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입김이 하얗게 허공을 물들이는 겨울날이 되었다. 이제는 기말고사도 끝이 나고 방학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만큼 치아키가 하는 업무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야 이제와서는 인수인계를 하고 자신은 완전히 손을 땐 상태였으니까. 아직은 자신이 학생회장으로서 있었지만 졸업식이 끝나면 그것도 더 이상 없었으며 사실상 지금 와서는 그냥 이름뿐인 학생회장이었다.
입시도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그냥 입시를 완전히 끝마치고, 졸업을 하고 어른이 되는 것 뿐이었다.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 생각보다 정말로 빨리 지나갔다고 느끼며 치아키는 뭘 하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빨리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가 한 것은 바로 가방을 갖다 놓고 교문으로 나와서 눈사람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도 제법 크게. 하나, 둘, 셋. 동글동글한 눈을 모아서 몸통을 만들고 그 위에 또 얼굴을 달아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눈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교문 앞쪽에 차르륵 줄을 세워놓듯이 세우고 있었다.
"입구를 다 막으려면 앞으로 10개는 만들어야 하려나."
누가 오기 전에 이거 다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테니까 최대한 만들어볼까. 아. 하지만 그래도 들어올 구멍은 뚫어놓아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좁은 틈 하나는 만들어두기로 그는 마음먹었다. 굳이 길이로 따지자면 옆으로 게걸음을 걸어야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만.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사라져버리고 자신은 어딘가에 앉아서 구경을 해볼까. 괜히 장난끼가 살살 올라와서 그의 미소가 짓궂게 바뀌었다.
"그러면 보자. 보자."
이어 그는 또 다시 눈덩이를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4번째 눈사람을 만들어서 바로 옆에 세울 생각이었다. 물론 누군가가 온다면? 그냥 눈사람 만드는 척을 하던지, 아니면 슬쩍 중단하던지. 그건 그때 상황을 보고 생각하기로 하며 그는 커다란 눈덩이를 3번째 눈사람 바로 옆에 놔두었다. 이제 머리를 만들 차례였다.
"내년 내도록 공부하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기초수준을 시험하고 맞는 공부를 시킬 수는 있지만. 사야카는 가볍게 말하는군요. 진짜 중요한 초등학교 수준부터 해냐하는가 가늠해보지만. 알아보기 전엔 알 수 없죠.
"안 가도 나는 상관없음" 이몸. 금수저. 라면서 어디서 본 듯 그림자에서 금빛 수저를 딱 꺼냅니다. 장난스럽네요. 물론 진짜 금수저들은 대학도 중요시한다지만.
"정말 그걸로 된다면.. 그럴 수는 있음." 생각이 너무 발전하면 안 좋기는 하지만. 사야카는 충분히 용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카라는 존재를... 영원히일 것인가? 그것을 아직도 정하지 못하면 어쩌냐는 듯한 생각도 들면서.. 동시에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고? 라는 게 동시에 들다니.
아직까지도 한해의 시작이 그리 멀지 않은 것만 같은데, 어느새 낙엽도 모두 떨어진 겨울이 되었다. 시간이 원래 이렇게 빠르게 흘렀던가? 가을은 유독 앞선 계절보다도 빠르게 지나간 듯했다. 그가 얼렁뚱땅 입학하여 예정에 없던 학교생활을 하게 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간다. 내년이 되면 학년이 하나 올라 2학년이 될 테고, 하네 역시 3학년이 되어 바빠지리라. 1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속한 위치가 바뀌는 경험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에게는 사뭇 낯선 감상을 가져다 준다. 비량은 이런 생경하고도 즐거운 겨울을 맞아 안 하던 짓을 하기로 했다. 바로 일찍 등교하기! 기상 시간이 되면 알아서 눈이 뜨이는 편이라 지각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태여 일찍부터 학교에 나온 적까지는 없었다. 우당탕탕 와장창 시끄러운 그라고 해도 가끔은 감각적인 아침을 보내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일찍부터 학교에 도착한 그는 교문으로 향하려다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길가의 나무 뒤로 휙 몸을 숨겼다. 남 놀래키거나 장난치는 데 이골이 나서는, 흥미를 자극할 무언가가 있다 생각하자마자 본능적으로 숨어 버린 거다. 한적해야 할 교문 앞에는 누군가가 왔다갔다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를 보아하니…… 아마 눈사람을 만드는 모양인데. 그런데 왜 저렇게 죽 늘어놓은 거지? 적당히 학교에서 혼자 노닥거릴 계획이었는데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나무 뒤에서 나와 정정당당하게 교문까지 걸어가는 대신, 교문에서 서성거리는 그 누군가의 뒤쪽에 휙하고 나타났다─신의 힘을 이렇게나 분별 없이 써먹는 신도 몇 없을 거다─. 그리고는.
"워."
대뜸 상대방의 무방비한 목 뒤쪽에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뒷목에 차가운 손 집어넣기 공격이다! 피하지 못했다면, 뒷목에서부터 사람의 손에서 느낄 수 있는 '차가운' 감각과는 다소 궤가 다른 기묘한 서늘함을 느꼈으리라. 가벼운 장난질이니 그래봤자 괴이하게 느껴지는 감각까지는 아닐 테지만. 그는 이내 손을 떼고 방긋 웃어 보였다.
갑자기 워하는 소리와 목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에 치아키는 깜짝 놀라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아파라. 작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울상을 짓고 엉덩이를 손으로 토닥토닥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하게 넘어진 것은 아니니 금방 아픔이 가라앉겠지만 대체 누가 소리를 질렀나 싶어서 그는 소리가 난 곳을 바르게 바라봤다. 그러자 웃으면서 뭐하고 있냐는 남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아 치아키는 가만히 표정을 찡그리고 빤히 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그렇게 생각을 하다 그는 아! 소리를 내면서 두 손을 짝 쳤다.
"그때 후배 양과 왔던 그..."
아마 친한 후배라고 했었던가? 물론 그 이전에도 만난 적은 분명히 있었다. 물론 제대로 만났냐라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포인트를 걸고 가위바위보를 한 것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치아키는 제 옷을 가볍게 턴 후에 언제 놀랐냐는 듯이 일부러 얄궂게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이렇게 부지런한 학생회장님은 흔치 않단 말이지. 물론 이제는 그냥 이름만 학생회장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눈사람을 만드는 중이었어. 후배 군. 우리 전에 한 번 본 적 있지? 포인트 관련으로 말이야. 와. 그때는 폭풍처럼 지나가서 정말로 뭔가 싶었다니까. 그리고... 마츠리 때도 우리 신사에 온 적이 있었고. 아. 이건 기억하기 힘들려나. 됐어. 나만 기억하면 되는거지."
그렇잖아? 동의를 구하듯 그렇게 말을 하며 치아키는 이내 키득키득 웃어보였다. 일부러 얄궂게 웃는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그렇게 웃는 것인지. 어느 쪽이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얀 눈밭 위에 도장처럼 찍혀있는 자신의 엉덩이 자국을 괜히 발로 슥슥 밀어서 지워버리면서 그는 린에게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리고 방금 그건 뭐야? 일반적인 차가운 손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뭘 내 목에 집어넣었다가 뺀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