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긴 하지. 그래서 혹시라도 온다면이라는 조건을 건거고. 아무튼 확실히 생각해보니까 딱히 호의적인 말을 들을 이유가 없긴 하네. 우와. 이런 사람 아닌데 후배 양에게는 묘하게 장난을 많이 치긴 쳤나봐. 나."
하긴, 그랬는데 호의적인 말들이 나오면 그게 이상한거지. 그렇게 납득하며 치아키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 와중에 이놈이라는 말이 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게 가장 기억에 남고 여러모로 임팩트가 컸겠거니 치아키는 생각했다. 물론 말해도 또 부정할테니 굳이 말을 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는 다시 한 번 가볍게 두 발로 물장구를 쳤다.
"그래? 그럼 괜히 말했나.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말을 꺼낸 것을 역시 없던 것으로 하자! 라고 할 순 없으니 말이야. 적당히 잊어주면 될 것 같아. 나도 굳이 더 언급은 하지 않을테니까. 정말로 필요없다고 한다면 말이야. 아무튼 상관없다라. 그게 가장 어려운건데.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내 멋대로 해석하도록 할게."
물론 어떻게 해석하는지의 여부는 딱히 알려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치아키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아이는 생각보다 새침떼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에 대해 싫어하는 점을 말해달라고 하니 싫어한다는 점은 없다고 하면서 묘하게 툴툴대고 지금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딱 그 표본이 아니겠는가. 조금은 이 후배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치아키는 가만히 하네를 바라보면서 의미모를 웃음소리를 냈다. 이어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는 다리를 굽혀 오른손을 물 속으로 쑤욱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얀색 조개껍데기를 잡고 손을 밖으로 꺼냈다. 겉면은 정말로 새하얀색이었으나 뒤집어보면 빛을 반사하며 무지개빛을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꽤 예쁘다고 생각을 하며 치아키는 하네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그럼 이건 서로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잘 지내보자는 나름의 선물이야. 우연히 이게 또 보이네. 하하하. 그럼 나는 후배 양이 쉬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슬슬 가볼게. 수학여행 잘 즐기길 바랄게."
다음에 어딘가에서 만나면 인사해주면 고맙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치아키는 바다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며 모래사장을 밟았다. 그리고 주변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후배 양. 아. 그 근처에 조개껍질 예쁜 거 많으니까 더 찾고 싶으면 찾고."
이내 그는 하네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딱히 부르거나 더 이야기가 없으면 아마 그대로 밖으로 완전히 나가서 걸어가지 않았을까.
/슬슬 막레적으로 가도 좋을 것 같으니! 막레로 받아도 되고 막레를 따로 쓰셔도 괜찮아요!
외국에 있어도 한 달음에 달려온다니, 대화를 나눈 것이 이제 겨우 두번째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역시 빈말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기에 장난스럽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결국 웃어 넘긴다. 역시 사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외국으로 나가겠지. 한국어와 중국어는 조금은 할 줄 아는데 서양쪽 언어를 역시 배워두긴 해야 할 듯 하다.
“그래요. 그럼 그 때 만나요.”
눈을 접어 웃으며 이내 작별 인사를 건넨다. 처음 만났을 땐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원래 사건들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법이었다. 인사를 하고 사에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갈 것이었고 케이는 간이 샤워장 쪽으로 향해 갔기에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그 와중에 청포도 주스를 다 마셔 버렸고 이내 동그란 얼음만 남아버렸다. 여우와 신포도 우화가 생겨난 건 확실히 여우가 포도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지난 대화를 거슬러서 생각했다면 여름이 콩쿨 피크라서 지금도 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을텐데, 이 신은 휴가를 나온 직장인이라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아마 마츠리 몇 주 전 쯤에야 콩쿨 일정을 알고 아차하지 않았을까.
/얍. 이걸로 막레 하면 될 것 같아. 일상 돌리느라 수고했어~ 마츠리 기간에 내한공연 보러 가는 구나....!!!! 접률이나 텀 같은 것 신경 쓰지 말고 할 수 있는데 까지만 해보면 되니까~! 어쨌든 잘 부탁합니다(꾸벅)
물론 생선 비린내 따위는 나지 않고, 비늘로 덮여있지도 않지만 내심 이런 동굴에 그런게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리라. 어찌 되었든 마구 난동... 까지는 부리지 않고, 갑작스레 내뱉은 비명 이후에 다시금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 있던 인물은 전혀 물고기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생...선이 아니네. 아니, 이런 어두운 데서 불도 안 켜고 뭐하고 있던거야?"
깜짝 놀란게 멋쩍기라도 했던건지, 상대에게 묻는다. 물론 자기가 할 말도 아니긴 하다. 대충 어디서 본거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눈앞에 있는 상대가 먼저 반말을 했으니 거침없이 반말을 하기로 했다.
수학여행은 꽤나 큰 행사였다. 반의, 학교의 모든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는 그 거대한 테마에 제법 타이트하게 짜여져있는 일정에다가 충분히 보장된 자유시간들. 이미 친구가 많은 사람에겐 또 다른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어쩌면 새로운 인연이나 만남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바꾸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조금이나마 홀로서기에 도전할 수 있는 도전의 장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리오는 홀로서기로 학생회장과 친구-적어도 리오는 그렇다고 믿고있다.-가 되기도 했고 반짝반짝을 찾으러 나가기도 했으며 남 몰래 사온 수영복을 입고 그 생기가득한 무리 사이를 걸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선 조금 흥이 올라서 바다에 발도 담궈보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깊이까지 천천히 걸어가보기도 했다. 혼자 시간을 보내며 혼자 놀았지만 제법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다.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다. 방 밖에서는 웃음소리라던가 이야기소리들이 많이도 들려왔다. 저 문 하나를 기준으로 저 밖은 생기가 돌고 이 안은 새카만 악의가 가득차버려 조금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리오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이부자리를 펴놓고는 다시 그 위에 앉아서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회상했다. 반짝반짝을 찾으러 나간 일과 학생회장과 친구가 된 일, 그리고 생기 넘치던 바다에 들어가 봤던 일. 생각해보면 또 미소가 지어졌다. 제법 훌륭한 홀로서기의 시작이라고 생각돼서 하레하네를 만나면 잔뜩 자랑할 생각이었다.
사실 지금은 혼자서 궁상을 떨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반짝반짝 아니, 바다에서 여기까지 들어오는 길에는 '같이 놀래?' 하고 말해주는 이들도 몇 몇인가 있었다. 자신도 누군가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 분위기를 타서 그러자고 말한다던가 지금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벼운 일탈행위에 참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리오는 혼자였던 탓에 의도와는 다르게 아무 말도 없이 검은 마스크를 쓰고 꽤나 사나운 눈동자로 마주보곤 했다. '싫어'라던가 '그래' 라던가 같은 말을 쉬이 꺼내지 못하고 머릿 속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최선일지르 계속 생각하다보면 '미안, 이치노세양.' 하는 말이 들리고 멀어진다. 그들이 멀어지고 나면 리오는 나직이 '나도 갈래' 하고 조용히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지금 현재.
방 안에 얌전히 앉아서 조금은 멍하니 있었다. 마치 주인이 돌아오길 바라는 강아지처럼 문을 응시하거나 방 이리저리를 돌아다녀보며 '이런게 있었네-' 하고 말해본다거나 조금 높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밤에도 바다가 제법 잘 보인다는 것에 감동하거나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수학여행은 '제법' 완벽했다. 생각하고 있자면 혀 끝에서 단 맛이 도는 느낌이 들었다.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하늘하늘한 솜사탕 같은 단맛이 퍼지는 느낌. 잠깐 눈을 감았다 떠보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조금 휑한 방에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앉아있는 모습. 혀 끝에 살짝 쓴 맛이 퍼지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소꿉친구와 한 방이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잠깐 밖에 있는지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같은 방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평소에도 가끔 저의 집에서 자거나 친구의 집에서 함께 자곤 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또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 '색다른' 경험은 아니겠으나, 누구의 영역도 아닌 새로운 곳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많이, 달랐다. 그러고보면 지금의 이것도 홀로서기라고 볼 수 있겠다. 평소였으면 어디있냐고 잔뜩 라인을 보내거나 밖에서도 꼭 달라붙어서 남들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질투를 느꼈을 것인데 지금은 그런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방에서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다.
잘 참고있다. 정말 꾹꾹 눌러담아 참고있다.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구급상자도 가져오지 않았고 스스로를 상처입힐 만한 자기파괴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악의가 가득 찬 무기들도 가져오지 않았다. 사실 눈을 돌리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다만 그러지 않았다. 오늘, 다시 하레하네를 만나기 까지가 오늘의 홀로서기 도전의 마지막이다. 지금 이렇게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것은 소꿉친구가 돌아왔을 때 오늘 있던 홀로서기의 무용담을 한껏 풀기 위함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