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버리기는 했는데, 제가 이런 인사를 하는게 맞는건가 싶어서 머뭇거리듯 말해버렸어요. 아니, 아예 물어보기라도 하듯이 말 끝에서 음이 올라갔습니다. 제가 감히 수고했다는 말을 해도 되나 의문이 들어버린 탓이에요. 선배님이 학생회장으로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고생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면 겉치레 인삿말 같기도 합니다. 물론 ‘자업자득’ 이라는 말을 해버리는 것보단 나았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역시 얼버무리고 싶은 기분에 손을 들어서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려버렸어요. 하지만 계속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고, 거기다 선배님이 선뜻 친구하자고 해주셨는데, 어떤 사람이 친구랑 대화할 때 그러겠어요. 선배님이 입을 여시면 우물쭈물 다시 선배님을 바라봅니다.
“......”
순식간에, 메이드와 집사, 카페, 엄청 손님들이 몰렸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표정이 굳었어요. 제가 선배님이었다면 분명 도망치고 싶었을 거예요. 도망쳤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옷을 입는 것도 무리고요, 카페처럼 사람들을 마주해야하는 일도 무리고, 그런 와중에 손님들이 많이 몰렸다는 것까지 전부 무리입니다! 표정이 더 굳어가기 전에, 표정 관리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표정을 지웁니다. 선배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 같아요. 그러니까 학생회장도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잘 띄웠어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을 때 고개 숙였던 것보다 조금 더 깊이 숙였어요. 목소리는 인사했을 때보다 작아졌지만요... 다른 생각을 해서입니다! 고개를 들어올리면서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감사해하는 얼굴은 웃는 얼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래도 작게 잠깐 웃는 것 정도는 이제 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살짝 웃을 수 있었어요. 물론 민망해서 금방 고개를 숙였습니다. 등불이 필요없다고 말해놓고서, 정반대로 등불을 띄워버리기까지 했으니까요. 놀려도 할 말이 없어요.........
살짝 웃는 모습을 보이다가 고개를 깊게 숙이는 그 모습에 치아키는 두 손을 살며시 휘저으면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의 사정은 알고 있었고 그녀의 입장에선 자신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이 어떻게 큰 일이겠는가. 아무튼 잘 띄웠다는 것에 분명히 자신의 할머니. 즉 키즈나히메가 크게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치아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에게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치아키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야 보는 것으로는 모르지. 잠깐 친구랑 따로 움직이는 걸 수도 있고, 친구가 나처럼 뭐 먹을 거 사러 간 것일수도 있잖아?"
이어 치아키는 제 손에 쥐고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 입 베어먹으면서 그 시원함을 만끽했다. 이내 아이스크림을 쥔 손을 살며시 아래로 내리면서 치아키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면서 제안했다.
"일단 나도 카페 일을 하다가 비번인 날이거든. 그래서 혼자란 말이지. 후배 양이 괜찮다면 같이 둘러볼래? 물론 따로 선약이 있다면 거절해도 괜찮아. 그럼 나는 나대로 다른 이를 찾아보면 되니까. 학생회장이랑 대충 여기저기 둘러보는 경험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절대 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핫. 물론 별 의미없는 경험이지만. 그런 거."
괜히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치아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 거절한다고 한다면 그것도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혼자서 못 둘러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를 부르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문뜩 떠오른 궁금증을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괜히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때 마츠리 때 같이 온 이는 누구야? 봄에 내가 QR코드를 찍게 하는 작은 이벤트를 했을 때 나에게 점수를 가져간 후배이긴 한데... 친구? 아니면... 깊은 인연을 다지고 싶은 누군가?"
일부러 치아키는 끝 부분은 조금 얄궂은 목소리를 냈다. 허나 어쩌겠는가. 여름의 마츠리인 토미시비 마츠리는 일단 인연이 더욱 깊어진다는 전승도 있지 않던가. 무슨 소릴 들을진 모르지만 역시 이 포인트를 놓칠 순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일부러 얄궂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들어간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해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요이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가 눈을 데굴 굴리며, 다시 탁자를 내려다봤다.
“으음, 이거다! 하고 와닿는 건 없, 어서..... 으음, 미안해요!”
정말 이 가운데에 마음에 드는 것은 자신에겐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하던 그가 요이카와 탁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혹시, 점 같은 거 칠 수 있어요? 타로나 뭐 그런 거. 그거하고 이걸 끼워맞춰서 팔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사실, 이거 보자마자 포츈하우스 같은 느낌이 났거든요. 간단하게 점을 보고 이걸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업! 같은? 아, 이거 너무 오X아X 같은 건가.”
그야 당연히 잡동사니만 한가득 가져다 놓았으니 사람의 이목을 끌 리가 없다. 범려나 자공, 백규가 살아 돌아와도 이런 걸 팔아치울 수는 없을 것이다. 키구치 요이카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가 찰랑 하고 이마 밑으로 늘어졌다. 그러고 있다가, 점 이야기를 듣자 눈을 가린 머리카락 너머로 시선을 들어올린다. “⋯점?”
그런 방법이 있었나? 요이카는 점의 종류를 머릿속으로 열거해 본다. 신사에는 오미쿠지를 뽑는 통이 있고 흉한 운세는 나뭇가지에 묶어 흘려보낸다. 점을 치고 그 점을 파훼하는 방식이다. 또는 이름으로도 점을 칠 수 있는 모양이지만 요이카는 사람의 이름에 약하다. 같은 반의 학생들이 손바닥을 한참 주물거리며 손금을 보거나, 아침마다 TV에서 언급된 별자리를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점이다. 그러나 요이카 자신은 점을 칠 줄 모른다. 물론 왕년에 제법 많은 인간의 인연을 이어 주었고, 재액이 쉬는 해에는 온 들판에 풍년이 들게 만든 적도 있다. 그런데 그걸 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인연을 잇고 풍년을 부르는 그런 일은, 두 눈에 보이는 것을 두 손으로 잇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요이카는 그런 것보다도 눈앞의 물잔을 들어서 옮길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해 농사의 풍흉을 미리 아는 것에 집착했다. 그 해 팔백만 석의 소출이 나온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고 해도, 실제로 가을이 되어 손에 쥐는 쌀 한 줌의 가치만 못할 텐데. 그래도 요이카는 선심을 못 이겨서, 파종 시기에 웃긴 옷차림을 하고 자기 앞에 몰려들어 온 사람들에게 농사의 결과에 대한 힌트를 알려주고는 했다.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모습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결과를 잘못 해석했다.
“당신 농사 지어?” 요이카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말했다. “대충 올해 몇 만 석인지 정도는 귀띔해줄 수 있는데.”
아니,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방금 한 말은 잊어. 그래도 시험 삼아 당신이랑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래봬도 나는 감이 좋으니까. 올 가을 원예부실에서 키우는 코스모스의 꽃잎이 몇 개일지를 보지도 않고 알아맞혔고, 오늘 내가 싸 온 점심 도시락 메뉴도 이미 알고 있지. 심지어 오십음도에 들어 있는 가나가 몇 개인지도 나는 알아.” 그렇게 술술 말하면서, 요이카는 아무 탄자쿠나 뒤집어서 ア부터 ン까지 가타가나의 오십음도를 그렸다. 46개다. 이어 가슴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을 책상에 있던 짧은 실로 자기 손가락에 묶는다. 손을 들어올리자 펜이 손가락에 매달린 채 오십음도 위에서 흔들렸다. “아무 질문이나 해 보겠어? 재화, 인연, 운수, 운명⋯. 당신이 알아도 될 정도까지는 알려 줄 테니.”
배려는 당연하지 않아요. 등불을 나눠주는 건 신사의 사람으로서 해야할 일이었을 지는 몰라도,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을까봐 다른 분이 아니라 선배님에게 등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건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입니다. 심지어 필요없다고나 말해버렸드니 괘씸해서 안 도와줬어도 아무도 뭐라 못 했을 거예요. 이런 말들을 말하지는 못 하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선배님한테 무언가 보답할 수 있을만한게 있으면 좋겠는데, 입시가 코 앞인데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돼요.........
“...안과 가보세요.”
축제에서 저랑 노는 것보다야 다른 사람이랑 노는게 더 재밌을 거란 건 굳이 비교하여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전 눈에 띄고 싶지 않아하고, 낯선 사람은 커녕 소중한 연이 되어버린 친구 사이에서도 부끄럽다고 툭툭거리기만 합니다... 제가 괜히 망치게 될 것 같아서 친구가 있어도, 없어도, 어느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축제에서 같이 다니자고는 말할 수 없어요.
“후회해도 제 탓 아니라고 한다면요.”
그러니 선뜻 선배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선배님은 분명 같이 놀 다른 사람이 많을 것 같으니까요, 굳이 저랑 재미없게 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약도 없고, 친구하자고 해준 선배님이니까 괜찮을 것도 같지만, 그건 제 입장만 생각한 거니까 못 되게도 남탓을 해버리는 거예요. 재미없어서 후회하게 되어도 선배님 탓이라고 해버리겠다는 못된 심보입니다......... 그러다 마츠리 이야기를 꺼내니 눈을 깜빡거려요. 아저씨에 대해서는 비밀이 많으니까, 일부러 ‘어디의 누군진 모르겠지만’ 라고 말했을 때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가 나와버리면 둘러댈 말이 필요해져요. 저번에 와타누키 씨에게는 친한 후배라고 말했었으니까, 이번에도 친한 후배라고 말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친한 후배예요.”
이미 아저씨는 제게 과분한 인연입니다. 정말로 운이 좋았는걸요. 아저씨는 운이 나빴고요. 차라리 언니나 오빠들 중에 한 명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아저씨랑 즐겁게 같이 학교에 다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17년을 알고 지냈으면 이미 깊은 인연이 아닌가 싶어요. 저한테는 평생이니까요.
안과를 가보라는 그 말에 치아키는 히잉.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하네를 빤히 바라봤다. 설마 여기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될 줄이야.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이전에도 손이 더럽다느니, 지금도 안과를 가보라느니. 뭔가 모르게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그 모습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좀처럼 감을 잡기 힘든 이 후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그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지는 말을 쭉 들으며 치아키는 일단 조용히 침묵을 고수했다. 후회해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부분에서 특히 주목하며. 물론 뒤에 있는 친한 후배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는 적당히 넘겼다. 그다지 중요한 상황도 아니고 자기 입으로 친한 후배라고 한다면 친한 후배인 것이니까. 그보다는 왜 '후회해도' 라는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어 치아키는 가만히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마저 입에 집어넣고 천천히 그 달콤함을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켰다.
"나야 혼자 다니는 것보다 누구랑 다니는 것이 좋긴 한데... 왜 후배 양은 내가 후회한다고 생각하는거야? 아. 설마 후배 양이 후회한다는 그런 이야기려나?"
그 달콤함을 완전히 집어삼킨 후 치아키는 살며시 고개를 내려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고 했다. 평소와 다를바 없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그와는 별개로 내 탓으로 해도 상관없어. 내가 권유했고 내가 같이 다니자고 했으니 그야 원인과 결과론적으로만 따져보면 내 탓인거지! 하핫."
그렇게 말을 마친 후 치아키는 다시 고개를 들었고 쭈욱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켠 후에 다시 팔을 내렸다. 분주하기 짝이 없는 주변을 잠시 바라보던 치아키는 이어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녀에게 살며시 물었다.
"그럼 후배 양은 어디로 가보고 싶어? 후회하지 않도록 처음에는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같이 갈게. 아. 남자 출입금지 구역 이런 곳은 곤란한 거 알지? 그 외라면 정말로 조용한 녹차 마시는 곳이라도 괜찮아. 이래보여도 나. 녹차라던가 꽤 좋아하거든. 집이 신사라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꽤 많이 마셔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