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이 가라앉았던 네 시선을 다시 들어 올릴 만큼 당혹스러웠던 걸까. 그러면 미유키는 무구한 얼굴로 고개만 슬쩍 기울이고, 따라 눈만 깜빡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이라는 네 말에 미유키는 다시금 입매를 당겨 웃는다. 우연이라. 하지만 우연이 우연으로만 흘러가지 않고, 인연이 된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 널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제 눈에 들어온 것처럼. 네가 선배들의 눈에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을지. 미유키는 네 물음에 어깨를 으쓱인다.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라. 학생이니 그러면 안 되는데, 게을러지게 되네요."
학생으로서의 본분이라는 것이 있으니 열심히 하였던 것이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떠날 텐데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모범생일지도 모르는 네게 선배로써 나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까. 미유키는 네 반응을 살핀다. 그리고 너와 이렇게 대화하며 걷다 보면 편의점 앞인지라. 들어가는 문 앞에 선 미유키는 널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는다.
귀 엽 다 여우가 제 말을 알아들은 건지, 그냥 아무 의미 없이 고개를 움직인 건지는 몰라도 만약 정말 여우신이 맞다면 신 주제에 꽤 경박한(?) 느낌이다 제 손을 핥아대고 사람 앞에서 배까지 벌렁 까뒤집고 아무튼 미카는 좀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복슬복슬한 배털을 만지작댄다 보들보들
"아까 그 선배는 어디 갔을까?"
한껏 느슨해진 표정으로 여우를 만지다가 문득 궁금해진 듯 혼잣말한다 안경 선배도 여우에 관심이 은근 있어보였는데 아니면 그 선배가 이 여우라던가...? 합리적 의심(?)
알기 쉽지는 않다는 답변이 돌아오자 퍼뜩 고개가 돌아가서 사에를 바라본다. 쓸데없이 엉뚱한 데 보지 말라며 교정당한지 아직 1분도 안 지났는데 말이다. 그러다가도 또 수작 부렸다는 사실을 들켜버리니 고개 돌린 적 없는 척 다시 앞만 보며 시치미를 뗀다. "내 수강생로서의 열의 넘치는 시선을 착각한 게 아닐까?" 알기 쉬운지는 몰라도 단순한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도 변명은 꽤 그럴싸하다. 진작에 편히 앉았던 그는 인사하는 듯한 그 동작을 멀뚱히 바라보다 뒤늦게서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발레도 이런 예절이 따로 있는 모양이지. 금방 끝나 버린 수업이지만 배운 입장인데 저도 따라해야 할까 고민이 짧게 들었다. 하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니 마저 가만히 앉아있기로 한다. 그나저나 두 번밖에 안 되는 짧은 만남 이래 사에가 이렇게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방금 전에도 똑같이 생각하긴 했다─. 이번에도 그는 반짝반짝하던 기세가 왜인지 한풀 꺾여서는, "어어, 글쎄……." 비교적 침착해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고개 갸웃거리며 생각하는 티를 내었다. 당연한 사실을 갑자기 설명하려면 으레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생각을 안 해 둬서 말이다. 그는 잠시 그러다 답을 내놓았다.
"대충… 살인청부, 사업 비리, 성적조작, 시간이동, 부활, 영생, 뭐 그런 범죄나 일반적으로 금기시 될 일만 아니라면?"
예시를 들어가며 손가락이 차례로 하나씩 접혔다. 설마하니 사에가 예시로 든 것들을 정말로 부탁할까 싶기도 하지만 약관 항목이 괜히 길어진 게 아니니까. 이제는 다시 씩씩함을 되찾은 낯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급하게 덧붙였다.
"……아, 여기서 나가달라거나 저리 가라는 소원은 안 들어줄 거다?"
본인이 평소에 남들 귀찮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족 덧붙이면 오히려 더 초라해 보이는데도…….
학생이라고 누구나 공부를 하고 대학에 진학을 한다는 건 편협한 사고입니다. 말실수를 했는지도 몰라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눈을 깜빡거립니다. 고향이 멀리 있는 걸까요? 타지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는 얼굴이 하나 떠올라서, 조금 마음이 쓰입니다. 나홀로 타지 생활은 힘들고 외로울 것만 같은데, 이렇게 상냥할 수 있다니 신기해요. 우산 끝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봅니다. 너머로 편의점이 가까워져요.
“......우산, 품절일 수도 있으니까 기다려주세요.”
들어가는 문 앞에서 걸음은 멈춥니다. 우산 아래에서 나와 편의점 차양막 아래에 서요. 선배님이 발을 돌려버리실까봐 불쑥 멋쩍은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우산을 안 쓰겠다고 거절을 해놓고, 지금은 부탁을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거예요. 하지만 선배님을 붙잡아둘 핑계가 기억나지 않았급니다. 선배님에게 줄 간식을 사올테니 기다리라 말할 수는 없잖아요! 선배님의 답을 들을 시간도 부족해서 서둘러 편의점 안으로 들어갑니다. 빠르게 우산이랑............ 어느 간식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하나씩 다 집어요.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 비싸지 않고, 양이 적은 낱개 포장 위주로요. 사탕은 맛 서너가지 정도, 초콜릿 하나, 젤리 작은 봉지입니다. 결제도 서두르고, 어서 편의점 밖으로 나옵니다. 손목에 걸린 우산, 두 손에는 간식을 들고 나왔어요. 선배님이 계신다면 간식들을 내밀고서 감사 인사를, 힘내서 할 거예요. 선배님이 안 계시다면............ 정말 반으로 찾아가야할 지도 모릅니다.
# 막레로 받을 수 있게 써왔어. 미유키가 떠났을지 안 떠났을지만 미유키주 마음대로 해주면 될 것 같아. 😊 그리고 아픈 것 같은데 무리말고 푹 쉬고 훌훌 털어버리자. 🥲
도리어 되물어오는 질문에 미야나기가 단호하게 끄덕였다. 이 신님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들 중 가장 뒤를 짐작하기 힘든 존재임에 틀림없다! 종종 파악 가능한 면모도 있긴 했지만, 언제 어디로 튈지 전혀 예상이 안 되니 대체로 그렇다. 그러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뚝 떼는 모습에 결국 학을 떼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냥 본인이 적응하는 게 제일 빠를 것 같다.
귀를 기울여 경청하던 미야나기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더니 기어코 경악했다. 어떻게 든 예시마다 이렇게 쇼킹할 수가! 게다가 뒷부분 역시 원하기는커녕 괜히 엮이기도 싫은 일투성이다. 부활? 살릴 사람도 없다. 영생? 제발 평범하게 죽고 싶다. 시간 이동? ······이건 조금 혹하네. 여하간 기막힌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그녀가 곧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님프가 호수 위를 걷듯 산뜻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진다 싶더니 금세 뒤에서 종이를 뜯어내는 소리가 났다. 다시 나타난 미야나기는 빈손이 아니었다. 그녀의 곁으로 푸른색 포스터 한 장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짠! 눈꼬리를 둥글게 휜 그녀가 얼른 두 손을 들어 포스터를 넓게 펼쳤다. 세상에. ’무용부 신입 부원 모집’? 단칼에 거절당할 부탁만 고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본인은 되도 않는 요구라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인지 꽤나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미야나기는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종이 위의 글씨를 톡톡 훑었다.
“사실 중도 입부는 원칙상 안 되지만······ 그 정도 권한은 저한테 있겠죠. 부원이 되면 여기서 나가지 않아도 돼요.”
요컨대 절충안이라는 거다. 보통은 입부를 하느니 차라리 당장 나가려 할 테지만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나 보다. 열심히 설명을 보충해가며 제안하는 입가에 반짝거리는 미소가 함박 걸려 있었다. 미야나기는 포스터를 착착 예쁘게 접어 그의 손에 억지로 들려 주려 했다.
“열심히 하시면 이번 예무제에 설 수 있을 거예요. 마린스키 발레단의 마리아 호레바가 딱 이맘때쯤 발레 시작한 거 알아요? 유럽이나 러시아는 안 돼도, 아메리카는 제가 책임지고 보내드릴 수 있어요!”
그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운좋게 적절한 발등과 골반, 무릎을 갖추기까지 했다면야 유럽도 문제 없다! 또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다. 무용수의 자질을 가름 짓는 결정적인 요건이니 말이다. 물론 이런 쓸데없는 고민은 애초에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미야나기 씨는 꿈을 좀 깨시길 바랍니다······.
이 신은 원래부터 모르는 상대에게도 거리낌없는 성격이니 케이의 짐작은 잘 들어맞은 것이다. 그는 상대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어, 그러니까 아는 사이였던가? 인간 신분 이름으로 부르는 걸 봐선 학교 학생인 모양인데 어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표정으로 뻔히 보였을 테다.
"엥, 나 유명인이었어?"
그렇게까지 튀는 짓은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 양반의 괴상한 행동거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이 이 생각을 들었다면 백이면 백 이마를 탁 치며 한탄했으리라. 그는 무심한 기질이 있어 제게 당장 중요하지 않다 여긴 사건들은 홀랑 잊어버리곤 했지만, 적어도 자기를 아는 듯한 신이 누구였는지 곰곰이 생각할 정도의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있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얌전히 듣다가…… 듣다 보니…… 아하! 뭔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하다!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그가 외쳤다.
"아! 그 친구의 친구……라면 그, 뭐더라…… 늑대?"
여우가 갯과이긴 하지만 한참은 틀렸다. 어쨌건 완전히 모르는 사이인 줄로만 알았던 때에도 꽤 좋은 첫인상이었는데 친구의 친구 쯤 되는 신이라면 더 반갑다! 그는 악수하자는 의미로 한쪽 손을 척 내밀고는 말긋말긋한 눈으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악수에 응해 주었다면 위 아래로 휙휙 야단스럽게도 흔들었을 거다.
"나도 소개를 해야 할 텐데 이미 아는 것 같으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무튼 반가워, 이 이름을 알고 있으면 당신도 학교에 다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