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기운을 믿던지, 믿지 않던지는 결국 개개인의 자유인데 웃으면 어때? 코웃음치더라도 내가 믿으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치아키는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누가 비웃건 말건 신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당장 자신의 가족만 해도 혼인의식을 치룬 어머니를 제외하면 모두 신이었다. 어머니조차도 언젠간 신이 될테니 결국 신의 기운은 물론이고 신 역시 믿지 않으면 자신의 가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태연한 마음으로 그렇게 대답하고서 치아키는 제 물음에 대한 요이카의 말을 들으면서 가만히 요이카를 바라봤다. 정말 뚫어져라, 얼굴 한가운데에 구멍이 생길 정도로 정말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그는 결국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와. 데카르트 이론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수업하면서 배웠는데 뭔가 묘하게 오묘한 말이지 않아? 그거? 그건 그렇다고 쳐도 후배 양은 철학쪽을 좋아하는거야? 보통 그런 책은 잘 안 읽는 편이니까 조금 신기한걸? 아. 읽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야. 나도 책은 어느 정도 읽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철학자 책은 잘 안 읽는 편이거든. 하하하. 후배 양. 공부 엄청 잘하고 그런 거 아니야? 살짝 학생회 일원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인데?"
당연히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 이전에 미카에게도 이야기한 것처럼 반 정도 장난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에 가까웠기에. 괜히 두 어깨를 으쓱하며 치아키는 이내 오렌지 맛 사탕을 꺼내서 요이카에게 내밀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치아키는 딸기 맛 사탕을 꺼낸 후에 자신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 산길을 오를 땐 당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래야 힘이 나고 에너지가 나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산길이 그 정도로 높고 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녀가 따라오기 쉽도록 치아키는 발걸음을 조금 더 늦췄고 발에 힘을 줘서 오르막을 올랐다. 그렇게 약 십 분 정도 걸었을까. 아마 신이라면 절로 느낄 수 있는 신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동굴이 눈앞에 보였을 것이다. 그 옆에는 낡은 신사도 하나 있긴 했지만 치아키는 그곳에는 그다지 눈을 주지 않았고 철문이 열려있는 동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와. 전에 탐사왔을때는 철문이 닫혀있었는데. 진짜로 열려있긴 하구나. 아무튼 저 안이야. 성스러운 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좋아. 들어가볼까? 아. 혹시 어두운 것을 싫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일단 동굴이니까 어둠을 싫어한다거나 좁은 것을 싫어한다면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물론 그렇게 좁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과연 동굴 안에 있는 샘은 어떤 느낌으로 생겼을까. 물 마실 수 있을까? 그 기대감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그는 동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요이카의 대답을 그는 기다렸다.
볕이 들어오는 큰 창이 있는 방에서 춤출 수 있다는 것은 무용수에게 있어 큰 행운이다. 임대료와 소음 문제로 적지 않은 스튜디오가 햇빛은커녕 곰팡이나 피는 지하층에서 운영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사용 요금을 지불할 필요도 없는, 탄성 마루까지 구비한 넓은 홀을 마다할 정신 나간 댄서는 단연코 없다! 미야나기 또한 그런 연유에서 구태여 방학 중에 학교를 찾았을 것이다. 학기가 끝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텅 빈 건물은 불과 며칠 전과 동일한 공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선 기류를 드리운다. 창틈으로 쉴 새 없이 밀려들던 활기와 웃음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눈 내린 듯 고요하기만 했다. 덕분에 무용실 내부는 아돌프 아당의 사랑스러운 음악만으로 온전히 채워질 수 있었다. 한창 40초 가량의 발로네를 유지하고 있을 쯤이었다. 이후 짧은 연기를 보여주며 곧바로 마네주를 돌아야 했으므로 그녀는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소리를 들어버린 것만 같은 건 순전히 착각일까? 중반부 즈음 이어지는 바이올린 선율에 순간 잡소리가 섞여 흐름을 날카롭게 끊었다. 미야나기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착지하다 말고 발목을 접지를 뻔했다. 그녀는 얼른 음악을 멈추고 가만히 서 귀를 기울였다. 이 노크 소리가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면 정말 더할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다. 그러나 건축 구조상 다른 장소에서 난 소음이 벽을 타고 들리는 경우도 충분히 있기 때문에, 미리 걱정을 사서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밖에 누군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 틀림없이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무용실을 찾은 다른 부원이겠지. 그녀는 헐벗은 레오타드 위에 얼른 리허설 스커트를 두르며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되나?”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기에 미야나기는 한동안 창을 등지고 서있어야 했다. 어두운 지하 방에서 기현상을 겪은 일은 종종 있었지만, 햇빛 환하게 들어오는 지상층에서 이런 기막힌 일을 겪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녀는 텅 빈 차가운 복도를 조용히 노려보며 속으로 숫자를 천천히 세었다. ······하나, 둘. 다섯까지 세면 뒤도 안 돌아보고 죽어라 뛰는 거다.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으스스한 짓을 한 건 맞다. 그렇지만 말이다, 이쪽으로 올 생각 않고 그렇게 단호하게 나가버릴 것처럼 굴면 안 되지! 얘, 관심 좀 주려무나! 사에라면 공포영화에 등장하더라도 초반부터 현명하게 행동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으로는 올 생각도 않으니 말이다. 좋은 판단임은 확실하지만 그렇게 나오면 이렇게 열심히 부르는 귀신 섭섭하지 않나! 못된 장난질 한 건 본인이면서 외면당하니 왜인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단다. 염치도 없지. 그는 창 바깥쪽에 딱 붙어서는 성냥팔이 소녀라도 된 심정으로 사에의 뒷모습을 은은하고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또 유리를 쳐댄다. 똑똑 두드리는 노크가 이제는 쿵쿵거리는 우악스런 소리가 되고, 후에는 아예 열고 들어가려 문을 미느라 창틀 덜걱거리는 소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창은 안쪽에서 잠겨 열리지 않았다. 오늘은 시원한 바람도 불지 않는 무더운 여름날이니 당연했다. 그러잖아도 괴이한 상황이 한층 더 공포스러워졌건만, 유감스럽게도 놀래켜주겠다 마음먹었던 처음 속셈과는 달리 문전박대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정말로 별 생각이 없는 상태로 이 짓을 하고 있었다. 급기야는 이런 수를 쓰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에가 바라보던 복도의 바닥에서 무언가가 꾸물거리다 먹으로 쓴 듯한 검은 글씨가 떠올랐다.
어 디 가 ?
눈에 안 보이는 각도에서 글씨를 쓰려니 필체며 간격이 영 들쑥날쑥했다. 그나저나 신의 힘을 문 열고 들어가는 데 쓰면 될 것을 엉뚱한 용도로 쓰고 있지 않나. 하지만 후에 회상하기를, 비량은 관종이었기에 제 쪽에서 열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존재감을 어필하는 편이 더 좋았단다…….
문 좀 열어 봐
창문 밖의 기이한 무언가 역할에 제대로 심취했다 착각할 법한 짓거리였다. 마지막에 붙은 되도 않은 그림과 문자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PLZ🙏🏻
……사람 해치러 온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이런 없어 보이는 멘트를 치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도. 뒤를 돌아 창문을 본다면 낯익은 술꾼이 한껏 하찮고 불쌍한 표정으로 눈 반짝거리고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돌아봐 주지 않았다면 이윽고 이런 그림이 추가로 떠올랐을 것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허나 고등학교 3학년의 여름방학이 어떻게 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이제 토모시비 마츠리라는 커다란 마츠리가 코앞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준비도 있어서 치아키는 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숨 쉴 시간은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무튼 신사에서 주로 입을 듯한 진한 남색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치아키는 집에서 나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바깥 공기도 마시고 신사 일도 조금 돌볼겸 나온 것이었다. 하루종일 집에 앉아 공부를 하기보다는 역시 한번씩 밖으로 나와 신사를 둘러보고 정리할 것을 정리하는 것이 그의 성미에도 맞았으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어쨌건 장차 이 신사는 그가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니까. 그게 유일하게 인간으로서 태어난 그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아무튼 새전함이 있는 곳 근처로 다가가자 누군가가 눈에 보였다. 누가 참배를 하러 온 것일까. 일단 말이라도 거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꾸벅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상대에게 인사를 올렸다.
"키즈나히메님을 모시는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키즈나히메님에게 인사 올리실건가요?"
이곳에서 모시고 있는 키즈나히메에게 참배를 하러 오는 이도 있었으나 가끔 신기하다는 이유로 구경을 오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어도 별 상관은 없었기에 치아키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필요한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불러주세요. 소개가 필요하다거나 부적이 필요하다거나, 혹은 그 외 기타 요소가 필요하다거나. 아. 하지만 너무 안쪽으로는 들어가주지 마세요. 몇 주 후에 있을 마츠리 관련으로 이것저것 있다보니."
이건 혹시 꿈이었을까? 연습하다 잠깐 선잠에 드는 일도 종종 있는 편이니 일리 있는 추측이다. 만약 이게 꿈이 맞다면 얼른 잠에서 깨어나야 할 텐데. 온몸의 솜털과 머리카락이 죄다 닭살처럼 삐죽삐죽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아까는 그저 평이하게 두드리는 수준에 불과했던 소음이 점점 요란스레 쿵쿵거리다가는, 이제 꼭 누군가 창문을 열려 시도하려는 양 덜컹거리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애써 지나가는 바람 소리라 스스로를 속일 수도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도망가자! 그나마 잠가뒀던 창문의 걸쇠가 애처롭게 버텨주고 있는 듯해 아직 늦지 않았다. 미야나기는 다 무른 토슈즈의 밑창을 세게 짓밟으며 황급히 줄행랑을 놓으려 시도했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나, 도망길마저 곧바로 막혀 완벽히 실패했다. 그녀는 대리석 위에 들쭉날쭉 적히는 글씨를 말도 안 된다는 듯 빤히 관망했다. 일반적으로 유령이, 저, 저런 일까지 할 수 있었던가? 잘못 걸렸다. 이 정도면 단순 잡귀 수준이 아니라 틀림없는 악령이다. 웬만한 제령술로는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PLZ’라는 황당한 글씨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비량 님이에요?”
미야나기가 맥빠진 투로 휙 하니 뒤돌아 섰다. 머리카락을 망으로 감싸 올리지 않았다면 신경질적으로 휘날렸을 몸짓이다. 아니나다를까, 창문 뒤로 보이는 건 익히 봐 아는 얼굴이니 그제야 식도께를 치밀고 토할 뻔한 심장을 도로 삼킬 수 있었다. 깊은 안도감에 짜증 반쯤 섞인 한숨을 푹 내쉬며 얼른 창문을 벌컥 열었다.
“아······ 진짜 놀랐잖아요! 제발 이런 짓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창문 밑 발레 바에 툭 걸어뒀던 타올로 젖은 땀을 닦으며 그녀가 투덜거렸다. 그러는 김에 창틀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도 켰고.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인공적인 냉기가 폐부로 천천히 밀려들었다. 미야나기는 거듭 작게 한숨 쉬다 말고 이내 고개를 사선으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외부인이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도 안 돼요. 얼른 돌아가세요.”
당연히, 들어오는 건 물론이고 밖에서 함부로 구경하는 것도 안 된다······. 애초에 커튼을 내리지 않은 그녀의 잘못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강하게 반발할 힘—깜냥—도 안 되었기에 미약하게나마 째려보는 것 정도에서 소심하게 그쳤을 것이다.
당신의 말에 소녀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말로만 하지 않을 뿐, 생긋 휘어진 눈매나 올라간 입꼬리 등으로 제 말을 싫어하지 않아 다행이라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간다?"
말을 마친 안즈는 당신에게 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그나마 본인이 앞장서 당신이 조금이나마 가려질 것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쌤들, 안즈 왔어요오~!!"
쾌활한 목소리가 교무실을 채운다. 저 오늘도 심심해서 놀러 왔지요! 다들 바쁘세요?? 하이톤으로 와다다 말을 쏟아내는 게 정신없을 법도 한데, 얼마나 자주 그랬는지 다들 익숙하다는 반응이다.
"정말로 심심하기만 해서 놀러 온 거 맞아?"
장난스러운 질문에 안즈는 헤헤 웃었다. 에, 어떻게 아셨대요~? 쌤들 간식 좀 얻어먹고 싶어서 왔는데!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답하는 모습이 능청스럽기 그지없다. 다소 뻔뻔한 말이지만 다들 기분 좋게 웃어넘기고 만다. 뭐 먹고 싶어서 왔냐는 말부터 우리가 간식 자판기냐는 말까지, 여러 답으로 교무실은 순식간에 소란해진다. 자, 판은 깔아졌다. 다들 안즈에게 눈 돌리고 있는 지금이라면 당신에게 관심이 쏠릴 일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