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면서 포근했던 바람도 이젠 따스한 기운을 머금을 때가 되었을까, 그런 작은 변화에 무덤덤한 이들에겐 딱히 와닿지 않을 말일 수도 있지만 뺨을 스치는 바람 한줄기에도 여러 변화가 있음을 알아채는 이들에겐 다가올 다음 계절을 기대하는 때이기도 했다.
축제 이후의 늦봄은 아무리 매사에 예민한 소녀라 하더라도 약간의 여유로움을 안겨주었으며 그렇기에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긴장감도 제법 풀리는 시기였을 터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가미즈나마저 또 하나의 고향이 된 기분일까?
이젠 익숙해지다 못해 눈을 감아도 대강의 위치를 파악할 것 같은 교내 건물들을 바라보며 본관 외곽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 시기의 토끼들은 어찌 지낼런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잠깐의 사색 이후에 가도 딱히 늦지는 않을테니,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던 와중에 반대편에서 어디선가 본적이 있던 인물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에 대비되는 하얀 피부, 어쩌면 자신보다 더 검고 희었을 날카로운듯 하면서도 순한 인상을 언젠가 한번 마주한적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뵙다니, 우연이라 해도 어찌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가물가물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상대방도 그럴지 몰랐으나 그 인상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제 섬기는 이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생김새이기에 더욱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을지도,
나른하게 뻗어오는 봄볕과 졸음을 몰고 오는 바람이 떠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라, 그 봄날의 정취를 퍽 좋아했던 검은 여우, 케이는 교내 주변을 산책하던 중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아, 이나바 님의 아해(兒孩)가 아닌가요. 이곳에서 볼 줄이야....”
퍽 놀랄 일 없는 케이에게도 면식 있는 인간을 이곳에서 만나는 것은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는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가벼운 인사를 건낸다.
그러니까, 예전에 신세를 졌었던 이나바노오키노시로 님이 돌보는 후손 중 한 명이었다. 약 2년 전 인간 세계로 놀러오는 김에 이나바 님의 신사에 인사를 하러 들렀다가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잠시 인사한 것이지만 이나바 님이 얼마나 자랑을 하며 이야기를 하시던지 잊을 수가 없는 인상이기도 했다. 그야 토끼를 닮은 생김새가 딱 이나바 님이 좋아할 만했다. 물론 대체로 모든 신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권속을 사랑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말이다.
“2년 만이로군요. 꽤 거리가 있는 걸로 아는데 고등학교 진학을 이곳으로 온 것인가요?”
이나바 님께 인사할 때에는 굳이 거처를 정하지 않았기에 인간 세계에 나들이를 왔다 하였기에 제가 가미즈나에 있다는 것은 아마 몰랐을 터인데 이곳에서 이 아이를 만난 것은 꽤나 우연이라 신기했다. 이나바 님의 신전과도 가깝지는 않은 거리지 않던가.
이 눈치 좋은 신이 미카의 원망을 모를리가 없다. 잠시 살살 달래어 저 날카로운 가시 잠재워볼까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문을 잠구어 억지로 붙잡은 까닭은, 솔직하지 못한 미카에 괜히 심술이 난 까닭이오, 억지가 통할 것 같은 상대인 까닭이다. 요컨대 잘 붙들어 놓아 이리저리 끌고다녀보면 저 날카로운 가시도 조금 뭉툭해지지 않을까하여 늙은 놈이 꼬장을 부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에이ㅡ 한 번만 도와줘요. 혼자하는 청소는 심심해서 그래요."
도와달라는 것치고는 놈 혼자 척척 잘 해내는 낌새가 있다. 미카가 한 번 빗자루질 할 때 이곳 한번, 저곳 한번, 우리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청소하는 모습을 보니 굳이 미카를 가둬둘 필요도 없어보이는데...
"토끼 만질때는 싫다, 싫다하면서도 한숨 한 번 안쉬더니, 역시 청소보다는 토끼가 좋으시지요?"
"네게 너무 질투가 나." 안즈: ...그렇구나! 사실 네가 무슨 부분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해. 우리는 모두 타인이고 그래서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 응? 아니야, 별말 아니었어. 하여간에 내가 말하고픈 건 이거야. 너도 네 나름대로 멋진 사람이라느니 나는 네 생각만큼 멋진 사람이 아니라느니 이런 말은 너에게 잘 닿지 않을 테니까, 응, 그런 건 스스로 깨달아야 납득이 되는 말이거든! 그러니까 이런 말이나 할까나... 내 멋진 점만을 봐줘서 고마워.
"배워 보고 싶은 취미는?" 안즈: 어... 악기? 건반 같은 거 말이야. 내가 노래할 때 직접 반주를 깔아보고 싶을 때도 있긴 하거든!
"어떤 초능력을 얻고 싶어?" 안즈: 순간이동!!! 학교에 편하고 빠르게 가고 싶어~!!
#shindanmaker https://kr.shindanmaker.com/770083 다들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
이런 곳에서 마주치리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더욱이 1학년과 3학년이라는 아슬한 학년차가 있기에 자신도 놀라는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그와의 첫 만남이 그렇게까지 오래된 일도 아니기에 쉽게 잊힐리야 있겠냐만, 아무래도 더 의외라 여긴 것은 상대방이었는지 잠깐 눈을 깜박이다가 곧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예를 담아 꾸벅 인사를 해보이는 것은 아마도 숨길수 없는 성미였던 모양이다. 그 일련의 행동엔 여전히 절제된 모습이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를 만난 것은 확실한 반가움이었기에 조금은 더 온화한 분위기였고, 항상 애매하게만 느껴지던 표정 역시 조금은 누그러진듯 약하게나마 웃음을 띄고 있었다.
"역시 제가 이곳으로 이끌려온 것도 곧 이리 될 운명이었기에 그러했겠지요."
여러 존재(신), 여러 문화를 배우기 위해 그런 것들이 가장 크게 맞물려있을 가미즈나에 온 것이라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설마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 만날줄이야, 당연히 그럴리 없겠다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이런 극적인 재회 또한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어떻게든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인생이란건 언제나 들쭉날쭉 했으니...
"말씀대로 거리상의 문제가 있기에 걱정거리가 전혀 없다면 그것 또한 거짓이겠습니다만, 배우기 위해 온 것이니 그 어떤 불만도 없답니다. 더욱이, 주신님과 부모님의 조언과 배려 덕분에 이곳으로 오게 되어 이렇게 학교의 선배님으로써 재회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묵묵히 길을 나아가는 제게 주어진 하나의 요행이 아닐런지요?"
다소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뭐라 해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기에 살짝 농담을 던져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신을 섬기는 이라 해도 이곳에서만 그런 신적 존재를 다수 접한 것은 우연이라기엔 조금 작위적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심기 불편한 듯 궁시렁댄다 싫증도 나는지 빗자루질이 영 시원찮지만 알게 모르게 꼼꼼히 쓸어대는 걸 보면 억지로 떠밀렸더라도 대충 할 생각은 없는 성싶다 ...그냥 빨리 나가고 싶은 걸수도 있고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미카는 묵묵히 토끼장을 쓴다 이어지는 말에도 별 대꾸 않지만 빗자루질 하면서도 혹여나 토끼 다칠까 녀석들을 슬금슬금 피해주는 걸 보면 답은 불 보듯 뻔하다
저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어요. 손을 잡아도 괜찮다는 듯이 말해도 저는 잡을 수 없습니다. 손을 닦거나 손수건이 있는게 아니라면 괜히 선배님의 손까지 더럽히는 기분이 들어요. 학생회실 청소를 하고 오셨다고 해도 실내의 공간을 청소한 거랑 화단에서 클로버를 뒤적거린 건 다르잖아요. 제 손이라고 말한 적 없다고 말해버렸지만, 그렇다고 학생회장 선배님의 손이 더럽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선배님을 배려했다고 생각하지 않을만한, 손을 잡지 않을 핑계를 생각하보니까 나온 말이에요...
“장래희망이 블랙 기업 오너에요?”
권력남용이라고 하기는 했지만요, 딱히 권력남용은 아닙니다. 선배님 말씀 중에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화단을 심하게 훼손시킨 건 아니지만 수상쩍어 보이긴 했을테고, 아무것도 안 꺾은 것도 아니니까 할 말도 없어요 .학생회장 선배님은 무릎을 쭈그려서 시선을 낮추었습니다. 이렇게 상냥하신데 기업 오너가 되신다면 블랙 기업 오너가 아니라 대기업 오너가 되실 거에요. 학생회장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만큼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렇다고 떳떳하지도 않으니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가방을 메고 뛰어가면 도망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오늘 무사히 도망치더라도 내일을 피할 수는 없을테니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이실직고를 하는 편이 수첩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네잎 클로버는 다른 곳에서 찾아도 되니까요............
“...꽃은 아니에요.”
쥐고있던 수첩을 펼쳐서 보여줍니다. 수첩의 맨 뒷장 사이에 꽂혀있던 네잎 클로버가 팔랑거려요. 꺾은지 얼마 안 되었고, 수첩 사이에 일부러 힘주어 짓눌러 놓은 것도 아니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네잎 클로버는 빼앗기게 되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시무룩해집니다. 일부러 표정을 지우려고 하는데도 드러날 만큼이요. 입꼬리가 내려가는 것 같아요.
“운명적인 만남이라니. 그런 말을 그리 쉽게 뱉으면 안 되는 거에요. 이곳에 혼인할 이를 찾기 위해 나와 같은 이들이 온다는 것을 이나바 님께 듣지 못했나요.”
물론 케이는 딱히 그런 의도로 왔다기 보다는 그저 오랜만에 인세를 구경하러 온 것이었지만, 고위신을 노리는 이들은 인간들과 인연을 쌓아 혼인하여 고위신이 될 목적인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토아의 말에 대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운명을 말하는 것은 보통의 신과 가까운 이들이 주로 하는 말이지 않던가. 그러니까 장난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죠. 이렇게 만났으니 편한 선배라고 생각하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요. 이번에 갓 들어온 후배님.”
이러한 인연도 인연이니. 예를 들어 선생님들의 시험 문제 출제 스타일이라던가 지금껏 공부해온 노트 정리나 족보라던가. 보통 선배들에게 원할만한 것들을 생각했다.
“아,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줄까요?”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는 아니라지만 날씨는 아이스크림을 먹기에 적당히 따뜻한 날씨이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니, 조금 어린애 취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긴 케이에게 토아는 정말 아주아주 어린 것이 맞지만 말이다.
능청스레 대꾸한다. 물밑을 유영하는 뱀처럼 눈 굴려 바라보니, 조심스레 빗자루질 하는 모습이 퍽 처량하다. 타고나기를 사납지 못하니 목소리에 짜증이 담겨있을지언정 악의까지 담겨있지는 못하다고 해야할까. 그쯤 생각이 미치니 힘껏 세운 가시가 무얼 향하는지보다 왜 존재하는지부터가 궁금해진다. 은밀하게 살피던 시선, 들키기 전에 시치미 뚝 떼듯 거두어진다. 질문을 듣자 그제야 당신에게 집중한다는 듯한 태도다.
"에ㅡ? 문을 잠궈요?"
놈이 눈썹을 높게 올리고는 어깨를 으쓱인다.
"제가 언제요?"
놈이 곁눈질하는 통에 문을 보니... 잠겨있던 자물쇠는 어느새 풀려있다!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걸까? 귀신도 신이란걸 감안하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다. 말했지 않나. 이곳에서 놈이 관여하는 건 토끼가 아닌 울타리라고... 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한편 꿈틀거리는 입꼬리가 못내 짓궂다.
"설마 제가 소년을 가두고 억지로 일 시킬까요? 소년께서 천성이 친절하고 남을 위하니 절 도우신거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손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면 자연히 제 손이 만지기도 싫을 정도로 더럽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치아키는 크게 당황해서 제 손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딱히 더러운 부분은 그의 눈에 비치지 않았기에 혹시나 자신에게 엄청난 원한이 있다거나 미움을 사고 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 하네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로 크게 당황했는지 약간 울망일지도 모르는 눈빛을 보이던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후에 제 손을 열심히 닦더니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손수건을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허나 이내 블랙기업 오너라는 추가타가 날아오자 치아키는 으억! 하는 소리를 내며 제 가슴에 손을 올리고 몸을 약하게 부르르 떨었다.
"...후배 양. 혹시 말이야. 내가 너에게 뭘 잘못했니? 아까부터 뭔가 쿡쿡 찌르는 것이 굉장히 아픈데.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난 신사를 잇는 쪽으로 가고 싶은데! 일단 우리 집이 키즈나히메님을 모시는 신사거든?! 블랙 기업 아니거든?!"
괜히 반사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하네의 눈동자를 다시 빤히 바라봤다. 허나 애써 진정하려고 하면서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하면서 이내 치아키는 평소의 미소를 지었다. 막 이래~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살짝 당황을 한 것은 진짜였지만. 어쩌면 상처 안 받은 척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건 치아키만이 알 일이었다.
아무튼 하네가 수첩 내부를 보여주자 자연히 치아키의 눈에 네잎클로버가 들어왔다. 아직 파릇파릇한 것으로 보아 그 안에 집어넣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며 자연히 방금 뭘 하고 있었는지 치아키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내 치아키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네잎클로버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야기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네. 네잎클로버. 이걸 찾고 꺾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그렇다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 나쁜 짓하는 것처럼 숨기고 그랬어. 자. 자. 입꼬리 내리지 말기! 안 혼내고 벌점도 안 줄거니까. 누가 보면 내가 엄청 혼낸줄 알겠어. 아무튼 네잎클로버라. 가만헤 보니까 나도 찾아보고 싶네."
이어 치아키는 그대로 오리걸음을 걸어서 화단쪽으로 걸어간 후, 그 앞쪽에 있는 풀들을 바라봤다. 어차피 풀들은 차후에 뽑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 중에 네잎클로버가 있다고 한다면 한번 찾아볼까 생각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 집 뒷쪽에도 이 시기가 되면 풀이 많이 자라고 그 중에 클로버들이 굉장히 많은데 말이야. 어릴 때 누나에게 네잎클로버를 선물받은 적이 있었거든. 그 이후로는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보자.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