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봤자 펄쩍 뛰기나 하고 그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더 심하게 놀라는 모습에 그는 눈을 깜빡거리다 곧이어 싱글싱글 웃는 낯이 된다. "이렇게까지 놀라면 살짝 미안한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똘망똘망하게 뜬 눈에서는 즐거운 기색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다 상대방이 저를 빤히 바라보며 무엇인지 모를 표정을 짓자 그도 덩달아 비슷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치아키는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의도였겠으나 그와는 반대로 린은 별 생각이 없었다. 왜 저렇게 보나 싶어 따라하고 있…으려니…… 어라, 왠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 느낌인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상대편이 해답을 내 주었다.
"학생회장이었어?"
게다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 학교를 돌아다니며 승부를 걸어댔던 명수가 한둘이 아니었던지라……. 그는 만사를 제 흥미 위주로 보는 신이었기에 특별하게 기억할 만한 건수나 접점이 없으면 학생회장이나 교장 얼굴도 잊어버리는 양반이다. 하지만 학생회장이라는 사실은 몰랐어도 마츠리 이야기는 다르다! 아까는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장난부터 쳤는데 이제 보니 확실해졌다. 그는 성큼성큼 벼락같이 바짝 다가와서는 한껏 눈을 빛내었다.
"아, 우리 꼬… 하네 친구구나! 얘기는 들었어! 지난번에는 덕분에 잘 놀았어!"
아주 얼굴을 들이밀어 버릴 기세다. 그러다가도 수상한 점을 지적당하자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냥 내 손인데? 확인할 겸 한 번 더 해 볼까?"
능청스레 대놓는 시치미가 제법 일품이다. 말로만 그치려는 것이 아닌지 장난스레 손을 뻗으러다 그만두었다. 치아키가 넘어져서 생긴 자국을 지우는 모습을 보니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발로 걸어오지 않아서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유심히 살펴본다면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는 짐짓 태연스러운 투로 눈사람을 가리키고 딴소리를 했다.
"너무하네. 그래도 학생회장인데 말이야. 하기사 일학년 때는 기억하기 힘들기도 하지. 그다지 볼 일도 없고 말이야."
상대의 교복으로 보아 상대가 일학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학생회장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에 섭섭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이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웃으면서 '역시 조금 더 기억에 남도록 힘을 써볼 것을 그랬나.'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그것도 아주 잠시. 하네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네라. 후배 양의 이름이 맞구나. 분명히 친한 후배...라고 듣긴 했는데 말이야. 이름으로 바로 부를 정도면 친한 것이 맞는 모양이네. 나에 대한 얘기? 호오. 그건 조금 궁금해지는데? 나에 대해서 뭐라고 들었어?"
흉을 보거나 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냥 확인차 그렇게 물어보긴 했으나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가벼운 표정으로 보아 말을 안한다고 해서 딱히 기분이 상하거나 할 일은 없어보였다. 말해주건, 말하지 않건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의 자유라는 듯 그는 두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한편 손을 뻗으려고 하는 그의 모습에 손을 잡으려던 치아키는 이내 손을 치우자 이내 뻘쭘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도 손을 내렸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손의 감촉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엄청 차갑지 않았나. 얼음물에 들어있는 얼음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눈을 잡아다가 슬쩍 갖다댄것이 아닌가 싶어 제 목을 만져봤으나 축축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체 뭐지? 조금 이상하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던 와중 눈사람을 묻는 질문에 치아키는 고개를 돌려 눈사람을 바라봤다.
"일부러지. 교문 앞에 눈사람이 있으면 신기할 거 아니야! 사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하핫. 후배 군에게는 비밀로 해둘까."
눈사람으로 교문 앞을 싹 막아버리는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고 말을 할까말까 고민을 하긴 했으나 이내 치아키는 입을 꾹 다물면서 오른손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살며시 가져갔다. 쉿. 소리를 내면서. 이어 그는 가만히 땅에 있는 하얀 눈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린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름을 못 외우고 찾아간 탓에 그렇게 장난을 쳤던 쿠로사와 씨니까요.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도 됐을텐데 삐딱하게 말해버리고 말아서 눈을 피해버립니다. 그러고서 생각해보면, 쿠로사와 씨도 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는 건 제가 그 때 이름도 모르고 계속 의심했던 것 때문에 안 좋은 이미지로 남아서 기억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사과해야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믿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안 헷갈립니다. 이제 안 속아요.”
쿠로사와 씨는 장난꾸러기인 것 같습니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얼굴들이 여럿 지나가요...... 이제 안 속는다는 말은 확신보다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럼 제가 진짜 타카나시 하네라고 생각하세요?”
심부름은 사실이라는 말도 못 믿게 만들면 어떡해요! 유치하지만 쿠로사와 씨의 말을 따라했어요. 똑같은 장난에 당하면 어떤 기분인지 쿠로사와 씨도 알아야 합니다.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게 옅어지는 기분이에요... 계속 장난을 치면 못 믿게 되는게 당연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렸다가, 계속 장난에 당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심부름 이야기에요. 정말 심부름은 사실이라면 선생님을 찾아가야 하는걸요.
#사랑한다는_말을_기대했냐는_말을_들은_자캐의_반응 “기대하지 않았어. 당신도 알잖아? 나에게 있어서 기대는 피안에 피는 꽃이나 다름없다는 걸. 그러니까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어.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도, 욕조에 몸을 담그거나 쌀밥을 입에 넣을 때에도, 새로 돋아난 잎사귀를 보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볼 때도, 그리고 꿈을 꾸는 때까지도, 나는⋯ 나는⋯. 당신의 「사랑한다」는 말을 기대하지 않으며 살아 왔어. 한 순간도 빠짐없이, 온 진심과 전력을 다해 「기대하지 않으면서」 살아 왔는데⋯. 후후.”
#자캐가_방송한다면 게임 스트리머(를 빙자한 휴방 아티스트). 좋아하는 게임을 하면 조회수가 낮게 나오고, 딱히 할 생각도 없는 걸 하면 레전드를 찍는다네요. 저챗을 하다가 잠든 사건이 유명합니다.
#자캐의_가장_큰_고민거리는 아무래도 뱃속의 원령들이겠지만, 그건 이미 습관/무의식의 경지에 달해 억누르고 있으니 패스⋯. 그렇게 되면 그 다음 대답은 아무래도 ‘나 냄새 나진 않겠지?!’겠네요. 그리고 그로 인한 샤워중독()
>>324 눈사람을 만들거나, 길에 쌓인 눈을 치우거나, 눈천사 만들고 있거나(?) 이것저것 귀여운 상황은 많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럼 그건 선레 쓰는 쪽에 맡기도록 할까요? 선레는 다이스로 정해도 괜찮은데 저도 곧 자야 하다 보니 한두 번 핑퐁하고 킵해야 할 것 같기는 하네요.
눈 덮인 흙더미에서 떡잎 한 쌍이 뻗어나와 있는 모습과도 같다. 햇살을 받으며 흔들리고, 새파란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그 자태는 강한 생명력, 혹은 끊임없는 의지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감동적인 풍경일 수도 있다. 이런 겨울에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을 보면 어딘가 뭉클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키구치 요이카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땅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뻗어 나온 그것은 새싹이 아니라 커다란 눈더미에 거꾸로 메다 꽂힌 요이카의 두 다리였으니까.
「으으으으음⋯.」 하고 눈더미 아래서 짧은 신음이 들려 왔다. 아니, 아무도 듣지 못했다면 들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
바둥바둥. 두꺼운 양모 바지에 어그부츠를 신은 두 다리가 열심히 흔들렸다. 그러나 눈더미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는 역부족인 발버둥이었고, 애꿎은 오른쪽 부츠만 발에서 빠져 버려서 노란 털양말이 드러났다. 학교 근처의 공터, 어린이들도 많이 다니는 길가에 쌓인 눈을 치우고 나서 「다 끝났다」 하고 자기 몸집만큼 쌓인 눈더미에 부심코 기댔더니 그만 와르르 무너지는 통에 깔려 버린 게 화근이었다. 요이카의 병아리 수준에 달하는 완력으로는 그 무게를 밀어낼 수 없었다. 지친 것도 있었고.
눈 퍼내던 막삽은 저 멀리 가서 꽂혀 있고, 땅에 떨어진 부츠는 똑바로 섰고, 이 날씨에 여기를 지나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고, 아니 몇 명 지나간 것 같은데 눈사람인 줄 안 건가⋯. ‘이대로 봄이 와서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수없이 많은 겨울을 지냈기에 그런 기다림은 익숙했다. 다행히 원령들도 화내지 않았다. 나무는 겨울의 추위만큼은 원망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애초에 왜 눈을 치우려고 한 거지? 그 길을 딛고 누가 오기를 기다렸나? 요이카는 스스로를 원망할 뻔하다가 생각을 멈추었다.
온 세상이 하늘보다 파란 이 눈더미 밑에서라도 조금이라도 짜증을 내면 뱃속의 원한들이 들끓고 솟구쳐서, 이곳 가미즈나가 눈보라보다 험한 꼴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볼을 콕콕 찌르는 냉기에도 무덤덤한 입장을 유지하며 기다리는 것이 옳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요이카는 평온한 마음 상태에 틀어박혔다. 마음의 평정은 눈더미에 쌓인 햇살보다도 하얗다. 길가에는 요이카의 다리가 거꾸로 박힌 눈더미가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