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나에게는 은신한 적을 추적하는 기술 같은건 없다. 방금전처럼 겨우 막아내거나 아니면 이 주변 전체를 휘말릴 정도의 공격이 아니라면 잡기도 힘들겠지
"내 목은 비쌀텐데"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암살자라면 머리 목 심장 등 일격에 끝낼 수 있는 급소를 노리고 올거다. 그리고 그걸 노리기 위해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오겠지. 흔히 친구를 놀라게 하기 위한 것과 다를바 없다. 그렇다면 공격하는 순간 전방위를 전부 막은 다음에 반격에 나서자
다만 몸이 굳어가는 이질적인 감각이 이 곳이 어떤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추위에 얼어가는 아이를 따스한 숨결로 보호해준 노인의 광경은 분명 훈훈해야 할 터이지만.
순식간에 전신의 털이 곤두섯고, 심장이 맥동친다. 강하다. 강하다. 강하다. 아니, 강약의 문제조차 아니다. 따지자면 거구의 인간 앞에 선 개미와도 같은 것. 존재의 값어치가 단위부터 다른 이 느낌. 하늘을 올려다본 태양이 실은 누군가의 눈이었단걸 깨닫는 듯한, 코스믹 호러.
내가 이빨을 딱딱거리며 광란에 빠지지 않았던건. 다만, 몸에 익힌 반역의 정신 덕분이다. 나약한 인간이 강대한 존재에게 억지 부리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물의 덕. 그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지금은 도움이 되었다.
어쨌거나 확신했다. 저 노인이 '고신'이다.
뭐가 그리 급하여 벌써 오셨소. 인가. 왜 왔냐고 책망하는 말투시로군. 겨울을 끝낼 생각도 없으시면서....그러나 조금 생각한다.
압도적인 강자에게 생각 없이 틱틱 거리는건, 용기가 아니라 그저 자살 희망자일 뿐. 지금 여기에선 고신에게 이 곳에 머물러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게 중요하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해라. 거짓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줍잖은 거짓말은 발각되면 더 큰 화를 부른다. 그렇다고 저 존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해가 있으신듯 한데, 저는 이 곳을 파괴하러 온 무례한 불청객이 아닙니다. 자상하신 어르신."
나는 여기서 날뛸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다. 무언가를 부수고 공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이트도 아니고. 그러니 공격 의사가 없다는걸 밝힌다. 물론, 있다고 한들 어떻게 되는 상황이 아니란 점도 있다마는. 그럼 그 다음에는 그래서 왜 여기에 왔는지를 전할 때. 이것만으로는 '그럼 돌아가주시오' 라는 답변이 나올 것이다.
"저는 잊혀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맹세한 수련기사입니다. 이 혹한의 겨울속에서, 찬바람 속에 묻혀져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하이젠피우스에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기사단장님을 설득할 때. 나는, 분명 그렇게 맹세했다. 소리에 묻혀 듣지 못할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고. 그것은 허풍이 아닌 나의 진심.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고신의 이야기에서 악의를 느끼기 보단,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잊혀진다는건 무슨 기분일까.
조금은 안다. 나의 기억속에 있는 과거의 인물들도, 전부 잊혀졌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듣고 싶다.
그러니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전한다. 나의 장점은 당당하다는 것. 나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다는 것.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저 강대한 존재에게 스스로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악인이 아니라는 당당함 뿐.
....그치만 역시 이것만으론 부족하니까, 조금 더 실리를 덧붙이기 위해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가 배가 고플 때, 따스한 스프를 먹여줄 수도 있습니다. 이 곳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노력할테니, 잠시간 머뭄을 허락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강산은 작게 중얼거린다. 차마 교실에서 욕을 할 순 없었지만 혼란스러운 표정은 그대로 얼굴에 묻어난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강산이 특별반이 아니었다면, 아니 그것도 반 년 전이었다면 그도 이걸 본 다른 사람들이 남긴 덧글처럼 쓸데없이 고퀄리티라 위험한 장난 영상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미친 게 아닌 이상 댓글들의 말대로 굳이 이런 1세대 빌런을 흉내내서 놀 사람은 없다. 이건 진짜로 저 빌런이 살아난 거여도 문제고 모방범이어도 문제다.
#'넓고 얕은 지식' 특성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npc에게 알린다면 누구에게 알려야 할까요?
>>720 아주... 연노란 빛의 즙이 새어나옵니다. 살짝 피부가 따갑긴 하지만, 곧 즙이 닿은 부분이 얼얼한 느낌이 듭니다.
무언가.. 알 것 같기도 하고?
>>722 고신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별로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단지, 갑작스럽게 찾은 손님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조금은 친절했단 점이 기분을 나쁘지 않게 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맨 뒤에 붙은 그 문장이었다. 음식이 귀한 곳에서, 음식을 베풀 수 있다는 것. 이 춥고, 거친 동네에서 살아가는 그에겐 그 모습이 선인을 가름지을 수 있는 문장이었다.
" 오래 지나지는 마시게나. "
그는 툭, 말을 던졌다. 당장의 축객령은 아니었지만 손님으로 대접하겠단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며칠 머물러도 좋다. 이방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접인 듯 했다.
" 그래. 그대는 어디서 오셨소? "
그는 그에게 물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답이었다. 어느 신의 사도이던, 아니면 신을 몰아내겠다는 당찬 이들의 누군가일지도 몰랐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지내지 않겠다는 확답은 할 수 없다.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능한 노력하겠다는 의사와, 감사를 전하기로 했다. 적어도 첫수는 나쁘지 않았다고 판단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 잘못하는 것만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힘들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 곳은 혹한의 지대. 춥고, 배고픔은 사람을 날카롭고 인색하게 만든다. 저 퉁명스럽게 보이는 말 조차도, 이 곳에선 '좋은 결과' 라고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지만 나는 방금 아이에게 불어넣어주는 따뜻한 숨결을 보았다. 그리고 내 기억속에도 또한, 어렴풋이, 그러나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이 있다.
열악하고 거지같은 환경속에서도. 인간의 정이란건, 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그 온도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뜨겁지만은 않더라도.
"저는...."
조금 생각한다. '신한국 미리내고 특별반입니다.' 라고 해봤자, 알아들을 수가 없겠지. 대화의 불씨에 제대로 타지 않는 장작을 던져 넣으면 허무하게 꺼져버릴 뿐이다.
"먼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왔습니다. 어르신. 최근에 배움을 위해 이 근방으로 와서 수련기사가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