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유령 도련님. 본가로 오기가 무섭게 어딜 간 거야? 새벽에 불침번을 서다 좀 졸았단 이유로 안이 휑 비었을 줄이야. 별채는 으스스하다.
"아니, 이 새벽에 도련님은 어딜 가신 거야?" "날 찾니?" "응?"
나무 위로 시선을 올리니 엎드리듯 늘어져있는 모습은 차분한 도련님이라기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짐승 같네. 머리를 풀고 있어서 그런가? 어찌 되었든 좀 짜증이 난다. 호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거긴 위험해요! 내려오세요!" "본가에서 내가 위험할 곳은 없는데, 무슨 소리람." "나무가 부러질 수도 있어요, 도련님!" "너. 몇 냥이니?" "예? 저요? 열 냥인데요?"
턱을 괸 도련님께서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둘째 마님을 닮았다더니, 저런 사람인가?
"얘, 내가 그보다 많은 돈을 줄 수 있다면, 어찌할 거니?" "지금 저 매수하시는 거예요?" "아니,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되거든. 네가 말한,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곳에 물건을 보내주는 거." "……설마 다 들으셨어요?" "응."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요?"
도련님께서 자신의 손톱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 여기에서 혀를 자르겠단 뜻이구나.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냥, 가도 좋아." "네?" "너는 내 호위니까 잘 해줄 거라 믿었을 뿐이지. 가주님께 고해도 좋단다." "아니, 그."
처음 보는 표정에 나는 벙찌고 말았다. 뭐, 14살 먹은 애가 저런 표정을 지어? 아, 젠장.
"할게요. 뭔데요?"
***
고드름 숲은 대담한 호위 일을 맡는대도 참 무섭다. 으슥하고, 햇빛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제대로 드는 날엔 고드름이 빛을 반사해서 눈이 너무 아프다! 거기다 가끔 고드름이 뚝 끊겨 떨어지면, 자칫하다 오늘 단명하겠구나 싶을 정도로 날카롭다.
그렇지만…….
"그런 표정인데 사람이 어떻게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냐…."
아이고, 내 팔자야.
***
"고마워, 정말 고마워." "저, 그런데, 도련님." "응……?" "거기에 있는 거요. 혹시……."
도련님.
"……부디 비밀로 해줘."
또 그런 표정이네. 차라리 울면 좋을 텐데.
***
그 이후로 유령 도련님이 말을 많이 거신다. 호위 녀석들은 뭐, 끼리끼리 어울린다는데 어쩌겠나. 나는 더 얘기할 수밖에. 그 도련님이 글쎄, 날 부려먹는다니까. 어느 날이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예?"
나는 멋쩍은 듯 뺨을 긁었다.
"저는 그렇게 재밌는 사람이 아닌데요." "너는 행복했니?" "……."
또 그 표정. 이쯤 되면 어떤 의도인지 뻔히 알겠다. 힘들어서 어디라도 기대고 싶겠지. 내가 들은 열 냥 어치의 정보로만 해도 삶이 좀 고되던데.
"저는 그 뭐야, 제사장 집안 서자로 태어났는데요……." "불편하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아뇨, 아뇨. 그냥, 남 앞에서 이런 얘기 꺼내는 건 처음이라."
내 얘기를 듣는 도련님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누구도 내 얘기를 이렇게 들어준 적이 없는데. 나는 내 이야기를 하면서도, 점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랬구나." "그래도 지금은 뭐." "응?" "…그, 도련님 모시게 됐으니까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는 말에 도련님은 활짝 웃었지만 영 모르겠다. 웃는 얼굴 너머로 계속 그 얼굴이 겹치니까, 점차 연민이 들었다 해야 하나? 그래, 죄책감이다. 앞으로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도련님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야, 마음에 바르는 연고가 있다면 좋을 텐데.
***
도련님은 내가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신다.
또 저 얼굴. 세상 모든 슬픔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참으려는 얼굴. 도련님. 저는 그런 슬픈 표정을 지으면 거절할 수 없어요. 안쓰러운 것이 아니에요. 그건 기만이잖아요? 도련님께서 꿋꿋하게 살아가려 하는데, 소문에 휘둘리고 도련님 흉을 봤던 과거의 나 자신이 한심해지거든요.
어휴, 이래서 호위하지 말라고 하나 봅니다.
***
점차 우리의 유대감은 깊어졌다. 도련님은 처음 듣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바다에 가고 싶었어."
내가 알던 열 냥의 가치를 깨부수는 이야기를. 나는 그날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
어느덧 도련님이 18세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다.
"아룁니다." "얘기하거라." "오늘도 물건은 잘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보약인데, 가주님께서 챙겨달라 하셨습니다." "더 할 말이 있으리라 믿는단다." "독은 없는데, 맛도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고마워." "곧 6학년이군요." "응. 벌써 6학년이네." "방학까지 나흘 남았으니 내 찾아가마." "……채비하겠습니다." "준비는 다 되었더니?" "물론이지요." "너는…… 늘 열 냥 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지. 오늘도 내 말벗이 되어주련."
도련님은 지팡이를 느릿하게 매만진다. 나는 알겠다는 듯 도련님께 깊이 오체투지를 했다.
"……얘, 내가 드디어 6학년이야. 학당을 졸업할 때니, 어찌 허망하지 않겠니.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 "도련님." "내가 죽음을 봐버렸단다. 너무나도 많이. " "……." "살고자 했고, 인간은 원래 그런 법이지. 그렇지만 나의 죽음이 타인의 죽음보다 어찌 같겠더니?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지만 나는 죄인이지 않더니."
도련님께서 또 그 표정을 짓는다.
아, 도련님.
"나는…… 늘 기꺼이 죽고자 했단다. 내 죽음이 타인의 죽음보다 가볍길 바라고 있었단다. 늘 그랬어. 언제쯤 나는 죽을 수 있을까, 내 태어남 자체가 잘못인데 왜 나는 죽지 못했던 걸까, 차라리 날 죽여주지, 그 사람은 왜 나를 살려서 삶에 박아두고 간 걸까. 내가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도련님께서 한없이 작은 몸을 웅크린다. 제발, 안 됩니다, 도련님!
"차라리 언젠가 있을 내 죽음에, 동등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을 뿐이야…… 아, 미안하구나. 네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어. 새벽이라 정신이 없었구나. 흘려 들어줘."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저는─
***
[이 미천한 몸이나마 MA 님께 바칩니다. 이 기도를 들어주시며 나의 죽음이 앞으로 살아갈 자의 삶과 동등한 가치가 있기를.]
도련님은 목매단 시체를 올려다봤다.
"얘, 나는 너의 마음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네게 늘 내 진심을 얘기했단다. 너를 귀애하였지. 그런데 어쩌겠니,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는데."
네가 주도했던 모든 이야기가 열 냥의 가치를 소비했음은 알아야지.
"그렇지 않더냐."
늑대를 닮은 호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질러라. 누구도 오해를 사지 않게끔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또 그 표정이다.
"너는 오래 살아주거라. 가급적이면 졸업할 때까지면 좋겠구나."
세상 슬픔을 다 끌어안은 표정. 허름한 창고에 불이 붙는다. 열 냥의 값어치는 쓸모를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