그 눈은 한없이 무감했다. 백호 된 아회 보면서도. 바삐 움직이는 두 아씨 보면서도. 홀로 먹먹한 세상에서 모든게 멀게만 보였다.
한 차례 소동 지나고- 짐승이 비명 지르니 그것 귀를 찔러와 미간 찡그렸다. 이윽고 짐승의 털 빠지고 늙어가는 것 보며 참 여럿 생각했다. 박 가의 집에서만 해도 이렇게 차분히 있을 수는 없었는데. 아. 술기운 떨어졌나. 그래서인가. 돌아가거든 독한 것으로 한 잔 해야겠다. 잠깐 사이 뼈만 남은 짐승, 박 가가 찾던 개였던 것일 그것 보다가 고개 돌렸다. 따라서 몸도 돌렸다.
얼룩덜룩한 두루마기 소매에 손 넣어 가벼이 걸치고서 먼저 훌쩍 자리 떠난다. 학당 있을 도화 아닌 천부 향해.
제 곁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살기는 절대 예삿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잡아낸 가현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애석하게도 신은 네 편이 아니라 내 편인가보네. 내 목숨을 가져가는 것은 네가 아니라 존엄한 존재여야만 하니- 아쉽더라도 지금은 그 살기 고이 접어 모셔두렴. 그런 뜻이 담긴 눈빞으로 새하얀 호랑이로 변한 학당 학우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곱게 휘어 접는다.
이윽고 꽤 험한 꼴으로 결말을 맞이하는 요괴를 그저 무덤덤한 눈길으로 지켜보았다. 이젠 모든게 끝이다. 실종된 아이들의 위치는 끝내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이 이상 실종되게끔 내버려두는 것은 막을수 있을테니.
"그럼..."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가현은 끝끝내 제 정신 놓아버리지 않은 채 묵묵히 뼈를 수습한다.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이 개가 어쩌다 사람의 피를 마시게 되었든 이젠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은 사람의 죄를 저울질하는 판관이 아니었기에. 그저 이것이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온전하지 못한 형태나마 되돌려줄 뿐.
그런 효과도 있군. 아니, 작용이라고 해야 옳은가? 과연 도착한 장소의 수풀 너머로는 싸늘하게 식은 시체의 팔이 삐져나와 있다. 그는 그것을 응시하다 수풀을 넘어 그 건너편을 보려 했다. 시체가 얼마나 있는지, 남은 부위가 얼마나 되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 했으니. 참, 아까 생각했던 궁금증도 해결해야 했다.
"용기가 안 나서 그런데, 같이 봐 주실래요? 당신도 아까 저를 잡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전혀 무섭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다. 보리 무서워하는 꼴 보겠답시고 치는 뻔뻔한 거짓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자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사라졌다는 아이들은 어쩐지 보이는 저들끼리 신나게 노느라 시간 가는지도 모르는 듯한 태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단서가 부족한 그로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 하나라도 있을는지. 인사성은 밝으면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뒤통수들을 그는 다소 황당한 눈으로 보다, 다시 시체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이것들 들고 돌아가야 하나? 남은 부위가 적다면 고려해 볼 만하다.
확인을 마친 후에는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의 끝마무리는 보고로 끝나야 하니, 이유는 그뿐이었다.
빌어먹을 세상은 또 내 편이 되어줄 수 없다. 아마도 일평생 그럴 것이다. 인생의 수지타산을 셈하자면 오늘까지 합산해 삼 대가 파산하고도 남을 손해를 봤을 것이다. 뿌리깊은 증오가 눈꼬리를 휘어 접는 모습에 다시금 샘솟는다. 그리고 다시금 몸을 낮췄을 적, 고막을 찢어낼 듯 쟁쟁한 비명이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노화가 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털이, 가죽이, 살이, 근막이, 그렇게 끝내 남은 것은 짐승의 뼈. 동시에 머리가 맑아졌다.
"……."
뼈와 함께 남은 것은 인간으로 돌아와 봉두난발에 얼굴 반쯤 가려진 청년으로, 상황을 파악하듯 그대로 꼼짝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조종 받지 않고 있음에도 감정의 여파가 식지를 않는다. 울부짖으며 남은 뼈에다 한을 쏟고 싶었다…….
그대로 한참, 한참이고 뼈를 향해 시선을 두다 제가 죽이려 들었던 흑룡의 학생이 수습하기 시작하자 몸을 홱 돌려버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뼈는 개에게 던져주지, 또 그놈의 애정이니 뭐니를 들먹이며 자애 베풀려 드는 모습이라 단정짓고 자리를 떠났을 적 끝내 사과하지 않았으리라. 상황이 급박스러워 어쩔 수 없었다기엔, 그는 자신이 정당하다 믿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파도 철썩이는 소리가 듣기 싫어 느긋하던 발걸음은 점차 박차를 가하더니, 더 빠른 수단을 갈구하듯 부적을 태워 연기가 되듯 사라지며 학당으로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이것은 가현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그러니 그로써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멀리 날아가 버린 아회를 볼 적에, 누가 이름을 세 번 외자 피부가 녹듯이 죽어가는 요괴를 연은 공허한 얼굴로 본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면 연은 통증에 무너지듯 자리에서 쓰러지듯 앉는다. 그제야 참고 있던 얕은 신음 소리를 세어 낸다. 저 요괴가 개입했다 하더라도, 그 밑바닥에서부터 존재하는 고유한 무언가 있다고 느껴졌을까. 호랑이, 짐승이 따로 없던 아회를 바라보던 연은 얼굴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아내려 하나, 이미 온통 흐른 피에 젖어 옷이며 머리카락에까지 말라붙었으니, 닦는 것을 포기하며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파도 찰싹 거리는 소리가 못 견디게 끔찍하다. 늘 바다는 안 좋은 기억만을 남기는 것이었으니. 연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를 등지고서 자리에서 멀어진다.
놀리려 한 말에 도령 언성 높아지자 아이고 귀야-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 태연히 흐흐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말 있으면 그렇지 못 한 말도 있다. 언젠가 큰 코 다칠 거라는 말 그렇다. 흐물하게 웃던 얼굴에 잠깐 쓴 기색 스쳐지나간다. 그래도 여전히 능청스레 대꾸하긴 했지만.
"언젠가라. 그 언젠가가 올 때까지 내 살아 있기나 할랑가 모르겠네. 아니면 도령이 당장 저질러도 내는 상관없소만? 오히려 환영이네만?"
그러면서 제 손으로 헐거운 셔츠 자락 스윽 들추니 봉긋한 곡선 보일락 말락- 아이고 남사스러워라. 낄낄. 잡은 옷자락 두어번 팔락이다 놓았다. 그 김에 더 벌어진 것 추슬러 놓았을 리 있나. 그 위로 붉은 머리칼 몇 가닥 늘어지니 흰 살결 더 도드라질 뿐이다.
골목으로 접어든 김에 또 슬그머니 장난질 치니 이젠 원망스레 쳐다보기까지 한다. 다른데 가면 소리 지를 거라나? 그럼 일단 제 팔이나 손 먼저 밀어내고 그런 말을 하지. 참 설득력도 없다. 대뜸 우뚝 멈춰서 도령도 같이 멈추게 붙든다. 비명 지를 거라는 도령 턱 끌어 온화 보게 한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가깝게- 이번엔 확실히 입술 겹칠 듯이 얼굴 가까이 하고서 소곤댄다.
"도령 소리 치는게 먼저일지. 내가 도령 입 막는게 먼저일지. 궁금하다면 지금 해봐도 좋은데. 어찌, 해볼테요?"
그러면서 고개 사알짝 비트니 이번에야말로...? 싶지만 역시나 그럴 리가 있나. 닿을 기미도 없이 온화 얼굴 뒤로 무른다. 그리고 둘이 선 자리 옆을 가리켰다. 거기엔 벽돌로 외관을 정갈히 꾸민 작은 찻집이 있었다. 전에도 어느 도령 데려왔던 그 곳이다.
"아니면 얌전히 여기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찌 하겠소?"
웃으며 그리 묻는 얼굴은 짖궂음과 장난기, 얄미움 등등 한껏 버무러져 있었겠지. 능실능실 웃으며 도령 바라보고. 들어가겠노라 하면 그러자며 같이 들어갔을 것이다.
검은 호랑이 반가면을 쓴 궁기가 주황과 갈색이 섞인 개를 품에 안은 인어,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불가살을 바라봤습니다.
' 동물이라도 키우고 싶어요? ' ' .... 아, 니.. ' ' 인어를 따라오던데? 물에 빠지는 사람 같았나? ' ' 흠. 나이도 꽤 있어보이고. 마침 잘됐네요. 눈 돌릴 게 필요했는데. '
말을 마친 궁기는 품에서 검붉은 액체가 든 유리 병을 하나 꺼냈습니다. 병의 뚜껑을 한 손으로 연 그는 개의 입을 강제로 벌려서 액체를 먹였습니다.
' 뭐야...? ' ' 가끔 있어요. 영물이 되는 짐승들이. 거기에서 방향을 조금만 틀어주면, 요괴가 되거든. '
그는 개의 머리를 강하게 쓰다듬었습니다.
' 그 중에서 개는 개여시가 되기도 하니, 우리에게서 눈을 돌리게 하기엔 이것만한 게 없어요. 잘하면, 그 아이를 한 번 더 자극시킬 수 있을 거고. ' ' ... 그 동생, 소중하다 하지 않았냐. ' ' 저번 걸로는 자극이 좀 부족한 거 같아서. 이 요괴가 그 아이를 죽이진 못할 거예요. '
그 전에 내가 처리할 거니까. 궁기가 살풋 미소를 지으며, 불가살에게 아무 마을 앞 산에 개를 두고 오라 했습니다.
#shindanmaker https://kr.shindanmaker.com/427004 이부자리에 몸을 뉘고 베갯잇에 머리를 대자니 평소 눕던것과는 다르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에서 자꾸만 이유 없는 성화를 내니 몸은 천근만근이나 당장이라도 날뛰라 하면 날뛸 수가 있을 것만 같다.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지니 아마 내가 죽기까지 일분이 남았나 보다. 그것 참 좋은 소식이다. 묘지에서 살아가는 주제에 나는 죽어 묘지로 돌아갈 것이라 호들갑 떠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쉬느니만도 못한 호흡이 멈추면 자연스럽게 동공이 풀릴 것이다. 왕일한 생명력이 꺼지어 몸뚱이가 축 늘어지면 그것도 볼만할 것이다. 애정이니 무어니 머릿살 아픈 얘기도 듣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영영 그래 버리었으면 좋겠다. 에잉, 죽어버려라, 전부 뒈져 버려라. 몸 뒤척이니 1분은 훌쩍 지났고 호흡은 여전하다. 세상은 당연히 나의 편이 아니요 새삼 깨닫는 것에서 불쾌감은 스멀스멀 치고 올라오는 것이 몸 옥죄는 뱀 같다. 고상하게 존재하노라 지껄이니 존재 만큼은 믿어주는 신은 옹졸한 것인지 죄 지은 놈 후손에게 줄 자비 하나 없는 것이 분명하고, 자기 자신을 우롱하는 것에서 즐거움 느끼는 것이 틀림 없다. 염병할 세상. 죽음은 어림도 없다는 것이겠지. 삶은 요지경이다, 구더기 밭이다, 나도 결국 구더기다……. 나는 숨 꺼지길 바라면서도 내심 그러지 않았으면 하고 또 바라며 어떻게든 뒤집어진 속 다시 잠재우려 눈을 붙이었다. 눈을 뜨면 염병할 세상 또 저주할 걸 알면서도.
동물 찾는 것도 아이 찾는 것도 결국 하나의 짐승이 부린 농간이었음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 곧장 천부의 집으로 가려던 온화 문득 그런 생각 들었다. 지금 제 꼴이 해괴하다 못해 말로 못 할 정도이지 않나. 하여 멈춰서 내려다보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지. 특히 옷은 두루마기만 조진 줄 알았더니 상의 하의 어디랄 것 없이 뻘건 자욱 듬성듬성 했다. 아이고. 이거 이대로 가면 사람들 놀라- 지는 않으려나. 하지만 칠칠맞다고 혼 날 것 같다. 그건 싫지. 그러니 학당에서 대충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갈까 했다. 뭔가 순서가 바뀐 듯 하지만 뭐 아무려면.
그리하여 학당으로 오니 입구에 영 사감 있었다. '제' 기억으로는 하 사감 제압할 때인가 보고 처음이기에 고개 꾸벅 하니 저 보고 혀 찬다. 아니 뭐 순순히 인사를 해도 짜증이냐. 저도 미간 구길려는데 뭔가 날아왔다. 뭐지? 하고 보니 그것 제 앞에 내밀어졌다. 알 수 없는 액체 담긴 병 보고 뭐 어쩌라고 쳐다보니 영 사감이 귀에 바르란 시늉 한다. 아. 약인가. 하지만 온화 집에 가서 치료 받을 생각이었으므로 안 받으려 했다. 애초에 저 사감이 주는 걸 무슨 신용으로 받나. 그대로 무시하고 들어갔- 으면 좋겠지만. 어림도 없었다. 버티고 버텼으나 기어코 약 받아 제 귀에 바르는 것 보고서야 영 사감은 길 비켜주었다. 이걸 참. 고마워해야 해 화를 내야 해. 알 수 없는 기분에 헛웃음 흘리며 적룡 기숙사에 향했다.
학당 입구에서 바른 약이 효과가 좋았던지. 기숙사 들어설 쯤엔 먹먹함 사라지고 소리도 얼추 깨끗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라. 이러면 집에 갈 필요 없을 듯 한데. 별 희안한 약이 다 있네. 씻고서 손이랑 머리에도 발라야겠다. 그리고 개운하게 술이나 마시러 나가야겠다고 딱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 야. 너 꼴이 왜 그래?!"
기숙사 계단에서 들려오는, 덜 회복된 귀에 팍- 하고 꽂히는 사내 목소리. 돌아볼 것도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귀찮은 상대한테 걸렸군. 슬금 고개 치켜들려는 짜증 은근히 누르며 빠르게 제 방이 있는 층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지치고 피곤한 저보다 쌩쌩하고 멀쩡한 상대의 걸음 빠른 것이 당연지사. 아무리 잰걸음을 해도 성큼성큼 다가온 이에게 금방 어깨 팍 잡혔다. 그대로 휙 뒤돌아져서 보이는 얼굴 보고 한껏 능청스럽게 웃어보였다.
"여어. 수 오라비. 갑자기 왜 그런디야- 내 깜짝 놀라잖어." "허. 네가 놀라긴 하고? 아니 이게 아니지. 너 이게 무슨 꼴이야. 어디서 싸웠어? 누구랑 싸웠어? 어?" "싸우긴 뭘. 급하게 도와달라길래 나갔다가 좀 그랬소. 별 거 아니여." "별 거 아니, 야!"
무슨 일인가 꼬치꼬치 캐묻는 그- 수일의 손을 슬그머니 어깨에서 내리고 다시 잰걸음으로 거리 벌렸다. 이쯤 했으면 어련히 알아서 좀 가지. 수일이 오늘따라 끈질기에 쫓아왔다. 옆을 따라오며 무슨 일이 있었냐 뭘 했길래 그 지경이 났냐 따발따발따발- 이 인간이 왜 이럴까 싶었으나 그래도 저 생각해주는 건데 하고 다시금 짜증 내리 눌렀다. 그래. 아버지나 향이 오라비가 그렇듯이 수 오라비도 나름대로 저를 생각해서 이러는 것이다. 오라비가 누이 생각하는 것 당연하지 않나. 짜증은 커녕 고마워 해야 할 일이다. 저를 이렇게나 신경 써주고 챙겨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하. 내가 왜?
아직 낫지 않은 머리에서 빠직 소리 들린 듯 싶었다. 아니. 제가 밀친 수일이 부딪힌 문에서 나는 소리였나?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수일이 억 소리 냈고 동시에 제 손이 수일 멱살 쥐어 제 방 문에 밀어붙였다는 사실이다. 하필 바닥에 긁은 손으로 옷 쥐고 힘 준 탓에 손에 닿은 부분부터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에 더 힘 주어 문에 짓눌러버릴 양 눌렀다. 손등뼈가 정확히 수일의 갈비뼈 한 가운데를 누르고 있었기에 곧 그에게서 숨 가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숨 거칠어지는 수일 보며 온화 굳은 입 열었다.
"보소. 수 오라비. 수일 오라버니야. 내가 분명 별 거 아니라고 했지. 사감이 준 약 발랐다고. 씻고 또 바를 거라고. 금방 낫는다고. 분명히 다 대답 했잖아. 그런데 왜 계속 그러는 거야? 왜? 대체 왜? 무슨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릴래. 어? 왜 나를 이렇게 귀찮게 굴어. 왜!!!"
온화 분명 조곤조곤히 말로 풀려고 했다. 멱살 잡은 손도 금방 놓아주려 했다.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 모든게 장난이었던 양 능청스럽고 능글맞게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단말마 내지르듯 터진 고함을 시작으로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들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나라고 좋아서 이 꼴 난 줄 알아! 내가 좋아서 이렇게 된 줄 아냐고! 무엇 하나도! 내가 원한 것이 없어! 그런데 왜!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왜!!! X발 내가 뭘 했어야 했는데!!!"
격앙된 말 뚝 뚝 끊길 때마다 수일의 등 문에 쿵 쿵 부딪혔다. 그 때마다 수일 컥컥대었지만 온화 말도 행동도 그칠 기미 보이지 않았다. 괴로운 것은 수일일 터인데 마치 제가 괴로운 듯이. 금방이라도 피 토할 듯 새된 목소리가 적룡 기숙사 복도 한 층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가 나를 위해서야! 무엇이 나를 생각해서야!! 네가 편해지고 싶은 거잖아!! 내가 이 꼴로 고작 연명하게 된 것이 네 탓이 아니라고!!! 그것 확인해서 편해지고 싶을 뿐이잖아!!! 내가 어디 진창에서 구르던 괴물 X끼한테 물려 나자빠지건!!! 내가 걱정되서가 아니라 너 때문이 아니라고 편해지기 위해서잖아 아니야?!" "그, 런게 아ㄴ, 큭."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도술도 제대로 못 쓰고! 뻑하면 기억 날려먹고! 약 없으면 사람 구실도 똑바로 못 하게 된게 류수일 네 탓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은게 아니라고?! 하하! 야. 뚫린게 주둥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되지. 그걸 내가 믿겠냐? 믿겠어? 어?!" "믿ㅇ, 윽, ㅎ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어?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해? 나는, 내 시간은 이제 고작 2년도 안 남았어! 나는 그저 조용히 졸업이나 하고 싶은 건데! 왜! 왜 X발 왜냐고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수일 하도 부딪혀 눈에 초점 없고 온화 고성 그칠 줄 몰랐다. 처음엔 수일 향한 불만인 듯 싶던 것이 점차 주변 알 수 없는 말들 되어갔다. 늘 싸움 벌어지는 적룡 기숙사라지만 그래도 너무 과한 소음은 보는 눈 늘리는 법이다. 거기서 더 과해지면 하 사감 불려오는 것인데 온화 하는 양 딱 그 직전이었다. 누군가 슬슬 사감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니냐 수근거릴 쯤. 파삭 무언가 깨지는 소리 났다. 작지만 강렬한 파열음과 동시에 복도 조용해졌다.
"후으... 흐..."
거짓말 같이 고성 그친 온화 가쁜 숨 고르며 잡고 있던 수일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힘 풀린 수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으나 온화 다시 부축하거나 잡는 일 없었다. 다시 피 뚝뚝 흐르는 손 아래로 떨구고 숨 고르며 수일 노려보다가 벌컥 문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렇게 난리를 치던 것과 달리 비교적 얌전히 문 여닫고 들어가는 모습에 구경하던 이들은 묘한 찝찝함 느꼈다.
흔치 않은 난리 끝났으나 수일 계속 주저앉아 정신 못 차리니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우 몇이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두 사람이 어깨 부축하여 일으켜주며 뭐 저런 누이가 다 있냐 저런 못되먹은 누이는 걱정해줄 것도 챙겨줄 것도 없다 하며 수일의 편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말 들은 수일 조용히 고개 가로저었다. 그 표현이 꼭 제 누이 욕하지 말라는 것 같이 보여 친우들은 너무 무르다며 수일 부축해 그의 방으로 데려가주었다. 그 부축 조용히 따르는 수일 생각 깊어보였으나. 온화 그랬던 것처럼 수일 역시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