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신을 제외한 그 무엇보다도 포근하고 달콤한 것. 수업이 없는 주말에 가현은 기숙사 방의 커튼을 살짝 걷어두고 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단정히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불을 푹 덮은 채로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지난날 하 사감을 그렇게까지 괴롭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얌전하다 못해 쭈그러진 자세였으나, 오히려 그렇게 자는 게 편한지 뒤척이지도 않고 간간히 입을 오물거리며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지금의 이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해가 조금씩 움직이고 커튼 너머 들어오던 햇살이 점차 사그라들 무렵, 가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뜨다 만 눈으로 시계를 보고. 입을 작게 벌려 하찮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몸을 쭉 펴고. 그리고 나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일어난다. 포근한 이불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약속한 것이 있지 않았는가. 그것을 잊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면 나갔지 절대 늦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할 겸 샤워도 하고. 바싹 마른 머리에 빗질을 하며 한데 묶고서, 마지막으로 이전에 선물받은 머리띠를 했다. 볼 때마다 만족스럽단 말이지. 준 사람의 성의도 있고 이것은 제 물건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모든 외출준비를 끝낸 가현은 밖으로 나간다.
"아. 여기야 여기~"
그렇게 조금 일찍 나와서 남은 시간을 가게 이곳저곳 둘러다니며 미리 구경하고, 약속 장소로 향하던 가현은 익숙한 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마침 딱 맞게 만난것을 보니 이쯤 시간이 흘렀으면 약속 시간이 되었겠구나 하던 자신의 감은 오늘도 적중한듯 하다. 한 사이즈 큰 탓에, 제 팔꿈치까지 걷어진 옷 소매를 다시 걷어내린다.
"너가 곡옥에 가있는동안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요즘 신입생들은 너무 나약해. 내 이야기에 몇십분도 못 버틴다니까~"
물론 자신은 그런 신입생들마저도 예뻐할 뿐이었지만, 괜히 하는 이야기인 듯 그렇게 말하고서는 잔잔히 미소지은 채 남학생을 슥 훑어본다. 자주 입지는 않았지만- 항상 곡옥에 간다고 이야기할 적이면 저 옷을 입고 나갔던걸로 기억한다. 추가로,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는 것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의아했다. 그렇게 안 좋은 일을 겪으러 가는거면 왜 그렇게 차려입고 가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런건 아무렴 어때. 로 퉁칠수 있게 되었다.
"음. 꽤 오래간만에 보는 옷인 것 같은데~ 언제 봐도 잘 어울리는걸?"
뭐가 어쨌든 일단 자신이 보기에는 이 남학생과 꽤 잘 어울리는 옷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 가현은 간단한 감상평을 남길 뿐이었다.
>>816 (볼콕콕)(?) 임가현.. 늘 한결같은 MA님조아 모먼트.. 우려내고 우려내서 사골육수 안 나오고 맹물 나와도 계속 우려먹을 것 ^Q^ MA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한결같겠지만! MA마저도 없어지면 평생 바라보고 가야 할 목표+자신의 이상향+그 외 기타 이것저것들이 전부 사라지는거랑 다름없기 때문에.. 저거 내가 처음 써보는 모먼트일거야! 같은 맛만 꾸준하면 질리기 때문에 신메뉴를 출시했답니다 ^-^!!(두둥)
>>811 어렸을 때 부터 굳어진 성격이 뭐랄까 가현이스럽다면 가현이스러우면서도 오싹한 느낌.. 그 때부터 MA외길인생이었던걸까요~ 세상 사람이 다 사라져도 MA만 남는다면 괜찮은 거구나.. 니오.. 사라져도 되는거야..? ((끌려감)) 반대로 MA만 사라지고 인간만 남은 상황도 궁금하네요~ MA 사라지면 멘탈 와르르 맨션 됐을테니까 니오 쫄래쫄래 가서 '언니야 괜찮아..?' 하고 제 발로 호랑이굴 들어가는 그런거라던가.. 아니 근데 드래그하면 왜 또 죽어버리자는 무서운 얘기가 나와서 심장을 쫄깃하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같이 죽자고 끌고가면 무섭다면서 밀치고 도망가구.. 그러다 엎어지구.. 다시 잡혀서 질질 끌려가는 그런거 생각나지 않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현이는 뭔가 다 한 번쯤은 옐로카드 주지만 MA님 관련이면 바로 레드카드 퇴장내리는 느낌이에요. 욕 한마디 했다구 바로 사형이라니 무섭다구... MA 원웨이에 취하면서도 말이에요 ㅋㅋㅋ 아~ 또 빨간글씨 떴다!!! 암요암요 무슨 뜻인지 잘 알지요. 그게 원빠따 미식인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니오 어딘가로 떠날 상황에 그래도 잊지 말라고 말했다가 3초만에 말한거 후회하고 '역시 가지 말까?' 하고 말하는 그런것도 떠오르네요. 여기서 떠났다간 진짜 24시간 감시당할 것 같아.. 완식 했습니다. 미-식 이네요!
가현이 약속 시간에 늦는 일은 없고 자신이 약속 시간에 거의 딱 맞춰서 도착했으니 어디선가 구경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돌아다니고 있으니 역시나 가현의 목소리가 들려와 윤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옷이야 사복차림은 많이 봤지만 자신이 선물해준 머리띠를 하고 있는 모습에 그는 환한 웃음과 함께 다가갔다.
" 졸업하면 얘기할 시간도 줄어들테니까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하자. "
가현과 이야기하는 시간은 하루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가 지금을 살아가게하는 원동력 중에 하나였지만 그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도 그녀도 익숙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자신을 아예 못볼수도 있으니-. 잘 어울린다는 말에 환한 미소에서 쓴웃음을 지은 그는 순수한 칭찬이라는 것을 알기에 옷매무새만 좀 더 다듬어 입었다.
" 어르신께서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애도를 좀 표하고 왔어. "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이야기겠지만 묘한 희열에 찬 느낌으로 답한 그는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하고 물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번화가라고 한들 여기서 6년을 살았는데 웬만한 곳은 다 가봤으니 목적만 정해지면 가는 방향이야 자동이다. 마침 끼니때가 돌아오기도 했으니 밥이라도 먹고 돌아다닐까싶어 윤하는 다시금 가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819 내가 그 새로운 맛을 뽑아내려면.. 아마 한참 걸릴테지만 ^q^... 그래도 좋아 고객만족 감동서비스가 뭔지 두팔 걷어붙이고 보여드리지! >:D (두둥)
>>821 오늘도 이런 세심하고 긴 맛평가라니 나 임가현주 새벽을 달릴 원동력 다시 얻었다며..(오열) 앗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찌되었든 임가현 얘는 MA 바라기인지라.. 니오는 소중한 사람 대열에 들어가니까 아마 한동안은 허전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ㅋㅋㅋㅋㅋㅋㅋ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임가현 폐인모드 켜고 머리 풀어헤친채로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어...' 만 중얼거리다가 괜찮냐고 하면 희번득해져서는 '괜찮을 것. 같아..?' 이러고 세상 허탈하고 공허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라며.. 하 상황묘사 너무 좋다 ^Q^ 도망치는 니오 끝까지 따라가서 붙잡으면서 '사랑한다며. 나 뿐이라며. 설마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이러면서 끝내 끌고 들어가는 그런 모먼트.. ㅋㅋㅋㅋ
모독! 부정! 임가현이 절대 못 참지 처음에는 좀 관대하게 설정 잡아놨던걸로 기억하는데 어쩌다가 얘가 하드코어 MA바라기가 된건지는 모르겠지만..(먼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응. 나랑 같이 있자! 평생. 언제까지나 계속.' 이러면서 니오 꼭 안아주는 그런 모먼트.. 진단 쪄오는 맛이 있구만 이거 ^-^!!
내가 못 참는단 말이야. 밉지 않을 만큼만 투덜거리던 것도 잠시, 특유의 집착이 묻어나는 말을 끝으로 가현은 다시 방긋 웃었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서로 보고 가까워지고 한 사이인데, 어찌 그 잠시를 자신이 참아낼 수 있겠는가. 가현의 집착은 물건에만 그치는 종류가 아니었기에. 물론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때는 또 모를 일이다. 바쁘고 또 바빠서 정신차리기 힘들겠지. 제사장에다가 당주 자리까지 겸해야 하는 만큼 분명 만만치 않은 일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야?"
처음의 그 미소를 유지한 채 다시 이야기하고는, 남학생의 옆에 바짝 붙어서는 올려다본다. 미래가 어떻든지 자신은 현재를 만끽하며 천천히 준비하고 싶었으니까. 미리 연습할 필요 따위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애도를 표하고 왔다는 말에, 가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평범한 애도는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자신같은 특이한 부류가 아니고서야 보통 애도라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엄숙해지는 부류의 것이 아닌가. 이전에 하 사감과 대화를 할 때. 하 사감이 그 목에 대해 말해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자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아마 흑룡 외의 사람들이 느끼는 애도겠지. 자신은 그 감정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음~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점심 안 먹고 나와서 좀 출출하기도 하니까. 간단하게 끼니가 될만한 음식이라면 뭐든 좋아~"
아무튼 가현은 다시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한번 터진 말문은 절대 닫힐 생각을 하지 않았지. 당장은 떠오르는 것이 없는지 조금 고민하는듯 하다가, 남학생과 팔짱을 끼고 먼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가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한 자리에서 오래 대화해봐야 다리만 아플 뿐이니. 느긋하고 느릿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가현은 우동가게 하나에 시선을 오래 두었다.
"음. 우동 먹으러 갈래? 저쪽 가게가 요즘 핫플이라고 신입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던데~ 인테리어도 좋고. 맛도 천부 내에서는 수준급이라더라?"
>>826 니오 교복 품에 안아죠........... 끌어안고 있다가 벽에 얌전히 걸어서 간직해죠........... ((또 잡혀감)) 괜찮을 것 같아? 이거 들으면 '아, 그럴,리가 없,겠지? 그,그럼 나는 이,만... 잘,쉬어..' 하고 벽에 딱 붙어서 경직된 채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나가기.. 방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저앉아서 패닉에 숨 몰아쉬는거 보고 싶닥!!!!!!!! 아니 이어주는 상황이 너무 맛있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머리채잡..고 끌고가는건 아닐 것 같고 그것도 맛있겠다만 아플 것 같으니까 옷 뒷목쪽 붙잡고 질질 끌고간다거나 그런거..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은 느낌 와아아아~~~~ 눈물 막 흘리면서 '안돼,안돼 언니야. 하지마,하지마,하지마! 싫어! 나, 나 죽기 싫어! 살려줘 언니야!!' 같은 그런거죠.. 니오가 꼭 안겨서 '오늘은 레벨 좀 낮아서 괜찮은데?' 하고 머리 부비면서 웃다가 '그런데 나, 둘째 언니.. 만나고 와야 할 것 같아. 이주일 정도 걸려. 다녀와도돼..?' 하고 넌지시 물어보고~~
>>830 아늬 왜 또 잡혀가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연히 그래줘야지 ㅠ 항상 눈에 잘 띄이는 장소에 두고 기억하면서 분명 신과 단 둘이라 행복해야 하는데 뭔가 계속 공허한 느낌이라고 독백하지 싶다 ^q^ 패닉에 숨 몰아쉬는 니오.. 이건 진짜 좋은 그림. 완전 가능.(엄지 척) 임가현 니오 나가기 전에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냐. 너만큼은. 너만큼은 있어줘...' 하고 중얼거릴텐데 못 듣고 나가주면 좋겠다. 임가현 멘붕와서 '결국. 결국 아무도 안 남았어..?' 하고 끝내 멘탈 가루되면 좋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마 머리채 대신 멱살잡지 싶은데 옷 뒷깃 잡는것도 맛있을듯! 아 대사 망상하기 딱이다 진짜.. '싫어? 왜? 분명 기쁠거야. 아프지 않아.' 이러고 '같이 죽으면, 두려울것 없단다.' 이러고 니오 꼭 안아주는 그런 맛.. ^Q^ 임가현 그 이야기 들으면 웃음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럼 나도 같이 갈래. 둘째 언니라는 사람, 나도 만나고 싶으니까? 이러면서 절대 안 만나게 해야할 분위기 뿜뿜할것..
류 가의 아이들은 자라면서 여러가지를 배운다. 그야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만 류 가에는 류 가만의 방침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여러가지를 배우게 하여 그 중 특출난 재능을 장래 삼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류 가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에 특히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다.
수많은 아이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주인 아버지의 첫째 아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류 가에서 아이들은 모두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다. 부모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하여 가능한 성장기에 차별을 느끼지 않게끔 키워진다. 어른의 간섭은 최소한으로 하며 또래들 사이에서 스스로 자아를 확립해 가는 것. 아마 그것이 가장 첫 번째 가르침이겠지.
하지만 미숙한 아이들의 성장이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아이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고 서로 기분 상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른은 중재해주지 않고 울면서 찾아가도 그 순간 달래주는 것에 그친다. 아이끼리 싸운 건 아이끼리 해결하라는 취지지만 미숙해서 싸운 아이들이 스스로 사과하고 화해하는 법을 터득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자칫 어그러질 수도 있는 관계에 선뜻 손을 내미는- 아이가 있었다.
고작 열살 남짓했던 그 아이는 어리지만 말을 똑똑히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말재주로 서로 심통난 아이들을 화해하도록 도와주거나 싸움이 벌어졌을 적 슬그머니 끼어들어 날 선 분위기를 와해시키곤 했다. 그 시절은 유독 매일같이 애들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울 뻔 했으나 그 아이 덕분에 싸우는 소리 대신 서로 깔깔대며 노는 소리가 더 컸었다.
붉은빛 감도는 고운 갈색 머리칼의 아이는 아버지의 셋째 자식이자 나와는 배다른 남매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생이니 잘 챙겨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어릴 적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나는 나대로 놀고 싶었지 동생 보기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피해다녔다.
저만치 보일락 하면 도망가고 불러도 못 들은 척 하고- 아무리 아이라지만 참 모질게 굴었다. 그래놓고 지레 양심에 찔려 그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르진 않았을까 저녁마다 불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일로 아버지에게 불려간 적 없었다. 매일 아무 일 없을 때마다 안심했고 시간이 지나 익숙해졌으며 어느샌가 내 행동이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팍삭!
실내에서 작은 공을 차며 놀던 나는 그 방에 있던 화분 하나를 깼다. 그 화분은 아버지가 직접 물을 주시며 기르는 화초였다. 그 전 날 저녁 화분의 꽃이 피었다며 기쁘게 말하시던 모습이 눈 앞에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이를 어쩌지. 그렇게 아끼시던 것이니 크게 혼날지도 몰라. 나는 덜컥 겁이 나 주변을 살폈다. 때마침 아무도 없었다. 잘 됐다. 이대로 도망가면 적어도 내가 했다고는 의심 받지 않을 거다. 솔직해지기보다 아닌 척 하고픈 마음이 더 컸던 나는 얼른 공을 챙겨 그 방을 나갔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척 마당에 나가 다른 아이들과 같이 공을 차며 놀았다.
얼마나 놀았을까. 오래는 아니었다. 여럿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공 쫓느라 잠시 화분에 대한 것은 잊었을 때, 집 안 어딘가에서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우는 소리도. 드문 소리들에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가 나도 그 사이에 섞여 그곳에 갔다. 그런데 가는 길이 어째 익숙했고 어른아이 옹기종기 모인 방을 보고선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또 덜컥 겁이 났지만 설마 나한테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방으로 다가갔다.
활짝 열린 방 안에서는 훌쩍이는 소리와 아이 달래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른아이 틈에 섞여 빼꼼 들여다보니 내가 깨놓고 도망간 화분 주변으로 물이 흠뻑 퍼져있었고 옆엔 유리 대접 같은게 깨져 있었다. 눈을 돌리자 익숙한 아버지의 옆모습이 보이고 그 품에 안겨 우느라 얼굴이 빨개진 그 아이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해 있으니 문 근처에 서 있던 어른들이 주고 받는 얘기가 들렸다.
- 아이고 놀래라. 무슨 일이래요? - 별 것 아니오. 온화 애기씨가 저 화분에 물을 주려다 그만 화분을 깼다는구먼. 물그릇도 같이. - 저런! 놀랐겠네. 다치지는 않았대요? - 다행히 괜찮다 허이.
화분을 저 아이가 깼다고? 아닌데. 내가 깼는데.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제 내가 혼 날 일은 없겠구나 안심했다. 화분을 깬 사람이 내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금방 안심하고 다시 나와 아이들과 놀았다. 언제 걸릴까 두려움도 덜었겠다 저녁 늦도록 신나게 놀고 다 같이 자는 방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 향아.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 돌아보니 어둑한 복도 끝에서 아버지가 나를 부르고 계셨다. 얼른 가서 그 앞에 서자 아버지가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마냥 기쁘게 쓰다듬을 받던 내게 다음 순간 아버지가 하신 말은 제법 따끔했다.
- 나는 다 알고 있단다.
다, 아신다고? 속으로 움찔 했지만 겉으론 애써 티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어른인 아버지 눈엔 다 비쳤을 것이다. 당황. 혼란. 불안. 두려움. 아마 낯빛이 하얗게 질렸을 나를 아버지는 혼내지 않으셨다. 그저 몇 번 더 쓰다듬어주시고 담담히 말하셨다.
- 네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라고는 않으마. 허나 적어도 네 자신에게만큼은 떳떳한 사람이 되거라. 잘 자렴.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인사를 끝으로 아버지는 가셨다. 조금씩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동안 계속 눈 돌려왔던, 차곡차곡 쌓였던 죄책감이 파도마냥 밀려들어와, 어두운 복도 끝 그 구석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유독 긴 밤이 지나간 다음 날. 여느 날처럼 햇빛이 세상을 밝혔다. 전날 그런 일 때문에 기분이 착잡했던 나는 오전 내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나가서 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느 고민은 들어 계속 그것만 생각하며 하릴없이 집 안 복도를 헤매였다. 그러다 문득, 나보다 어린 아이들이 생활하는 방 근처까지 갔고 그 방 앞 마루에 있는 그 아이를 보았다. 평소라면 보이자마자 돌아서 멀어졌겠지만 어쩐지 그대로 멈춰서버렸다.
볕 내리쬐는 마루에 앉아 홀로 종이접기를 하고 있던 그 아이는 곧 나를 눈치챘다. 나를 보며 깜빡이는 적갈색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나를 흘겨볼 것만 같았으나-
- 아, 향이 오라버니.
그 아이는 울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활짝 웃었다. 매일 무시하고 멀리했던 나를 보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웃는 얼굴을 보고 얼이 빠진 내게 다가와 그 아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내 손을 보는 것이었다. 순간 뭘 하는 거지 싶었지만 곧 깨달았다. 화분을 깬 내가 다치지는 않았나 살핀다는 것을. 당연하게도 멀쩡한 내 손을 보고 그 아이는 헤헤-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 다행이어요. 오라버니가 안 다쳐서. 화분은 화야가 깼다고 아버지한테 말했으니까. 오라버니는 안 혼 날 거여요. 응.
그 말에 머리 맞은 것처럼 얼얼해졌다. 그래. 그랬던거다. 이 아이는 내가 깬 것을 알고도 일부러 거기에 물을 붓고 그릇도 깨서 자기가 한 것처럼 만든 것이다. 이제 보니 아이의 작은 손에 반창고 붙어있는게 보였다. 어제 그 일을 하느라 베인 거겠지. 나 때문이다. 내가 솔직하지 못 해서. 내가 잘못하고도 혼나기 싫어서. 그래서...
내가 내 죄책감에 못 이겨 눈물 뚝뚝 흘리는데 이 아이는 그것조차 제가 잘못했냐며 전전긍긍했다. 나보다 작은 몸으로 나를 안고 연신 울지 마요 화야가 잘못했어요 하는 모습에 지난 나날 내가 무시했던 모습들이 겹쳐져 더 눈물이 났다. 결국 내가 어엉 울어버린 탓에 아이도 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도 나를 놓지 않고 되려 미안하다는 아이에게 나는 겨우 말했다. 그동안의 무시와 어제와 상처 입은 손에 대한 사과를. 울음 반 소리 반으로 겨우 꺼낸 내 말에 아이는 눈물 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 괜찮아요. 화야는 오라버니 정말 좋아하니까. 미워하지만 않으면, 그거면 돼요.
그저 미워하지만 말아달라며 웃는 아이를 보고 다시 내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하고 그저 솔직한 아이라는 걸, 모르는 채라면 모를까. 바보. 라고 면전에 대고 말해도 마냥 해맑게 웃는 아이를 나는 더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화야." "응? 갑자기 왜 그러오?" "그냥. 이리 불러본 지 오래된 듯 해서." "오라비도 참. 실없긴."
>>833 아늬 하사감님 판은 왜 뒤엎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 그걸 다른 사감님들한테 다 일러바치다니.. 동 사감님이 잠가버리기 전에 먼저 찾는다 찾아내서 무조건 바친다(희번득) 흑룡에 대한 관심.. 붙어먹으려는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임가현주가 아주 감사하지 ^q^ 짜릿하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835 아늬 이 얼마만에 맛보는 세상 무해하고 뽀짝한 독백..?? 세상 무해한 온화 픽크루로 시작해주는 독백이라니 나 임가현주 정화당해서 죽어버리는 것 ^Q^ 어린 온화 착한데 결국 아버지가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게 좀 안쓰럽다 착한 온화 원하는대로 몰라줬어야 하는데 임가현주의 사회에 찌들대로 찌든 시선으로 보면 결국 그 어떤 거짓말도 나중엔 들통나는구나.. 구라쳐봐야 좋을것 하나 없구나 하는 게 새삼 다시 느껴지고 그래() 꼬꼬마 온화의 순수하고 귀엽고 짠하고 뽀짝한 모먼트.. 최고야... 오늘 미식도 완식 완료라며 ^Q^
피식하며 웃어버린 그는 가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녀의 행동에 대해선 농질의 것도 있고해서 그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해주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선호하는 편이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래, 집착이라고 불리우는 종류의 것이 그녀에겐 가득하다. 가급적이면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 그래도 네 미래엔 내가 없을수 있으니 말이야. "
그 미래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애도를 표하고 왔다는 말에 맞지 않는 분위기를 풍겼음에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은 그녀도 그와 같은 흑룡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듯 했다. 별거 아니라는듯 얘기한 그는 가현이 팔짱을 끼고선 앞으로 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가는 방향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돌아다니다 보면 목적이 생기는 법이니 이것도 나쁘진 않은듯 했다.
" 으음 ... 들어본 것 같아. 비교적 최근에 생긴 곳이었던 것 같은데. "
오지랖이 넓은 윤하라 학생들끼리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고 그 중에선 새로 생긴 우동집에 관련된 것도 있던것 같았다. 평은 그녀의 말대로 꽤나 괜찮아서 학당의 학생들이 자주 들르는 곳 같았다. 다만 그렇게 알려진 곳은 대기를 해야할 수도 있으니 가려면 최대한 빨리 가는게 좋았다. 다행히 가게 앞엔 대기줄이 없는듯 했기에 얼른 들어가기 위해서 걸음을 좀 빨리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 테이블 남은게 별로 없는걸 보면 금방 찰 것 같은데? "
본격적인 점심시간이라기엔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어 안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이 꽤나 있었다. 역시 맛집은 언제 와도 사람이 붐비는 법인가. 그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메뉴판에서 튀김우동을 고르고선 가현이 고른 것과 함께 주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