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해가 떠있다. 피곤을 간신히 이겨내며 연은 학생으로서 본분을 지키기 위해 수업 장소로 걸음을 옮겼을까. 그 걸음이 멀쩡하지 못하고, 자꾸 졸아 비틀거리는 탓에 다른 이의 청룡 학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도착하고 나면 연은 하품하며 눈물을 닦아낸다.
무풍의 바다처럼 고요하고, 또 깊은 얼굴로 가만 침묵을 유지했다. 묵은 뭍의 것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두었고, 두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 또한 그곳에 두고 온 자였다. 분노, 후회, 비탄, 번뇌, ……사랑. 묵의 유령선에 닻 따윈 부재했다. 그저 부랑아처럼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가다가. 풍랑에 뛰어들어 스스로 풍랑 그 자체가 되고자 했다. 다만 눈앞 상대는 온전히 저와 같은 존재가 아닌 탓인지 표정이 어두웠으므로, 묵은 잠시 배를 정박시키기로 했다. 잠깐 숨통 좀 틔워주려 했다는 뜻이다. 그녀가 입 밖으로 꺼낸 (묵이 느끼기에)절절한 청만 아니었다면.
묵은 가라앉는 눈을 하면서,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그 미소는 칠흑같이 어둡다기엔 한 구석이 젖어있었고, 온기 한톨 없다기엔 기묘한 정을 품었고, 동료애라고 명하기엔 싸늘했다. 난데없이 제 배에 난입한 이레귤러, 다음은 동료 선원, 이제는 풍랑으로 뛰어들어 풍랑이 될……. 사람으로 태어나 사랑으로 죽었고, 망령으로 무덤 속에서 일어나 이제는 사람조차 아니게 됨으로써 그 존재를 증명한다. 동일한 목적성을 띤 동반자를 발견한 심정을 무어라 칭함이 오를까. 이건 너무 어둡고 저건 과히 밝다. 다만 말로썬 표현할 수 있었다.
유레카! 하고.
그래서 묵은 여상하게 어깨를 내어주고, 드물게 손을 들어 눈가를 쓰다듬었다가 암녹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려 했다.
"예정엔 없던 일이지만 안될 것도 없지요."
우린 풍랑이 될 거예요, 하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우릴 죽인 이 세계를 모조리 휩쓸어버릴 풍랑이."
그리하여 선언한다.
"사랑으로 죽은 우리는, 죽음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 쨘, 막레입니다! 연주 냅다 이런 전개로 끌고 가버려서 죄송하구, 어울려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정말로 즐거웠어요 XD 이레귤러에서 승객되고 선원되고 이제는 인생의 끝을 함께할 동반자가 되었다니 넘 마싯서요.... 🥹🥹👍👍
>>857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묵이의 깔개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데! 나도 할래! (?) >>870 일단 윤하와 가현이가 알고 지낸지 6년차라는 점, 그리고 가현과 농질이 룸메이트였다는 점, 윤하가 설정 상으로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는 점, 어딘가 높은 곳에서 사람 구경하는걸 좋아한다는 점. 이렇게 네가지를 고려하면 윤하는 가현이가 그런 모먼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웬만큼은 알고 있지 않을까 해! 100%는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모르는척 하냐? 일단 가현이 먼저 말하지 않으면 굳이 아는척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것이 가현이가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이해해줄 수 있기에, 설령 그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기꺼이 화살을 맞아줄 수 있기에.
수업, 단 두 글자밖에 안되는 주제에 지루하기로는 둘째가기 서러울 이름이다. 소녀는 그냥 이대로 기숙사에 박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검지로 머리카락 끝을 꼬았다. 물론 안될 일이란 걸 알고 있기에 결국 한숨 푹 쉬며 기숙사를 나선다. 오늘 수업은 분명 대기를... 어쩐다고 했던 것 같다.
감정이 밝다가, 어두워지고, 이내 비가 되어 내린다. 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인다. 지금 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폭파 시킨다. 지금 내 감정은 그러니까, 울고 있는 사감을 바라보면 자신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힌다. 하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아래에서부터 몰려오는 슬픔으로.
"울음은 전염성이 있는 거 같네요. 슬퍼요. 근데 깊은 슬픔은 아니에요. 천천히 아득히부터 몰려오는 그런 슬픔이에요."
그저 흘린 말에 그대로 몸을 맡긴단 말인가. 긴장도 없이 얌전해진 몸은 재미가 덜 하긴 하다만. 빈 옆구리에 껴놓고 있기엔 괜찮지. 허리르 두른 팔에 힘 조금 더 들어간다. 은근슬쩍 가슴팍 쓸어내리는 손길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저 유유란 것이 뜀박질을 잘 한다길래 다리 하나만 조져놓고 적당히 몰아가려고 했는데. 뭐 저리 픽 쓰러진다냐. 이거 참. 담배가 없으니 적당히가 안 되는구만. 곰방대 물지 못한 입술을 부채 끝으로 톡톡 두들긴다. 이제라도 꺼내어 한 모금 피울까. 생각하며 엎어진 유유의 몸뚱이를 본다.
"가져가긴 해야겠지. 몰아오라고는 했으나 잡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
느긋히 중얼거리며 도령을 본다. 유유가 쓰러져인가 다른 이유에서인가. 눈빛도 낯색도 바뀌었나. 무어가 저리 신났나. 위협이 없어져서? 온화는 조용히 입술 비틀어 올리고 고개 가까이 하며 중얼거렸다.
"요행히, 예 있는 것은 도령과 나 뿐인 듯 하이. 하여 지금이라면 저것의 살을 취하든, 여흥을 즐기든 나는 입 꾹 다물고 손이 필요하다면 보태줄 것이니. 어찌하것소?"
요괴의 육골과 혈은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다. 그것들을 다루는 걸 숱하게 봐온 저로써는 이리 말하는 것이 이질적이지도, 역할 것도 없다. 허나 이 도령은 어떨까. 흥미가 새로이 샘솟으니 그걸 참을 이유가 없다. 도령은 어찌하고 싶소? 온화의 붉은 부채가 도령의 턱 끝에 닿아 느릿하게 턱선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