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리도 믿기힘든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물론 마법을 쓴다면 어려운일은 아니었지만)이었다. 차라리 황제가 여성형 오우거에게 반해 황후로 맞이한다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릴리가 침착하려 애를 쓴다.
"...어머니. 누가.. 누구랑 약혼을 해요?"
아닐거야. 아니어야만해. 애써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지만 그런것따위 신경쓸새가 없었다.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들어준다는 말도 있건만 그게 사실이라면 신은 자신을 버린것이 틀림없다. 그렇지않고서야 통신구 너머 어머니에게서..
-릴리 너와 칼레로아 공자. 이미 약혼서도 넣었단다.-
..같은 말이 들려올리는 없었으니까.
"...대체 왜요! 왜 제가 칼레로아같은 놈이랑 약혼을 해야하는건데요!"
절규와 같은 릴리의 외침에도 어머니 에르아젤의 표정에는 미세한 동요조차도 없었다. 이미 이렇게 됐는데 어쩌겠냐는 어머니의 표정은 릴리를 더한 절규의 구렁텅이로 빠트릴뿐이었다. 릴리의 감정과 함께 동요된 릴리의 마나가 소용돌이 치는탓에 방안의 가구가 흔들리며 창문에는 금이 쩍쩍 갈라질때조차 에르아젤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감정을 내비쳐봤자 달라질건 없겠다고 생각한 릴리가 통신구 속 어머니를 잠시 노려보더니 기숙사를 뛰쳐나갔고 곧이어 한숨소리와 함께 통신이 끊긴다.
기숙사를 뛰쳐나온 릴리가 향한곳은 이 사태의 또다른 주인공이자 (릴리의 주장에 따르면)인생에 도움되는게 하나도 없는 인간(다시한번 말하지만 릴리의 주장이다.)이 이 시간에 있을만한곳이었다. 연무장의 문을 거세게 열어제낀 릴리가 금빛의 커다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연무장을 훑는다. 그러고는 단숨에 이안을 향해 달려가더니 간절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매사 무언가를 할 때, 일심이 되어야 한다고 배워온 그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홀로 연무장에 서서 검을 두손으로 쥔 체 서있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검을 휘두르는.. 그런 생각을 할 때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더니 평소에 아껴쓰던 목검 조차도 내팽개지며 릴리를 째려본다.
" 내가...내가 할 소리야...! 너 같은 선머슴 같은...그런 녀석이랑 약혼이라니! "
자기가 더 억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던 이안은 심지어 울상까지 지어보이며 릴리의 어깨를 잡곤 흔들며 외친다. 절대로 이게 사실일리가 없다는 듯 외치던 이안의 주머니에서 한장의 종이가 떨어진다. 아마도 릴리와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듯한 편지였지만,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 통보나 다름 없는 모양새였다.
" ..너...너.. 뒤에서 음침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랬냐?! 집에 가서?? "
이유라곤 그런 것 밖에 없을게 분명하다는 듯 이안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설마, 하는 눈으로 릴리를 바라본다.
이안의 반응에 릴리는 암담한 현실이 한층 더 다가와버린것만같아 절망에 빠져버린다. 평소라면 제 몸에 감히 손을 가져다댔다는 이유로 이안의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면 길길이 날뛰었을테지만 절망에 빠진탓에 그의 손에 어깨가 잡힌채 팔랑팔랑 흔들릴 뿐이었다. 이안의 주머니에서 삐져나와 바닥에 떨어지는 종이가 제 신세같아 그저 암담하게 바라만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칼레로아 놈의 입에서 나온 끔찍한 말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이안의 손을 쳐낸 릴리가 이안의 정강이를 있는힘껏 걷어찬다. 자그마하고 연약해보이는 릴리였지만 기사출신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탓에 어지간히 아플것이었다. 하지만 그런것따윈 릴리가 신경쓸게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읽어내려가던 릴리가 이를 악물더니 야무진 손길로 종이를 찢어발긴다.
"아아악!! 망했어... 망했다고!! 내가 왜 저딴거랑 약혼을 해야돼!!!"
화가나다못해 억울했다. 자리에서 방방뛰며 억울함을 잔뜩 표출해내던 릴리가 제자리에 서서 씩씩거린다. 어떡하면 좋지? 솜사탕같이 탐스러운 분홍색머리를 쥐어뜯으며 패닉에 빠져있던 릴리의 행동이 일순간에 멈추더니 찬찬히 고개를 들어 스산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릴리의 눈은 반쯤 돌아있었다.
"...그래, 약혼할 사람이 없어지면되는거잖아."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모르겠지만 릴리의 입가에 걸려있는 스산한 미소는 그 생각을 조금이나마 예상되게한다.
힘껏 릴리가 걷어찬 정강이에서 머리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통증에, 이안은 바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진다. 그가 좌우로 이리저리 뒹굴며 통증에 시달리는 동안 릴리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일어난 건 릴리가 편지를 다 읽고나선 찢어버린 후였지만. 숨을 몰아쉬며 일어난 이안은 눈이 돌아간 릴리를 발견하곤 뒷걸음질 친다.
" 너, 너.. 평소에도 훼까닥 돌아간 건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
스산한 미소를 발견한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목검을 집어들며 머리를 쓸어넘긴다. 먼지가 묻었지만, 그의 새하얀 피부는 변함없이 하얀 빛을 띄고 있었다. 물론 이안의 반짝이는 눈은 한껏 경계심을 품은 체 릴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 후우, 학교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가식을 보여줄 때부터 내가 조심하고 있었지... 그리고, 약혼이 가장 싫은건 나라고! "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무슨 약혼이야, 라고 덧붙여 말한 이안은 목검을 제대로 움켜쥐곤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벤치에 주저 앉아 머리를 부여잡는 릴리를 바라보던 이안은 참담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린다. 깊은 한숨이 이어지는 것도 아마 고요한 연무장이었기에 그대로 전해졌을 것은 분명했다. 쥐고 있던 목검을 내려놓은 이안은 털썩 연무장 바닥에 앉아 릴리를 바라본다.
" 대마법사가 되어 첩을 잔뜩 끼고 살 변태 릴리양. 아무리 내그 좋아도 뒤에서 그렇게 공작을 하면 안되는거야. 약혼은 너무 나갔잖아. "
팔짱을 끼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인 이안이 역시나 김칫국을 마시는 내용으로 태연히 말을 이어가며 방긋 웃어보인다. 아무래도 지금 이안의 마음 속에선 그런걸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 얼마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인지 모르겠지만 얼른 너희 집부터 들려서 다 오해라고 말씀드리자. 내가 네 실수 때문에 무릎 꿇는 날이 올 줄 몰랐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꿇어줄게. "
다 릴리가 꾸민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듯 고개를 끄덕여가며 말하는 이안이었다.
" 정말이지. 난 참 뽐내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죄를 저지르고 있을 줄은... 후, 어쩌겠어. 평소에 대들던 것도 다 눈에 띄고 싶어서 그랬던거구나. 하지만 미안. 역시 난 네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
이안은 이미 릴리가 작정하고 마음이 앞서나가 저지른 일인 것처럼 태연히 현실회피를 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있는 사이 앞에서 이안이 바닥에 앉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들은 기가차고 어이가없는것들이었다. 어디까지 하나보자 라는 마음으로 잠자코 듣고있던 릴리의 입에서 기어코 한숨이 튀어나온다.
벤치에서 내려와 이안의 앞에 쪼그려앉은 릴리가 이안을 뚫어져라보더니 그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그러고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이안과 눈을 마주친다.
"...칼레로아. 살면서 얼마나 인기라는걸 느끼지못하고 살아왔으면 그런 착각을해도 단단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 안좋아해. 너 내 취향 아니야."
물론 예전에 멋모르던 시절에야 허구한날 붙어다니던 이안에게 호감을 느끼긴했었지만 그건 아득히 먼 옛날(그래봤자 십여년도 안되긴했지만)의 일이었다. 아무튼 잔뜩 측은함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본 릴리가 한숨을 내쉬며 안됐다는듯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내 애칭 함부로 부르지말아줄래? 지금은 애칭을 부를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칼레로아 놈에게 자신의 애칭을 불리우고싶지않았다. 이안의 어깨를 토닥이던 손을 거둬들인 릴리가 손을 교복자락에 슥슥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이가없다못해 사라져버렸긴하지만 그래도 이안 덕분에 정신이 한결 돌아온것이 느껴졌다. 자, 이젠 어떻게 해야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릴리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안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안이 불편한티를 내든말든 안중에도 없던 릴리는 측은함과 안타까움 따위를 섞어서 자신을 쳐다보는 이안을 마주보며 눈을 얼려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관둔다. 높은확률로 어머니에게 혼날테고, 어머니에게 혼나는건 무서웠으니까.
".....정말 대답할가치도없네. 너한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손뼉을 치기에 좋은 생각이라도 난것인지 잠시나마 기대했던 자신에게 실망이다. 이안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할만한 가치도 없는 말은 릴리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표정이 지어지기 충분할만한 것이었다. 당황해서 뜬구름잡는 말이 튀어나온걸로 언제까지 우려먹을 심산인지 참 모를일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애랑 약혼을 하라고 하시는건지.."
릴리는 갑자기 왜 이안과 약혼을 하게된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이렇게된거 진짜 친구에게 가짜 연인행세라도 부탁해야하나 고민까지 되었다.
" 하아. 어처구니가 없네. 그게 하렘 발언 같은 걸 입 밖으로 내뱉은 사람이 할 말인가. "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릴리를 보며 말하는 이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말은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릴리 본인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오히려 저런 태도로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그 뻔뻔함은 어디 가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릴리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아니, 나이를 먹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그랬을까.
" 내가 할 소리거든. 우리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천방지축 선머슴 같은 여자애랑 약혼을 시킬 생각을 하신지 모르겠다니까. "
물론 어린 시절 - 아니, 지금도 충분히 어리긴 하지만 -에는 꽤나 친했던 것이 기억나긴 하지만. 그건 아주 어렸을 적의 추억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틀어져서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지 오래였으니까.
" .... 너 혹시 공작 부인한테 말도 안되는 가짜연인 같은 걸 들이댈 생각은 아니지?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겠다는 듯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한다.
" 그런거 할거면 너 혼자 찾아가도록 해. 난 공작부인께 죽도록 혼나고 싶진 않거든.. "
차마 릴리의 어머니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던질 생각은 못 하겠다는 듯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저어보이는 이안이었다.
이안의 말에 묘하게 심기가 거슬린 릴리가 그를 노려보며 팔짱을 낀다. 그러고는 눈이 제대로 달려있으면 자세히 보라는듯 바로앞까지 다가가더니 빳빳하게(키차이가 20cm는 족히 넘는탓이었다.) 고개를 쳐든다. 이안에게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남학생들이었다면 백이면 백 릴리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혀댔을터였다.
"아, 그럼 뭐 어떡하자고! 내 말에 딴지만 걸지말고 너도 아이디어 좀 내봐! 너도 약혼하기 싫다며!!"
결국 표정을 와락 구기고 말아버린 릴리가 짜증나 죽겠다는듯 자리에서 방방뛰더니 잔뜩 성이난 고양이처럼 소리를 질러버린다. 안그래도 이안과의 약혼소식에 심기가 뒤틀렸는데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이안의 행동에 기어코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이쯤되면 성질을 내느라 이리저리로 파이어볼이나 라이트닝볼트 따위를 난사할 릴리였지만 지금 있는곳이 검술학부 연무장이니만큼 꾹 참아낸다. 그탓에 꽉 쥐인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릴리의 외모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지만, 두사람은 소꿉친구였으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냉전이 겹쳐져 틀린 말은 아님에도 비꼬고 마는 결과가 나오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인형 같은 얼굴이 가까워지자, 예쁘긴 하네 - 라는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그래도 입 밖으론 내뱉지 않는다.
" 싫지! 어휴, 너랑 살면 하루도 못 버티고 울화통 터져서 뒤로 넘어갈걸. "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양이처럼 소리를 치는 릴리에게 똑같이 소리를 낸다. 으르렁대는 늑대와 고양이. 아니,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선남선녀가 다투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둘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마법 공부하더니 다른쪽은 굳어버렸나. "
흥, 하고 웃으며 팔짱을 낀 이안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이더니 느긋하게 입을 연다.
" 당장 취소하게 만드는 건 무리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못 할 것도 없을걸? 일단 부모님들 앞에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돼. "
어렸을때부터 하도 인형같다, 예쁘다 등의 말들을 들어온 릴리인지라 자기가 예쁘게 생긴건 아는모양이었는지 별타격없는 얼굴로 솜사탕같이 몽글몽글해보이는 머리를 뒤로 찰랑 넘겨버린다.(딸바보, 동생바보인 아버지와 오빠의 영향도 있었을것이다.)
"...호오, 너 방금 그 말 마법공부를 하는 마법사들은 모두 머리가 안돌아가고 마법 외에 다른쪽 머리는 굳어버렸다는 말로 들린다?"
팔짱을 끼고 씨익 웃는 이안의 얼굴을 노려보던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리고는 이안의 말을 확대해석하더니 이 이야기를 마법학부 교수님에게 하는게 좋으려나- 아니면 아버지에게 하는게 좋으려나- 하고 혼잣말을 하며 고민하는척을 한다. 교수님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듣는다면 이안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수도 있으니 정말로 전하지는 않을테지만.
속에서 뭐가 올라오려고 한다는 것 같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릴리의 말에 반응을 돌려준다. 뭐, 객관적으로 보면 예쁜 것이 맞았지만. 소꿉친구이자 견원지간으로 지내던 그가 릴리의 입으로 듣는 자화자찬은 좀 힘겨운 모양새였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떈 이안도 릴리의 외모를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굳이 제 입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 아니, 내가? '마법사'들 말고 내 앞에 있는 사람 말이야. "
피식 웃어보인 이안이 릴리의 가늘어진 눈을 피하지 않고 태연히 받아치며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다. 릴리의 아버지는 그에게 있어서도 나름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배울 점은 있다 생각하는 그였지만, 눈 앞의 여자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모양새였다.
" 그래, 일단 말 잘 듣는 시늉을 하는거지. 뭐든 무대뽀로 밀어붙인다고 되는게 아냐. "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아들었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한다. '물론, 나도 너랑 약혼자 행세를 하는게 쉬운건 아니다? ' 라고 덧붙인 이안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다.
" 그리고 약혼자로서 지내면서 '우리 둘은 이래서 약혼자가 안된답니다 ' 하고 보여줘야지. 각 집안의 어르신들한테. 제대로, 인상깊게, 차근차근 말이야. "
절대로 그걸 무시하고 결혼을 시키면 안되겠다 싶은 것들을 보여드리는거야.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어떻냐는 듯 웃어보인다.
릴리는 토하는 시늉을 하는 이안을 니가 뭘 알겠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버린다. 그런 릴리의 행동은 저딴 형편없는 심미안을 가진 놈하고는 대화를 할 가치가 없다는것처럼 보인다.
"그래? 그럼 네 말은 내가 마법공부만 하느라 대가리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거네?"
이안이 능청스럽게 자신을 콕 찝어 강조를 해버리자 가늘게 떴던 눈을 서서히 원래대로 뜬 릴리가 어느새 이안을 빤히 쳐다본다. 확대해석을 하며 장난스레 넘어가려했지만 방금 그말이 릴리의 자존심 한귀퉁이를 건들어버린듯했다. 그리고 그런 릴리의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는 눈이 어디한번 다시 지껄여봐- 라고 말하는것만같다.
이안의 말이 계속될수록 릴리의 검지손락이 서서히 내려간다. 대신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짝다리를 한 릴리가 못들을걸 들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니 말대로 제대로, 인상깊게, 차근차근 보여주잖아? 어느새 정신차려보면 결혼까지가있을거란 생각을 안해봤니 머저리야? 우리 어머니 행동력 몰라?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칼레로아와 자신을 약혼시키려하는것인지 어머니의 속마음을 도통 알수가 없지만 확실한건 칼레로아의 말처럼 행동했다간 어머니의 행동력에 휩쓸려버릴것이라는거였다.
"그리고 만에하나 니 말대로 순응하는척을 했다고 쳐. 결혼하면 안되겠다는걸 뭐 어떻게 보여줄건데? 저렇게 단호하게 행동하시는 우리 어머니 마음을 바꿀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으신가봐?"
이안이 콧방귀를 뀌는것을 들은 릴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쓸어넘기며 혼잣말을 한다. 주변이 마나로 일렁이는것이 빈말로 하는말은 아닌듯했다. 아직 어린 릴리였기에 폭주를 할까 우려된 아버지가 걸어놓은 구속이 아니었다면 이미 주변이 뒤집어져도 한참 뒤집어졌을터였다.
릴리는 이안의 말이 틀린말이 아니라는것은 알겠지만서도 그와 약혼을 수긍하는척을 하는것이 모든 혜택을 다 버리고 집을 나가는것보다 싫은듯해보였다. 결국 최후의 방법인 가출을 입에 올린것을보면말이다.
"그리고 너말이야 그런식으로 사람신경 살살 긁는것좀 하지마. 진짜 짜증나니까."
한두번이 아니니 그냥 넘어갈만도하건만 이안과 약혼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신경에 거슬리는 말까지 들은탓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릴리였다. 평소의 릴리였다면 울며겨자먹기로 약혼을 받아들이는척을 했을테지만 가출을 할 지언정 죽어도 싫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있는것같았다.
"이것도 어떻게보면 계약이니까 증빙할만한 서류를 만들어놓는편이 좋겠지. '이 계약은 릴리아나 드웰로 드 벨레로아와 이안 데미르 드 칼레로아의 약혼이 무효가되는 순간까지 유효하다. 계약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하나, 약혼 무효에대한 새로운 계획이 생겼을시 서로 공유한다. 둘, 약혼무효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 생겼을시 이 계약은 중단된다. 셋, 계약기간내에 둘 중 한사람에게라도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기면 계약은 즉시 중단된다.' 더넣고 싶은 항목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