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그는 햇볕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혈관이 보일 정도였다. 오똑한 콧대와 은은하게 분홍빛을 띈 입술은 새하얀 피부 탓에 더욱 도드라져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만들어주었다. 날카로운 듯한 눈매는 그의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지만, 그와 반대로 그는 대체로 눈웃음을 잘 지어보이곤 하는 편이었다. 오른쪽 눈 아래에는 점이 하나 박혀있었는데, 그것 역시도 어머니와 빼닮은 모양새였다. 키는 기사가문 답게 아버지를 타고나서 185 정도로 큰 키를 가졌다. 현재도 크고 있다는 것을 보니 190이 넘는 아버지의 혈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 했다. 몸도 평상시 단련을 미루지 않아 꽤나 탄탄한 편이었지만, 보기 좋은 미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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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겉으로 보기엔 눈매도 사납고, 키도 커서 꽤나 까칠하고 사나워 보이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무난하게 넘기고자 하는 면이 있다. 웃는 것도 잘 웃고, 화를 내는 것도 확실해서 감정이 풍부한 편에 속한다. 이 성격 탓에 릴리아나와 자주 부딫치곤 해서 처음엔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가장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릴리아나라는 사실을 깨닫곤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 그리고 자존심도 강해서 경쟁심도 꽤나 강한 편이다.
기타 :
- 이안은 대대로 기사들을 배출해온 칼레로아 공작가의 장남이다. 그의 아래에는 두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나이 차이가 열살이나 나는 편이여서 동생에겐 한없이 풀어지는 편이다.
- 이안의 아버지, 듀란 데미르 드 칼레로아 공작은 그의 아들인 이안이 곱게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평생을 검을 잡아온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미남이다. 다만 이쪽은 정말로 무뚝뚝한 편이기에, 한눈에 보아도 살얼음이 보일 정도다. 물론 딸들에게는 그 얼음조차 녹아내리지만 이안에게는 가차없다.
- 이안의 어머니, 레아 데미르 드 칼레로아 공작부인은 전형적인 귀족가 여인으로, 살면서 단 한번도 검을 잡아본 적도, 거친 삶을 겪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타고난 바가 총명하여 그녀의 남편이 집을 비우는 동안에도 가문을 아주 잘 유지하는 등 한 집안의 어머니로서 그 존재감을 뽐낸다. 하지만 몸이 약한 편이기에 잔병치레도 잦은 편. 듀란 공작과 마찬가지로 미모가 뛰어나 한때 그 미모가 유명했다고.
- 아카데미 검술부에 재학중이고 기숙사에서 머무는 중. 사실 등하교를 해도 되지만, 릴리아나가 기숙사에서 머문다는 소식에, 그도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다. 그의 애완동물은 검은색 깃털과 샛노란 부리가 인상적인 독수리로 꽤나 똑똑해서 알아서 기숙사와 밖을 돌아다니는 편이다. 평상시에는 순해서 딱히 건드려도 크게 반응은 안 한다고 한다.
- 식사 외에는 딱히 무언가를 먹는 걸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차를 마시는 것 정도는 즐기는 편이기에, 종종 그가 한가할 때에는 그의 주위에서 향긋한 차의 향이 다양하게 머문다고 한다.
- 릴리아나가 며느릿감으로 뛰어나다는 판단과 양 집안의 화합으로 두 집안의 권력을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듀란 공작의 판단과 공작부인의 지지로 갑작스런 약혼을 맞이하게 되었다.
외모 : 분홍빛 홍조가 띄워진 새하얀 얼굴엔 볼 중앙에 점이 콕 하고 박혀있다. 금을 녹여 만든듯이 반짝이는 금안은 끝이 살짝 올라가있어 새초롬한 인상을 주었고 그 밑엔 버선모양으로 오똑하게 올라간 코가 또 그밑엔 도톰하고 붉으스름한 입술이 늘상 미소를 띄고있다. 벨레로아 집안의 특성인 옅은 분홍빛의 머리는 허리춤까지 내려와 구불거려 마치 솜사탕을 연상시켰고 150후반의 자그마하고 가녀린 몸은 보호본능을 자극할만한 것이었다. 릴리아나를 본 사람들은 저절로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인형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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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랑스럽고 개미한마리 못죽일것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꽤나 호전적인 성격을 지니고있다. 아카데미나 무도회에서 덤벼오는 사람이 있다면 지지않고 웃는얼굴로 맞서기도한다. 이는 사랑스러운 얼굴의 싸움꾼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벨레로아 집안의 특성이기도하다. 받은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갚으려는 성격이기도 하며 빚지고는 못산다. 경쟁심도 강해서 지고는 못살기도 한다.
기타 : -릴리아나는 대대로 마법사를 배출해내기로 유명한 벨레로아 공작가의 막내딸이다. 벨레로아 공작가의 가족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버지 : 아스라한 킬리언 드 벨레로아(공작) / 곱슬거리고 뒷목에 닿는 적당히 짧은 옅은 분홍빛 머리와 끝이 내려간 청안, 180이 훌쩍 넘는 큰 키와 적당히 탄탄한 몸 / 대마법사이자 공격마법에 특화 되었고 사랑스러운 외모와는 다르게 성격이 좋지는 못한편. 딸바보. 아내바보. 아내와는 토벌에서 만났음.(무표정으로 몬스터를 반으로 갈라버리는 모습에 반했다고 함)
어머니 : 에르아젤 마리안 드 벨레로아(공작부인) / 단아하게 틀어올린 금발과 끝이 새침하게 올라간 금안, 170 초반대의 큰 키와 다부지다고 할 수 없지만 마냥 가녀리지만은않은 몸 / 검을 주로다루는 드웰로 백작가에서 태어나 기사로 자랐음. 차분하고 이성적인 성격. 토벌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해 공작부인이 된 이후로 손에 굳은살을 감추기위해 항상 장갑을 끼고다님.
오빠 : 카스티안 드웰로 드 벨레로아 / 20세 / 끝으로 갈수록 금빛이 희미하게 섞인 옅은 분홍빛이 섞인 뒷목에 닿는 짧은 머리와 끝이 내려간 청안, 170후반대의 키와 탄탄한 몸 / 치유마법에 특화됨. 어머니를 닮아 차분하고 이성적임. 순결선언을 함(비혼주의자). 동생바보. 동생에 한해서만 호전적인 성격으로 변함.
-아카데미 마법부에 재학중이고 기숙사 1인실에서 살고있다. 아버지를 닮은 릴리아나는 공격마법에 특화되었고 나머지 마법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지만 치유마법에는 재능이 없는편이다. 마법부에서는 항상 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학년 종합성적은 이안과 항상 수석과 차석을 다투고 있다.
-애완늑대를 한마리 키우고 있다. 이름은 뱅뱅. 희귀종인 하얀늑대이며 이마에 뱅뱅돌아가는 무늬가 있어서 이름이 뱅뱅이되었다. 네발을 바닥에 짚고 서있는 키가 릴리아나만 해서 가끔은 릴리아나가 타고다니기도 한다. 릴리아나가 기숙사에 있는 동안은 공작가의 하인, 하녀들이 돌보는데 릴리아나 한정으로 순한 뱅뱅이라 하인, 하녀들이 릴리아나를 무척이나 그리워한다고한다.
-사랑스러운 외모와 어울리게 단음식과 디저트류를 좋아한다. 제일좋아하는건 쇼콜라 케이크. 화가난 릴리아나를 진정시키고싶을땐 아카데미앞 유명 베이커리의 쇼콜라케이크를 사다주면 된다고한다.(주의 : 하루에 홀케이트 1개분 밖에 팔지않아 구하기 어려움)
-당장은 거부감이 들겠지만 이안과의 약혼이 릴리아나의 행복을 불러올 수 있고 벨레로아와 칼레로아 가문이 약혼으로 화합될 수 있다면 이득이 많을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에 이안과 약혼을 하게될 위기(?)에 처해있다.
세상에 이리도 믿기힘든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물론 마법을 쓴다면 어려운일은 아니었지만)이었다. 차라리 황제가 여성형 오우거에게 반해 황후로 맞이한다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릴리가 침착하려 애를 쓴다.
"...어머니. 누가.. 누구랑 약혼을 해요?"
아닐거야. 아니어야만해. 애써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지만 그런것따위 신경쓸새가 없었다.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들어준다는 말도 있건만 그게 사실이라면 신은 자신을 버린것이 틀림없다. 그렇지않고서야 통신구 너머 어머니에게서..
-릴리 너와 칼레로아 공자. 이미 약혼서도 넣었단다.-
..같은 말이 들려올리는 없었으니까.
"...대체 왜요! 왜 제가 칼레로아같은 놈이랑 약혼을 해야하는건데요!"
절규와 같은 릴리의 외침에도 어머니 에르아젤의 표정에는 미세한 동요조차도 없었다. 이미 이렇게 됐는데 어쩌겠냐는 어머니의 표정은 릴리를 더한 절규의 구렁텅이로 빠트릴뿐이었다. 릴리의 감정과 함께 동요된 릴리의 마나가 소용돌이 치는탓에 방안의 가구가 흔들리며 창문에는 금이 쩍쩍 갈라질때조차 에르아젤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감정을 내비쳐봤자 달라질건 없겠다고 생각한 릴리가 통신구 속 어머니를 잠시 노려보더니 기숙사를 뛰쳐나갔고 곧이어 한숨소리와 함께 통신이 끊긴다.
기숙사를 뛰쳐나온 릴리가 향한곳은 이 사태의 또다른 주인공이자 (릴리의 주장에 따르면)인생에 도움되는게 하나도 없는 인간(다시한번 말하지만 릴리의 주장이다.)이 이 시간에 있을만한곳이었다. 연무장의 문을 거세게 열어제낀 릴리가 금빛의 커다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연무장을 훑는다. 그러고는 단숨에 이안을 향해 달려가더니 간절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매사 무언가를 할 때, 일심이 되어야 한다고 배워온 그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홀로 연무장에 서서 검을 두손으로 쥔 체 서있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검을 휘두르는.. 그런 생각을 할 때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더니 평소에 아껴쓰던 목검 조차도 내팽개지며 릴리를 째려본다.
" 내가...내가 할 소리야...! 너 같은 선머슴 같은...그런 녀석이랑 약혼이라니! "
자기가 더 억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던 이안은 심지어 울상까지 지어보이며 릴리의 어깨를 잡곤 흔들며 외친다. 절대로 이게 사실일리가 없다는 듯 외치던 이안의 주머니에서 한장의 종이가 떨어진다. 아마도 릴리와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듯한 편지였지만,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 통보나 다름 없는 모양새였다.
" ..너...너.. 뒤에서 음침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랬냐?! 집에 가서?? "
이유라곤 그런 것 밖에 없을게 분명하다는 듯 이안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설마, 하는 눈으로 릴리를 바라본다.
이안의 반응에 릴리는 암담한 현실이 한층 더 다가와버린것만같아 절망에 빠져버린다. 평소라면 제 몸에 감히 손을 가져다댔다는 이유로 이안의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면 길길이 날뛰었을테지만 절망에 빠진탓에 그의 손에 어깨가 잡힌채 팔랑팔랑 흔들릴 뿐이었다. 이안의 주머니에서 삐져나와 바닥에 떨어지는 종이가 제 신세같아 그저 암담하게 바라만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칼레로아 놈의 입에서 나온 끔찍한 말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이안의 손을 쳐낸 릴리가 이안의 정강이를 있는힘껏 걷어찬다. 자그마하고 연약해보이는 릴리였지만 기사출신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탓에 어지간히 아플것이었다. 하지만 그런것따윈 릴리가 신경쓸게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읽어내려가던 릴리가 이를 악물더니 야무진 손길로 종이를 찢어발긴다.
"아아악!! 망했어... 망했다고!! 내가 왜 저딴거랑 약혼을 해야돼!!!"
화가나다못해 억울했다. 자리에서 방방뛰며 억울함을 잔뜩 표출해내던 릴리가 제자리에 서서 씩씩거린다. 어떡하면 좋지? 솜사탕같이 탐스러운 분홍색머리를 쥐어뜯으며 패닉에 빠져있던 릴리의 행동이 일순간에 멈추더니 찬찬히 고개를 들어 스산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릴리의 눈은 반쯤 돌아있었다.
"...그래, 약혼할 사람이 없어지면되는거잖아."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모르겠지만 릴리의 입가에 걸려있는 스산한 미소는 그 생각을 조금이나마 예상되게한다.
힘껏 릴리가 걷어찬 정강이에서 머리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통증에, 이안은 바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진다. 그가 좌우로 이리저리 뒹굴며 통증에 시달리는 동안 릴리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일어난 건 릴리가 편지를 다 읽고나선 찢어버린 후였지만. 숨을 몰아쉬며 일어난 이안은 눈이 돌아간 릴리를 발견하곤 뒷걸음질 친다.
" 너, 너.. 평소에도 훼까닥 돌아간 건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
스산한 미소를 발견한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목검을 집어들며 머리를 쓸어넘긴다. 먼지가 묻었지만, 그의 새하얀 피부는 변함없이 하얀 빛을 띄고 있었다. 물론 이안의 반짝이는 눈은 한껏 경계심을 품은 체 릴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 후우, 학교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가식을 보여줄 때부터 내가 조심하고 있었지... 그리고, 약혼이 가장 싫은건 나라고! "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무슨 약혼이야, 라고 덧붙여 말한 이안은 목검을 제대로 움켜쥐곤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벤치에 주저 앉아 머리를 부여잡는 릴리를 바라보던 이안은 참담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린다. 깊은 한숨이 이어지는 것도 아마 고요한 연무장이었기에 그대로 전해졌을 것은 분명했다. 쥐고 있던 목검을 내려놓은 이안은 털썩 연무장 바닥에 앉아 릴리를 바라본다.
" 대마법사가 되어 첩을 잔뜩 끼고 살 변태 릴리양. 아무리 내그 좋아도 뒤에서 그렇게 공작을 하면 안되는거야. 약혼은 너무 나갔잖아. "
팔짱을 끼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인 이안이 역시나 김칫국을 마시는 내용으로 태연히 말을 이어가며 방긋 웃어보인다. 아무래도 지금 이안의 마음 속에선 그런걸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 얼마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인지 모르겠지만 얼른 너희 집부터 들려서 다 오해라고 말씀드리자. 내가 네 실수 때문에 무릎 꿇는 날이 올 줄 몰랐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꿇어줄게. "
다 릴리가 꾸민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듯 고개를 끄덕여가며 말하는 이안이었다.
" 정말이지. 난 참 뽐내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죄를 저지르고 있을 줄은... 후, 어쩌겠어. 평소에 대들던 것도 다 눈에 띄고 싶어서 그랬던거구나. 하지만 미안. 역시 난 네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
이안은 이미 릴리가 작정하고 마음이 앞서나가 저지른 일인 것처럼 태연히 현실회피를 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있는 사이 앞에서 이안이 바닥에 앉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들은 기가차고 어이가없는것들이었다. 어디까지 하나보자 라는 마음으로 잠자코 듣고있던 릴리의 입에서 기어코 한숨이 튀어나온다.
벤치에서 내려와 이안의 앞에 쪼그려앉은 릴리가 이안을 뚫어져라보더니 그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그러고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이안과 눈을 마주친다.
"...칼레로아. 살면서 얼마나 인기라는걸 느끼지못하고 살아왔으면 그런 착각을해도 단단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 안좋아해. 너 내 취향 아니야."
물론 예전에 멋모르던 시절에야 허구한날 붙어다니던 이안에게 호감을 느끼긴했었지만 그건 아득히 먼 옛날(그래봤자 십여년도 안되긴했지만)의 일이었다. 아무튼 잔뜩 측은함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본 릴리가 한숨을 내쉬며 안됐다는듯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내 애칭 함부로 부르지말아줄래? 지금은 애칭을 부를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칼레로아 놈에게 자신의 애칭을 불리우고싶지않았다. 이안의 어깨를 토닥이던 손을 거둬들인 릴리가 손을 교복자락에 슥슥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이가없다못해 사라져버렸긴하지만 그래도 이안 덕분에 정신이 한결 돌아온것이 느껴졌다. 자, 이젠 어떻게 해야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릴리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안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안이 불편한티를 내든말든 안중에도 없던 릴리는 측은함과 안타까움 따위를 섞어서 자신을 쳐다보는 이안을 마주보며 눈을 얼려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관둔다. 높은확률로 어머니에게 혼날테고, 어머니에게 혼나는건 무서웠으니까.
".....정말 대답할가치도없네. 너한테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손뼉을 치기에 좋은 생각이라도 난것인지 잠시나마 기대했던 자신에게 실망이다. 이안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할만한 가치도 없는 말은 릴리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표정이 지어지기 충분할만한 것이었다. 당황해서 뜬구름잡는 말이 튀어나온걸로 언제까지 우려먹을 심산인지 참 모를일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런애랑 약혼을 하라고 하시는건지.."
릴리는 갑자기 왜 이안과 약혼을 하게된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이렇게된거 진짜 친구에게 가짜 연인행세라도 부탁해야하나 고민까지 되었다.
" 하아. 어처구니가 없네. 그게 하렘 발언 같은 걸 입 밖으로 내뱉은 사람이 할 말인가. "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릴리를 보며 말하는 이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말은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릴리 본인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오히려 저런 태도로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그 뻔뻔함은 어디 가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릴리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아니, 나이를 먹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그랬을까.
" 내가 할 소리거든. 우리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천방지축 선머슴 같은 여자애랑 약혼을 시킬 생각을 하신지 모르겠다니까. "
물론 어린 시절 - 아니, 지금도 충분히 어리긴 하지만 -에는 꽤나 친했던 것이 기억나긴 하지만. 그건 아주 어렸을 적의 추억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틀어져서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지 오래였으니까.
" .... 너 혹시 공작 부인한테 말도 안되는 가짜연인 같은 걸 들이댈 생각은 아니지?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겠다는 듯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한다.
" 그런거 할거면 너 혼자 찾아가도록 해. 난 공작부인께 죽도록 혼나고 싶진 않거든.. "
차마 릴리의 어머니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던질 생각은 못 하겠다는 듯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저어보이는 이안이었다.
이안의 말에 묘하게 심기가 거슬린 릴리가 그를 노려보며 팔짱을 낀다. 그러고는 눈이 제대로 달려있으면 자세히 보라는듯 바로앞까지 다가가더니 빳빳하게(키차이가 20cm는 족히 넘는탓이었다.) 고개를 쳐든다. 이안에게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남학생들이었다면 백이면 백 릴리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혀댔을터였다.
"아, 그럼 뭐 어떡하자고! 내 말에 딴지만 걸지말고 너도 아이디어 좀 내봐! 너도 약혼하기 싫다며!!"
결국 표정을 와락 구기고 말아버린 릴리가 짜증나 죽겠다는듯 자리에서 방방뛰더니 잔뜩 성이난 고양이처럼 소리를 질러버린다. 안그래도 이안과의 약혼소식에 심기가 뒤틀렸는데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이안의 행동에 기어코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이쯤되면 성질을 내느라 이리저리로 파이어볼이나 라이트닝볼트 따위를 난사할 릴리였지만 지금 있는곳이 검술학부 연무장이니만큼 꾹 참아낸다. 그탓에 꽉 쥐인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릴리의 외모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지만, 두사람은 소꿉친구였으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냉전이 겹쳐져 틀린 말은 아님에도 비꼬고 마는 결과가 나오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인형 같은 얼굴이 가까워지자, 예쁘긴 하네 - 라는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그래도 입 밖으론 내뱉지 않는다.
" 싫지! 어휴, 너랑 살면 하루도 못 버티고 울화통 터져서 뒤로 넘어갈걸. "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양이처럼 소리를 치는 릴리에게 똑같이 소리를 낸다. 으르렁대는 늑대와 고양이. 아니,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선남선녀가 다투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둘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마법 공부하더니 다른쪽은 굳어버렸나. "
흥, 하고 웃으며 팔짱을 낀 이안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이더니 느긋하게 입을 연다.
" 당장 취소하게 만드는 건 무리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못 할 것도 없을걸? 일단 부모님들 앞에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돼. "
어렸을때부터 하도 인형같다, 예쁘다 등의 말들을 들어온 릴리인지라 자기가 예쁘게 생긴건 아는모양이었는지 별타격없는 얼굴로 솜사탕같이 몽글몽글해보이는 머리를 뒤로 찰랑 넘겨버린다.(딸바보, 동생바보인 아버지와 오빠의 영향도 있었을것이다.)
"...호오, 너 방금 그 말 마법공부를 하는 마법사들은 모두 머리가 안돌아가고 마법 외에 다른쪽 머리는 굳어버렸다는 말로 들린다?"
팔짱을 끼고 씨익 웃는 이안의 얼굴을 노려보던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리고는 이안의 말을 확대해석하더니 이 이야기를 마법학부 교수님에게 하는게 좋으려나- 아니면 아버지에게 하는게 좋으려나- 하고 혼잣말을 하며 고민하는척을 한다. 교수님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듣는다면 이안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수도 있으니 정말로 전하지는 않을테지만.
속에서 뭐가 올라오려고 한다는 것 같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릴리의 말에 반응을 돌려준다. 뭐, 객관적으로 보면 예쁜 것이 맞았지만. 소꿉친구이자 견원지간으로 지내던 그가 릴리의 입으로 듣는 자화자찬은 좀 힘겨운 모양새였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떈 이안도 릴리의 외모를 인정하는 편이었지만 굳이 제 입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 아니, 내가? '마법사'들 말고 내 앞에 있는 사람 말이야. "
피식 웃어보인 이안이 릴리의 가늘어진 눈을 피하지 않고 태연히 받아치며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다. 릴리의 아버지는 그에게 있어서도 나름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배울 점은 있다 생각하는 그였지만, 눈 앞의 여자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모양새였다.
" 그래, 일단 말 잘 듣는 시늉을 하는거지. 뭐든 무대뽀로 밀어붙인다고 되는게 아냐. "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아들었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한다. '물론, 나도 너랑 약혼자 행세를 하는게 쉬운건 아니다? ' 라고 덧붙인 이안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다.
" 그리고 약혼자로서 지내면서 '우리 둘은 이래서 약혼자가 안된답니다 ' 하고 보여줘야지. 각 집안의 어르신들한테. 제대로, 인상깊게, 차근차근 말이야. "
절대로 그걸 무시하고 결혼을 시키면 안되겠다 싶은 것들을 보여드리는거야.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어떻냐는 듯 웃어보인다.
릴리는 토하는 시늉을 하는 이안을 니가 뭘 알겠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버린다. 그런 릴리의 행동은 저딴 형편없는 심미안을 가진 놈하고는 대화를 할 가치가 없다는것처럼 보인다.
"그래? 그럼 네 말은 내가 마법공부만 하느라 대가리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거네?"
이안이 능청스럽게 자신을 콕 찝어 강조를 해버리자 가늘게 떴던 눈을 서서히 원래대로 뜬 릴리가 어느새 이안을 빤히 쳐다본다. 확대해석을 하며 장난스레 넘어가려했지만 방금 그말이 릴리의 자존심 한귀퉁이를 건들어버린듯했다. 그리고 그런 릴리의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는 눈이 어디한번 다시 지껄여봐- 라고 말하는것만같다.
이안의 말이 계속될수록 릴리의 검지손락이 서서히 내려간다. 대신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짝다리를 한 릴리가 못들을걸 들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니 말대로 제대로, 인상깊게, 차근차근 보여주잖아? 어느새 정신차려보면 결혼까지가있을거란 생각을 안해봤니 머저리야? 우리 어머니 행동력 몰라?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칼레로아와 자신을 약혼시키려하는것인지 어머니의 속마음을 도통 알수가 없지만 확실한건 칼레로아의 말처럼 행동했다간 어머니의 행동력에 휩쓸려버릴것이라는거였다.
"그리고 만에하나 니 말대로 순응하는척을 했다고 쳐. 결혼하면 안되겠다는걸 뭐 어떻게 보여줄건데? 저렇게 단호하게 행동하시는 우리 어머니 마음을 바꿀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으신가봐?"
이안이 콧방귀를 뀌는것을 들은 릴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쓸어넘기며 혼잣말을 한다. 주변이 마나로 일렁이는것이 빈말로 하는말은 아닌듯했다. 아직 어린 릴리였기에 폭주를 할까 우려된 아버지가 걸어놓은 구속이 아니었다면 이미 주변이 뒤집어져도 한참 뒤집어졌을터였다.
릴리는 이안의 말이 틀린말이 아니라는것은 알겠지만서도 그와 약혼을 수긍하는척을 하는것이 모든 혜택을 다 버리고 집을 나가는것보다 싫은듯해보였다. 결국 최후의 방법인 가출을 입에 올린것을보면말이다.
"그리고 너말이야 그런식으로 사람신경 살살 긁는것좀 하지마. 진짜 짜증나니까."
한두번이 아니니 그냥 넘어갈만도하건만 이안과 약혼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신경에 거슬리는 말까지 들은탓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릴리였다. 평소의 릴리였다면 울며겨자먹기로 약혼을 받아들이는척을 했을테지만 가출을 할 지언정 죽어도 싫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있는것같았다.
"이것도 어떻게보면 계약이니까 증빙할만한 서류를 만들어놓는편이 좋겠지. '이 계약은 릴리아나 드웰로 드 벨레로아와 이안 데미르 드 칼레로아의 약혼이 무효가되는 순간까지 유효하다. 계약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하나, 약혼 무효에대한 새로운 계획이 생겼을시 서로 공유한다. 둘, 약혼무효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 생겼을시 이 계약은 중단된다. 셋, 계약기간내에 둘 중 한사람에게라도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기면 계약은 즉시 중단된다.' 더넣고 싶은 항목 있어?"
이안은 고개를 까닥이는 릴리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그의 머리로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대놓고 반항하는 길에는 암울한 미래만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이 방향이 두사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길처럼 보였다. 극단적으로 나서지 않고, 양 공작가가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약혼을 끝낼 수 있는 길.
" 뭐, 그정도면 됐지. 난 그래도 서류까진 생각 안했지만 우리 벨레로아 아가씨가 원하시니까 그정도로 하자고. "
그정도면 됐다는 듯 이안은 릴리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리곤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한손을 내민다. 그래도 내밀기 전에 단련복에 닦았는지 흙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손을.
" 일단 약혼자님, 앞으로 공동전선 잘 부탁합니다? 아카데미에서도 일단 사이좋은... 약혼자의 모습부터 보여줘야돼. 말 잘 듣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믿기 시작할테니까. "
나도 힘들거라고 생각해, 라고 말을 덧붙인 이안이 알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까닥인다.
사이좋은 약혼자처럼- 이라는 말에 표정이 조금 굳는다싶더니 팔짱이라는 말에 그야말로 표정이 썩어버린 릴리의 동공에 지진이 나버렸다. 내가 잘못들은건가하고 넘기려했지만 이안의 눈이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는것을 보니 잘못들은게 아니라는 생각이들었고 그 순간 릴리의 얼굴이 새하얗다못해 창백해진다.
"너..너는 그게 돼?! 팔짱이라니!!"
잠깐사이에 이안과 팔짱을 끼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듯한 릴리가 소름이 돋아버린 팔을 마구 쓸어내린다. 어렸을때야 뭣도모르고 스킨쉽을 했겠었지만 어느정도 자라버린 지금은 손을 잡는것도 낯선데 팔짱이라니!
"나는 안돼.. 싫어!!"
믿기어렵다는것처럼 고개를 저은 릴리가 두세걸음 뒤로 물러난다. 다정한척을 해대는 자신과 이안, 팔짱을 끼고 함께 걸어가는 자신과 이안, 서로 마주보고 웃는 자신과 이ㅇ.. 떠올리고싶지않건만 절로 상상되는 모습에 어느덧 릴의 얼굴에 울상이 지어진다.
이안의 손에 힘없이 흔들리면서도 몰라.. 모른다구.. 싫어..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릴리는 평생 보고 살지도 모른다는말에 순식간에 입을 다물더니 그건 죽어도 싫다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본다.
"...그래.. 너랑 평생보고 살바에 잠시 고통스러운게 낫지.."
칼레로아 놈하고 결혼하면 평생 같은 집에서 살아야하고.. 같이 마주앉아 식사해야하고.. 평생 무도회의 파트너는 칼레로아 놈일거고.. 후계자 생산하라는 원로회의 닥달도 받을거고... 상상만해도 넌덜머리나는 일들을 쭉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릴리가 각오에 찬 눈으로 이안과 눈을 맞춘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이안은 한걸음 한걸음 여학생 기숙사를 향해 걸어간다. 아카데미는 여학생 기숙사와 남학생 기숙사가 나뉘어 있지만, 건물 안으로만 들어가지 않으면 딱히 제지를 하는 일은 없었다 .아카데미에선 옛적부터 가문간의 인연을 위해 그런 것은 나름 널널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안을 지키는 이들이 막아세우곤 했다.
" 릴리..릴리..윽.. "
어릴적엔 잘도 부르던 애칭이 지금은 입밖을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애써 머리를 쓸어넘긴다. 잘 차려입은 그는 한눈에 봐도, 누군가를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슬슬 아카데미 안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니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째서 여학생 기숙사로 향하는지 알 수 있을 모습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이안은 이내 멈칫하더니 멈춰선다. 돌아서서 주변을 살펴보지만 아직 자신을 유심히 보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평소와 같이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살피던 그는 도로 걸음을 옮겨 목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 후우, 할 수 있다. 이안.. "
이안은 점점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고, 점점 여학생 기숙사가 가까워지자 목도 돌려가며 몸을 이완시킨다. 마치 대련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처럼 나아가던 그는 이내 기숙사 앞에 멈춰서선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시작한다.
" 릴리~!! 같이 등교합시다!! "
평소엔 릴리에게 하지도 않았을 존대를 섞으며 이안이 크게 기숙사를 향해 외친다. 일종의 대외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을.
오늘은 이안이 데리러오기로한 날이었다. 그렇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 탓에 느긋하게 등교준비를 시작한다. 슬슬 약혼에대한 소식이 퍼졌을거라 짐작한 릴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외모를 꾸미기로한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자연스레 풀기로하고 연한 화장을 한 릴리가 자신의 기숙사방을 나섰고 얼마지나지않아..
"저런 미친."
릴리의 입술사이에서 비속어가 튀어나온다. 릴리라는 애칭에 한번, 되도않는 존대에 또 한번, 자신에게 꽂힌 시선들에 또또 한번. 당황할데로 당황한 릴리는 다정한 약혼자인척을 해야한다는것을 잠시 망각하고야말았다. 릴리의 근처에 그녀의 비속어를 들을 만큼 가깝게 있는 사람이 없다는게 다행일 따름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차리고 파들거리는 주먹을 로브자락사이로 감춘 릴리가 심호흡을 하더니 조금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이안에게 다가간다.
"오...래기다렸어?"
말 한마디가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않아 입꼬리를 파르르 떤 릴리가 간신히 마인드컨트롤을 한다. 그리고는 그 한마디를 입밖으로 내뱉는다.
팔짱을 끼기편하게 살짝 벌려진 이안의 팔을 본 릴리가 뒤이어 뭐, 어쩌라고 라고말하는것같은 눈으로 이안을 본다. 하지만 곧이어 이안이 릴리의 머리를 정리해주었고 릴리의 눈에 경악이 차오르는것을 순식간이었다. 소름이 돋은 팔을 무의식적으로 쓸어내리려다 멈춘 릴리가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새하얗게 질린 손을 움직여 이안의 팔에 팔짱을 낀다.
"그...래? 나..도 그랬는데, 하하하."
순간적으로 속이 안좋아진 릴리였지만 간신히 참아내더니 적당히 어색하게나마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팔꿈치로 이안의 옆구리를 꾹 누르는것을 보아하니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듯했다.
"왜 눈을 구기고 지.... 가 아니라 산책도 좋지..?"
슬슬 한계점에 다다르려던 릴리는 이안의 윙크에 이성을 잃고 험한 말을 하려했으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성을 다시잡는다. 그덕에 이안의 의도대로 답하게된 릴리였다.
평소와는 다른 이안의 태도에 날서있던 마음이 약간 사그라든다. 그런탓에 릴리의 입에서도 평소보다는 부드럽다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입에서 칼레로아를 칭찬하는 말이 나왔다는것이 달갑지않은지 표정이 썩다싶이해지긴했지만.
"아무도없는거 확인했거든? 그리고..."
이안에 의해 다시 팔짱이 끼어지자 릴리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해진다. 이어 한숨을 푹 내쉰 릴리가 눈을 감자 따뜻한 바람이 주변을 훑어내리더니 얼마지나지않아 사라졌고, 마법으로 주변을 살핀 릴리가 팔짱을 다시 빼버린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있지않던 손을 반대어깨에 올리더니 팔짱을 끼고있던 팔을 살살 돌리며 스트레칭을 한다. 그러면서도 이안을 흘끔 올려보는것이 뭔가 불만이있는듯해보였다.
"....어깨아프다고."
최대한 이안과의 접촉을 피하기위해 힘을 주고있었던 탓에 어깨에 무리가 온 듯 했다. 미간을 구긴 릴리가 어깨를 주먹으로 통통 내리치는것이 어지간히 뻐근한것같았다.
평소였으면 픽하고 웃는 이안을 보고 뭘 쪼개냐며 시비를 걸었을테지만 지금은 노곤함에 취해 잔뜩 풀어진터라 무방비해진 릴리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고양이마냥 고롱거리는 소리도 나올것만같았다. 하지만 이런 릴리의 노곤함과 무방비함도 이안의 마사지가 끝나자 신기루처럼 금새 사라져버린다.
한참동안 이어졌던 마사지가 끝나자 온몸을 지배하고있던 노곤함이 서서히 물러가고 이어서 잠시 사라졌던 이성이 돌아오기시작한다. 그러자 자연스레 정신이 돌아온 릴리의 입에서 핫! 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더니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는 이안의 손을 홱 하고 피해버린다. 손으로 머리를 가려버리며 이안을 노려보는건 덤이었다.
"너...너 나한테 무슨짓을한거야!"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한 릴리가 뒤로 몇걸음 물러난다. 마치 이안의 무슨 꾀를 내어 릴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라도한것같은 모양새였다. 잔뜩 날이선게 자신히 칼레로아 놈 따위의 손에 노곤하게 풀어졌다는것이 꽤나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었다.
기사인 어머니보단 마법사인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지라 운동부족인 릴리는 조금만 무리하면 금방 근육에 무리를 느끼곤했다. 그탓에 안마를 잘한다는 사람들에게 종종 마사지를 받고는했는데 받을때마다 찝찝한 뻐근함이 남곤했었다. 그때와는 달리 이런 시원함은 처음느껴본 릴리는 이안이 무슨 꾀라도 냈다고 생각한듯했다.
"....정말로 그게 다라는거지. 만약 거짓말이면 평생 입 못놀리고 살게될 줄 알아."
느긋한 태도에 더 날이 서서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안을 노려본 릴리가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면서도 이안을 따라 어깨를 돌려보더니 가벼워진 어깨가 내심 만족스럽긴했는지 흥 하는 소리를 내고는 아카데미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아니, 돌리려 했다.
기사시절 어머니의 후배였던 검술학 교수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약혼 소식을 듣기라도했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가오는 젊은 교수를 발견하고 바로 다시 뒤로 돌게된것이다. 방금까지 투닥거리는것을 봤을터인데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게되면.. 하고 생각한 릴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그럴바엔 이러는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 도달한 릴리가 눈을 꾹 감더니 이안의 품에 폭하고 안겨버린다.
생각보다 느리게 사라지는 교수탓에 이안의 품에 오래 안겨있게되자 점점 어색함이 몰려온다. 딸바보인 아버지와 동생바보인 오빠의 품에 자주 안겼던 릴리였지만(물론 릴리의 의견은 하나도없었긴했다.) 그 두사람말고는 남자의 품에 안긴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을터였다. 거기다 어렸을때보다 훨씬 커진 이안의 품이 낯설게 느껴졌을것이었다.
교수가 사라지고 이안의 품에서 나오게된 릴리는 이안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음과 어색함에 괜히 시선을 피하게된다. 투닥거리며 싸우고다닐때는 몰랐는데 새삼 훌쩍 자라버렸다는것이 실감이나기도했고.
릴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이안이 자신을 한대 쥐어박고싶은 욕구를 참고있다는것을. 그걸 아는 릴리인지라 통쾌한 마음을 숨기지못하고 절로 환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릴리의 미소를 본 남학생들이 헙 하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릴리는 관심조차 두지않는다. 그저 이안을 향해 메롱하고 혀를 내보이더니 조원들에게 가버릴뿐이었다.
"릴리아나 이게 대체 어떻게된거야? 약혼이라니! 아니 그것보다 왜 나한테 말안해줬어? 이 재밌는 일을!"
자리에 앉은 릴리는 평소 내숭을 부리던 친구가 광분에 찬 목소리로 말하던말던 귓등으로 흘려보내버린다. 지루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과목이었지만 릴리는 수업시간 내내 입가를 비짓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눌러담느라 곤욕이었다.
평소였다면 높은점수를 받기위해 재미없는 수업내용과 조별과제를 전투적으로 해치웠을 릴리였겠지만 오늘은 이안을 한방먹인덕인지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을 마친 릴리였다. 수업종료를 알리는 교수의 말에 릴리는 누구보다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했다. 골탕먹이는것은 즐거웠지만 아까 그 이안의 눈빛을 봐서는...
"..잡히면 무조건 꿀밤이다."
저 무식하게 큰 주먹으로 꿀밤을 맞으면 연약한 제 머리통이 부서지고야말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릴리는 친구가 자신을 부르던말던 강의실을 벗어나려한다.
이안의 손에 이끌려 착 달라붙게된 릴리의 표정이 썩어들어가자 그걸 본 이사벨라가 이안과 릴리를 번갈아 보더니 아하? 하는 소리를 낸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웃으며 릴리를 향해 이제야 알겠다는 눈빛을 보낸다. 그런 이사벨라를 본 릴리의 머릿속에 쿠궁, 하는 효과음이 울려퍼졌고 상황파악을 끝낸 릴리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이안의 옆구리를 꼬집어버린다.
"벨라 그게..." "진짜 둘이서만 먹을래 릴리? 그럼 혼자가되서 심심한 나는 같이 점심을 먹을 친구를 구하러가볼까나- 점심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좀 하고?"
눈치가 빠른 이사벨라가 모든것을 눈치챈것을 느낀 릴리가 이안을 밀쳐내더니 이사벨라와 팔짱을 낀다.
"에이, 내가 벨라 너만 혼자 점심먹게 하겠어? 그치 이안? 벨라도 같이 점심먹는거지?"
답은 정해져있으니 눈치챙겨서 얼른 대답하라는듯한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한 릴리는 그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사벨라를 마주보며 배시시 미소짓는다.
이안이 결국 함께 점심식사하는것을 허락하자 그제서야 씨익 웃는 벨라였다. 그런 벨라를 보고 한숨돌렸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릴리는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이안을 보더니 뻔뻔한 표정으로 '뭐'라며 입모양을 벙긋거린다. 그러고는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 벨라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네, 뭐. 릴리라면 칼레로아 공자하고 순순히 약혼하지않을거란걸 알만큼은 가깝죠. " "벨라는 나를 잘 아니까 애초에 벨라를 속이는건 어려웠을거라구."
존대를 하는 이안에게 맞추듯이 존대를 하며 말을 한 벨라가 싱긋 웃더니 "그리고 이사벨라양이 아니라 카산드라 라고 해달라니까요? 우리 그렇게 친하진 안잖아요?"라고 말한다. 누가 친구아니랄까봐 릴리처럼 새침한 벨라였다.벨라가 새침하게 나오던말던 릴리는 그저 방금 이안이 했던 꿀밤형이란 말이 걸리긴하는건지 변명아닌 변명을 한다.
"뭐, 만에하나 릴리가 갑자기 한순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공자와 약혼을 결심했다고 생각하기엔.. 공자는 릴리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릴리는 하녀가 가져다준 오렌지주스를 한모금 넘기던 찰나에 들려온 벨라의 폭탄발언에 놀라 사레가 걸린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는 릴리를 흘끗하고 본 벨라가 손수건을 건넸고 그걸 받아든 릴리가 입가를 닦아낸다.
익숙하다는듯한 이안을 빤히 바라보던 릴리는 더 화내어봤자 그럴 가치도 없다는것을 깨달았는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별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너랑 평생 밥먹으며 살바엔 수녀원에 들어가고만.....야. 근데 그동안 그렇게나 으르렁 거렸던 사람들이 약혼을 한다는이유로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연인처럼 변한다는게 말이 안되지않니?"
이안이 뭐라 말하던 말던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대충 대답하던 릴리의 머릿속에 순간 의문점 하나가 스쳐지나간다. 그동안 으르렁거리면서 지나가던 개만도 못하게(이것도 릴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로를 대해왔던 두 사람이건만 하루아침에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다닌다는것이 도저히 말이 안되는것이었다.
"아무리 약혼에 순응을 하기로 했다고한들 그동안 얼굴만보면 싸워댔던 사람들치고는 지금 우리 너무 친밀하다고."
뭔가 이상하긴했는데 이안의 기세에 떠밀려 여기까지 와버린터라 뭐가 이상한것인지 정확히 집어내지는못했었지만 조금전의 화로 머리가 차분해진 릴리였기에 뒤늦게나마 인지할 수 있게된 모양이다.
"애초에 사이좋은 약혼자인척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던거 아닐까? 그냥 대충 약혼에 순응하는척만 하면되는거니까. 부모님들도 우리가 서로 죽고못살만큼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걸 바라지는 않으실거아니야? ...아, 칼레로아 공작부인은 좀 다르시려나.."
이안의 말을 조용히 듣던 릴리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니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해도 명확한 해답은 없는듯했다. 이안이 채워준 와인잔(물론 성인식을 치르지않았으니 둘의 잔에 채워진건 무알콜 와인일것이다.)을 든 릴리가 목을 축인다.
"...이왕 하기로 마음먹은거 제대로 속여야지. 말 잘듣기로 했다는 그런 어설픈 대답으로는 우리 어머니 못속여."
지금이야 자리를 내려놓으시고 벨레로아 공작부인으로의 삶을 살고계시지만 한땐 황실 기사단장을 제의 받았던 어머니인만큼 지금의 어설픈 이유는 금새 파악하실터였다. 그리고 릴리같은 말광량이가 순순히 부모님의 말을 듣기로했다는것만큼이나 말도안되는 이유는 없을테고.
"이렇게 하자. 너랑 나는 서로의 약혼소식을 듣고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려 노력했어. 하지만 도무지 양가 부모님의 눈을 속일만한 방법이 생각나지않은거야. 하지만 우린 포기같은건 하지않았어. 시간이 날때마다 만나서 계획을 세우려노력했고 그러다 우린 의문점이 든거지. 우린 왜 서로를 밀어내려고만 하는건지. 의문점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해봤자 나오는 답은 없었고, 마침내 깨닫게된거야. 우린 서로를 싫어하고 있었던게 아니라 사... 우욱.."
괜히 마법학부 수석이 아니라는듯 짧은 시간안에 최적의 시나리오를 찾아내어 줄줄 읇던 릴리는 시나리오라도 이안과 자신의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해야한다는것에 거부감이 드는듯 우욱 하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곧 갈무리를 하곤 질린 표정으로 와인을 마신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싫어했다는걸. 그래서 우린 약혼을 받아들이기로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