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들어가려 했으나 현진 도사가 인사를 하는 바람에 절로 한숨 새었다. 그래도 일단은 배우는 입장이니 고개 까딱 하고 멀찍이 있었다. 허나 멀리 있으면 더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던가. 저 한 켠에서 아회 보이고 무언가 내려놓는 것 보았다. 무언지는 보지 않았다. 아회의 긴 머리만 눈길 좀 주다가 고개 돌렸다.
부적 없이 싸우는 법 배우는데 굳이 없앨 것까지 있나. 의문은 드나 잠자코 현진 도사의 말대로 가진 부적 모두 꺼내어 불살랐다. 손아귀에서부터 불꽃 피어올라 한웅큼의 부적 모두 재로 만든다. 파스스 부서진 잿더미 바닥으로 털어버리고. 무엇 시키나 지켜보니 저 토벽 부숴보란다.
나무 허수아비보단 낫군.
제법 단단해 보이는 토벽 앞에 서서 검에 손 올렸다가 내린다. 손만 대었을 뿐인데 거부감이 느껴진 듯 했다. 수업 중에 괜한 피를 보는 것은 싫다. 그러니 역린 쓰는 것은 무르고. 토벽 앞에서 정권 자세 취했다. 발 적당히 벌리고 허리 비스듬히 틀어 오른손 뒤로 빼었다가- 강하게 쥔 주먹으로 토벽의 한 가운데 향해 내질렀다.
"실제로 위험한 상황은 아닐 거라 믿어서 위기감은 들지 않았어요. 음, 그래도 낙하에 따른 본능적인 흥분은 조금 느껴졌었던 것 같네요. 짜릿하다는 말을 이런 때 쓰던가요?"
알고자 하는 마음 저 역시 모르지 않기에 순순히 대답한다. 설명이 보다 상세했다면 좋았겠으나, 그 이상의 감상을 말하기엔 그 감각이 어떤 것인지 유현으로서는 정확히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곱씹는다면 나중엔 알 수 있을까?
흙더미는 머릿속에 그린 생각을 도통 따라주지 않는다. 다시.라는 말에 무념하게 시키는대로 하려다 '완벽하게'라는 말이 들려오자, 그는 재차 시도하던 것 멈추고 흙을 다시 무너뜨렸다. 반항은 아니다. 단지 조금 더 생각을 하고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머릿속의 상과 진흙의 움직임을 보다 뚜렷이 그려가며 다시 시도해 본다.
주먹이 토벽을 때리는 감각이 생생하다. 타격의 충격. 그로 인한 근육의 떨림. 토벽이 무너질 때의 흙 섞인 공기와 그 내음.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되려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그 감각 참으며 자세를 바로잡으니 토벽은 금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제야 완벽히 부숴야 한다는 현진 도사의 말에 고개 비뚜름히 기울이고 짧은 한숨 내뱉었다.
그런 건 처음부터 말 하라고.
토벽의 반격을 흘려내고 재차 어깨를 당긴다. 손을 두어번 펴고 쥐기를 반복한 후 다시 꾹 쥔다. 지익. 뒷발 살짝 밀어 간격 벌리고 허리 또한 비튼다. 그리고 다시 정권 내질렀다.
압도적으로 우울한 저기압이 몰아쳐왔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도하지도 못했으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도 없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바라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더라면. 부정해도, 부정하지 않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 두려우며, 부끄럽고, 고통스러우니 연은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으나, 학생으로서의 의무가 자신을 강제로 끌어다 내놓은 것이었으니. 비척비척 연은 수업 장소로 향했다.
아. 문. 어제 그거. 여기 문이라면 학당 문 말고 다른게 없을텐데 왜 다른걸로 알아들었지? 가현은 조금 머쓱해져서는 입맛을 다신다. 얘가 제 4의 벽을 넘을수만 있다면 데헷 하는 포즈로 제 머리를 쥐어박는 가현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너의 역량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진짜로....(쥐구멍)
"어제 저희 동 사감님께서 잠그신 문이었군요. 무언가를 닮았다고요..?"
여튼 사서의 이야기에 점차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도술로도 안 열리고 영 사감님께서 열어도 금방 닫혀버리는 문.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동 사감이 귀를 틀어막고 닫아버리는 모습이었는데. 가현은 눈동자를 도륵 굴린다. 폭주. 익숙하다. 이전에 하 사감이 한번 그랬던 적이 있지 않은가.
"괜찮아요~ 어차피 1년 뒤면 저도 어른인걸요. 그러니까... 더 말씀해주시지 않으실래요? 영 사감님 말고, 다른 사감님들께서 열어보려고 시도하신 적은 있나요?"
말도 안 된다는 듯 사서가 말했습니다. 그녀는 잠깐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 신수 중에 닫는 걸 좋아하는 존재가 있어.. 근데, 자취를 감춘 지 제법 오래 되었단다. ' ' 다른 사감들이 열려고 시도했다가 문이 어찌나 굳게 닫혔는지 포기하더라고. 하 사감님이 문을 걷어차고 주먹질하고 불까지 냈는데, 멀쩡하잖니. 동 사감님은 아프다고 안 나오는 중이란다. '
사서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녀는 아는 정보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 사감님들 말로는 해신장과 자신장을 설득해야 할 거 같다는데... 말이 통해야지, 원.. '
어느 평소 때와 다름없을 춘 사감을 보고서 연은 옅게 웃는다. 그러며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니, 안에 있을 비단 주머니를 꼭 잡아 쥔다. 어떻게 오늘 이걸 건넬까 말까, 고민하던 연은 비단 주머니를 손에서 놓는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선택하자. 그러며 자리에 앉는다. 오늘의 수업이 무엇이었더라 생각해보고, 춘 사감을 본다.
가현은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조금 더 판단하고 정보를 흘릴 필요가 있겠다. 자신이 그 날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은 뒤로 숨겨둔 채 사서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그래요? 자취를 감춘지 오래 되었다는 것 외에, 달리 알고계시는 내용은 없나요. 제가 하사감님께 들은 게 있기도 하고, 따로 본 것도 있기 때문에 조금 혹하는데요~"
바로 이럴 때 알고 있는것을 끄집어낼 찬스지. 가현의 눈이 반짝 빛난다. 적당히 간을 재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자연스러우면서도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낼수 있을지 재어보기 시작한다. 물론 그때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갈수는 없을 것 같았으나 조금이나마 듣는 건 아예 안 듣는것과 큰 차이가 있기에.
"아프시단 말이죠... 조금 유감스럽네요. 그보다 다른 사감님들께서 시도해도 안 열릴 정도라면 큰일이예요~"
다른 사감은 몰라도 하 사감만큼은 신수가 확실하다. 그런 존재조차 용을 써 보아도 열리지 않을 정도라니. 동 사감 역시 뭔가 있다. 이전, 자신이 겹쳐보았던 것도 그렇고 석연치가 않다. 그 날 자신은 그 장소에 있었으며 직접 걸어잠그는 것을 보았는데.
"설득하는 방법 같은건 이야기해주시지 않으시던가요?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것 같기도 한데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