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자취를 하는 이상 금전관리는 알아서 해야 했다. 돈 쓸 일이 생겨 지갑을 뒤져 보던 그는 때마침 귀찮은 일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금이 없네. 귀찮게. 필요하다면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정 급한 게 아니라면 되도록이면 인간 법으로 합법적인 돈을 쓰는 편이 더 낫기야 하니까……. 그는 겸허히 끔찍하도록 찜통 같은 공기를 무릅쓰고 밖으로 나서기로 했다. 물론 나가서 5분만에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일 오전에 나올 걸 그랬다. 후회하면서도 꾸역꾸역 은행에 도착했을 때는, ATM이고 뭐고 그냥 에어컨 바람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원래 용건은 집어치우고 곧장 은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그를 반겨주었다. 금방이라도 초주검이 될 것만 같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러던 것도 잠시, 기쁘게 냉기를 만끽하던 그의 귓가에 불쾌한 소음이 내다 꽂혔다. 평소라면 달리 신경쓰지 않았겠으나……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짜증나게!
"더운데 열 내면 아저씨만 손해야. 거 진정하고 앉아서 심호흡이라도 합시다. "
다가가서 냅다 한 대 때리…지는 못하고, 그대로 그 진상을 번쩍 들어서 제 옆구리에 끼웠다. 마음 같아선 접어 버리고 싶지만 까딱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참아야지. 다 큰 어른이 소형견처럼 깜찍하게 들려 버리니 수치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은행원을 상대로는 끝없이 샘솟던 용기가 힘에 밀리자 온데간데 없어진 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빽빽 소리 지르며 시끄럽던 양반이 순식간에 과묵해졌다. 그는 그대로 그 진상을 들고 한구석에 있는 대기용 의자로 향했다. 억지로 붙잡고 눌러 놓으면 얌전해지리라는 생각이었다.
"실례 좀 할게."
마침 남은 자리가 별로 없어서 부득이하게 기존 방문객의 옆자리에 앉혀 둬야 할 것 같다. 그는 먼저 앉아 있던 손님에게 조심스레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도 말투는 반말이었지만. 아무튼, 평소에 남의 눈치 보지 않는 그라고 해도 '소리 지르느라 땀 뻘뻘 흘려대는 시끄럽고 추잡한 아저씨'를 바로 옆에 앉히는 처사는 좀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Q. 여름 방학이라고 놀러 온 쌍둥이 동생이 다리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을 때 가장 어울리는 말은? A. 비명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쌍둥이 동생의 다리 깁스. 그 때, 머랭쿠키를 굽겠다 생크림을 만들고 있던 쥰은 휘핑기를 그대로 든 채 굳어버렸다. 크림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 챈 레이가 "왜 그러고 있어!! 바닥 닦아야지!" 하고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계속 굳어있었을 예정이었다. 구기부에 들어가서 활동하는데, 다리를 다쳤다며 별 거 아니라는 동생에게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제 동생을 부축하며 거실로 데려왔었다. 역시, 동생인 척 하고 한 번 그 운동 동아리를 뒤엎어야.... 따위를 생각하던 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혼자서 동생과 같이 먹을 음료를 테이크아웃 해야 했다.
밖으로 나온 쥰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더웠다. 매우. 띠링, 소리와 함께 쌍둥이 동생에게서 메일이 왔다. 고생한다 뭐 그런 말이겠지! 하며 기대한 그는 메일을 열고 잠깐 얼어붙었다.
「좋은 쌍둥이 형은 아픈 쌍둥이 동생을 위해 시럽을 세 번 추가한 아이스바닐라라떼를 사와줄 거라 믿어♪♪o(・x・o∪ ∪o・x・)o♪ 오늘 저녁은 시소잎을 넣은 고기 춘권이 좋겠어(*´∀`) 형을 생각하는 마음 알아주기 바라+゚*。:゚+(人*´∀`)+゚:。*゚+. -影」
"........ 죽일까."
집에 있는 게 환자가 아니라 웬수가 아닐까. 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카페에 도착했을 무렵, 그는 테이블에 누워있는 사야카를 발견했다.
"어...?"
같은 반 학생을 여기서 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뭐어, 그는 올 해 처음 보는 학생들이 많긴 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서도. 다가갈까, 어쩔까 따위를 고민하던 쥰이 슬그머니 사야카에게로 다가가서, 테이블에 손을 가볍게 통, 통 두드렸다.
"안녕, 키리나즈메씨."
빙긋 웃으며 쥰이 인사를 건넸다.
"덥지 않아? 방학인데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네. 여기 카페 자주 오는 편이야?"
자신이 일어나서 행동을 하기 전에 방금 들어온 것 같은 누군가ㅡ공교롭게도 신이었다ㅡ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대신 했다. 그리곤 그 진상을 옆구리쪽에 끼는 것을 보면서 다른 직원들 및 은행 업무를 보러온 이들과 같이 속이 시원해짐을 느꼈지만, 그가 그 진상을 데리고 자신의 옆으로 오는 것으로 인해 이내 티벳 여우 표정이 나올 뻔 했지만 참았다. 왜냐하면 그 신이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저도 일어나려고 했거든요.”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훨칠한 덩치의 젊은 남학생 두 명이 선 채로 진상 손님을 내려다보자 진상 손님은 이내 쪽수에서도 밀리고 왠지 모를 위압감에도 밀리게 되었다. 엉겁결에 자리에 앉게 된 남자에게 케이가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다시 한 번 얘기 해 보시죠.”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는 똑똑히 다 들었다. 워낙 소리가 컸어야지. 그러니까 대출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요건이 되지 않아 돈을 빌려주지 않자 땡깡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진상은 차마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크흠, 어른들이 하는 일에 애들이 신경쓰는 거 아니다!”하며 꼰대 발언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자연스럽게 나가려고 했다.
"그럼 쿠로인 걸로." "쿠로...사와였나." 이번에는 색깔이 되어버렸으나. 그래도 제대로 된 것을 기억해낸 뒤에 쿠로라고 부르는 건 애칭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사야카는 주문한다는 쥰을 잠깐 바라보다가 으.. 하는 소리를 냅니다. 분명 귀찮아서였을거야. 쥰의 질문에
"아직 안시킴..." 그렇지만 신사랑 콜라보한 음료는 시킨다는 건 확정이라고 한 다음에...
"디저트는 배불러." "콜라보메뉴 디저트는 2인용이라서 혼자는무리" 단품 파블로바정도를 시키면 괜찮으려나 같은 생각은 하지만 메뉴판의 디저트들은 생각보다 커보이니까. 직원호출벨을 누르고는 음료를 시키려 합니다.
아저씨를 앉혀 놓은 그는 자리를 비켜준 손님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말까 하는 듯싶고. 내가 이런 신을 알았던가? 골똘히 생각하기엔 당장 눈앞에 신경써야 할 일이 있어서 일단은 미뤄두기로 했다. 그보다 이 진상 손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니까 똑같이 아저씨라고 지칭되는 입장에서 좀 신경쓰인다. 난 절대 이런 아저씨는 되지 말아야지…….
앉혀 놓고 그 다음에 어쩔지는 생각 안 했는데, 옆에 있던 신이 때마침 딱 좋은 말을 대신해주었다. 짜증은 좀 냈다지만 내심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아마 잘 모르는 사이일 텐데 은근히 죽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돌아온 것 말 돌리면서 도망치기다. 결국은 진상질이라 들어 봐도 별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지만, 그래도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말을 안 하면 사람이 열받잖아!
"어른이시니 인생 조언이라 치고 좀 가르쳐 주시죠? 아, 완전 궁금해서 다리에 힘이 풀리네?"
지금 눈앞에 있는 그 애가 본인보다 열 배는 족히 더 먹었을 텐데!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킬킬거리다 급기야 진상에게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서 도망가려는 손님의 다리를 붙들고 바닥에 앉아버린다. 제게 불편을 줬으니 응징하려는 생각은 아니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괴상한 성격이라 그만……. 그리고는 힐끗힐끗 케이를 바라보면서 한 마디 거들어 달라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잘 알지도 못하는(비량의 입장에서는) 신에게 이심전심을 바라고 있으니 이 도깨비도 참 경우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