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입술에서 흰 입김이 새어 나오면, 금세 또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정말 믿기지도 않지. 시선 닿는 곳마다 모든 사물이 한층 단단해져 있고, 어제는 잿빛 하늘이 가까워졌다 싶더니 목화송이만큼 큰 눈송이를 떨어트려 놓고 간 것이다. 온 세상눈으로 덮여 있으니 가지만 남은 나무도 희게 보일 정도라. 미유키는 검은 겨울 코트에 목도리까지 둘러 단단히 무장한 채 밖으로 나선다. 그럼에도 추위를 느끼지만, 지금만큼은 반가웠다. 미유키는 쌓인 눈을 밟으며 걷다가, 눈을 모아 작은 눈덩이를 만든다. 그리고 담벼락 위, 우체통 위, 눈덩이에 눈을 더해가다 보면 좀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이고. 그에 이젠 주먹만 한 눈덩이를 들고 눈이 많이 쌓였을 공터 쪽으로 향하다 이상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쌓인 눈덩이에 솟아나 있는 것은 그러니까. 사람의 다리다. 그 모습에 미유키는 얼굴 하얗게 질러서 눈덩이를 내버려 두고 달려간다. 튀어나온 두 다리를 잡고선 힘주어 당기며 당신을 눈덩이에서 꺼내려 한다.
"죽었어요? 죽은 거 아니죠? 응?"
면장갑을 낀 손이 당신의 눈꺼풀 달라붙었을 눈을 털어내려 했을까. 보면 걱정하는 얼굴에, 노랑색 눈이 당신에게 향해있다. 당신에게서 저와 같은 기운을 느끼니, 쉽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가 지금 내려와 있을 인간의 몸이란 생각보다 연약한 것이기에. 당신의 상태를 확인하며 미유키는 걱정을 버리지 못한다.
남이 당겨 주자, 키구치 요이카의 몸통이 생각보다 간단하게 쏙 하고 빠졌다. 역시 발버둥이 통하지 않은 이유는 눈이 무거워서라기보다는 요이카 자신이 무기력해서였다. 간신히 일어선 요이카는 앙감질을 쳐서 저 멀리 똑바로 서 있는 오른쪽 어그부츠를 신고, 막삽을 들어올린 채 어깨를 떨며 가볍게 몸서리쳤다. 눈가에 묻은 눈은 친절한 행인의 손길에 떨어져나갔지만, 얼음에 닿았던 코 끝이 빨개져 있다. 매듭도 짓지 않고 그저 목에 둘둘 감은 머플러에다가 콧김을 뿜어내서 열심히 얼굴을 녹였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이 말을 꺼낼 때쯤 요이카는 문득 상대방이 범상한 인간들 가운데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神)⋯. 어딘가 낯익으면서도 낯선 기운을 품은 신이다. 요이카는 그때, 북녘에서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 같은 냄새를 맡았지만 그게 마주본 신의 기운인지 그저 때맞춰 부는 계절풍인지는 확단할 수 없었다.
“내년 초까지 거꾸로 꽂혀 있다가 풀려날 뻔했어. 그래도 이 주변에는 마음씨 상냥한데다 키도 큰 사람이 지나다니는구나.” 일본에서는 평균 정도 키가 되는 요이카도, 소나무 분재처럼 목을 뒤로 한껏 구부려야 올려다볼 수 있을 만큼 은인은 키가 컸다. 요이카의 나무식 사고방식으로 말하자면 키가 크다는 것은, 동급생 여자아이들이 애청하는 연속극의 이케멘 배우가 얼마나 이케멘인지, 결혼정보회사가 신규 회원을 받을 때 그 회원의 봉급에 0이 몇 개나 찍혀 있는지, 할머니들에게 있어서는 손주가 밥을 얼마나 잘 먹는지와 같은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이 은혜를 어찌 갚으면 좋을지. 내가 옛날만 같았어도 곡식을 한가득⋯. 아, 아니. 식사라도 많이 대접했을 텐데.”
삽을 들고서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던 요이카는 일단 깍듯이 몸을 굽혀 인사했다. 앞머리가 이마 밑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요이카는 이 낯선 신의 기운과 커다란 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영문 모를 익숙함을 곰씹으며 열심히 그 정체를 짜맞추고 있었다. 분명히 초면이고 대화한 것도 처음인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인상, 그리고 키란 말이지⋯. 꾸벅꾸벅꾸벅이 대여섯 차례쯤 반복되었을까, 요이카는 ‘아’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고개만 들고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혹시, 가⋯미⋯즈⋯나⋯고교?”
그 속이 텅 빈 것 같으니 적은 완력으로도 미유키는 쉽게 당신을 꺼낼 수 있었다. 죽은 사람 일어나 걸으며,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미유키는 당신이 살아 있음에 크게 안도하며 숨을 길게 내쉰다. 당신 한 발로 뛰면 넘어질까, 어쩔 줄 몰라 걱정하는 표정이 스치다 이내 다시 안도하는 표정으로 떠오른다. 당신 코 끝이 붉은 것이 얼마나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인지. 하늘 위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고, 여우 눈 속 생쥐 찾는 것처럼 머리를 박다가 그랬을 리도 없고. 기대었거나 올라섰다가 빠지기라도 했을까.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리 된 이유를 생각하다, 당신 말 들어 보면 우리 눈 높이 심히 차이가 나는 것인데. 당신 고개 들어 올려다보는 것이 불편할까봐 미유키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려 한다.
"내가 아니었어도, 다른 누구라도 눈에 사람이 거꾸로 꽂혀있는 걸 보면 달려와 구해주었을걸요. 그리고 난 받은 만큼, 베풀어야 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그리 안 해도 괜찮아요."
말하며 미유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곡식이라는 말에 당신이 어떤 신인지 생각하나 수백수천의 신들 있으니 쉽게 어떤 신일지 답을 낼 수가 없다. 그것을 꼭 알아야 할 것은 아니니. 인사함에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던 미유키는 당신의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눈치의 당신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다, 제 다니는 고교의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끄덕인다. 가미즈나에 모인 많은 신들, 인간 생활을 체험하는데 가장 좋은 곳이었으니. 특히나 자신은 멀대 같으니 학생들 사이에서 특징이 커서 지나가며 눈에 몇 번쯤 스쳤을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