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골에 끼쳐 오르는 소름을 지울 수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발목을 붙잡으려 드는 것을 겨우 떨쳐낼까 싶다가도, 불가항력이란 말이 무엇인지 여실히 느끼게 된다. 아회야, 우리는 죄를 씻을 수 있다. 차디찬 겨울에도 봄이 올 것이다……. 아닙니다. 봄은 만들어야만 오더랍니다.
섭섭하다고? 당신이? 아회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었다. 침묵했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지 않았는가, 당신의 뜻이 나의 뜻과 같지 아니하지 않았는가, 돌이킬 수 없지 않은가! 죄를 지었지 않았던가, 정원이 피범벅이 되었다. 어찌 잊겠는가! 섭섭하단 말도, 두려워 말라는 말도 어찌 믿어야 하겠는가. 본능적인 공포를 다른 본능이 짓누른다. 원초적인 감정이 일렁였다. 지금이라면 손 뻗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당신의 목을 틀어쥘 수 있지 않을까…….
"해, 를……."
끓어오르던 감정은 꼬리를 말아 삽시간에 눌려버린다.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포를 이길 수 없었다.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 떨린다. 손의 떨림을 타고 팔이 벌벌 떨리려 할 적, 아회는 지팡이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그들은."
압박감. 심장 뛰는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하다. 주변의 희미한, 사람 살아가는 당연한 소음도 모두 묻혀버리는 것 같았다. 세상에 홀로 남아, 아니, 단둘이 남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당신이 말을 건네면, 자신은 대답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으니 이 명백한 상하관계일 터다. 올라서거나 수평일 수 없는 관계.
"그것이."
정신이 아득해진다. 기절할 것만 같다. 마른침을 삼켜도 먹먹한 귀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마지막 기회가 울림처럼 귓전을 때린다. 저 자는 필히 선고할 것이다. 피를 부를 것이다, 전란의 혈운이 드리울 것이다, 천하가 잿더미가 되고 죽음만이 고요히 온 땅을 덮을 터다. ……그것이 나와─ 생각이 끝까지 미치기 전, 아회 팔 쭉 뻗었으니 본능에 가까웠다. 지팡이가 땅에 허망히 툭, 하고 떨어진다. 움직이게 두어서는 안 돼.
"학, 학당 내부에서-"
은색에 가까운 아스라한 회청 빛 눈 부릅 뜬 채로 팔이든, 어디든. 손 더듬거려 뻗었을 터다. 가까이 있었으니 제발 옷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길 바랐다. 붙잡아야만 한다, 납득을 시켜야만 한다.
"친우입니다, 치, 친우입니다! 워, 원내에, 자, 작은 소란이 있어 수업이 미뤄진 터라, 도움이, 도움을, 요청하여, 그러니까…… 잘못, 잘못했습니다……."
떨림이 멎지 않는다. 그렇지만 해야만 한다, 돌이킬 수 없더라도. 이미 각오하지 않았는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눈썹 여덟 팔자 그린다. 눈은 흐리다 못해 초점 맞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울 듯이 덜덜 떨리는 숨 토해내듯 차올랐던 단어 가련히도 뱉어냈다.
날큰한 웃음을 짓고 있으면 무언의 대꾸가 돌아왔다. 아, 실감이 난다. 타 기숙사라도 같은 학년이라면 육 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희박했고 자신의 욀재주는 제법 쓸만했다. 팔 년 전 초상이 여즉 망막에 붙박여있다. 그러니 이 순간 그녀가 다른 학년, 즉 후배임을 확신하나 그보다는 아이같은 천진을. 어느 점에서 그랬느냐 꼽자면, 발음기관을 이용해 소리 내기보다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현한 점이. 붉은 눈 느릿하게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이고, 숙인 연의 면을 응시했다. 시선이 자못 높다. 다만 느끼기에 저가 그녀를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으니 필히 저 물먹은 솜 같은 태도 탓이리라.
"어머, 자주 늦게 자나 봐요? 다들 연이 걱정돼서 그러는 걸 테지요. 위험하니까요. 아, 무거운 책을 이고 움직이는 계단을 오른 묵이가 하기엔 적합하지 못한 말이었으려나요."
덧붙인 뒷말을 하면서도 아차, 싶은 표정은 아니다. 연이 청에 응하면 묵은 그저 물비늘 같은 미소를 걸고, 앞으로 나아갔다. 움직이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안내하는 모습에 전과 같은 불안정함은 더 이상 없었다. 흑룡 기숙사로 향하는 동안 다들 방으로 돌아간 건지 인적이 드물었고, 간혹 보이는 흑룡 기숙사 학생들은 나긋한 낯을 하고 지나쳐갔다. 두어 번의 턱을 돌고, 서너 번의 면면들을 흘려보내고. 묵은 책을 안아든 양팔 대신 오른손에 쥔 쥘부채를 까닥했다. 방의 문이 열렸다. 흑요석 선추가 한차례 크게 흔들리더니 잠잠해졌다. 묵은 책상 위에 책을 아무렇게나 두더니 간이 냉장고에서 우유를, 찬장에서 설탕과 꿀을 꺼냈다.
"편한 곳에 앉아있어요. 저는 잠시."
묵은 양해를 구한 뒤, 꿀물을 타기 시작했다. 수저가 찻잔에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연속됐다. 연이 방에 들어오면 바로 레드 포인트가 들어간 무채색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닥 전체에 깔린 검은 카펫 위에 놓인 침구 옆에는 마침 책상과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전면적으로 강박에 가깝게 깔끔했다. 생활의 흔적을 찾기가 희박한 것들 중 유일하게 사람 손 때가 탄 듯 보이는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각각 하나씩 구비된 책상과 의자였다. 상 위에는 여러 서적과 교과서가 어지러이 흩뿌려져있었고 가장자리 쯤에 유일하게 펼쳐진 공책이 산처럼 쌓인 책들 맨 밑에 자리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펼쳐진 종이 위로 드러난 글자는 이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