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한 날이었다. 학당에서 수업이 없는 날임을 전날 확인했기에 오늘 하루는 느긋하게 보내고자 하였다. 평소 기상시간 보다 두 시간 정도 늦잠을 자고, 몸를 단장한 뒤 가볍게 아침을 챙긴 뒤, 남은 시간은 푹신한 러그, 따스한 벽난로 주변에 앉아 목화에게 책을 여럿 읽어주던 무탈한 하루. 마지막 책을 읽어줄 적 삑삑대며 호랑이는 정말 곶감을 무서워하느냐 묻는 조그마한 털 뭉치를 손가락으로 잔뜩 간지럽히고, 삐비빅 웃음을 터뜨리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던 조그마한 존재를 위해 아회는 부적을 태웠다. 제 몸에 가두듯이 눕히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삐롱삐롱 조그맣게 숨소리 들려오자 아회는 느긋하게 뺨을 비비고는 자신도 잠에 들고자 자세를 바꿨다.
그러자 무탈한 하루의 마무리라는 듯 벽난로가 불타며 서신이 나타났다. 처음엔 어머니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나 싶었으나 가문의 인장은 찍혀있지 않고, 신변에 문제가 생겼더라면 다른 것도 함께 왔을 터였으니. 아회 고개 까딱이자 서신이 자연스레 펼쳐져 러그에 안착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읽어보고자 손을 뻗는다.
"……."
어디 보자, 그래, 슬슬 서신 보낼 때가 되긴 하였지. 몸을 웅크리자 불 그림자가 일렁였다. 잠든 조그마한 목화를 손바닥에 고이 올려두고, 푹신하고 조그마한 베개와 얇은 이불이 있는 목화 전용 침대에 눕혀준다. 손가락으로 다독거리며 작게 편지를 쓴다. 잠시 외출할 터이니, 오래 걸리지는 아니할 겝니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 앞으로 걸어가 지팡이를 쥐고 안경을 찾을 적, 아회는 저도 모르게 몇 번 더 화장대 한구석을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그 빌어먹을 흑룡 기숙사의 사감 때문에 개박살이 났지.
……오늘 하루는 조금 더 힘이 들겠구나. 손을 까딱여 상자가 날아오게끔 하고는, 품 속에 넣어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장소는 천부……. 그 사람의 냄새는….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닌지."
과신한 탓에 조금 더 헤매고 말았다. 천부야말로 사람 찾기 끔찍하게 어려운 곳이거늘 무엇 하러 과신하였는지. 평소와 달리 멱리 쓰고 아스라히 백색 가까운 벽람빛 도포 차림이니, 교복 입은 학생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빈정과 비아냥을 알았을 터인데도 그냥 흘려버리는 것 보고 픽 웃었다. 그래. 어차피 그는 그런 존재다. 다른 사감은 몰라도 하 사감은 어느 인간이 그의 앞에서 무얼 하든 눈도 깜짝 안 할 것이다. 심기를 건드린다면 모를까. 제가 건드린대도 아직은 역린 쥐고 있으니 봐주는 것일 테지. 순간 순간 저와 동떨어진 것 깨달으나 의미 없다. 실실 웃는 얼굴로 그저 말할 뿐이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면 거 죽을 가능성이 높겠구려. 무어. 함구하겠다면 달리 알아보면 그만이지."
영 사감에 대해서는 언급하면 짜증이라도 낼 줄 알았으나 의외로 별 반응이 없었다. 웃는 것 보니 어차피 아무 것도 못 들을 것이라 생각하나? 말린다면 그를 이용해 들을 수 있는 것 있겠지. 하 사감 비웃든 말든 어깨 으쓱였다.
"말리려 한다면 내야 좋지. 그걸 빌미로 뜯어낼 수 있는 것 분명 있을 테니."
당장 제게 득이 된다면 약이든 독이든 이용하면 그만이다. 역린 쥐고 놓지 않는 것도 술을 이토록 주구장창 마셔대는 것도. 새 맥주캔 내어주자마자 냉큼 받아 열고 입에 대었다. 이번엔 조금 천천히 몇 모금 마시고 하 사감 말에 히히 웃었다.
"에이. 셔틀로 생각하긴. 이 오밤중에 학생 땡깡 받아주고 술도 달라는 대로 주는- 감사한 사감이라 생각하네만? 너무 과찬이라 낯간지러운가?"
키득키득키득. 술 거하게 취한듯 연신 웃어대나 눈동자 붉은 빛 또렷한 것이 전혀 취하지 않았거니 보인다. 그래 보이건만 마냥 취한 척 하 사감 어깨에 제 팔 슥 두르고 기대 나른히 중얼거렸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내 어찌 보답해야 하나 싶은데. 하 사감님이여. 먹고 마시는 것 외에 향락은 관심 없으신가?"
스슥 천 스치는 소리 나며 제 붉은 두루마기 자락 살짝 아래로 늘어진다. 험히 놀아도 나름 계집이라 관리는 하였는지 어깨며 허벅다리며 뽀얗다. 히- 웃는 낯에 눈웃음 더하고서 하 사감 빤히 보았다.
외출할 적 교복이 아닌 옷을 입는 것은 꽤 오래간만이었다. 옅은 도포, 자신의 모습을 타 학생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반투명한 비단 드리운 멱리까지. 다만 남에게 모습 보이지 않는 효과보다는 길 잠시 헤맸을 적 더운 날씨에 내리쬐는 해를 가려주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으리라.
"외출을 들키면 좀 곤란한지라, 부득이하게 치장하고 말았지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다르겠지. 수선을 맡겨 매화 자수 있는 붉은 두리 소매 도포요, 바림질 되어있는 용 자수 두루마기 교복 차림이 적색이 일색이기에 위용과 단호함을 돋운다면, 지금은 색 배치부터가 유령 같은 고요함과 고아한 미를 더 돋우고 있었을 테니. 아회 비단을 천천히 걷어내곤 차분하게 지팡이 손잡이를 더듬었다. 동생이라.
"어떤 부분에서 그리 느끼었는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염려하는 부분에서 형님과 저는 다르니 안심하시지요."
말을 듣지 아니한다고 썰어내진 않는단 뜻을 덤덤하게 전하고는, 아회 주변 슥 둘러본다. 사람 없음을 확인하곤 품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직 줄 생각은 없는지 팔을 뻗지는 아니하고, 고개 느릿하게 기울였다.
꼬드기면 넘어올 지도 모른다더니 이것 봐라. 말 잘 하는 것이 저만 그런가. 칼 같은 거절에 미간까지 찡그리는 것 보고 나름 상처 받은 표정 지었다. 그럴싸하게 생겨선! 속으로 불만 투덜이며 맥주캔 비웠다. 분풀이 대신 하듯 빈 캔 구깃구깃 누르다가 영노란 말에 힐끔 흘겨보았다.
"내가 끌고 오고 싶어서 끌어왔나. 주니까 받아온 것을."
잔뜩 괴롭혀진 캔 휙 던져놓고 두루마기 자락 펄럭 열었다. 방금 생각나긴 했지만 전에 받았던 영노의 호드기 그 안에 달려 있었다. 두루마기 안쪽에 끈으로 달린 호드기 들었다 놓자 대롱대롱 흔들린다. 영노가 뭐였더라. 뱀이었나 사자였나. 그 둘 섞인 것이었나? 에이 모르겠다. 두루마기 내려 놓고 검지로 하 사감 볼 꾸욱 누르며 조잘대었다.
"비린내 나면 뭐 어쩔 것이여. 뺏어서 내다 버릴 텐가? 흥이다. 못되게 구는 댁보다야 이 영노가 훨씬 귀엽겠네."
거진 투덜거림 투성이 말 줄줄 늘어놓더니 에휴- 제풀에 한숨 길게 내쉰다. 이러는게 다 무슨 소용이냔 듯. 숨 내뱉으며 낮아진 목소리 그리 덧붙인다.
"여즉 말없다 갑자기 물어보긴. 이것 학당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럼 밖으로 치우던가 하겠지만."
제 가문이 이런 물건 다루는데는 도가 텃으니 말이다. 안 된다면 조만간 집에 들러 맡기고 오면 될 것이다. 그런 생각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