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을 일이 되기는 했지만요. 메이드복을 입을 일도, 이상한 페이스페인팅을 할 일도 없으니까요. 괜히 선배님 말 꼬투리나 잡고 있는 제가 유치합니다... 빨리 페이스페인팅을 하는게 낫겠단 생각이 들 정도예요. 계속 틱틱대고 있는 것보다야 차라리 눈 꼭 감고서 모르는 사람에게 페이스페인팅을 받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 그리는데 하루종일이 걸리지는 않을테니까요...
“안 알려줄래요.”
가을에서 다람쥐, 다람쥐에서 도토리까지 두번 정도 꼬았으니 어째서 도토리가 나온건지 이해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설명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도토리를 좋아하는지는 비밀입니다. 어째서 도토리를 고른건지 모르게 하려는 장난이에요. 도토리에 대해서 좋다, 싫다 하는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지만요. 그리고서는 선배님이 계속 얄밉게 웃었던게 기억나서 저도 조금 짓궂게, 살짝 웃어봅니다. 장난스럽게 웃는 건 그냥 웃는 것보다 조금 쉬운 느낌이에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장난치기 좋아하는 가족들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
생각이 읽힌게 분명합니다! 저도 모르게 치사하단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삐죽거렸어요. 차라리 물어보지 말고 작게 그려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이미 작게 그려버린 후 후에 작게 그렸다고 무슨 말이 나오면, 크게 그리라는 말은 없지 않았냐고 시침떼면 되니까요......... 그러다보면 줄이 줄어들어서, 선배님이 먼저 하라고 이야기를 해왔어요. 선배님에게 순서를 미룰까도 싶었지만, 이러나 저러나 코앞에 닥친 일이라는 생각에 순서가 뭔 상관인가 싶어졌어요. 굳게 마음을 먹다보니 해탈한 걸지도 모릅니다... 자리에 앉아서 두 눈을 꼭 감았어요.
“ㅈ, 잘 부탁드립니다.”
페이스페인팅이 끝나고 나면, 거울을 보고 그림을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바로 선배님에게 자리를 넘겼을 거예요. 도토리 그림을 골라주고요.
"수상한데? 분명히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도토리에도 꽃말 같은게 있었던가? 아니. 도토리가 아니라 도토리나무겠지? 아마?"
꽃말에 대해서 그다지 자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ㅡ물론 물망초꽃처럼 너무나 메이저한 것들은 몇 개 알고 있긴 했다.ㅡ 치아키는 괜히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분명히 무슨 의미가 있을텐데 도저히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찝찝함을 애써 잊으려고 하면서 그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이내 하네가 자리에 앉고 페인팅을 받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괜히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하네의 얼굴에 하네. 그것도 천사의 날개. 역시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완벽한 초이스라고 생각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이름은 치아키. 아키에서 혹시 도토리를 따왔나? 하지만 가을하면 보통은 단풍 아닌가? 그렇게 다시 생각을 하는 와중, 하얀색 날개는 점점 완성이 되었고 이내 페인팅을 하는 이는 완성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예쁘게 잘 그렸다고 말해왔다.
자연히 다음은 치아키의 차례였다. 그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고 자신의 오른쪽 뺨을 내밀었다. 붓질이 제 뺨을 간지럽히듯 춤을 추는 것에 그는 몸을 약하게 떨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겨우겨우 참으며 도토리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기다렸다. 정성스러운 붓질은 괜히 간지러우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졌고 치아키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그의 뺨에 도토리가 활짝 피어났고 그는 핸드폰을 꺼내 셀카모드로 제 얼굴을 확인했다. 뺨에 남아있는 도토리 그림이 괜히 앙증맞은 느낌이라서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데? 이거. 괜히 귀엽고 앙증맞은 느낌이야. 그리고 후배 양의 날개도 되게 귀여워. 하핫. 역시 내 센스도 아직 죽진 않았다니까."
괜히 자뻑을 하면서 치아키는 키득키득 웃었고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살며시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