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안아서 넬라에게 태웠을 때도 나온 물음이었기에 알렌은 태연하게 웃음소리를 내며 그때와 비슷하게 대답했다. 물론 사람인 이상 무게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정도 단련을 하고 있고 체력도 기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성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안아들 수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체중을 걱정하는 것일까 싶어 알렌은 마리안느의 체형을 가만히 바라봤다. 딱히 체중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나 그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제 누님이 여성에게 체중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교육을 받은 탓이었다.
아무튼 넬라를 천천히 몰면서 알렌은 마리안느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그 대답에 알렌은 정말 철저한 계약관계로 이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우를 한 만큼 일하고, 대우받지 못한 것은 하지 마라. 즉, 돈을 받은만큼만, 그리고 딱 시키는 정도의 일만 제대로 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다정한 분위기보다는 조금 딱딱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섞여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지만, 철저함이 확실히 느껴지네요. 인간미가 조금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전문직들이 많을 것 같고요. 명확한 기준이 있으니 일을 하는 이들도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할 것 같고요. 하지만 충심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뜻밖이네요. 대체로 고위 귀족들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충심을 요구하는 일이 많은데.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조금 신선하네요."
애초에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거나, 기본적인 대우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적인 좋고 나쁨은 구분할 수 없는 법이었다. 로덴버그 가문은 로덴버그 가문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잘 맞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자신이 아는 바, 로덴버그 공작가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는 그다지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한편 마리안느가 이어 자신의 말을 정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알렌은 그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황제 자리에 오를 일이 없기 때문에 자신과 교분을 바라는 경우도 있다는 말에 알렌은 일리가 있다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태에서 그는 살며시 고개를 내려 마리안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마리안느. 당신은 어떤가요? 만약 제 1황자가 정혼자를 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럼에도 저와 이렇게 교류를 할 건가요?"
조금 비겁할지도 모르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과연 어떨지 알렌은 알고 싶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제 1황자에게 집중적으로 다가갈지, 아니면 제 4황자인 자신과 지금처럼 지내줄지. 물론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도 그는 굳이 답을 재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그녀의 입에서 노을 지는 수도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자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풍경을 보기 위해서 시찰을 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같아서는 그 풍경을 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찰을 대충할 순 없을테니 시간이 천천히 가길 바랄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게 답을 마치고 좀 더 넬라를 이끌고 앞으로 가는 도중,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모여있는 장소가 보였다. 아무래도 저곳이 목적지인 모양이었다. 천천히 넬라를 세우고, 그는 넬라 위에서 내렸다. 마리안느가 내리려고 한다면 손을 잡아주려고 했을 것이고, 마리안느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 상태에서 고삐를 잡고 천천히 앞으로 갔을 것이다.
아무튼 사회자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알렌은 그 목소리에 잠시 집중했다. 보아하니 엄청난 명사수가 나타났고 그 때문에 이득을 본 사람도 있고, 손해를 본 사람도 생긴 모양이었다. 여기까진 그냥 가벼운 게임으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허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응?"
어떤 남성을 과녁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더니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는 모습에 알렌은 대체 왜 사과를 저렇게 올리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와중에 넬라는 사과가 있는 방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사회자의 다음 말이 들려오자 알렌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말릴 사람은 없어보이고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게 돈을 걸고 있고, 사회자는 더더욱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려는 듯이 더욱 더 돈을 거는 것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고 거기에 활을 쏘라고 한단 말인가. 과녁에 꽂힐 정도의 화살이라면 사람에게 명중했을 때 크게 다칠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런 판국에 어떻게 저런 내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알렌은 마리안느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숨을 약하게 내뱉었고 넬라에게 기다리라고 이야기를 한 후, 고삐를 놓았다.
"멈추십시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을 너무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어디 목소리 뿐이겠는가. 그의 눈빛 역시 상당히 매섭게 바뀌어있었다. 이어 그는 공터의 중앙으로 다가갔고 돈이 모여있는 책상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책상이 그대로 엎어졌고 올려진 돈은 땅바닥에 흩어졌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행패입니까?! 당신 뭐야?!"
"그 입 다무십시오. 그저 단순한 활쏘기 게임이라면 가벼운 유희일 뿐이니 너무 과도한 돈을 걸지 않는 한, 그저 가벼운 게임일 뿐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고 활을 쏘라고 하고 거기에 돈을 걸다니. 당신들에겐 이게 가벼운 게임입니까? 당신들이 하는 짓은 그저 한 순간의 스릴과 자극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뺏는 행위입니다. 인간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위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 제국의 황제 폐하 역시 이런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했을텐데요?"
"그러니까 당신 뭐냐고!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행패야?! 행패는!"
"제가 누구냐고 했습니까?"
이어 저 뒷편에서 말 두 마리가 빠르게 달려왔고, 그 위에 타고 있는 남성 두 명이 말을 세운 후, 빠르게 내려왔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꺼내서 그곳에 모여있는 이들에게 겨눴다.
"저는 이 제국의 제 4황자. 알렌 실포드 알드레아입니다. 레너드경, 알프레드경. 저 사회자를 붙잡으세요. 제국의 법으로 엄하게 다스려서 다시는 이런 말도 안되는 짓을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절대로 지금 이 일을 그냥 넘길 순 없다는 듯이, 알렌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자신의 호위기사들에게 사회자를 붙잡으라고 단호하게 지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리안느와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낮고, 차갑고 날카로웠다.
/우와. 어쩌다보니 길이가 상당히 길어진 것 같은데. 이거. (옆눈) 일단 너무 길어지면 안되니까 조금 간추려서 쓰긴 했지만..아무튼... 알렌을 화가 나면 날뛰기보다는 낮고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면서 분위기를 제압하려고 하는 스타일이야. 일단 돈이 올려진 테이블은 걷어차서 엎어버렸고 게임 자체를 엎어버렸으니 판을 엎어버린 것이 맞겠지! 아마!
물론 신분은 낮긴 하지만 알렌은 존댓말이 입에 붙은 애거든. 물론 진짜 엄청나게 화가 났을땐 그땐 반말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알렌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저런 활쏘기 내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기도 하고.. 호위기사들은 이럴 때 일하라고 데리고 온 것이니까! 물론 알렌도 검을 다룰 수는 있지만, 그래도 호위기사가 있고 시찰 나왔는데 검을 차고 나오기도 조금 애매하기에 처리는 기사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잘 자! 마리주! 좋은 밤 되길 바라!
아마도 황가를 직접적으로 모욕하거나 황가에 칼을 들이밀었을때 나오지 않을까. 그것만큼은 알렌도 적당히 못 넘어갈 사안이기도 하고, 진짜 제국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아주 큰 사건이니 말이야. 아앗...ㅋㅋㅋㅋㅋㅋ 적어도 알렌의 입장에선 마리안느와 같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순간이 줄어들었으니 조금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어. 물론 저놈들을 그냥 둘 수 없다는 분노가 먼저겠지만!
그래도 일상 중에 한 번 정도는 어떻게 섞으면 나올수도 있지 않을까? 약간 위기적인 느낌으로.. 음. 이를테면 줄을 서고 그 이후에 권세를 키우기 위해서 막 황가 사이에 이간질을 하다가 걸린다던가? 이런 것도 알렌 입장에선 상당히 화를 낼 것 같거든.
앗. 마리안느가 이제 상황수습을 하는 거야? 이미 알렌이 정체까지 다 밝혔는데 과연 어떻게 수습할지도 궁금해지는걸. 물론 꼭 그런 전개가 아니어도 마리안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지마 말이야! 물론 오늘은 잇지 않아도 돼! 일정이 있으면 당연히 노는 것이 뒤로 가야지! 나도 그러는걸!
맞아. 오늘...더웠어. 그것도 모자라서 지금 태풍이 또 올라온다고 하는데..(흐릿) 뭔가 8월달이 되니까 또 날씨가 스펙터클해지는 것 같네. 나는 에어컨의 시원함으로 버티는 중이야. 전기비..모르겠어. 그래도 당장의 시원함이 좋아. (글러먹음) 마리주도 더위 안 먹게 조심하자구!
딱 정치적 싸움을 벌이고 반대파를 몰아내고 다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 말이야. 실제 황가에서는 그런 식으로 같은 피를 나눈 이들끼리 싸우는 일도 흔했다고 하고. 아무래도 경우에 따라서는 진짜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물론 알렌은 그런 일이 있어도 마리안느에게 굳이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그런 수습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거니까 나는 다음 답레의 마리안느의 행동을 기대하고 지켜보도록 하겠어!
태풍은... 에어컨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야. 정말로 큰 피해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곳은 태풍이 와도 그렇게 큰 피해는 잘 없던 곳이라서 이번에도 의외로 별 피해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수분섭취는 바로 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리주도 수분섭취 잘 하기야!! 그리고 잘 자!!
전혀 안 무겁다는 대답에서 배려가 느껴지는데도 묘했다. 아무리 가벼워도 다 자란 성인이면 곡식 몇 자루 무게는 너끈히 된다. 곡식이면 날라서 먹기라도 하지 멀쩡한 사람을 들어 옮겨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그랬기에 그의 아쉬움 표현이나 무겁지 않다는 말에는 아무래도 수긍이 되질 않았다. 무겁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기도 우스꽝스럽고 그의 완력을 얕잡는 결례로 비칠까 봐 말문은 닫았지만.
다행히 그도 더 개의치는 않는지 넬라를 모는 데 집중했다. 그러던 중 공작가의 얘기를 듣자 뜻밖이라 말하면서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냉정하다면 냉정하고 담백하다면 담백한 분위기라고 새삼 생각했다. 고위 귀족이 충심을 바라는 경우가 많더란 말이 나왔을 땐, 나도 명문 귀족가라면 으레 그렇겠거니 선입견을 가졌었기에,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어! 정도의 살짝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다 돌연, 예기치 못한 질문이 파고들었다. 그보다 서열이 더 높은, 어쩌면 다음 대의 황제 폐하가 될지도 모르는 분의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 거냐라. 나나 공작가의 목적이 그의 신분임을 뻔히 알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런즉 진지한 만남 같은 걸 무턱대고 제의하진 않았다는 의미일 테니 안심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혼란스러웠다.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들은 순간의 당혹감에 비하면 답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나왔다.
"제 의사만 물으신다면, 물론입니다. 데뷔 파티부터 농담으로도 숙녀답다고는 못할 언동을 보였는데도, 하이네님은 제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뱉은 말에 거짓은 없었지만, 아니, 거짓이 없어서 더 석연찮았다. 내게 호의를 보여 주는 황자이기 때문에 교류한다고 하면, 단순히 혼인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리라는 기대 때문에 접근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아무리 지위가 높은 상대라도 혼인이 성사될 가능성이 없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니, 성공 가능성이 더 큰 쪽에 도전하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와의 교류도 그 합리적인 선택의 일환으로 보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뭘까. 이 밑도 끝도 없는 답답함은. 거기 저항이라도 하듯 마리안느는 제 머리를 묶은, 그와의 재회에 톡톡히 한몫한 리본을 가리켰다.
"게다가 이 리본을 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겠지. 황족이며 귀족을 통틀어 결혼 적령기 남성 중 내게 가장 호의적이고, 리멜트 가의 마리안느를 기억해 주는 이니까. 남들 앞에서 쓰기 민망한 손수건도 간직할 만큼, 그 시절 마리안느와의 교류를 각별히 여겨 주는 이니까. 그래서 다른 황자가 혼처를 구하는 중이든 아니든, 그와 교류하고픈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 거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책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래도 그가 이내 너무나 그답게도, 시찰을 대충 할 수 없다는 성실한 반응을 보였기에 스스로도 영문 모를 동요는 어찌어찌 가라앉았다.
그러나 평온한(?)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활쏘기 내기 현장에 가까워 오자, 그가 넬라를 세우고는 편히 내리도록 도와주겠다는 듯 손을 건넸다. 아니, 그것도 ―신사라면 으레 보이는 매너이니― 그가 손등에 입을 맞췄던 게 의식되긴 해도 차분한 척 목례하고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활쏘기 현장에서 벌어지는 정신 나간 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은 일전에 베르메르 후작 영식을 상대할 때보다도 더 차디차게 굳어 있었다. 그런 얼굴로 그는 공터 한복판의, 판돈이 놓인 탁자를 걷어차 엎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분위기를 띄우느라 법석이던 사회자는 특히나 더.
그런 현장을 그의 싸늘하게 날 선 분노가 뒤덮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사회자가 성을 내자, 그는 극약 처방을 단행했다. 제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부른 것이다.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기사에게 포박당한 채 무릎 꿇린 사회자는 물론 돈을 걸던 이, 그 명사수를 비롯해 활쏘기에 도전하던 이까지 모조리 그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퍼뜩 주위를 둘러봤다. 과녁이 될 뻔한 그 사람은? 얼마나 겁을 먹고 있었는지, 머리에 사과가 얹혔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뒤늦게 벌벌 떨며 꿇었다. 사과가 흙바닥에 굴러떨어지며 파삭 으깨졌다. 마리안느가 다가가자 그 남자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웅얼거렸다. 다가오는 이가 누군지 분간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앞에 쪼그려 앉고서야 드문드문하게나마 남자의 말이 들려왔다. 죽을 죄를 지었다는 사죄와 이 일을 못 하면 끝장이라는 한탄이 뒤섞인 것 같았다. 순간 찌푸려진 미간을 애써 펴면서―찡그리고 있으면 이 남자가 나를 보자마자 겁먹을지도 모르겠기에― 헛기침을 했다.
"이 일의 보수가 얼마나 됩니까?"
남자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가 엎드렸다. "10알더를 선금으로 받았습니다요."
한 방 맞은 듯했다. 10알더? 고작 그 돈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을 했다고? 책을 그러안은 손이 떨렸다. 부정하게 산 책이 아닌데도, 이 책을 손에 넣은 게 처음으로 부끄러워졌다. 그 감정을 숨기고 싶어 속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는 로덴버그 공작가의 영애 마리안느입니다. 10알더에 목숨을 걸겠다면, 공작가에서 세 달 정도 일해 보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잘만 해 준다면 그대로 공작가의 일원으로 채용하거나, 다른 귀족가를 소개해 주겠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마리안느를 쳐다보더니 거듭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요! 아가씨!"
감사받을 일일까. 내 부끄러움을 덮으려고 얼렁뚱땅 얼버무린 건데. 마리안느는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그가 직접 신분을 밝힌 이상 격식을 제대로 갖춰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저 사람은 제가 채용해 보겠습니다만, 이건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빈민을 도울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찌어찌 이어봤는데 기대하신거에 비해 김새는내용은 아닌가 모르겠네요「(¬ε¬゚。) 어쨌거나 답레로 갱신이에요(*´ー`) 오늘이 입추였다는데요 계신데는 좀 덜더웠을까요?(°~°˶)
제 물음에 대한 답은 어떻게 보면 그리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상당히 비겁한 질문이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보통은 눈치를 보면서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는데도 굳이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과연 마리안느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라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방금 전 자신과의 교분을 바라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있었기에 특히나 더. 과연 그녀는 어떤 입장에 서고 지금 여기서 뭐라고 답을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찰나, 그녀의 답이 들려왔다. 그 답을 들으며 알렌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미소를 보였다. 물론 마리안느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어릴 때의 저를 스스로 칭찬해야겠네요. 그 리본을 선물해준 덕분에 지금이 있었을 수도 있을테니까요."
물론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굳이 알렌은 리본을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르고 만났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어린 시절의 그 교류를 알게 모르게 소중하게 대하는 것 같았기에. 마치 자신만이 그때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기에.
"...그럼 저도 답을 하는 것이 좋겠지요. 만약 저에게 다른 약혼녀가 이미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처럼은 지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 약혼녀에게 당신을 소개해주고 친구 대 친구로서 지냈을 거예요.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기억은 저에게 있어선 꽤나 즐겁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거든요. 어린 시절, 무모하게 밖으로 나온 정체도 모르고 신분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어린 남자아이를 그렇게 잘 대해주는 여자아이는 보기 힘드니까요. 특히나 귀족 가문이라면 더더욱."
장난스럽게 그 정도로 이야기를 하며 알렌은 굳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다가 시찰 중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그는 표정과 눈동자를 관리하며 집중했다.
한편 자신이 정체를 드러내고 기사들까지 부르자 주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잡아들일 이를 잡아들인 후, 그는 차가운 눈빛을 거두지 않고 그곳에 모여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도 모두 처벌하고 싶었지만 세상사는 마음만으로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일단 주모자인 이 사회자만 잡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한번 더, 이런 식으로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이가 있으면 제 이름을 걸고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제가 마을에 뿌려둔 정보원, 혹은 다른 황가의 사람들, 혹은 믿을 수 있는 귀족의 목소리로 소식이 들리는 순간, 그때는 당신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어 그는 땅바닥에 뿌려져있는 돈을 바라봤다. 이어 그는 그 돈을 가리키며 자기 몫을 얼른 챙겨가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 와중에 돈을 은근슬쩍 더 가져가려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즉각적으로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기에 그는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가 두 명이나 있으며, 그 실력은 제국에서도 손꼽을 정도지 않던가.
한편 마리안느가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고 있던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하고 있는 모습에 알렌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저 사람을 채용하겠다고 제안했고 그 사람은 크게 감사하며 절을 하고 있었다.
이내 자신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하며 빈민을 도울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자 알렌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은 황제가 아니며, 다음 황제가 될 이도 아니었다. 그만큼 이 제국의 직접적인 정책을 만들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허나 건의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민에 대해서는 제 아버지인 황제 폐하도 심히 고민하고 있어요. 오늘 시찰을 마친 후에 제가 보고드리고 최대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서 시행하도록 노력해볼게요."
한편, 저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챙기는 그 모습과 빈민을 걱정하는 그 모습이 상당히 상냥하고 따스해보여서 알렌은 마리안느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느 순간, 살벌하고 날카로웠던 목소리와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거야 원."
의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알렌은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기사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그 주모자는 지금 당장 끌고 가도록 하세요. 한 명만 가고, 다른 한 명은 아까처럼 거리를 두고 저를 따라오세요."
"알겠습니다. 전하."
이어 기사 중 한 명이 포박한 사회자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한 명은 검을 거둔 후에, 살며시 거리를 띄웠다. 이어 알렌은 숨을 내뱉으며 마리안느에게 이야기했다.
"보기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 같네요. ...적어도 당신 앞에선 이렇게 화내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나 따스하고 상냥한 마리안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 저런 뒷수습을 하다니. 역시 마리안느는 착한 사람이 맞다!! 음. 여기는 그나마 조금 덜 덥긴 했어. 하지만 그래도 더웠어...흑흑... 마리주는 어땠을지 모르겠네. 아무튼 하루 수고했어!
내기에 참여한 이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그는 서릿발 같았다. 약혼자가 있었더라도 친구로 지내고 싶었을 거라며 어린 시절의 만남을 추억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사건을 처벌해야 하는 입장이니 무리도 아니다. 신분을 숨기고 일행을 최소화한 시찰이 아니어서 인원이 충분했다면 아마 저들을 모조리 추포했으리라. 다음엔 모두 다 처벌하겠다는, 즉 이번에는 주모자만 처벌하겠다는 말에, 엎드린 채 쭈뼛거리던 자들이 황공하다 외치고는 하나둘씩 제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현장을 떠나면서도 하나같이 허리를 굽힌 채 뒷걸음질만 한참 한다. 어쨌거나 일단락된 것 같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쩐다? 마리안느는 채용 제안을 절하며 반기는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떤 일을 할 줄 아는지 파악하기는커녕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고서 채용했기에 앞으로 무슨 일을 맡겨야 할지 애매한 건 그렇다 쳐도―그랬기에 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아마 10알더를 주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그의 시찰에 동행시키기는 난감하다. 그렇다고 저 사람더러 혼자 공작가로 보내자니 공작가에서 영문도 모르고서 맞아들릴 리 없다. 데리고 돌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마리안느가 제 돌발 행동의 뒷수습을 생각하는 사이, 그가 특유의 부드러운 태도를 되찾고 빈민 문제는 최대한 노력해 보겠단다. 하루아침에 뭐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도 완전히 해소하기는 사실상 어렵겠지만, 효과가 있었으면 했다. 적어도 이런 자리에서 화살받이를 자처하는 사람이 나오는 일은 없길.
"감사합니다."
이윽고 그가 호위 기사 중 한 명에게 사회자를 연행하도록 지시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격분한 모습을 보인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었던 걸 찜찜해하는 게 딱해 고개를 내저었다.
"명백히 비윤리적인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흥분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자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이번엔 마리안느 쪽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때처럼 호른산에 올랐다면 감회가 남달랐을 테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오늘은 새 고용인과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임의로 고용한 이인 만큼, 제가 데려가야지 않겠습니까."
"이해해줘서 감사해요. 정확히는 그냥 이 제국에서, 그리고 황성이 있는 이 마을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던 것이 컸지만요."
물론 그는 신분과 빈부격차를 부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서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사람의 목숨을 두고 내기 대상으로 삼거나, 그것을 가지고 노는 것은 별개였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런 것을 가지고 놀 순 없으며, 돈이 없다고 해서 그런 이들의 유희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형이나 누나였다면 조금 더 차분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직 자신은 많이 멀었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한 번 쓴 웃음소리를 냈다. 좀 더 공부하고 익히고 몸에 녹아들게 해야 할 것들이 그의 기준에는 너무나 많았다.
한편 마리안느는 더 이상 동행할 수 없었고, 저 사람과 같이 돌아가봐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그 말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애초에 그녀가 마지막까지 쭉 자신의 시찰에 동행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여기까지 같이 한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충분히 납득했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알겠어요. 길을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같이 다닌 것도요. 마음 같아선 저택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시찰을 그만둘 수도 없고 제 호위기사에게 데려다주라고 말을 해도, 필시 갈 수 없다고 할테니 아쉽네요."
어쨌건 그의 호위기사의 임무는 알렌은 호위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을 우선할 순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그는 괜히 아쉬워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는 이런 시찰이 아니라 좀 더 편할 때 봤으면 좋겠네요.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의 입장에서도 다음 만남을 보장할 순 없었을 것이다. 서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렇게 쉽게 만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또 언젠가 만날 것을 기약하려고 하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시 한 번 수고했어요. 마리안느."
/아이고...;ㅁ; 그래도 괜찮을거야! 늘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아마도지만!! 아무튼 상태가 매롱이었다니..지금은 좀 괜찮아? 너무 무리하진 말기야... 그리고 상황이 저렇게 되어버리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아무튼 둘이 헤어져야 할 상황인 거니까 여기서 끝을 내고 되고 아니면 한턴 정도 더 이어도 괜찮아!! 그리고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여기는 비가 좀 오는 편이었어. 물론 본격적인 비는 내일부터 오는 것 같지만 말이야. 내일... 괜찮겠지...라고 믿고 싶네. (죽은 눈) 아무튼 마리주도 내일은 특히나 더 조심하기야!
오케이! 그럼 저걸로 막레를 짓자! 그리고 확실히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는 짧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이거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어쨌건 알렌은 시찰 중이고 마리안느는 데려가야하니까 동행할 수도 없고 말이야. 그렇다고 알렌이 마리안느의 저택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가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기사도 움직이지 않을테니.
ㅋㅋㅋㅋㅋㅋ 다양한 반응이 나오게 되겠지. 역시. 나 역시도 만족스럽게 즐겼어. 그와 동시에 뭔가 두 캐릭터의 사이에 매우 중요한 분기점 같은 것이 나온 것 같고 말이야.
글쎄. 다음에는 어떻게 만나게 하는 것이 좋으려나. 저번엔 알렌이 공작가에 찾아갔으니 이번엔 공작가 쪽에서 어떤 업무 관련으로 황실을 찾아가는데 마리안느도 데리고 왔다라는 것은 어떨까? 황제에게 인식시키려는 목적은 물론이고, 운이 좋으면 알렌과 마주할 수도 있는 것을 노리는 느낌으로 말이야. 물론 공작이 그 정도까지 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어. 꼭 두 개를 따로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황궁에서 만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그때의 이야기도 나올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정확히 그것을 합치면 되지 않을까 싶어. 앗. 그것도 공작가의 중요한 업무 아닐까? 어쨌건 영지를 관리하는 것 역시 공작가의 중요한 일이니 말이야. 혹은 아주 큰 뭔가를 해야하는데 황실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있겠고! 앗. 그러면 알렌이 당연히 관심을 보이고 나올 것 같은걸. 쿠키도 있겠다. 물론 쿠키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말이까지 타고 온다고 한다면... 딱 좋을 것 같네. 알렌이 살짝 이야기했던 넬라와 말이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을테니 말이야!
황태자나 황태녀라면 모를까 알렌이 그 자리에서 참석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소식만 듣고 살짝 방에서 나오거나 혹은 근처에 찾아오는 정도가 아닐까 싶어. 어차피 공작이나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제대로 나올 것은 아니고 그냥 구실일 뿐이니 그 이후에 그냥 알렌이 마리안느와 만나서 돌아다니는 것도 좋을테고 말이야. 일단 시간이 시간이니까!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잘 자! 마리주!
여기는 비가 엄청 내리긴 했지만 그래도 별 피해는 없었어. 물론 내 생활권만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하지만 다른 피해를 본 곳은..괜히 걱정이 되네. 정말로.
물론 그렇게 해도 괜찮아! 어쨌건 공작이나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만나게 하기 위한 구실이니 말이야. 응접실에 있으면 알렌이 노크하고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 그리고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쓰는 거야 천천히 쓰면 되는 거니까! 다음주 월요일 이후에 써도 괜찮기도 하고! 이건 진짜야! 아무튼 안녕! 마리주! 마리주는 별 피해없이 잘 지냈을까?
알현실에서 나오고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꼭두새벽부터 폐하를 알현해야 한다는 공작 내외의 부름에 어찌나 놀랐는지. 비몽사몽간에 부랴부랴 단장하고서야 무슨 상황인지 들을 수 있었다. 영지의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공작께서 폐하를 뵈러 가는데, 겸사겸사 날 폐하께 선보이고 여건이 되면 4황자와 마주하게도 할 심산이라고. 황망한 와중에 파티셰 얘기와 말이 얘기를 꺼냈다. 일전에 4황자께서 파티셰의 쿠키를 맘에 들어 하셔서 조금 싸 보냈는데 황실에서 반응이 좋았고, 4황자께서 당신의 말과 말이가 만났으면 하시더라고. 눈도장을 찍고자 한다면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권한 끝에 파티셰는 새벽같이 쿠키를 만드느라 진이 빠진 끝에 동행하고―파티셰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미안했지만, 다행히 공작 내외가 두둑한 보너스와 휴일을 약속해 주었다.― 난 말이를 탄 채로 입궐했다. 그 뒤 폐하를 알현하고서는 언동을 어찌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렇게 무사히 나왔으니 큰 실수는 하지 않았겠거니 할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그와 마주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응대해야 할까? 만약 <날 용서하지 마세요.>를 읽은 뒤라면... 가슴이 죄어드는 듯했다. 난 아직 그 대답을 들을 준비가 안 됐다. 파티셰와 말이를 동원해 버린 것도, 반쯤은 그래서이다. 그가 호의를 보일 만한 대상이 있으면, 여러 부정적인 감정에서 조금은 주의가 돌려질 것 같아서. 비겁한 짓이지. 둘을 방패막이로 써먹는 것이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그와 마주치지 않길 바라야 할 것 같다만. 그건 말이는 몰라도 파티셰에겐 몹쓸 짓이다. 황실 분들과 안면을 트게 해 주겠다는 구실로 그 고생을 시켰으니, 소기의 성과는 안겨 주어야 도리 아니겠는가. 적어도 5황자를 뵐 기회는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끄러운 속을 애써 감추며, 시종의 인도에 따라 응접실에 들어갔다. 공작께서 용무를 마치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며, 시종은 다과도 준비해 주었다. 공작가의 일원을 허투루 대접하지는 않겠다는 뜻이 엿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얄궂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파티셰가 조금 전에 폐하께 쿠키를 한 박스나 진상했는데. 파티셰도 그 생각이 들었는지 웃는 낯이 어째 난처해 보인다. 시종에게 감사 표시로 목례하며 혹시 5황자께서 지금 한가하신지, 한가하시다면 일전에 쿠키를 만들었던 파티셰와 찾아뵈어도 될지 물어 달라고 청했다. 공작께서는 그와 만나길 바라셨지만, 4황자는 바쁘시더라고 둘러대면 어떻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황태자 혹은 황태녀의 삶은 정말로 바쁠지도 모르나 그 아래의 다른 황자와 황녀의 삶은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지금만 해도 알렌은 당장 처리해야할 공무가 없었기에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지난 시찰에서 여러가지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황제에게 보고했고 그 이후 알렌은 시간을 내서 마리안느가 추천해준 책인 <날 용서하지 마세요.>를 천천히 읽었고 바로 어제, 모든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을 수 있었다.
그 책을 읽고 알렌은 그녀가 왜 자신에게 이 책을 추천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이전에 한 제안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듯이 이야기를 했었지. 그렇게 기억하며 알렌은 그녀의 의도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바로 답이 나오진 않았다. 아니. 안 나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뒤이어 그 행동의 의도에 대한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녀의 일방적인 손해이고,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그는 표정을 조용히 찡그렸다.
그런 생각을 오늘도 그는 황궁에 있는 정원의 벤치에 앉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조용히 부르는 이가 있었다.
"알렌."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제 1황녀인 세레나 실포드 알드레아의 모습이었다.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넘치고 현재 가장 차기 황제의 자리에 가깝다고 평을 받고 있는 그 황녀는 알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알렌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 누님. 부르셨나요? 무슨 일로?"
"후훗. 누나가 동생을 부르는데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하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가 해서 여쭸습니다."
"그러니? 조금은 어깨에 힘을 빼도 좋을텐데. 아무튼 일이 있는 것은 맞단다. 다름이 아니라 로덴버그 공작이 아버지를 알현하고 있단다. 그래서 로버트와 함께 나도 공작과 만나볼 생각이란다."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동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물론 너는 동석할 수 없겠지만... 공작이 혼자서 온 것이 아니라 공녀를 데리고 왔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전에 맛있는 쿠키를 만들었다고 하는 파티셰도 함께 말이야. 후훗.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부른거야. ...너는 최근 그 공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잖니."
"네? 아, 아뇨. 그렇게까지는..."
"후훗. 귀여운 동생이라니까. 아무튼 지금은 응접실에 있다고 하는구나. 만나고 싶다면 만나는 것은 어떻겠니? 너도 슬슬 혼기가 차고 있으니 마음이 가는 여자가 있다면..."
"아, 아직 그렇게는 아니에요!"
"아직이란 말이지? 후훗. 그래. 아무튼 나는 로버트와 함께 아버지에게 갈테니 너도 오늘 하루 휴식을 잘 취하렴."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내던 그녀는 뒤로 살며시 돌더니 기품있는 발걸음을 보였다. 제 1황자인 로버트 실포드 알드레아와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한편, 알렌은 괜히 자신의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식히려고 했다. 제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 조금 붉게 물들어있겠지. 그는 그렇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특별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방금 전 장난이 너무 짓궂은 것 뿐이라고 그는 스스로 합리화했다.
아무튼 마리안느가 왔다는 말을 다시 곱씹으며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만나고 싶은 탓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는 정원에서 나와 성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거기서 또 안쪽으로 들어간 후에, 또다른 복도로 나온 후에 3번째 방. 그곳이 바로 응접실이었다. 그곳에 멈춰선 알렌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 너머에 마리안느가 있는 것일까. 평소에 짓는 부드러운 미소를 자신도 모르게 머금으며 그는 천천히 문을 노크했다.
"제 4황자인 알렌 실포드 알드레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리안느는 등장할때마다 엄청나게 예쁜 옷을 입고 오는구나! 이번 드레스도 보통 예쁜 것이 아닌 것 같아. 와아아... 아무튼 알렌은 자신의 누나에게 소식을 듣고 내려왔다는 느낌이야. 이후에 마리안느가 어떻게 나올지가 너무나 궁금해졌어. 하지만 답레는 천천히 써도 괜찮아!
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마리주가 기대할만한 답 퀄러티가 나올지는..(옆눈) 아무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일상으로 짜자잔하고 밝혀질 예정이야! 아무튼 이번 주말은 일정 잘 보고 바쁜 일 잘 해결하길 바라! 절대로 무리하게 이을 필요 없으니 말이야! 파티셰를 내보내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사실 알렌이 등장했으니 공작이 미리 언질을 했다면 슬쩍 자리를 비우지 않을까? 공작은 일단 무조건 알렌과 마리안느를 같이 있게 하고 싶어할테니 말이야.
5황자를 내보낼까 했지만 그냥 여기선 1황녀를 내보내봤어. 아무래도 누나이기도 하고 나이 차이도 조금 있긴 하니까. 대충 열살 이상.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행동이 상당히 조심스러워지는 편이야. 물론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존경의 의미로 말이야. 그렇다고 완전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일단 궁중암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 살벌하게 피바람이 부는 일은 없는 황실이야. 적어도 이번대에는!
맞아. 공작가라면 옷이 많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늘 옷 사진이 나올 때마다 정말로 예쁘게 보고 있어! 알렌도 예쁘게 생각할테고 말이지!
일단 나는 퇴근하고 식사를 마치고 갱신이야! 이제 또 주말이니까 쉬어볼까 싶기도 하고 소일거리를 조금 해볼까 싶기도 하고! 어떻게든 또 지나가겠지!! 마리주도 일정 화이팅이야!!
그것을 알기에 지금 답을 하지 않고 일상에서 하려고 대기하는 거지만 말이야! 상황이 상황이니 얼마 가지 않아서 밝혀지기야 하겠지만! ㅋㅋㅋㅋㅋ 아무래도 사실 둘의 상황이 그 소설의 상황과는 조금 거리가 멀긴 하지. 물론 비슷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앗...파티셰님...ㅋㅋㅋㅋㅋ 적당히 요리에 관심이 있는 막녀 황녀를 불러야..(안됨)
이미 다음 황제의 자리는 둘 중 하나에게 준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있고 딱히 그 아래의 이들도 황제 자리에 욕심이 있진 않거든. 물론 알게 모르게 1황자와 1황녀는 경쟁하고 있지만 말이야. 그래도 둘의 사이가 또 좋아서 누가 황제가 되어도 납득하기로 서로 협의를 한 상태야. 그래서 일단 황가는 아직은 평화로운 느낌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파, 파티셰님.. 극한직업이구나. 그래도 보너스와 휴가를 약속받은 것이 어디야. 악독한 귀족집안이라면 당연히 일하는 것이 맞지 않냐고 보너스도 휴가도 주지 않을텐데. 이렇게 보면 로덴버그 공작가는 정말 철저하게 보상을 약속하니까 일하기에는 좋지 않을까 싶어.
아랫사람끼리 알게 모르게 싸울지도 모르지만 정작 당사자들이 마음이 없고 관심이 없으니 아마 어설프게 콕콕 건드리면 바로 함부로 모함한다고 목을 댕겅 잘라버릴지도 몰라. 어쨌건 알렌도 살짝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황가를 함부로 건들면 진짜 가만히 안 있을 황실이니까. 너희들의 권한이나 힘은 어느 정도 보장하겠으나 도전하지 마라. 흔들려고 하지 마라. 이런 느낌이 알드레아 황가라고 보면 좋을 것 같아.
아앗..강제기상이라니. 그건 정말로 힘든데. 나는 조금 더 쉬었다가 오후에 영화나 한편 보러 가려고 생각 중이야! 콘크리트 유토피아인가. 그거 재밌다고 해서 보러 갈 생각이거든! 마리주도 일정 화이팅!
사실 말만 보면 굉장히 악독하고 막 부려먹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합리적인 대가를 주고 있고 그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게 하며,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 의식주까지 해결해주는 것을 보면 이 공작님은 시대를 뛰어넘은 엄청나게 좋은 공작님이 아닐까? (흐릿) 뭔가 마리안느가 혼인에 실패해도 씁. 어쩔 수 없지 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실제 역사에선 그렇게 되겠지만, 그래도 여기서까지 피싸움을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도 먼 미래가 되면, 알렌 기준으로 3~4세대가 지나면 그런 피싸움이 생길지도 모르지.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만!
아이고... 일정이 계속해서 잡히는구나. 그래도 월요일 하루만 일하면 또 화요일에 쉬니까!! 나는 나대로 에어컨 켜놓고 푹 쉬는 중이야!! 그리고 내가 8월말에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지라 그 날 연차는 쓸 수 없고 대신 8월 말에 연차 2번을 써서 갔다올 생각이야. 어차피 연차 남아돌고 있고 촉진제 때문에 아낀다고 돈도 안 주니까 그냥 이럴 때 쓰자하는 마음으로 쓰려고 하고 있어.
원래는 전에 1주일 쉴때 갔다오려고 했지만 그땐 영 시간이 안 맞아서..(흐릿) 그러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시종이 5황자께 여쭙겠노라고 말하고 물러나려는 찰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기척이 났다. 그러고 이어지는, 어디 지나가다 스쳐 들어도 알아챌 것 같은 정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그였다. 가슴이 급격히 뛰었다.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간 나머지 피가 몰린 손가락이 시뻘개졌다. 그러고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마리안느는 누가 옆에서 놀래기라도 한 듯 흠칫 몸을 떨었다. 뒤이어 괜스레 머리칼을 매만져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깨달았다, 무슨 답이 돌아올지 두려워 그를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못지않게 그에게서 답을 듣길 바란다는 걸. 그리하여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어떻게든 결착 나길 바란다는 걸. 결국 마리안느는 심호흡을 하고 일어서면서 대답했다.
"배알할 기회를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전하."
마리안느가 대답하기 무섭게―아마 마리안느의 대답은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황자에겐 집이나 다름없는 황궁에서, 황자가 응접실에 들어가겠다는 걸 누가 굳이 막겠는가.―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시종이며 파티셰가 허리 굽혀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스쳐 간 것과 거의 동시에, 마리안느 역시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 다리가 후들거릴 것만 같아, 구둣발에 악착같이 힘을 주면서.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다만 이렇게 되니 상황이 좀 애매하다. 시종에게 앞서 청한 건 잊어 달라고 해야 할지, 파티셰는 이 자리에 있도록 해야 할지 보내야 할지, 보낸다면 어디로 보내야 할지. 답이 정해져 있는 사안인지도 모르나, 아무래도 겸연쩍었다. 특히 순전히 내 본위로 데려와 놓고, 이제 와 자리를 비켜 달라고 파티셰에게 명하는 건 영 낯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파티셰가 그에게 허리를 더욱 깊이 숙이며 아뢰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저..., 소인은 로덴버그 가의, 그...일전의 쿠키를 구운 파티셰입니다! 황송무지합니다만 저, 황궁의 파티셰를 뵙게 해 주시겠습니까? 황궁에서 일하시는 분은 어떤 분인지 늘 궁금했습니다!"
얼떨떨했다. 내게 전혀 알리지 않은 채 그에게 직접 고하다니. 그와 마주칠 경우를 대비해 공작 내외께서 미리 지시해 둔 내용일까.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얕게 숨을 내쉬었다. 파티셰가 사전 논의 없이 그에게 청한 것으로 비춰져서는 곤란할 듯했다.
배알할 기회를 주면 영광이라는 그 말에 알렌은 미소를 유지하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파티셰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마리안느 역시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그대로 담겼다. 이어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아주며, 동시에 자신도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 이야기했다.
"덕분에 말이죠. 당신도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마리안느. 설마 이 성에서 보게 될 줄은 조금도 몰랐지만요."
물론 그녀 역시 공작가의 사람이니 성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허나, 바로 이 자리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만나더라도 자신이 성밖으로 나가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건 이것대로 신선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파티셰가 더욱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하기에 알렌의 시선이 자연히 그 파티셰에게 향했다. 처음에는 시종인줄 알았지만 이제야 그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이가 파티셰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일전에 구워줬던 쿠키는 매우 맛있게 잘 먹었답니다. 제 가족들도 포함해서 말이에요. 당신이 그때 그 쿠키를 준비한 파티셰였군요.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건 그렇고, 황궁의 파티셰라."
만나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잠깐 일하고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순수하게 황궁의 파티셰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맞을지에 대해서는 그는 믿기 힘들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 모습.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니라 자신이 오자 자신에게 직접 청하는 모습. 또 공작가에서 뭔가 손을 썼다는 것을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어 마리안느가 역시 똑같은 요청을 하자 알렌은 살며시 시선을 옮겨 마리안느를 바라봤다.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지만, 나중에 조금만 더 시간을 내 줄 수 있을까요? 제 동생이자 제 5황자인 로이 실포드 알드레아가 당신의 쿠키에 흥미를 특히나 많이 보였거든요. 아마 만나준다면 매우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동생에게 호의를 조금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마리안느와 혹시나 만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차단하려고 하면서 그는 옆에 있는 시종에게 이야기했다.
"저 분을 황궁 파티셰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주세요. 그리고 혹시나 쿠키를 구워보고 싶다면, 재료는 얼마든지 사용하게 해주세요."
가볍게 웃어보이면서 그는 살며시 고개를 다시 마리안느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쩔 건가요? 당신도 따로 만나고 싶은 이가 있나요?"
/ㅋㅋㅋㅋㅋㅋㅋ 파티셰님. 엄청나게 빠르게 반응하잖아?! 아무튼 이제 또 월요일이니까. 하루 또 서로 힘내보자! 잘 자! 마리주!!
안녕! 마리주! 여러모로 몸이 많이 피곤해보여서 걱정이야! 나는 어제 하루 잘 보냈지! 그리고 오늘은 푹 쉬면서 보낼 예정이야. ㅋㅋㅋㅋㅋ 그리고 사실 저 정도면 어지간하면 다 눈치를 채지 않을까? 아. 그건 제 5황자도 마리안느에게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못 만나게 알렌이 막는 그런 느낌이야. 알렌은 지금은 딱히 다른 이와 만나게 해줄 생각은 없거든. 물론 마리안느가 만나겠다고 한다면 아쉬워하면서 만나게 해주겠지만 적어도 자신 쪽에서는 만나게 해줄 생각이 없다는 그런 느낌으로 보면 돼!
긴장감에 땀이 나는 게 느껴지는 동시에 묘해졌다.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 몰랐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면 과연 그가 믿을까. 공작의 의중을 알고 그게 내 목적에도 부합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자신에게 들이댈 구실을 만든 걸로 비치지 않을까. 아니, 이 정도면 내가 사전에 알았고 몰랐고는 중요하지 않다. 공작의 의향에 따라 입궁했고, 이렇게 그를 마주했으니. 그랬기에 파티셰의 느닷없다면 느닷없는 청과 마리안느의 맞장구를 들으면서 그가 보였던 의미심장한 표정은, 가책 같기도 하고 께름칙함 같기도 한 감정을 자극했다. 그가 속아 주겠다는 듯이 수락함은 물론, 5황자와 만나 볼 것을 권하고 쿠키를 구워 봐도 좋다는 호의까지 보이자 더더욱. 그가 과연 <날 용서하지 마세요.>를 읽었을까? 그걸 읽고도 저렇게 우호적으로 반응하는 걸까? 모르겠다. 황제 폐하를 비롯해 황실 사람들의 의중을 함부로 짐작하지 말라는 말이 지금만큼 절감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동요를 다스리려는, 되지도 않는 시도 따윈 아예 단념하고, 티나 덜 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파티셰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나갔고, 그가 마리안느에게 따로 만날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뭐라고 아뢰야 할까. 파티셰와 함께 5황자를 배알할 수 있을지를 타진하려던 차이긴 하다만, 파티셰를 혼자 5황자께 보내기보다는 고용주로서 대동해서 파티셰가 직접 대응하기 어려운 부분을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만, 지금은, 그와 마주한 이 순간만큼은, 그걸 우선시하기가 힘들었다.
"고용주로서 파티셰가 5황자를 배알할 때 동행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만..." 마리안느는 손깍지를 끼며 숨을 골랐다. 너무 꽉 껴서 손가락 마디가 쑤시고 손바닥에 땀이 밴 것도 느껴졌지만, 차마 힘을 빼지는 못하겠다. "지금은 그보다, 전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면서도 망설여진다. 듣고 싶지만 듣고 싶지 않다. 들으면 분명 결착은 나겠지만, 그게 내게 유리한 결과일 가능성은 낮다.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정성을 쏟고도 보답받지 못하고 도리어 이용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고도 정성을 쏟고자 할 리 없지 않은가. 차라리 그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남주인공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 수밖에 없을 만큼 푹 빠진 뒤에 고백(?)을 했어야 할까 하는 생각마저 스쳐,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그건 소설의 등장인물이니까 됐던 거지, 이해타산을 따지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타인의 마음이 그렇게 뜻대로 되겠는가. 대답을 듣는 걸 미뤄 봤자, 이미 정해진 결과를 내가 모르는 것뿐. 달라질 건 없다. 그리 마음을 다잡고도 진정하기는 어려워 실없는 소리부터 꺼내 버렸다.
"그렇다면 그때 동행하도록 할게요. 데려가야 할 사람은 필요할테니까요. 시종보다는 같은 황자가 낫겠지요."
적어도 둘이서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애써 숨기면서 그는 미소를 유지하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적어도 명분은 확실했다. 아랫사람인 시종보다는 같은 황자인 자신이 대동하는 것이 조금 더 분위기적으로 편할테고, 혹시나 무례한 요구나 그런 것들이 있을 때 차단할 수 있을테니까. 물론 그보다는 다른 사적인 감정이 조금 더 크긴 했지만 굳이 그런 것을 표현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편 손깍지를 낀 상태에서 숨을 고르던 마리안느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말에 알렌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물음이 나올 것은 이미 예상한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도 그에 대해서 답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예상한 그 물음이 나오자 알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세 번 읽었답니다. 참 인상 깊은 소설이었어요."
이용하고자 하는 이와의 사랑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가. 그 물음을 몇 번이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온 상태였다. 허나 그 답을 바로 하지 않는 것은 약간의 심술이었다. 조금은 짓궂을 수 있는 그런 작은 심술을 보이면서 알렌은 표정을 살며시 굳혔다.
"그 책을 왜 저에게 권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묻고자 하는 건데..."
이어 알렌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순간이 자신과 그녀의 미래가 크게 바뀔지도 모르는 분기점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알렌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내려 마리안느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평소의 미소가 섞인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 상당히 진지하고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를 냈다.
"마리안느 리멜트 로덴버그. 당신은 저를 이용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나는 것인가요?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오로지 그 목적만으로?"
그것은 자신이 답을 하기 전에 그녀에게 던지는 작은 물음이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그 목적을 위해서 남주인공을 만나고 이용하고자 하는 느낌이 상당히 강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이 여자는 어떤가. 자신도 동일하기에 그 소설에 대입해서 지금 이 상황을 묻고자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 물음의 답을 거짓으로 고하진 않겠지요?"
부드러운 톤의 목소리였으나 그것이 마냥 부드럽게 들릴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목소리는 기분이 나쁘다거나, 불쾌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진지함만이 살며시 녹아있었다.
/쑥스러울 것이 뭐가 있어. 오히려 알렌에겐 쿠궁하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리고 이번엔 마리안느가 쿠궁을 느껴볼 차례가 되려나? 자. 마리안느의 답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겠어!
예상 밖의 반응에 눈이 확 뜨였다. 나쁠 것 없는, 아니, 오히려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시종에게 안내받는 대신 그에게 안내받으면 4황자의 손님 같은 모양새가 되어 여러모로 부담이 덜할 테니까. 그라면 나나 파티셰가 정말로 막돼먹은 짓을 하지 않는 한, 우리가 난처할 일은 없게 해 줄 거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아연해졌다. 그걸 어떻게 믿지? 그와의 교분이 지속될지 불투명한 이 판국에?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건만, 희한하게도 그가 의심스러워지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동행 제안이, 일종의 희망처럼 느껴졌다. 그가 진지한 만남을 여전히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이 0은 아닐지도.
이 무슨 망상이람? 잡념을 몰아내고자 속입술을 잘근 깨무는데, 그가 앞서의 실없는 소리―그에게 직접 줘 놓고 별개의 인물을 통해 전한 양 지껄였으니 다시 생각해도 싱거운 소리다.―에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 번이나 읽었다, 그건 그가 이 사안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이리라. 아릿한 통증에 마리안느는 이를 앙다물었다. 비릿하고 찝찔한 맛이 배어났다. 칠칠치 못하기는. 핏물과 함께 마른침을 넘기는데, 그가 한 가지 알아야겠다고 하다가 말을 그쳤다. 그 침묵이 그의 입장을 보다 잘 전달할 표현을 고르는 과정일지, 이 화제를 꺼내는 것에 대한 망설임일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웃음기가 싹 가신 표정에, 타자의 속을 꿰뚫기라도 할 기세로 직진해 오는 맑은 눈빛에, 이제 막다른 길임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가슴을 찌르는, 엄정하게까지 느껴지는 물음. 뒤이어 쐐기를 박으려는 듯한 덧붙임. 이제는 있는 그대로, 긴장감이 더해져 어지러울 지경인데도, 도리어 미소가 머금어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실직고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얼렁뚱땅 얼버무리고자 했다면 그 책을 건네지도 않았다! 마리안느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게 결혼은 확실한 신분을 얻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생각한 결혼은 양측이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입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배우자에게서 얻어 내고 배우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이 제공하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러리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직한 거래 관계나 사업 파트너에 빗댈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고, 그런 관계라면 서로를 신뢰할 수도,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정열에 기반한 결혼을 바라시지 않습니까. 저처럼 정열의 가치를 낮게 여기고 결혼을 거래로 여기는 사람과 진지하게 만나신다면, 주제넘은 말씀이오나 전하께 괴로운 기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열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고도 보답받지 못하는 게 서러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책을 읽어 주십사 청한 것은 그 부분을 숙고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전하께서 일전의 제안을 철회하시는 것이 제게 두렵고 난감한 일이기는 하나, 양쪽 모두가 바라는 바를 충족할 수는 없는 관계라면 빠르든 늦든 파국에 이를 것이라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말을 맺기 무섭게 온몸이 떨려 왔다. 티 내고 싶지 않은데, 공작가의 사람답게 우아하고 의연하게 버티고 싶은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마리안느가 어떤생각으로 제무덤을 팠을지 제가 파악가능한선에서 최대한 표현해보려고 하긴했는데요(º﹃º) 기대하신 보람이있는 반응일지는 잘모르겠어요「(^ᗣ^゚。)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잇고 자러가볼게요εミ(ο_ _)ο 안녕히주무세요(︶。︶✽)
몸을 떨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가 말한 내용이 상당히 무섭긴 한 모양이라고 알렌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서도 어떻게 보면 참 그녀답다고 알렌은 동시에 생각했다.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 정말로 상대를 이용할 생각만 하는 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자신의 비하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알렌은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조용히 곱씹으면서 알렌은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정말로 당신다운 답이라고 밖엔 할 수가 없네요. 그보다 좋은 표현이 저는 떠오르지 않거든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는 그녀의 자유였으나 적어도 목소리에 비꼬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그렇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알렌은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자신은 이런 이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에 가까워보이네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상황이 무섭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스스로 한탄하는 것에 가까워보이고요. 마리안느. 일단 심호흡을 좀 하시겠어요?"
지금 이대로 계속 말을 듣게 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선 매우 힘든 일일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가 심호흡을 할 수 있도록 잠시 뜸을 들였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시 생각을 곱씹던 그는 이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저를 정말로 이용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말고 적당히 둘러댈 수도 있었을텐데. 당신은 언제 봐도 올곧고 직선적이네요. 그런 당신이기에 더욱 흥미롭고 눈길이 가는 거 아시나요?"
이어 그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조용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방적으로 이득을 얻는 것은 안되며, 그로 인해서 제가 괴로운 기억을 가지게 될 거라고 하셨지만 그것을 정하는 것은 저에요. 당신은 제가 본 그 소설의 여주인공은 되지 못하는 것 같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걱정하고 있는 따뜻한 사람이에요. 물론 그런 모습조차도 저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이고 가짜라고 한다면 그것에 속은 제가 잘못인거고요."
그리고 그는 그녀를 향해 한걸음 천천히 다가가며 사이를 좁혔다.
"지금 당장 결혼이나 약혼을 청하진 않겠지만, 저와 좀 더 만나고 시간을 가져봐요. 저는 그동안에 당신의 마음에 저를 조금 더 심어두고 싶으니까요. 심어둔 씨앗이 싹을 띄우거나 꽃을 피우면 혹시 아나요? 당신의 마음 속에 또 다른 감정이 피어오를지. 소설의 남주인공은 상관없어.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라는 논리를 쓴 모양이지만, 저는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볼게요. 당신의 마음 속에 꽃이 필 수 있도록. 기왕이면 그런 쪽이 당신에게도 좋잖아요? 아예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보다는 말이에요."
마음이 가는 사람이 신분까지 보장해준다. 차라리 그녀에게는 그게 더욱 좋지 않겠는가. 적어도 알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두 말은 하지 않을게요. 이 손을 잡으면 앞으로 저와 조금 더 깊게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잡지 않는다면 거절하는 것으로 알게요. 마리안느. 당신은 그 어떤 여성보다 눈길이 가는 존재고, 더욱 깊게 알고 싶은 존재에요."
/저기서 마리안느가 어설프게 말을 돌리거나 조금이라도 좋게 꾸며보려고 했다면 알렌의 입장에선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굳이 더 관계를 좁히려고 하진 않았겠지만 저 말을 듣고, 그 내용을 듣고 알렌은 이 사람이다..라고 어느 정도 느껴버렸으니.. 마리안느는 참으로 계획적인 것이 맞다. (어?) 아무튼 잘 자고 좋은 밤 보내! 마리주!
떨림이 주체가 안 되는 가운데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갔다. 공작 내외께서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다 된 밥에 재 뿌렸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고? 그렇다 해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래에서 상호 이익이 보장되어야 하듯, 결혼―혹은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가 그런 관계에서 바라는 건 여느 사람이 바라는 것과 다르니, 여느 사람 같은 '거래'로는 만족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누가 뭐라든 지금의 처신이 최선이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싶었으나, 그와 별개로 완전히 녹초다. 여기가 황궁만 아니었다면, 심지어 광장의 코끼리 분수 앞일지라도 체통이고 뭐고 모르겠다고 누워 버렸겠다. 하지만 황궁이니, 시선의 초점을 그에게 맞추고자 아등바등할 뿐.
실내 전체가 침묵에 잠겼던 탓일까. 그의 얕은 숨소리가 멍한 와중에도 또렷했다. 뒤이어 그는 진지한 표정 그대로, 마리안느를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나답다는 발언엔 다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의미가 담긴 것 같았으나, 그보다 마리안느의 주의를 끈 건 목소리였다. 여전히 진중했지만, 직전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압박감은 가셔 있었다. 그런 채로 그는 마리안느의 대답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이어가다가 불쑥 엉뚱한 얘길 꺼냈다. 심호흡? 멍하던 눈이 확 뜨였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내 꼴이 어지간히 엉망으로 보였나 보다. 마리안느는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고 가슴도 몇 번 쓸어내리니 좀은 나아진 것 같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온 게 보였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 채 가늠해 보기도 전에 전혀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잘못 들었나? 그러나 내용은 몰라도 어조는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표정도 온화하다. 얼떨떨했다. 이렇게 나한테만 유리한 판이 돌아가는 게 거짓말 같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면 악수일 수도 있는, 혹은 악수에 가까운 언행에 그가 흥미를 갖는 건 어째서일까.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가 다가오며 오른손을 건네는데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온몸을 차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 곳곳이 고동쳤다.
그러던 중, 괴로운 기억일지 아닐지는 그 자신에게 달렸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 말대로, 선택도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그의 몫이다. 그렇기에 문제나 변수를 최대한 검토한 뒤 결정했으면 해서 <날 용서하지 마세요.>를 전했던 거고. 그 의도를 헤아려 준 걸까? 그는 내가 그 소설의 여주인공과는 다르단다. 그 주인공은 상호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긴 하다만, 내 처신이 과연 따뜻함일지는 의문이다. 그는 마주할 때마다 신기하리만치 성의를 보여 줬는데, 그런 이와 차마 불공정 거래(?)는 못 하겠다는 게, 뭐 그리 고운 심성의 발로일까?
그래도 이어지는 말에 안심이 되고 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그를 심고 싶으니 좀 더 만나 보자는 발언에는 여타 로맨스 소설의 고백이 연상되어 확 더워지기도 했다. 진짜 소설에서나 나오는 연애의 직전 같잖아. 이분을 이렇게 직진하도록 만드는 정열은 어떤 감정일까.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현실의 숱한 사람들과는 다른― 꺼지지 않는 불 같은 것일까. 호기심 섞인 흥분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 남주인공처럼 할 수는 없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일순 머쓱했지만, 이내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즉 그는 내가 책을 건넨 의도를 확실히 알아주었고, 숙고한 끝에 지금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일 거다. 그리고 아마 이번 같은 문제가 또 생기더라도, 터놓고 이야기하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 결론에 이르자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혼인은 물 건너가고 최악의 경우 공작가에서 파양되는 것까지 각오했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일이 잘 풀렸다. 그 안도감을 만끽하다 지레 찔끔했다. 지금 내 표정 되게 얼빠져 보이는 거 아냐? 민망함에 고개를 돌려 슬쩍 헛기침을 하면서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고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위에서도 말하긴 했지만 아마 저기서 마리안느가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말을 막 꾸미거나 좋게 들리는 것처럼 말하려고 하거나 하면 알렌은 아마 그 이후로는 크게 마리안느와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았을테니 말이야. 물론 그렇게 되어도 또 미래의 상황에 따라서 바뀌겠지만! 공식적으로 썸타는 사이..ㅋㅋㅋㅋㅋ 일단은 그렇게 되려나? 적어도 이전보다는 조금 깊게 만나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겠네. 이렇게 공작님은 또 춤을 추게 되려나? 확실히 그런 것 같아.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더워. 더위가 좀 꺾여야하는데...8ㅁ8
로이는 아무래도 조금 철부지같은 면이 있기 때문에 파티셰를 만나면 크게 관심을 보이면서 "네가 그 쿠키를 만든 이란 말이지? 그럼 여기서 또 만들어서 증명해볼래?" 이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쿠키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까 싶어. 그러다가 같이 동행한 알렌에게 철부지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혼나고 히잉 소리를 내겠지만 말이야.
오히려 그런 발언이기에 진실성을 엿볼 수 있고 마냥 그런 발언들이 이기적이라기보다는 깊이가 있고, 또 할말은 확실하게 하니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상당히 커. 알렌은 아무래도 입발린 소리는 너무나 많이 들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게 불만이라는 것은 아니고 내 주변에는 없는 이였으니까 괜히 더 눈길이 가는 그런 느낌? ㅋㅋㅋㅋㅋㅋ 그게 그렇게 되려나. 아무튼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해도 알렌이 잘 받아주면 되지 않을까?
만약 진상을 한다면 로이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냥 우리 황궁에서 일하지 않을래? 내가 보너스 더 줄게. 그러면서 바로 직접적으로 스카웃을 시도할 것 같아. 물론 그러다가 알렌에게 또 때쓰지 말라고 하면서 엄한 소리를 들을 것 같지만 말이야. 그리고 마리안느에게 아직 철이 없는 아이니까 조금 이해해달라고 이야기를 할 것 같아.
물론 로이는 로이대로 나도 2년 후면 성인이거든?! 데뷔하거든?!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마리안느를 보면서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싶어. 혹시 형이랑 장차 결혼할 거 아니면 나는 어떻냐고 슬쩍 꼬셔도 보고. (물론 형편없는 실력)
안녕! 마리주! 이번 주말은 내가 시골에 조금 다녀와야해서 아마 푹 쉬는 느낌은 아닐 것 같아. 할머니가 워낙 날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수준이라고 하니..(흐릿) 사실 가면 가는대로 피곤하지만 안 갈 수도 없고. 아무튼 그렇다! 고로 주말에는 내가 오기 힘들 것 같아.
ㅋㅋㅋㅋㅋㅋ 역시 마리주의 큰 그림이었구나! 공식적인 썸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노력이라. 과연 어떤 것들이 나올지가 궁금해지는걸? 알렌은 그저 귀엽게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면 되는 거 맞지?
로이도 딱 알렌을 닮아서 쿠키를 좋아하긴 하지만 알렌처럼 굳이 막 사서 먹고 그러진 않아. 그냥 있으면 정말로 잘 먹는다 정도? 아앗..ㅋㅋㅋㅋㅋ 파티셰님.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는구나. 가장 마지막 루트가 정말로 행복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내 기분 탓일수도 있지만!
맞아. 로이드는 2년 뒤를 엄청 기약하고 있어. 나도 정식으로 데뷔해서 어른으로 대접받을거야! 느낌으로 말이야. 알렌도 정식 데뷔를 하면서 좀 더 자유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아무튼 마리안느...ㅋㅋㅋㅋㅋㅋ 정말 능숙하게 대처하는구나. 그러면 로이는 히잉.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알렌과 마리안느를 번갈아가면서 볼 것 같아. 그러다가 마리안느에게 그럼 형이랑 장차 결혼할 생각이야? 확정 났어? 이렇게 물어보다가 알렌이 가능성은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또 수습하려고 하지만 형에게 물은 거 아니라고 하면서 마리안느에게 어쩔 꺼냐고 물어보지 않을까 싶어.
ㅋㅋㅋㅋㅋ 사실 내가 요즘 잘 안 내려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해해줘서 고마워!!
오. 몇몇 소재를 생각해둔거야? 그렇다면 그것이 뭔지 몰래 두근두근거리면서 기대를 해야겠어! 사실 나도 몇 개를 생각해두긴 했지만 뭔지는 아직 비밀이야!
괜찮아! 알렌이 아마 그만큼 사먹을테니까! 그리고 황가 식구들에게 선물하려고 대량으로 사갈테니까. (안됨) ㅋㅋㅋㅋㅋㅋ 어느 쪽이건 파티셰는 잘 보였으니까 미래가 황금빛 미래 그 자체네! 로덴버그가에 박아둔다고 한다면 알렌이 쿠키 먹으려고 은근히 찾아갈지도 모르겠는걸. 혹은 쿠키를 주문한다거나 말이야.
그 정도면 충분히 능숙하게 대처한 거 아닐까? 너무 기분 나쁘게 말한 것도 아니고 거절을 해도 상당히 기분 좋게 거절을 했으니 말이야. 아무튼 그런 뒷사정 이야기가 있었구나. 원래 캐릭터는 자기가 처음 계획한대로만 흘러가진 않는 법이니까!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ㅋㅋㅋㅋㅋ 아무튼 아직은 살짝 철부지니까 막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있고, 로이는 일단 설정상 상당히 직설적인 성격이라서 말을 돌리거나 하진 않거든. 그래서 알렌이 정말로 이대로 커도 괜찮은 것일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야. ㅋㅋㅋㅋㅋ 아무튼 로이는 마리안느의 그 말을 들으면 아마 흥미롭게 마리안느를 바라볼 것 같아. 그러면서 못난 형이지만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를 할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알렌은 작게 웃으면서 아직 철부지인 아이니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달라고 요청할 것 같아. 너무 진지하게 로이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