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지, 그래. 비가 내리던 날이었을 터다. 북부에서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은 드물었다. 그 짧고 어린 삶에서, 책에서나 나오던 묘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창가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땅이 젖는 것이 하도 신기해 글공부 봐주던 가문의 어르신이 곁으로 다가오는 것도 몰랐던 날. 수업이 다 끝났으면 나가지 무얼 하냐는 따끔한 호통 소리에 벼루며 붓이요, 글자 공부하는 책을 품에 가득 안고 꽁지가 빠져라 발걸음을 옮겼을 때, 어머니가 계신 방으로 돌아가려면 그 빗줄기를 뚫고 넓은 기와집의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야만 했던 날. 저것에 맞으면 필히 젖겠지만, 눈처럼 그냥 맞고 돌아가면 될 것 같았다.
자박자박 걸었을 때 깨달았던 것이 우수수 쏟아지는 장대비라는 것은 어리고 연약한 몸에 있어 상당히 아프다는 것과, 비는 몸을 빠르게 젖게 하며 바람결에 스치니 눈보다 더 차갑다는 사실이었다. 몸을 벌벌 떨며 걸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겐 가문의 유령이라는 별칭 딱 걸맞게 다른 사람들처럼 우산 받쳐주는 시종도 없었거니와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가기엔 작은 몸뚱이로 몇 보는 더 걸어야 하는데…….
빗줄기에 젖은 손 때문에 무거운 벼루가 미끄러져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 나는 몸을 웅크려 앉았다. 벼루를 쥐고 싶어도 꽉 벼루를 쥔 나머지 손바닥으로 쥘 힘이 없고, 장대비는 아팠으며, 책도 젖었고, 몸을 웅크리니 품에서 빠져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위태롭게 벼루를 향해 손을 뻗어 쥐기를 몇 번, 그만 품에 위태로이 안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 이러고 있다가 돌아가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물방울이 머리카락과 뺨을 타고 떨어졌다. 땅을 한참이고 쳐다볼 때 후드득 비 몸에 쏟아지던 소리가 좀 높은 곳에서 들렸다. 몸을 세차게 때리던 빗줄기도 느껴지지 않아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산을 들고 있던 당신이다. 그때 당신이 날 마주하며 뭐라고 했더라, 아마 여기서 뭘 하고 있었니? 였을 것이다. 나는 대답하기 전 추위 탓에 한번 훌쩍였다.
"그게, 도련님, 쉬었다 가려고 했어요."
새파래진 입술로 얘기했을 때, 당신이 되물었다.
"여기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의아스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작은 마님은?" 내 침묵에 당신은 더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당신은 어머니가 계신 곳까지 바래다줄 테니, 힘들지 않으면 일어나자고 타일렀다. 나는 허둥대며 쏟아진 필기구와 책을 품에 안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내 걸음을 맞춰주었다. 몇 걸음의 침묵이 어색한 나머지, 친절에 조바심이 난 나머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달달 덜리는 입술로 얘기했다.
"저, 그게요." 당신이 귀를 기울였다.
"처음이에요, 이런 거. 누가 우산을 받쳐주는 것도, 같이 걸어주는 것도……."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우렁찬 빗소리에도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는 것과, 당신은 나를 유령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만 남아있다. 나는 낡고 거미줄이 가득한 곳에 발을 디뎠고, 젖은 머리카락이 무거웠음에도 당신을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쭉 빼 올렸다. 당신은 돌아갈 것이고, 그 사실에 나는 욕심이 덜컥 치솟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는 가문의 유령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두려웠던 나머지 내가 얘기하고 말았다.
"저, 그게. 그러니까, 도련님."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렇게 더듬더듬 얘기하던 나를 마주 보던 당신의 표정이 어땠더라.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 심한 고뿔에 걸리고 열이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표정이 내 머리에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비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뒤의 거리처럼, 당신이라는 존재가 이미 아득히 기억에서 씻겨 내려간지 오래다. 나는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도 나는 씻겨져 내려간다. 당신은 씻겨져 내려간다. 그때 무릎에 묻었던 진흙처럼, 세차게 내린 비가 내 속을 씻었다.
나는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눈을 짓누르듯 덮어 가리며 고개를 치켜 올렸다. 당신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무 아회 】
>>132 ㅋㅋㅋㅋㅋㅋㅋㅋ 하 젠장 이렇게 약점을 들키다니 임가현 vs 수묵 그 결과는 묵이의 압승인걸로~~ (편파판정) 사실 독백 쓰는 시점에서 비설이 너무 빨리 털려버려서 그랬던것도 없진 읺지만! (낙서칠범벅된 묵주 닦아줌)
그치그치 그 점이 나를 더 미치게하는 그런거야 서로 물러서는거 없고 완전 팽팽하게 가는거.. 현 관계랑 갭차이 비교해봐도 너무 맛있는데 100m는 좀 무섭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현:너 좀 많이 커졌다...? 내 말은 들리니...?) 헐 말속에 짱 살벌한 모먼트 들어있는거 진짜 나 너무 좋아.. 언젠가 진짜 다리 작살내버리고 꿇어버리는 임가현 떠올라버려 (?) ㅋㅋㅋㅋㅋㅋㅋ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거지~~ 헐 근데 묵이 심리 넘 좋다 얘는 남이 뭐라하든 안 들을건데 MA가 명령하면 아이고 넵 하면서 몸 바치는 타입이라.. 그 심리 알게되면 자신이 왕도 아니면서 건방지게- 어쩌고저쩌고로 또 물고 늘어질거같은 느낌 ㅋㅋㅋㅋㅋㅋ 하 매운맛 되길 잘했다 브레이크 밟는건 빡세지만 굴리는 맛이 있어...
아회 어릴 적 한장면 미쳤다... 저 저 도련님 궁기겠지? 유령취급 볼때마다 안쓰럽고 형이라도 불러도 되냐는 말 귀여운데 한편으론 미어진다. 아마 저 때 이 후로 형님이라 부르게 된 걸까? 아회는 저 시절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저 말을 한 건 후회하지는 않을까...
아아, 탈자.. 쥐고 싶어도 꽉 벼루를 쥔 나머지 -> 쥐고 싶어도 올때 꽉 벼루를 쥐었던 나머지...랍니다...
>>138 진단님이 참 좋은 소재를 주셨어요.😊 어린 시절의 아회는 생각보다 많이 말랑했답니다... 도련님은, 네에. 형님이지요... 너무 멀리 와버린 형님...😂 이 순간 이후로 형님이라고 불렀을 거예요. 한편으로는 그때 하지 않았더라면……하고 생각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으니 후회하면 안 된다 생각할 거예요.
>>136 ㅋㅋㅋㅋㅋㅋㅋㅋ 도망을. 치려고.? (수갑 촥)(감옥으로 끌고 감)(?) 하 진짜 볼때마다 느끼는건데 내가 글에서 빛이 난다는 이야기를 잘 안믿는 편이었거든?? 근데 여기 시트내고 나니까 그게 뭔 뜻인지 알겠더라고 나는 내가 떠올린 키워드 아니면 뭔가 쓰기 힘든데 대단해.. 전부터 감 확실히 잡았지만 역시 전부터 이야기하던 아회가 만나러 가던 사람은 궁기였구나 :0 뭔가 아회한테는 궁기에 대한 증오심 말고도 다른 뭔가가 더 있을거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어렸을때 저렇게 잘 챙겨주던 사람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짐작해보는것도 재밌고..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응 불러줘 나 가현주 오늘부터 남자로 살래 ^q^ (가현주 나가)
>>140 꺅!(철컹!) 가현주의 글도 빛이 나는데... 어쩐지 불야성인 이유가 있었어요, 반딧불이 금손 오너가 많은 어장인 거예요!(?) 궁기를 자주 만나러 갔지만요, 네. 으음, 증오심 말고... 공포감...?(끄덕) 형...ㅋㅋㅋㅋ 으악 가현주 고작 형이라는 단어를 위해 남자가 되시면 안 돼요!(비명) 아회가 이렇게 된 거 언니라고 부르면...!(아회: ...언니?)
>>141 음 좋아 아회주를 감금했으니.. 이제 맛난걸 한가득 사먹이고 용돈도 꼬박꼬박 쥐어주면서 1일 50독백을 쓰게 만들수 있겠어 ^q^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여기가.. 여기가 바로 반딧불의 묘인가요... (?) 아늬 진짜 뭔가 읽으먼 읽을수록 아하 하는 부분도 있는데 계속 빠져들고 다음 독백을 기대되게 하는? 그런 맛이 있어 궁기 자주 만나러 가고 저렇게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친근하게 굴던 애가 왜!! 어째서 증오랑 공포를 느끼게 된 건지 그 이유가 굉장히 의문이란 말이지! 아니근데뭐라고 언... 언니.... 언니래.... (오타쿠 가현주, 여기 잠들다) 아회 TS버전.. 지금도 하도 곱상하게 생겨서 뭔가 큰 차이가 없을것같다는 해석이 있음.... 이것은 유언이여 꼴까닥
>>143 에이 죽인다고는 안 했어? 대신 날 위해서 독백을 써줘 독백 독백 그리고 더 많은 독백... (임가현 모먼트) 그야 당연히 칭찬 들어 마땅한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이지~~! 하 흑흑 나 이제 진짜로 여한없이 죽을수도 있음 찐텐임... 근데 미묘한 차이라니 너무 좋은거 아니야?? 목젖 미묘한 부분은 지금의 아회가 그만큼 곱상하고 여장시키면 찰떡일것 같다는 그런 해석을 불러주고 상반신 미묘한 차이는 말하지 않아도 느낌이 딱 오는 그런거잖아 다양한 부분으로 즐길수 있는 아회 최고다 ^Q^ 헉 대충 10cm 더 작아지는거야?? 완전 귀여워 꾹꾹 누르고 싶어 (관뚜껑을 열고 일어나며)
그렇게 배웠으므로. 그게 당연하니까. 아, 싫어하는 말들의 향연이다. 잠시지만 온화의 얼굴이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류 가는 기본적으로 서로 접점이 없다면 가문원들끼리도 대면대면하게 지내다보니 저런 말들이 퍽 와닿지가 않다. 뭔지 알고는 있지만 굳이 실천은 하지 않는 주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의 선에서 끝나게끔 하는 것이 류 가의 가르침이었으니. 당연한 것을 실천하는 그네의 행동이 눈에 거슬릴 수 밖에.
그렇지만 고작해야 얼굴 몇 번 더 볼까 말까 한 사이다. 됐다. 뭘 그리 곱씹나. 하고픈 대로 하게 두자. 그렇게 생각하면 저런 소리 하는 것도 대강 흘려버릴 수 있다. 머릿속 너저분하게 흩어진 생각들을 죄 흩뜨려 날려버렸다.
"흐음. 아씨가 그러하다면야 그런가보오."
아무래도 좋은 듯이 초연한 한 마디. 그 뒤에 남은 것은 처음과 다를 것 없는 얼굴의 온화였다.
엉결겁에 들어온 과자 가게였으나 온화는 좌판에 깔린 과자는 눈길 한 번 주기만 하고 줄곧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흑룡의 두루마기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바삐 돌아다니던 두루마기가 겨우 멈출 즈음 다가가서 팔을 둘렀더란다. 이번에도 떨쳐내지 않고 순순히 안기는 행동 지켜보다가, 보는 눈이 많지 않냐길래 그럼 눈 없는 곳으로 가면 되겠느냐 말을 하려 했는데-
"아, 그러신가. 아씨 맘에 정한 분 있다면야 내 손 대서야 쓰나."
어쩐지 많이 비틀린 듯한 말이 이어져 그것이 온화에게서 속 빈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흐흠. 그렇구만. 들은 말로 납득했단 듯이 고개 끄덕이며 둘렀던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가벼이 안았던 만큼 가볍게 떨어져, 근처의 과자 몇 개 적당히 집어든다. 이것만 할까- 하며 아씨를 보았다가 기분 좋은 얼굴로 과자 먹고 있길래 푸흐흐 웃어버렸다.
"볼에 주머니라도 달렸나. 어찌 그리 볼록하오? 흐흐. 뺏어갈 이도 없는데 천천히 드소. 누 보면 과자 처음 먹는 줄 알겄네."
온화는 실실 웃는 얼굴로 고른 과자를 주인장에게 가져가 계산했다. 중간에 채일 새라 재빨리. 저 아씨가 사겠다며 오긴 했으나 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들고 가기 편하게 담아준 것을 한 팔에 안고 돌아보며 말한다.
니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래라니 무슨 이야기일까. 거래라면 무언가의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일터다. 그 사감과 거래를 했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굳이 니오의 앞에서 한다면, 그리고 굳이굳이 건드리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쉽게 귀결된다. 기숙사와 기숙사간의 어쩌면 사감과 사감 사이의 거래였고 그 거래 품목은 '학생'이었으며 이 경우에는 니오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래대상이 되어 이리저리 넘겨졌다는 이야기. 그건 조금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네.
" 아-뇨. 패는것도 죽이는것도 제가 직접 합니다. 남의 손을 빌리는 취미는 없어요. "
니오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 대 맞으면 다섯 대를 패주는 것도 물론 좋은 방법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확실하게 밟아놓는것이다. 다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다시는 감히 자신을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달려들어서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서 이러다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 까지 때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짜로 반 죽여놓으면, 그러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해결된다.
" ...오면, 저는 다시 거기로 돌아가는거겠죠? "
황룡 기숙사. 두 번째 떠나서 도착한 곳. 그곳은 아직 '도착'한 곳이지 '정착'한 곳이 아니다. 집을 떠나서 적룡을 찾아 이 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잠깐의 도발에 넘어가서 기세좋게 넘어가겠다고 말해서 황룡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넘어간 곳은 딱히 좋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계속해서 겉도는 느낌. 누구와도 친해지기 어려운 느낌이 계속 들었고 그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원래 있던 곳에서 찍힌 배신자라는 낙인. 그것이 자꾸만 괴롭게한다. 우리와 너는 다르다는 그 느낌이 속을 어지럽게 만들어버리고만다.
" 그러네요. 이젠 완전히 딴 집 새끼가 되어버렸네요. "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힘이 들어간 탓에 멎었던 피가 다시 조금 흐르는게 보였다. 니오는'붕대 써도 되죠?' 하고 물으며 붕대를 집어 손등에 가볍에 감아주었다. 금세 빨갛게 물드는 것이 퍽 보기 좋았다. 딴 집 새끼라. 니오는 그 말을 한 번더 곱씹었다. 적룡에 있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다른 기숙사 것들이 싫었는데 이제 본인이 그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니오는 '다른 기숙사'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싫어한 것이었다. 자기 맘에 거슬리는 그 사람들을 싫어했을 뿐이다. 내심 사람이 좋고 사람이 그리워서 또 자기랑 잘 맞는 사람들은 좋아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게 행동할 뿐이지.
" 아- 진짜 적응하기 힘들거든요 여기.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느낌이랄까. 그러면 안되는거 저도 아는데 어제는 처음 본 녀석이 자꾸 친한 척 하길래 한 대 때렸어요. 자꾸 들러붙지 말라고. "
그러다보니 점점 더 겉도는 것일지도 모르지. 가시를 잔뜩 세우고 다가오지 말라고 온 몸으로 어필하고 있으니까.
" 나중에 사감님 오시면 말씀좀 해주세요. 잘 좀 돌봐주라고~ 딴 집 새끼라고 너무 미워하진 마시고. "
표정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분명 이 이야기는 싫은 거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임씨 가문 사람이었고, 그 규칙들과 딱딱하다 못해 조금은 답답한 단어들을 수없이 듣고 자랐다. 그것들 앞에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그저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여학생의 표정이 풀리자, 가현도 따라 웃었다. 그래도 너무 싫어하지는 말아줘. 입으로 꺼내는 말은 싫겠지만, 나라는 사람까지 싫어하지는 말아줘. 나는 모두가 좋은걸?
"음~ 근데 그 분께서 흔쾌히 받아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이쯤 하고, 과자나 마저 고르자."
정말 말 그대로였다. 그 분의 입장에서 자신이 그릇으로써 재미가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연히 무슨 짓을 하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 여지껏 그런 것에 한해서는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을 만큼 MA에게 진심인 사람 아니던가. 이야기를 급하게 마무리지은 것은 행여나 그 말중에 조금이나마 그 분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였다.
아무튼 늘 하던 대로 과자류를 양 볼이 볼록해지도록 한가득 우겨넣고 입 안에 잔뜩 감돌던 달달함을 만끽하던 가현은, 여학생의 말을 듣고 과자를 한 번. 그리고 여학생을 한 번 번갈아 보다가 방긋 웃는다.
"으응... 그래도 이렇게 먹는게 맛있는걸."
씹기는 조금 버겁기는 하나 그것보다는 달달함이 한가득 들어차있다는 그 느낌이 좋았다. 물론 이렇게 먹어대면 나중에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기 때문에 기숙사에 돌아가거나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마실걸 하나 사서 입가심하면 딱이라고 느끼며 지갑에서 과잣값을 꺼내려던 가현의 동작이 멈추었다.
"..."
여전히 입에 과자 한가득 물고서 갈 곳을 잃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축 내리고, 여학생에게 불만 한가득 담겨있는 시선을 주었으나 진심은 아니라 금새 표정이 풀린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호의를 받고 안 받고는 이 여학생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학생이 어떤 방향을 택하든 전부 받아들여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잘 생각해보니 이렇게나 포용력 넓고 이해력 넘치는 사람이라면 우리 흑룡기숙사에 들어와도 딱 안성맞춤일 것 같은데. 아쉬워라. 그래도 다른 곳에서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는것만 해도 어디일까. 그저 지금에 감사하며, 여학생의 그 친절한 면모 또한 포용할 뿐이다.
"자. 여기야. 아까 전보다는 뭐가 좀 더 많지? 내가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겪어본 결과로는, 천부에서 과자가게 하면 아까 그 집이랑 이 집이 최고라고 장담할 수 있어~"
언제 급했냐는 양 다시 느려터진 발걸음으로 아까전의 과자가게에서 한참 떨어진 다른 과자가게로 도착했다. 진열되어있는 것들의 종류 면에서 훨씬 다양했으며, 그 양 또한 많았다. 아까 전까지는 차를 마시며 살 것 위주로 골랐다면 이번에는 그냥 간단히 입 심심할때 집어먹을수 있는것 위주로 골라볼까. 분명 과자가게를 알려주는 입장인 가현인데 어째 자신이 더 신나있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