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자랑스럽게 꺼낼 말은 아닌데 말이다. 엉뚱한 소리 하는 낯짝이 당당한 걸 넘어서 왜인지 득의양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던 것도 잠시, 이번에는 그가 놀랄 차례가 되었다. 치아키의 말에 그는 펄쩍 뛰다시피 몸을 들썩거리며 외쳤다.
"친하다고 말했어?! 걔가?"
아차. 이러면 꼭 못 믿어서 되묻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나. 나는 무려 본인에게 친하다고 인정 받은 신인데!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해대며 여유로운 척을 했다.
"크흠, 그래. 친한 순위로 따지면 첫 번째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엄청 친하지! 아이 거, 짜식. 내 앞에서는 마지못해 말하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말이야……. 다른 사람 앞에서도 친하다고 말할 거면서 꼬맹이가 참 괘씸해."
다시 말해 여유로운 태도로 간접적인 자랑질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아저씨 평소에는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건가 싶을 정도로 철이 없는데, 안 물어봤는데도 조카 자랑하느라 절로 말 길어지는 모습을 보면 역시 어르신은 맞는 모양이다. 치아키가 묻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나불거리던 입을 멈췄다. 그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며 골똘히 기억을 되짚는 듯하더니, "으음… 거창한 건 아니고. 대충 등불 받으러 왔다는 걸 안 들키고 싶었는데, 네가 도와주겠다 약속했다고 들었어."라며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자세히 듣지 못했으니 이 내용이 그가 아는 사실의 전부이긴 했지만서도… 직전까지 나불거렸던 말에 비하면 너무 깔끔한 답변이지 않나. 본인도 그리 생각하는지, 혹은 당장의 의심을 무마하기 위해서인지, 눈사람을 훑어보던 그가 말했다.
"오, 그런데 이거 통행 방해하기에 딱 좋은 간격인데? 하나도 아니고 말이야. 알 만한 분이면서."
동의를 구하듯 고개가 까딱인다. 그저 짐작일 뿐이니 아니라고 한다면 아닌 게 되겠지만. 되묻는 말에 그는 또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살 위 선배를 꼬맹이라고 부른다거나 괘씸하다고 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이 학생회장은 말이야. 하핫. 그래도 비밀로 해줄게. 이번엔 못 들은 것으로."
얼마나 친한진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살 연상이거나 한학년 선배인데 저런 표현은 문제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하며 치아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야 아무리 친해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선이나 예의는 있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적어도 치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살며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린을 빤히 바라보긴 했으나 치아키의 입에서 굳이 뭔가 더 메시지가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한편 등불에 대해서 린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 치아키는 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기사 자신이 직접 주긴 했었지. 곤란한 일이 안 생기게 말이야. 그렇다면 이 후배는 그에 대해서 정확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것인지. 잠시 생각을 해보긴 했으나 굳이 말을 꺼내서 좋을 것은 없었기에 치아키는 이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조금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으니 말이야. 나 이외에는 도와줄 이도 없었고. 이 부분은 일단 비밀이야. 쉿."
일부러 얄궂게 웃으면서 그는 제 오른손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살짝 갖다대며 쉿소리를 작게 냈다. 눈웃음을 가만히 짓던 와중 눈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치아키는 순간 움찔하더니 시선을 살며시 회피하면서 일부러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하하. 후배 군. 무슨 소리를 하는걸까? 통행 방해하기에 좋은 광경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이 학생회장님이 애들 등교를 못하게 하려고 입구를 막고 있는 것 같잖니. 아무리 그래도 등교를 못하게 하진 않아! 그렇고 말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슬며시 시선을 계속해서 회피하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괜히 더 어석하다고 느낀 탓이었다. 그러다 이내 치아키는 린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내가 보여서 왔다라. 좋아! 후배 군. 그럼 후배 군도 눈사람 같이 만들어볼래?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정말로 유명하다 못해 이제는 상당히 옛날 노래가 되어버린 그 멜로디를 가볍게 부르면서 치아키는 작게 키득거렸다. 동참하겠냐는 눈빛을 살며시 보이면서.
"별명 같은 거지! 나 1학년이지만 걔보다 연상이라 상관없어. ……음, 그래도 후배로서의 예의라면 반성해 볼까?"
엄연히 거짓말이 아니다. 세상엔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유급하게 된 학생이 많으니 이참에 유급생 설정이라도 붙이지 뭐. 이 어르신, 일코를 이렇게 대충 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 정도 일로 정체를 들킬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그는 본래부터 인간인 척을 배짱으로 대충 하면서 산 신이시다. 또 마지막으로 하네와 이야기를 나눴다면 저 상대 역시도 여러모로 아는 것이 많아 보여서 말이다. 물론 짐작이 틀렸을 가능성도 있으니 먼저 말 꺼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게 더 재밌어 보이고!
"어어, 그러면 수상해 보이잖아. 좀 더 뻔뻔하게 가자고."
그는 눈 가늘게 뜨고는 다 안다는 양 능청스레 미소지었다. 그도 종종 잘못한 일이 있을 때면 저리 대놓고 어색하게 눈 돌리거나 뻔뻔하게 굴기가 특기인데, 남들이 보기엔 저렇구나 싶다. 미묘한 동질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 변명의 진위 여부야 어떻든 치아키의 제안은 그의 흥미를 충분히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와, 통행 방해하기라니 너무 좋아! 그는 대번에 얼굴빛이 밝아졌다. ……근본이 남의 곤경으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비뚤어진 성정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귀여운 장난이니 괜찮지 않을까.
"당연하지! 진짜 눈사람이 뭔지 보여줄게."
'진짜'를 운운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얼른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려 했는데 문득 뜬금없는 생각이 스치지 뭔가. 그는 자못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는, 치아키가 이미 만들어 놓은 눈사람들을 슬쩍 가리켰다.
"2개씩 합쳐서 4단 눈사람 만들면 안 돼?"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느냐 묻는다면, 길 막는 건 모르겠고 그냥 크면 멋있으니까 그렇다…….
1학년이지만 2학년보다 연상이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과 동갑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대체 어쩌다가 2년이라는 시간을 유년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치아키의 눈이 살짝 안타까움의 색으로 물들었다. 물론 그런 이들에게 편견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조금 안타까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그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했다. 자신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무슨 천벌을 받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할머니나 부모님에게 꾸중듣고 싶지도 않았으니 더더욱.
"아니. 정말로 이 학생회장님은 등교를 못하게 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는걸. 어쨌건 오늘은 수업이 있는 날이고 아직 내려온 것도 아니니까 등교도 못하게 길을 막아버리는 학생회장님이 될 순 없어. 절대로 거짓말 아니야."
어쨌든 지나갈 수 있는 길은 뚫어줄 생각이었기에 그의 말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누군가가 말을 한다면 부정을 하기는 힘들지도 모르나 아무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는 와중 2개씩 합쳐서 4단 눈사람을 만들면 안되냐는 그 말에 치아키는 가만히 오른손으로 대충 길이를 재기 시작했다.
"시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4단으로 만들기에는 힘들지 않겠어? 생각보다 높이가 꽤 될텐데? 눈을 뭉치기도 엄청 힘들테고."
4단이나 되는 무게를 유지하려면 밑단이 상당히 커야하고 그렇게 쌓아 오르게 되면 아무래도 머리 쪽으로 눈을 올릴 수도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가능하다고 한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신 앞으로 숙이던 고개를 이번에는 옆으로 갸우뚱한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기로 한다. 순수한 선의의 뒷이야기를 더 캐물어도 실례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는 식물의 미덕인 「침묵」을 충실히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슬슬 몸에 열기가 되돌아와서 콧물도 금세 멎었다. 감기가 다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번에는 동장군이 곧장 떠나간 모양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니 가을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 지 얼마 안 되어 한 번 더 감기에 걸린다면 심히 곤란할 뻔했다. 겨울을 방구석에서만 앓아누운 채로 틀어박혀 보낸다면 자기는 상관없지만 남들을 걱정시킬지도 모르니까.
“응, 가미즈나 고등학교. 1학년 B반⋯.” 저번 감기 이후로 이름을 기억하는 노력이 조금 느슨해져서였는지, 요이카는 자기 이름을 떠올리는 데 약간의 시간을 들였다. 이름은 얼마 안 가서 생각났다. “키구치 요이카, 좋은 돈(良いお金)이라고 쓰는 요이카야.”
무심코 이름뿐만 아니라 암기법까지 같이 발설해 버렸지만 상관없다고 여겼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요이카는 조금 안심했다.
“당신도 혹시 눈치챘을지는 모르겠는데, 나도, 신⋯ 이란 말이지. 나도 받은 만큼 갚아주는, 배로 갚아주는 성격인 건 비슷하거든. 옛날에는 정말 너끈히 보은이란 걸 했는데 지금은 모종의 사정이 있어서 이 모양이야. 그래도 베풀 수 있는 동안에는 베풀고 싶거든⋯. 당신처럼. 그러니, 다음에 학교에서 만난다면 자판기의 캔 팥죽이라도 살게⋯.” 요이카는 상대방이 곧 졸업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아마도 당신을 잊어버릴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이름, 물어봐도 될까.”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요이카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은인의 얼굴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덕분에 나중에라도 그 인상착의를 까먹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모조리 잊어버린 적이 있어서 그렇지, 사소한 디테일까지 하나하나 새겨넣는 기억력 자체는 좋은 편이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해버렸구나. 미유키 그렇게 말하며 미소만 지어 보인다. 베풀던 것에만 익숙하니, 역으로 자신이 받는 것에 대해서 미유키는 어색하며 무언가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마음속 응어리로 남고는 했었으니. 제 선의로 이루어진 것이든 상대의 호의로 향하는 것이던. 받은 것이 있었으면 그만큼 돌려주어야만 마음이 편한 것이었을까. 당신이 학년과 반을 이야기하면 미유키 고갤 한 번 끄덕인다. 1학년이라는 건 가미즈나 온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이름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 역시도 인간의 몸으로 내려온 것이 얼마 안 되어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 주변을 살피면 따라 미유키도 주변을 둘러본다. 우리를 가려 줄 나무 같은 건 없지만, 다행히 이 눈 밭에는 오직 당신과 나뿐이다. 지켜보는 눈 없으니. 신들끼리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여도 문제가 없다. 모종의 사정,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미유키는 눈을 반 접는다. 순간 내려앉는 입꼬리를 다시 꾹 당겨 웃어 보인다. 다음번에는 자신은 학교를 떠나 없을 것인데. 그것을 밝히며 당신을 난처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니. 미유키 그저 절 바라보는 당신의 노란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당신의 머플러를 다시 매듭지어 감아주려 한다.
"이토이가와 미유키에요."
다시 감아주고 싶어 간질간질한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머플러를 다 감아주고 미유키 무릎을 다시 한번 굽혀 당신과 눈높이를 같게 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빙그레 웃어 보이며 미유키 말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