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책을 넘겼습니다. 붉은 글씨가 미색의 양피지 한 면을 가득 채운 게 바로 눈에 띕니다.
처음에 그 존재가 뒤집혔을 때, 세계는 멸망했다. 그것은 자신이 세운 모든 것을 불태웠고 뭉개버렸다. 그리고 과연, 그것이 단 한 번 뿐이었을까. 보
불타는 대지와 불타는 생명들의 그림이 보입니다. 다음페이지로 넘깁시다. 지 다른 한 쪽은 몇 번이고 대지를 복구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간들이 많아지면, 모든 신수의 기억을 지우고 세계를 부쉈다 마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악의가 가득 느껴집니다. 붉은 글씨의 잉크가 흐르는 것이 보입니다. 아니, 당신의 방 천장에서 피가 뚝, 뚝, 흐릅니다. 그것이 글자를 만들어갑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혈액은 당신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단순한 착각이거나.
툭, 무언가 떨어졌습니다. 사람의 눈알입니다. 읽
당신의 입에서 무언가 입 밖으로 흐르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
마 그 과정에서 그 존재는 인간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몇 번이고 사라진 세계에 대한 건,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를 제외하곤. 지금이 뒤집히고 다시 재건 된 세계로 느껴지는 거지, 맞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지금 너희는 몇 번째 일까
너무 즐거워. 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HA</CLR>
<clr red>너희의 죽음은 아직이야 아직이야 아직 아직 yetyetyetyetyetyetyetyetyetyetyetyetyetyet
아무튼 혼나는 상황이었다. 잘못한 일이 있고, 그것에 대해 혼나고 있는 상황.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니면 어렸을 때 제대로된 사회화 교육을 받지 못해서였는지 니오는 이 상황에서도 '하 사감님이라면 칭찬해줬을걸, 둘째 언니라면 아무튼 감싸줬을거야' 라던가 '가현언니라면 내 편이었을텐데, 온화선배였다면 잘했다고 했을거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을 살짝 올려떠서 쳐다보는 것으로 겉으로도 어느정도 드러나버렸을지도 모른다. 호승심에 몸을 맡겼다가 그가 또 폭주하면 일이 복잡해진다는 이야기였다. 요는, 성격을 많이. 아-주 많이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니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주의할게요. "
암, 주의해야지. 주의하는 수 밖에. 니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내가 왜?' 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살면서 성격을 죽인다거나 걸리는 싸움을 피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이야기를 듣고나면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정도는 어린아이여도 잘 알 수 있겠지만 타고난 성격을 죽인다거나 바꾼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해야한다. 잘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진 알 수 없지만 작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 걸리는 싸움 피하고, 시비걸면 무시하고 뭐 그러란거잖아요? 으음.. 네. 뭐, 노력할게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노력할게요. "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 사람들이라면 다르게 말해줬을걸- 하는 생각이 계속 피어올랐지만 일단은 여기에 집중이다. 니오는 후- 하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그 많은 싸움과 시비를 무시하려면 기숙사 방 안에 칩거하는 수 밖엔 없을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여태껏 걸려오는 싸움도, 시비도 피해본 적이 없었기에 벌써부터 그것들을 피하고 도망쳐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부글부글 화가 끓는 느낌이었다. 아랫배가 살살 간지럽혀지고 하반신에서부터 뭔가 이상한 감각이 피어올라 위로 점점 올라오는 느낌. 이것이 그가 말한 '호승심'일까.
" 솔~직히 말하면 말이에요. 그 이야기들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아서요. 그래도 노력할테니까.. 뭐.. 자기 자신하고 싸운다고 생각해볼게요. 그 정도는 괜찮겠죠? "
자랑이라기에 정말 자랑해 봤다. 농담이라는 것도 이제는 할 줄 알고, 어렸을 적 표현 없던 시절에 비하면 그도 많이 사람이 되었다. 백룡이 되며 '자신'을 확립한 탓인가? 말마따나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니 정말 그러할지도 본인 말고는 모르는 일일 테지만. 하지만 적어도 타인의 사소한 말마디 하나, 가벼운 동작 하나하나에도 집요하게 의미를 찾고자 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돌아오는 대답에 그는 온화를 흘깃 쳐다보다 말았다. 그 잠깐 사이에도 수많은 생각과 가정이 스친다. 사람은 종종 망설여지는 어떤 일을 시도할 때에 적당한 당위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결심이 서기도 한다더라. 선뜻 먼저 알려주기도, 그렇다고 캐물으러 찾아온 집념을 무시할 정도로 대단한 비밀은 아니라 하면서도 운에 맡긴 내기를 건 까닭은 그것일까? 당장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상념은 잠시 물려 둔다.
아무렇게나 댄 답이 용케도 맞았단다.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틀렸는데도 맞다 해 준 걸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생각지 못한 행운에 극적인 반응을 할 법한데도 그는 고개를 갸웃하기만 하고 치울 뿐이다. 그보다는 얼른 답하라는 양 대꾸도 없이 빤히 바라보는 꼴이 뻔뻔한 집고양이 같기도 하다. 그다지 날렵하게 움직일 의욕이 없고, 상대가 무얼 하든 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닮아 있기는 했다. 유현은 반항 않고 가만히 폭 안긴 채 선명하게 달라붙는 감각에 귀를 기울였다. 어두운 방, 나직하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 신경이 자연히 곤두서며 흘러드는 이야기 붙잡아 둔다. 짤막하면서 긴 이야기 다 듣고서 그가 꺼낸 소감은 이러했다.
"꼭 이런 자세로 대답해야 할 이유는?"
그리도 궁금해하던 이야기 듣고서도 엉뚱한 소리가 앞서는 경우는 무언가? 아니, 가만 보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골똘하다. 아마 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곧 안긴 자세에서 슬며서 고개를 빼고는 제 바로 옆에 있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제대로 막아냈더라도 후련했을까? 내 생각엔 그래 보이지는 않아."
결과적으로는 마지막에 다 죽여 버렸으니 제대로 막아냈느냐 하면 그런 셈이고, 그들이 죽기 전 분명 기회가 있었음에도 온화는 그 결심을 쉬이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해냈다면 괜찮았을까? 감히 타인의 심정을 단정하듯 멋대로 추론해대는 짓에 망설임이 없다. 제 귀에 틀어박힌 웃음소리 따라 유현도 어렴풋이 미소했다. 웃음기 미약하게 서린 낯이 궁추하듯 온화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