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 즐기며 폭주하는 일곱째와 식음 즐기나 폭주는 하지 않는 다섯째. 그리고 그 둘 누구도 아닌 이. 지금은 그저 사감일 뿐이라는 그를 마주 응시했다. 잠시간은 저도 웃음기를 지웠지만 자칭 훌륭한 사감님이라 할 때는 피식 웃었다.
"아이고 그러시나. 거 참 훌륭하시구려. 하 사감님."
제대로 부른 그 호칭이 어쩐지 놀리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목덜미를 드러내고 물어보란 듯 굴 때는 살짝 들뜬 듯 하더니. 하 사감이 확 다가올 땐 뺨을 붉히며 입술을 살며시 깨물기까지 했다. 하지만 물지 않고 상체를 무르자 붉어진 얼굴인 채 볼 부풀리고 궁시렁거렸다.
"흥. 감질맛나게 하긴! 내 기억해둘테니 나중에 딴 소리나 마소."
남김없이 먹어준다는 말에도 전혀 떨지 않고 되려 기억해두겠다며 입술 비죽 내밀었다.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지. 혹은 그것 바라는지. 아니면 그저 한 때의 놀이마냥 구는 걸지. 겉뵈기론 놀림 당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덜대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 사감이 맥주를 마시는 동안 저도 홀짝홀짝 캔에 든 맥주를 마셨다. 다 마신 그와 달리 3분의 1쯤 남은 것 들고 입맛을 다시다가 저 향한 시선 느끼고 마주 곁눈질 했다. 이제 와서 저걸 묻네. 이 밤에 왜 왔냐는 질문에 당연한 것 묻는다는 양 어깨 으쓱였다.
"이유는 오자마자 다 얘기 했잖소. 술 얻어마시고 그 김에 저것이랑 이것저것 물으러 왔지. 이렇게까지 내 편한게 굴어줄 줄은 몰랐지만서도."
저것이라 함은 두 말 할 것 없이 역린이요 이것저것도 이미 앞서 말한 것들이다. 죽지 않고, 미치지 않고, 역린 쥐고 살 수 있는 방법. 수확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버렸다. 죽지 않게 된들 미쳐버리면 이도 저도 아니지 않나. 에휴. 혼자 작게 한숨 내쉬고 캔에 남은 맥주 단번에 들이켰다. 빈 캔 근처에 적당히 휙 던져놓고 하 사감에게 기대 편히 늘어진다. 평소와 같은 기세등등함도 능글맞음도 같이 늘어진 그 사이, 느슨해진 신경줄 사이 작은 중얼거림 입술 새로 새어나왔다.
"홀로는 외롭지..."
날숨과 같이 읊조리곤 고개 숙여 잠시 제 머리칼에 얼굴 감추었다. 그 얼굴 쓸어내리는 손이 잘게 떨리는 것도 같았으나. 손 내리고 고개 들자 언제 그랬는 양 흰 얼굴에 능청스러움 한 가득이다. 히- 하고 웃음 새로 지은 온화 팔 들어 하 사감 감싸안는다. 고개 든 채 그의 어깨에 턱 올리고 떠들었다.
"만약에 말이네. 내가 하 사감이 되어 더는 사감이 아니게 되면 그 때에도 떠나지 않고 여기 있을 수는 없소? 뭐 다른 것 가르치는 도사로 있으면 되지 않나. 그리 되면 새로이 이름도 하나 짓고 말이오. 꼭 떠날 필요는 없어뵈는데."
형님은 아실까요, 알고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표정 하나하나가, 웃을 적엔 어디부터 호선이 그이는 지, 어디가 찡그려지는지, 어디에 주름이 지고 어떤 방향이 조금 더 올라가는지 이 하잘것없는 눈에 모조리 담기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내가 소경처럼 손으로 당신의 얼굴 윤곽을 더듬었던 이유는 당신이 실존하는 것인지, 내 오늘 또 몽중에서 헛된 망상이나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몽중도, 내 망상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내 결국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허상이라면 내 추잡한 망상에 괜히 당신을 몰아세우며 내 잣대로만 보는 것에 참을 수 없는 역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진실로 형님을 마주하였으니 오늘 결심을 세웁니다…….
"말더듬이 동생은 싫으신지요. 예전 모습과 같아서 좋으실 줄 알았는데."
짚은 점을 유연히 흘려 넘긴다. 과거를 빗대어 자신을 표현한다. 나는 과거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그리 표현하듯. 상념은 과거로 흘러간다. 만고의 수심 끌어안고 홀로 버티는 그 애처로운 미소의 의미를 당신은 알까. 나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을 당신이 어찌 알겠습니까?
"잠시 옛날 일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사냥의 당일, 어머니는 피투성이가 된 저를 안고 한참을 우셨습니다. 아회야, 너는 무 씨 집안의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무 씨 그 자체가 될 필요는 없어. 한참을 저를 다독이다 다짐하듯 말씀하셨습니다. 령도에 가자, 아회야. 우리, 바다를 보자. 그리고 마님께서는 저희 어머니를 몰아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간단한 사냥이라는 단어가 제게 있어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건만. 형님은 역시 낮에 뜨는 달처럼 저와 섞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 또한 형님의 사정을 깊게 헤아릴 수 없지마는. 아회는 여전히 표정을 갈무리하지 않았다. 어쩌면 못했다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내려놓은지 제법 지난 잔이건만 입안은 여전히 쓰다. 차라리 내 망상 속의, 잣대로 판단하던 흉몽 속의 당신이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마음 놓고 칼이라도 꺼내 찔러들었을 텐데.
"형님."
덤덤하던 감정에 작은 파문이 인다. 물결은 느릿하게 퍼져가며 목을 비집고 나오는 발음 하나하나를 채운다. 잿더미의 열감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린다. 애정이 담겼고, 후회가 담겼으며, 해탈이 담겼다. 잔에서 손을 뗀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셨길 바랄 뿐입니다. 사냥을 마친 날, 가주님께서 저를 위한 잔치를 열었다고."
품에서 부적 떠오르더니 불타오른다. 흠결이라곤 굳은살 빼곤 없던 손에 잔털 돋아났을 적, 아회는 느릿하게 제 손을 하나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손톱은 마치 메스처럼 반대쪽 손의 손바닥을 갈라내듯 그었다. 붉은 실과 같은 선이 돋아나고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깊게 긋기라도 하였는지 벌어진 틈새가 큼직하다. 손바닥을 오목하게 하자 금세 작은 웅덩이가 고일 정도로.
"아무리 귀한 음식이 나오고, 웃음이 꽃 피며, 어머니께서 귀한 옷을 선물받았다 한들 무엇 합니까. 그 자리에 형님이 없어 이 아우는 외로이 날밤 새어가는 잔치를 지켜보기만 했는데."
주먹을 쥐자 붉은 피가 제 몫의 커피잔에 쏟아져 들어간다. 형님, 제가 오늘 결심하고, 피로 하여금 맹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약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엔 제가 사냥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실 수 있는지."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음을, 내가 가장 처절한 순간을 그 눈에 찔러박아 다시는 기억에서 잊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노라고. 그리고 맥이 뛰는 목을 꼭, 제 손으로 찢어내겠다고. 그렇게 잘린 목을 안고 내 겪은 일 이제 들리지 않을 뭉개진 귀에 속삭이겠노라고. 역시 형님은 다른 사람에게 사냥당하기엔 아까운 맹수이니 내가 사냥하여 가죽을 벗겨야지요. 손바닥을 오목하게 하여 웅덩이를 다시금 만들곤, 당신이 있는 맞은편을 향해 느릿하게 뻗었다.
"물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형님께 강요하겠습니까?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10년 만에 회포는 풀지 못할망정 이 아우가 부탁드리는 것이 염치없는 짓이지요."
자, 역겨운 반쪽짜리 피로 맹세할 시간입니다. 깊은 감정의 침잠은 여전히도, 안면에서 깨어지지 못했다.
하 사감 목소리에 화가 드러나도 온화 눈 빤히 뜨고 깜빡일 뿐이다. 그러다 그가 웃으면 저도 웃었다. 목에 둘러진 띠 제외하면 걸친 것 가린 것 없는 흰 얼굴에 표정이 생생하다. 되려 쉬이 무너질 것만 같이.
"그런 것 홀랑 말해주면 내야 좋지. 잘 기억해두겠소."
저 역시 키득이며 말하고 조용히 생각한다. 제가 역린 쥐고 있는 동안은 싫어도 어느 정도 따라준다는 의미일까. 저에겐 유용한 정보이나 그것 그대로 이용해도 좋을지 망설임 생긴다. 그래도, 아직은 순순히 역린 놓을 마음 역시 없으니. 알아낸 것 쓸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할 것이다. 어느 길도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면 끝까지 발악하다 갈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꺼낸 물음이었다. 제가 하 사감을 잇거든 떠나지 말고 있어주면 안 되겠냐던 그 말은. 그에게는 한낱 인간이 영구히 역린 취하려는 욕심으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아니, 어쩌면 그게 맞을 지도 모르지만, 그저 묻는 것이 잘못은 아니잖은가. 봐. 말이라도 꺼내보니 여지가 생겼잖아?
"도사 아니면 어떠나. 그런 척 하면 되지. 일하기 싫은 건 이해하오만. 흐음?"
하 사감이 쓰는 불이 그의 것이 아님은 의외였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럼 혹시 다른 사감들도?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유예를 주겠다는 말에 괜히 심통난 척 볼을 부풀렸다.
"조건이 까다롭잖소! 내가 아는 것이라곤 살생 좋아하고 먹고 마시는 것 좋아한다 뿐인데. 귀뜸 하나 정도는 주소. 무엇이 그 흥미 동하게 할 수 있을지."
맨땅에 머리 박으라는 거냐며 귀뜸 한 마디 정도는 해달라 투덜대던 온화 문득 작게 하품했다. 저녁부터 늘어지게 자긴 했으나 아직은 밤이고 동 틀 시간은 멀었다. 졸음에 겨운 아이 칭얼이듯 하 사감에게 기대 볼 부비고 재차 하품한 온화 그리 말했다.
"무어에 흥미 동하나 그 대답 듣고, 한숨 자고 일어날 때까지 있을 거요. 내 자는 동안 예민하니 내던지고 그러지 마오. 그랬다간 온종일 저것 괴롭힐 것이여..."
슬슬 늘어지는 목소리 말하고 한 손은 소파 더듬어 놓았던 역린 재차 쥔다. 금방 잠에 떨어질 듯 눈 끔뻑이면서도 기어코 들을 것은 다 듣고 감을 건지 줄곧 하 사감 얼굴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