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관계이기는 하더라도 친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어른 취급 받으면서 필요할 때는 친구도 하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어김없이 감동 받았다는 양 반짝반짝한 눈을 하는 꼴이 오늘도 한결같이 주책이다. 가만히 두었더라면 그새 무슨 추억을 장착했을지 모르니 화제가 전환된 건 차라리 다행이었을 테다.
"용돈 주는 건 막 쓰는 게 아닌데?"
애당초 그 정도 지출로 쪼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다른 누구도 아닌 하네에게 쓰는 건 '막'이 아니다! ……그런 것치곤 애를 고생시킨다고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혼자만 쌩쌩하게 기운 넘치던 그는 한발 늦게서야 하네를 보고 머쓱하게 침음했다. "잠깐 쉴까?" 양심이라는 건 이 나이가 되도록 잘 모르겠어도, 하네가 좋아야 그도 즐거운데 벌써부터 진 빠지게 만들었다면 큰일이다!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저쪽에 가서 앉아 있자며 한구석의 벤치를 가리켰다.
"너한테 줬으니까 네 거 아니야?"
역시 우리 꼬맹이라면 인기도 많겠지! 선물 받은 당사자보다 자기가 더 좋아서 의기양양하다가, 이어지는 말에 고개가 갸우뚱한다. "엉뚱한 사람 이름이라도 적혀 있었어?" 아니, 그거라면 모르겠다는 말이 아니라 확실하게 잘못 왔다고 했겠지. 눈 깜빡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그는 이내 가벼운 투로 말했다.
"잘못 왔어도 아무튼 받은 사람이 임자…… 음, 농담이고. 나도 좀 받았지."
아차. 하마터면 비도덕적인 소리를 할 뻔했다. 그는 제 발언을 무마하기 위해 평소처럼 짓궂은 소리나 하며 넘어가려 들었다.
찬물 끼얹어버리는 말은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하지는 못하고 대신 변명하듯이 말이 길어집니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지만 분명 못지 않게 오래 본 사이인 것도, 알고 지낸 사이인 것도 맞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어요. 아저씨한테 여태 쌀쌀맞게 군 걸 생각하면 진작에 멀어진 사이가 됐어도 할 말 없는데, 지금은 친하다느니 말하고 있으니까 당연합니다. 이 뻔뻔함이 창피한 거예요.
“막 쓰는 거 맞거든요. 그러다 빈털터리 됩니다.”
아저씨가 신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했습니다. 아저씨가 인간이었더라면야 만날 일도 없었겠지만요. 용돈을 받아도 쓸 곳도 없는데 아저씨 지갑을 지키는 편이 나아요. “심심하다면서요.” 심심하다고 제 교실까지 찾아왔었으면서 쉬자는 말은 저 때문인게 분명해요. 아저씨 속도를 쫓으려면 숨 가쁘기는 했지만 쉬어야할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저씨가 가르키는 벤치 쪽을 바라보았다가, 도착하자마자 구경하고 있었던 부스 쪽을 바라봐요. 비교할 필요도 없었지만, 역시 아저씨한테 재밌어보이는 쪽은 부스 쪽 같습니다.
“...누가 줬는지 모르겠어서요.”
아저씨의 질문에는 고개를 가로저어서 대답합니다. 엉뚱한 사람 이름이라도 적혀 있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거예요. 제게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걸요. 하나 빼고는 전부 익명, 메세지를 읽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던 건 하나 뿐입니다. 받아서 기쁜 마음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걱정되기도 해요. 잘못 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빼고, 제대로 받았다고 해도 어떤 답례를 누구에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감사 인사조차 전할 수도 없고, 저를 과분하게 생각해주는 누군가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단 사실 때문입니다.
“남의 거 말고 제대로 받은 거 맞아요?”
혹시라도 잘못 온 걸 아저씨가 차지해버렸을까봐 말꼬리를 물었습니다. 설마, 농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만요.
“너무 많이 받아서......”
아저씨가 놀릴 확률과 조언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가늠해봅니다. 생각조차 없었던 화과자들을 많이 받은 것도 받은 거지만, 역시 분홍색 포장지는 신경쓰여요. 결국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립니다. 눈만 가리지 않고 아저씨를 흘끗 바라봐요. “......놀릴 거예요?” 놀리지 않겠단 말부터 들어야겠습니다.
"또래 같은 느낌은 처음이라서! ……어, 그런데 방금 친하다고 해 준 거야? 얼마나 친한데?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
대번에 화색이 된 그가 척척척 거리를 좁히고 다가온다. 제 두 손 꼭 마주잡고 사뭇 들떠서는 말이다. 친한 정도로 순위 매기면서 부담 주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걸 어쩌겠나. 그러고 보면 요즘들어 하네가 조금은 더 살가워진 듯해 더 유난인 건지도 모른다. "빈털터리 되면 일하고 살지 뭐. 가끔은 직장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 그는 빙글빙글 웃고는 잽싸게 손 들어 기습적으로 하네의 이마를 꾹 누르려 했다. 역시 아무것도 안 하고 얌전히 있기엔 손이 근질거리지 뭔가! 이건 볼 꼬집는 것보단 덜한 장난이니까 봐줬으면 좋겠다.
직접적인 말이 돌아오지 않았어도 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괜찮겠지. 그는 더 권하지 않고 부스들이 모인 자리로 후다닥 바쁘게 향했다. 때마침 자리가 빈 곳이 있기에 거기로 갔더니, 앞선 손님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잠시 자리를 정리 중인 상황이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해 그 앞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하네의 말에 고개를 까닥 기울이며 말했다.
"친구라고 말하긴 조금 애매한 사이라고 생각해서거나, 자기가 누군지 알아맞혀 보라고 그런 거 아냐? 잘못 준 건 아닐 것 같은데."
본인은 지금까지 전부 이름 밝히면서 보냈으니 정확히 무슨 심정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러모로 복합적으로 고맙다는 심정은 잘 모르는지라 논점이 조금 빗나간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그러다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난 내 이름 제대로 적힌 것만 받았어." …역시 농담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더라면 큰일이었겠다. 그건 그렇고, 농담으로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이 받았다는 건 역시 우리 착하고 예쁜 꼬맹이답게 기특한데, 그걸 넘어 뭔가 일이라도 있는 듯한 낌새가 보인다! 눈치없는 그라도 어느 순간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애당초 이런 고민거리 들어주려고 학교에 오기도 했고! 그도 조금은 진지해지기로 했다. 그는 두 주먹 굳게 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