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몇 번째라고?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잘 못 들었는데 한 번만 다시 말해주면 안 돼? 아~ 내가 타카나시 양의 한 손가락에 꼽히는 친한 사람이라니 잘못 들은 거겠지? 첫 번째라고 했던 것 같은데 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한 번만 더 들으면 따악 잘 새길 수 있을 텐데!"
이 양반, 하는 소리 들어보면 당연하게 분명히 제대로 매우 또렷하게 아주 잘 들었으면서 능청이다. 첫 번째라니 엄청 좋다! 그저 의리로 하는 말일 거라거나 선의의 거짓말일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 않았다. 설령 거짓말이라고 해도 듣기 좋으면 그만인걸!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못해 아예 몸 옆으로 이리저리 기울이면서─흡사 '너 울어?'라며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그 장난과도 닮은 깐족이다─ 왔다갔다 깐족거렸다. 거 참, 가장 친하다는 말 곧장 취소당해도 할말 없는 짓거리다.
"음, 최근은 아니고 아아아주 옛날에 잠깐? 배짱장사 해도 되는 일이나 짧게 하고 치웠지. 엄격하게 하는 일은 당연히 안 했어."
그가 말하는 옛날이라면 서력으로 세 자리 수 년도였을 적까지 가뿐하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절 직장생활은 지금과는 양상이 꽤 달라 그와 같은 신도 어떻게 하기는 했다는 뜻인데, 사실 이 영감님은 재물신이니 따져 보면 처음부터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 말하는 모습을 보니 고민깨나 했겠다 싶어 조금 웃음이 나왔다. 한데 나오던 웃음도 이어지는 살벌한 말에 싹 사라지고 말았다. 지극히 반사적인 작용이었다.
"그…… 우야, 내가 그러겠다고 장담하긴 했지만 설마 된다고 하면 진짜로 그걸 할 생각은…… 아니지?"
아니, 당연히 한 입으로 두 말 하려는 생각은 아닌데 저렇게 차분하게 그래도 되냐고 물어 보면 겁난다! 여하튼 약속을 어길 생각은 아니니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는 이어지는 하네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분홍색 포장지의 선물을 받았다고? 아하!
……뭐?
언제나 똘망똘망 생기 넘치게 빛나던 눈빛이 일순 멍청해졌다. 입도 반쯤 벌리고 굳어서는 우뚝 서서 죽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행히도 그는 몇 초 뒤에 현실을 직시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그, 그러니까 그 선물이 익명이라서 누군지 모르겠다고……?"
누군진 몰라도 가만 안 둬……. 아, 아니 이게 아니지. 그래, 우리 꼬맹이는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당연하고말고! 그는 애써 침착한 척 하네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손이 떨린다……. 바보 같은 도깨비… 말실수 얼버무리려 장난스레 꺼낸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담긴 정성이, 그 모양이 너무 귀중하고 예뻐서 차마 먹을 수가 없을까요?] [기억하고 있기만 하다면, 언젠가는 같이 보러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때에는 못다 한 그 후배님 이야기를 마저 해주시길 바라요.]
4.??? -> 케이 기묘하다. 그리고 알록달록하다. 뭘 표현하려 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백앙금과 찹쌀을 섞은 반죽을 사용한 걸로 봐서는······ 관동 지역의 생과자 종류인 것 같다. 포장 봉투에 묶인 새틴 리본이 기재되지 않은 발신인을 대신한다.
https://postimg.cc/RWNRTSsM
5.린 -> 미유키 부엉이 모양 틀 안에 든 색색의 라쿠간과 별사탕. https://i.postimg.cc/DZ24fCJ9/w621-P1030229.jpg [아, 조금 애매해. 지난번에 이야기 나눴던 '그런 의미'의 연은 아니지만 다른 방향으로 와닿는 건 느껴 본 것도 같거든. 지난하면서도 낙락한 고민이야. 판정은 어찌할까, 나중에 만나면 얘기라도 해 볼래?]
다음부터는 더 작게 말해야겠어요. 아저씨가 능청맞게 늘어놓는 말들을 듣고 있자니,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습니다. 놀리고 있잖아요! 일부러 다 들었으면서 부끄럽게 만들어버리는 거니까요, 그래서 입술을 꾹 물었습니다. 심지어 앞에서 계속 이리저리 깐족거리길래, 아저씨가 왔다갔다 할 때마다 고갯짓으로 시선을 피해요. 그러다가도 왔다갔다를 두 번 정도 하고 나면 눈을 꾹 감아버립니다. 이제 그만하겠다 싶을 때 쯤에서야 다시 눈을 뜨고서 아저씨를 바라봐요. 얄밉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요!
“......아아아주 옛날이랑 지금이랑은 달라요.”
역시 용돈을 절대 안 받겠다고 마음먹길 잘 했습니다. 아저씨가 정말 돈이 많다고 했어도 안 받았을 거긴 하지만요.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진짜로 할 생각은 당연히 없어요. 마츠리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 광장에서 제가 왜 팥을 던지겠어요! 하지만 아저씨를 놀리려고 절대 말하지 않았어요. 오늘 장난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거리면 일부러 살짝, 개구지게 웃어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표정을 지워요.
“비 씨?”
부끄러워하던 중이라고 해도, 아저씨가 오히려 이렇게 조용해지면 놀라서 쳐다보게 돼요. 분홍색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많이 놀라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제가 받은게 믿기지가 않으니까, 아저씨가 이런 반응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돼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어서 속으로만 허둥지둥거리고 있으면, 아저씨가 말을 꺼냈어요. 그래도 다행히 금방 충격에서 조금 돌아온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거려서 대답해요.
“......아저씨...?”
아무래도 아저씨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괜히 말했단 생각이 새록새록 듭니다. 어깨에 올라온 손이 떨리고 있는데, 이만큼이나 충격일 줄은 몰랐습니다...... 믿지 못 하는 정도까지만 생각했어요. 아저씨의 떨리는 손 위에 제 손을 살짝 올리려고 해요. 떨릴 때는 잡아주면 조금 나을 지도 모르니까요.
이리저리 왔다갔다, 장난질은 속 시원할 때까지 마음껏 하고서야 끝이 났다. 샐쭉하게 전해져 오는 시선을 마주하자 그는 겸연쩍은 척도 않고 온 힘을 다해 개운하고 낙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이런 얼굴 보면 말을 말자고 하기도 하잖나. 아양으로 넘어가기의 다른 버전이다.
"아무튼 내 먹고 살 걱정은 않아도 된대도. 그래서 용돈은 얼마가 좋다고?"
이 아저씨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 하나도 이해 못했다! 아니, 다 알면서도 안 준다는 선택지는 한쪽에 갖다 치운 거다. 별 수 없지. 정 안 된다면 다음 시험 때는 치졸하고도 은밀하게 소매넣기하고 잽싸게 도망가야겠다! 시커먼 속내는 절대 꺾지 않을 것처럼 당당한 얼굴이다가, "으, 으응. 앞으로 잘하마……." 무서운 소리에 뻔뻔하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이래서 약점 잡힐 말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거다. 물론 하네가 정말 그걸 약점 삼을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말한 거지만. 그렇게 생각한 그는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고 하네를 슬쩍 보았다. ……보았다가 못 본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반가운 미소가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건 처음이다……. 그러나 목욕하자는 말 들은 개처럼 저 혼자 하찮은 위협에 떨고 있기엔 이어지는 화제가 너무도 경악스러웠다. 그는 잠깐 저세상으로 떠나 있던 정신머리를 수습하고 퍼뜩 대답했다. 달달달 떨리던 손도 하네의 손바닥이 닿자 떨림이 멎었다. 그는 그대로 하네의 어깨를 토닥토닥 인자하게 두드려주었다.
"응, 나 멀쩡하단다. 역시 하네야. 인기인이구나."
그런데 어쩐지 목소리가 지나치게 침착하다. 늘상 활달하고 떠들썩하던 말투도 어디 과학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나 나올 법하게 점잖아졌다. 게다가 '우야'나 '우-쨩'이나, 주책맞게 길고 부끄러운 애칭이 아니라 평범하게 이름 두 글자로 부르고 있다. 이 양반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었나? 아무래도 정신머리 아직 다 안 돌아온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은 지극히 멀쩡하다 믿는 채로 그는 차분하게 상황을 복기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얄밉다고, 그래서 나름대로 부루퉁하게 쳐다봤는데 아저씨가 활짝 웃어버려요. 그럼 더 얄밉기만 한걸요!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가, 아무도 이쪽에 관심이 없는걸 확인하고서... 얼굴을 꾸깃꾸깃 잘 뭉친 종이뭉치처럼 찌푸리고 싶었지만, 그 정도까지는 하지 못하고 조금 찡그리기만 합니다.
“비 씨 과자나 사먹으세요.”
용돈을 안 받겠다고 이렇게 주구장창 말했는데도, 아저씨는 용돈 줄 생각 밖에 안 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칠 시험의 갯수를 생각하고, 그때마다 아저씨가 용돈을 주겠다고 할 생각을 하니까 아찔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2학년이라 다행이에요. 아저씨랑 똑같이 1학년이었다면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피하지 못했을텐데, 1학년 동안은 용돈을 받을까봐 걱정할 일 없이 다녔으니까요... ‘바보 아저씨.’ 소리내지 않았으니까 세이프입니다. 아저씨가 풀죽은 듯 해보이니까 입모양으로 장난쳤어요. 아저씨가 못 본 척하는 것도 조금 웃음이 나버려요. 히히 소리없이 웃고는 아저씨가 다시 보기 전에 지워버립니다.
“전혀 안 멀쩡합니다...... 인기인 아니거든요.”
아저씨가 이상한 것도 이상한 거지만, 제가 인기인이 아닌 것도 아닌 거라서 걱정하다가 말고 꼬투리를 잡았어요. 충격에서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완전히 고장난 것 같습니다. 아저씨가 이름 두 글자로만 부르는 걸 얼마만에 듣는데요! 떨림은 멎었으니까 손은 떼었지만, 토닥임을 받는 건 아저씨여야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고, 신이 고장났을 때 어떻게 하는지 가족들한테 물어둘 걸 그랬습니다......
“......하고 싶어요.”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습니다. 답하기 곤란한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을 곱씹느라였어요. 과분한 선물을 받았으니까, 선물에 대해서 제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잠시 미뤄두고 답장에 대해 먼저 답했어요. 누군지 전혀 알지는 못 하지만, 답을 할 수 있다면 누구더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요. 마음에 대해서도요, 화과자에 대해서도요. 사과도 하고 싶습니다. 잘못 보냈다고 생각한건 실례니까요. 그리고...... 또 한참을 다물고 있다가 작게 입을 엽니다. “놀랍고, 잘 안 믿기고, 고맙고, 걱정되고 그래요.” 얼굴을 들기 민망해서 숙였는데도, 다시 얼굴을 가립니다. 이번에는 눈까지 전부 다요...... 얼굴이 따뜻한건지 손이 따뜻한건지 모르겠습니다.
낙엽은 퇴비가 된다. 잿빛으로 변해서 여위고, 밟히면 바스라지고, 점차로 흙을 닮아 가는 그런 낙엽들은 모두 나무가 땅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 주고 남은 껍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낙엽을 치운다든지, 태운다든지, 태워 버린다든지, 특히 태워 버리는 일이 키구치 요이카에게는 딱히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공간에서는 별개다.
이곳 가미즈나고를 비롯해 요즘의 도시는 바닥이 온통 콘크리트, 또는 콘크리트로 만든 보도블럭이라는 작은 벽돌로 뒤덮여 있어서 땅과 나무가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잎사귀가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블럭 틈새로 자라난 민들레에게는 다소나마 도움이 되겠지만, 나무도 낙엽도 민들레도 그런 일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팔랑, 하면서 빗자루로 치올린 낙엽 하나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바닥의 습기에 조금 젖어 있어서인지 바스락이 아니고 팔랑이었다. 요이카는 그 낙엽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다가 「회장」을 만났다.
“⋯아이자와.” 성씨를 떠올리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싸리비의 긴 자루에 팔과 뺨을 기댄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이네. 수학여행 때 고마웠어.”
어느새 바람을 쐬면 몸이 떨릴 시기라서, 요이카는 교복 밑에 받쳐입은 후드티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꾸벅 인사를 건넨 다음에는 오래된 일에 구구절절 감사를 덧붙이는 것도 아니다 싶은 건지, 도망치다 길 위에 멈춘 낙엽을 길가로 쓸어 버리고 다시 묵묵히 근처에서 비질을 계속했다. “⋯당신,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데서 빗자루질이나 하고 있어? 「회장」이잖아.” 요이카는 말할 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열중해서 그런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