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가 그런가보다 하니 아씨도 이 얘기는 이쯤 하잔다. 온화는 내키지 않아 끊었다지만 저 아씨는 다른 것을 생각한 듯 보였다. 그러자 하고 과자를 고르며 생각한다. 그 분. 얼핏 들으면 가문에서 정해준 정혼자이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사람이겠으나. 이 감이란 참 얄궂은 것이라. 필시 보통의 누군가는 아닐 거란 것이 등골 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누구인가를 탐구하기 전에 생각마저 끊는다. 깊게 생각하지 마라. 언제나 그랬듯 흘려버려라. 끊임없이 흘러야만 고이는 것 없을지니.
볼 가득 과자 먹는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도 일종의 처세술이다. 잘 하는 방법으로 흐름을 틀어버리는 것. 상대가 그 흐름을 따라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마주 웃으며 그리 먹는게 더 맛있다 하는 아씨를 보고 그러시구랴, 했다. 그렇게 웃다가도 온화가 홀랑 계산해버리자 나오는 불퉁한 얼굴은 일부러 못 본 척 휘파람만 가늘게 불었다. 휘익. 그리고 같이 나와 다른 가게로 향했다.
근처라던 다른 가게는 의외로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이 아씨, 언제 그리 서둘렀냐는 듯 다시 느긋해졌다. 이랬다 저랬다 바쁜 아씨일세. 온화도 아까 그랬던 것처럼 사람에 치이지 않게끔 길을 터가며 걸었다.
"아이고. 천부가 좁은 곳도 아니건만. 여 있는 곳들 다 가보았다 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좋아하나보오."
먼젓번의 가게와는 느낌이 다른 두 번째 가게에서 아씨가 재잘대길래 온화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좋아한다. 사실 이 나잇대에겐 지극히 평범한 취향일 것이다. 그 중 별난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고 고르고 고른 것만 좋아하는 이도 있고. 그런게지. 안내해주러 와놓고 되려 더 신난 저 흑룡 아씨의 모습을 이번에도 잠시간 지켜보았다. 곰방대는 어느새 소매 속으로 넣어졌고 한 팔에 앞서 샀던 과자 꾸러미만 고이 든 채. 붉은 눈 두어번 깜빡이다 조금 후에 저도 과자를 고르려 고개를 돌린다.
질보다는 양이 많은 곳이라더니 하나하나 정말 양 하나는 끝내주게 많다. 여기 것은 령이들을 줄까 예 누이를 줄까. 제 아래 남매들을 생각하며 손이 가는 몇 가지를 집어들었다. 이러면 수 오라비가 이 썩는다고 뭐라 하긴 할 텐데. 에이 모른다. 집은 것들 그대로 들고서 더 고르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계산해버렸다. 큼지막한 꾸러미 하나 더 품에 안겨지면 검은 두루마기 아씨 돌아보며 말했다.
"만두에 국수에, 과자까지 그리 많이 먹었으니 목이 텁텁할테지. 이번엔 내 아는 곳이 있으니 가서 목이나 축이고 갑세."
과연 거길 데려가는게 괜찮을까 싶긴 한데. 뭐- 괜찮겠지. 혼자 납득하고 고개 끄덕이고선 어여 가자는 듯 아씨 어깨에 손 올린다. 밖은 이미 노을로 붉어지고 있기도 했으니.
" 혹시 또 발걸음이 여기로 닿을지 모르니 그 때는 '내새끼 왔니' 하고 맞이해줄래요? 웃긴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집에서는 그런 얘기 못 들어봐서. "
니오는 아하하, 하고 조금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집에서도 오랜만에 왔으니 환영은 해주겠다만 알맹이가 비어있는 느낌이랄까. 항상 그런 것에 대한 결핍이 있어왔다. 결핍을 채우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라면 모자란 것을 찾아서 채우는 것과 '난 그런거 필요 없어' 하고 정신승리를 하는 방법이었다. 니오는 항상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애초에 없었으니 필요없다고, 그렇게 치부했다. 결국은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이 남아있기에 제자리 걸음일 뿐이다.
" 하던대로 하면 된다는 이야기네요 그건. "
맘에 안들면 패버리면 그만이다. 그 말에 니오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긍정을 표했다. 대부분의 문제는 힘과 싸움으로 해결됐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힘이 모자랐을 뿐이다. 게다가 싸움에서 이기는 것과 힘이 센 것은 별개의 문제였고 니오는 일찍이 그 진리를 깨달았다. 이길 수만 있다면 뭐든 하면 되는 것이다. 이길 때까지 물고 늘어지면 결국 이기는 것이다.
" 네-에 부탁드릴게요. "
부탁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격도 죽일 필요가 있을 터 였다. 황룡의 누군가가 다가오면 건드리지 말라고 홱 짜증을 냈고 적룡의 누군가가 다가오면 시비걸면 죽이겠다고 짜증을 냈다. 그러다보니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직 만회할 기회가 있을까. 만회할 기회가 온다면 그걸 잡을 수 있을까.
"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언젠가. 제가 여기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다시 돌아오면 그 때는 반갑게 맞이해주세요. 내새끼 왔니~ 하고. "
또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람이 왔다는 걸 보아하니 돌아갈 시간인가보다. 마음은 이미 원래 집에 돌아온 느낌인데 돌아올 곳이 여기가 아니란 것이, 돌아가야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마음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황룡으로 옮긴 뒤에 두 번째로 다시 청룡 기숙사로 찾아간 성하. 아직 성하의 짐이 청룡 기숙사에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마저 가지러 온 것이다. 이전의 동급생들이 다시 청룡으로 돌아온 것인 줄 알고 반기지만, 성하는 동기의 얼굴에 루모스(빛을 비추는 마법)를 시전하며 저지한다.
"아효..이러다 다시 독기 들겠다...얼른 빠져나가야지.."
청룡의 독기가 거의 빠진 청하는 여기에 다시 있으면 이전의 감정기복이 심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 우려되어서 빨리 나가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성하는 자신의 방에서 남은 짐을 정리했지만, 작은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로 거창한 짐들은 아니었다.
"후..이제 진짜로 안녕이다..청룡."
성하는 자신의 방에서 나온 뒤에, 기숙사에서 나가던 중에 한 여학생과 살짝 어깨가 부딪혔다. 같은 기숙사라서 안면식은 있고, 동급생은 아닌 걸 보면 후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