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꿈을. 꿨어.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점차 흐릿해지는 기억의 조각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왜 항상 즐거운 꿈은 이리도 쉽게 잊혀지고 마는 걸까. 평생 기억에 새겨둔 채 즐긴다면 분명 좋을텐데. 몸도 무겁고 눈꺼풀도 무거웠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부스스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정리한다. 잠을 깰 겸 씻고 수업 들으러 가야겠다. 자신이 누구든간에 학생이라는 지금의 위치를 망각하면 안 된다.
그리고 가현은 기숙사를 나서기 전 어떤 수업을 들을지에 대해 잠시 떠올린다. 그러고 있자니 여간 불만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계의 역사. 태초의 신화. 분명히 존엄하신 존재가 영향을 끼친 것들인데 어째서 야속하게도 둘 다 한번에 듣지 못하는 것일까. 왕이시여. 소녀. 조금이나마 그대에게 더 가까워지고 싶단 말이옵니다. 그대가 걸어온 길이라면, 옳든 그르든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든 전부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지어니.
물론 가문에서는 가현이 이러라고 이 학당에 보낸 건 아니었다. 임씨 가문. 가문 특유의 도술이나 저주라는 개념이 굉장히 미미하고 그 색이 옅기에 가문에서만 따로 전해져오는 것들은 없었다. 끽해봐야 다른 제사장 가문이 가진 도술이나 저주 정도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현을 여기로 보낸 것이었다. 저들이 특출나지 못하듯 가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도술공부든 저주공부든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만약 가현이 이렇게까지 MA에 심취한 것을 안다면 가현의 부모님은 미간을 짚을 것이다.
"으으음... 크으윽-.. 좋아. 오늘은 이거 들어아지."
한참 앓는소리를 하며 저 혼자서 자아들간의 갈등을 겪던 가현은 저주 수업을 택하기로 한다. 마음 같아서는 태초의 신화를 들으며, 존엄하신 존재의 활약상을 한껏 보고 듣고 즐기고 싶었지만 아까도 말했듯 학생이라는 위치는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에.
아까 분열된 자아끼리 어느 수업 들을지 다투던 것은 행복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도사님마다 수업의 방식은 다르지만 수업에 대한 열정은 같았다.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수업들을 자신이 어떻게 싫어할 수 있으랴.
"이번 수업도 분명 즐겁겠네요. 저주를 튕긴다고 하셨는데, 허용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요?"
아니. 정정하죠. 못 튕겨내는 저주도 있나요. 뒷말을 이어가며 가현은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사랑에 있어 바라지 않는 건 없다고 여겼으나 곧 그 생각마저도 정정했다. 자신이 정말 미치도록 집착하고, 또 자신만의 위험하고 살벌한 애정을 줄 상대가 그 분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면 분명 별로일 것이다.
기숙사 방은 다시금 깔끔해졌다. 대체 언제 패악질 부렸냐는 양 박살난 화병의 유리 파편도, 이리저리 튄 거울의 부스러기도 없어진지 오래다. 어찌 되었든, 다시금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그 소리겠다. 아회 침상에서 몸 일으키며 생각했다.
아. 잠이 안 깨... 아... 머리 멍해... 가배차가 마시고 싶다……. 얼음 가득…….
일찍이 현대인의 필수품, 얼음 띄운 가배차의 맛을 알아버린 아회는 오늘 수업을 생각하곤 몸을 일으켰다. 보상이라 생각하자. 고된 수업 끝나고 마시면 행복하겠지.
겨우 정신 차린 뒤, 준비할 것 전부 준비하며 정리 마치면 긴 머리 양손에 가득 움켜쥐고 비녀 입에 가벼이 문다. 삶이란 오래 지속될 수록 잔꾀만 늘고, 어떻게 해야 좀 수고를 덜 들일 수 있는지 알게 되는지라, 감에 의존해 머리를 헐겁게 쪽지면 제법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두어 가닥 흘러내린다.
"……."
아무튼 준비 끝. 진짜 준비 끝! 기숙사 나서며 지팡이 툭, 하고 내딛는 걸음 느긋하다. 오늘 들을 수업은 미리 정해뒀으니까.
서슬 퍼런 하늘빛이 기숙사 안으로 담뿍 쏟아졌다. 이른 아침, 피곤한 기색도 없이 왼팔의 붕대를 갈아끼우고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한 묵은 흐트러짐 일절 없다. 우려낸 차만 느긋하게 마시다가 일정한 때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여즉 몽중 헤매는 제 룸메이트 어깨 한 번 흔들어 깨워주고, 붉은 꽃 자수 새겨진 먹빛 꽃신에 새하얀 발 꿰어 방을 나섰다.
조금은 향상심에 불타오르는 가현은 교수님의 대답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려는 듯 경청하기 시작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덧없는 피조물이 만들어 낸 감정임에도 그 깊이며 뜻이며 무궁무진하니, 흥미를 안 가질래야 안 가질수가 없었다. 가현 자신도 결국에는 그 덧없는 피조물 중 하나였기도 하고.
"아아, 역시 사랑이라는 건 달고도 부드러워.."
요점은, 가현이 그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한 뜻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현의 방식은 정상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많이 고장나 있었다.
"버티지 못하는것도 하나의 사랑 아닐까요. 목을 옭죄여 오는 고통.. 선명하게 뿌려지는 빨간 잎.. 정말이지..."
사랑 아닐까요- 이후의 이야기는 자신에게도 안 들릴만큼 웅얼거리는 부류의 것이었지만. 자. 이제 제웅을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