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신도 인간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안즈가 린의 진심을 알았더라면 정말 단단히 삐져버렸을 테니 말이다. 풀기 힘들진 않더라도 한동안 번거롭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일이라 하자.
"흠, 흐흠, 안즈가 좀 그렇긴 하지..."
괜스레 헛기침하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려 했다. 아무래도 린의 반응이 싫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 간절함으로, 혹은 그런 척하느라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면 조금 움찔한다. 뭐, 보고 싶었던 반응도 봤고 애초에 그렇게까지 삐진 건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로 그만할까?
"좋아, 관대한 안즈가 한 번만 더 넘어가 줄게!"
슬그머니 팔짱을 풀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은 정말로 없는 줄 알아! 잘 기억하라는 것처럼 단단히 일렀다. 물론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냥 엄포를 놓는 것에 불과하다.
나 이거 본 적 있어. 사고 치고 난 후 강아지 반응이라면서 올라온 그거, 그 사진이랑 완전 똑같잖아! 안즈는 약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세상에! 하고 외쳤다. 그러고는 잠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러면 다음부터는 더 조심스럽게 대해 봐... 학교 비품 다 부서지기 전에."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당연히 린을 놀리려 한 소리다. 진심도 약간은 섞여 있지만.
"아마 다른 게 고장 난 건 아니고, 그냥 저번처럼 뭐가 끼거나 해서 돈을 씹은 것 같아요. 왜, 저번에 하나쨩 때처럼요!"
시들시들해진 선생님들이나 그만큼 생기발랄해진 린의 모습은 안즈의 시야에 들어오지 못했다. 열심히 설명하느라 그런 건 안중에도 없나 보다. 말을 마친 후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마주한 안즈는 작게 아이고, 탄식한다. 고생 많으시네. 나중에 사탕이라도 좀 드려야지...
안즈는 교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도망가는 린을 뒤쫓아 빠르게 걸었다. 저렇게나 교무실이 싫을까! 같은 생각도 조금 하면서. 와중에 린이 쾌활하게 말을 걸어오면 우쭐한 얼굴이 된다.
"고럼! 안즈가 얼마나 인기쟁인데!"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아주 자신감 넘친다. 히히 웃는 모습이 장난꾸러기 같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허풍이나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그 점이 가장 무서운 부분일지도.
잇쨩은 거짓말을 계속 하려는 것 같아요. 선생님한테 혼나는 것보다는 저한테 좋다고 말합니다. 제가 아이돌이 아니고 잇쨩이 아이돌이라고만 말하면 혼날 일은 없을 거에요. 거울을 갖고 나왔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정말 선생님을 부를 수도 없으니까 대신 잇쨩을 혼내기로 해요. 하지만 잇쨩을 혼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잇쨩의 손등 위에 다른 손의 손가락 끝 바닥을 살짝 부딪칩니다.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아프게 때릴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계속 거짓말하면 다음에는 꼬집을 거에요.”
말해버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어떤 신님의 장난일까요? 나한테만 알려줘야하는 소원을 남들에게 말하고 다니다니 괘씸하다고 생각한 신님이 있었던 걸까요? 저는 소원을 빌 수 있는 신이 많으니까, 꼭 하루노하나히메님에게 소원을 빌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잇쨩이 소원을 말하더라도 잇쨩의 소원을 이루어주세요’ 라는 소원을 빌 수 있어요.
“무슨 소원이에요? ...궁금한 건 아닙니다.”
궁금해요! 그리고, 제가 소중해서 저에게는 말해줄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요. 잇쨩에게 저는 나름 특별한 사람이라는 거니까, 저도 특별한 잇쨩을 대신해서 소원을 빌 수도 있습니다. 잇쨩이 소원을 말하더라도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해도 되겠고, 잇쨩과 같은 소원을 빌어도 되는 거에요. 같은 소원을 다른 두 사람이 빌면 정말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고 생각한 신님들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줄 지도 모르잖아요. 잇쨩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말을 다 하지 못 했어요. 할 수 있는 말이 이게 최대였습니다. 존댓말과 반말의 경계에 있는 말을 혼잣말인 척 얼버무립니다. 잇쨩은 바보가 아니고, 제가 해줘서 더 예쁜게 아닌걸요. 다른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 머리를 땋아서 장식하는 건 거울을 보고 해도 예쁘게 하기 어려우니까요. 얼버무리다보니 잇쨩을 잘 바라보지 못 하지만, 그래도 팔짱을 낀 팔을 잘 얽고서 걷는 건 열심히 합니다. 마츠리에는 가야 하니까요. 꽃 향기가 나고, 사람들의 들뜬 소리가 들려요.
“신님한테 인사부터 하러 가요.”
신사는 벚꽃나무 안 쪽에 있으니까요, 가는 길도 분명 예쁠 거에요. 상하지 않고 떨어진 벚꽃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애들이 무섭다는 건 알고 있다. 서양에서 들어온 무슨 이상한 운동회 같은 걸 한다고 횃불을 들고선 온 도도부현을 돌아다니질 않나, 곰방대 말고도 일회용 궐련을 수도 없이 피우면서 아무 데나 불씨를 털지 않나. 철판구이 가게에서도 고기를 다 태울 것마냥 불이 높이 치솟는 건 예사다. 심지어 벽난로가 그냥 1시간동안 타는 방송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한 달에 1,490엔(세금 포함)씩이나 내면서⋯.
하여간 세상이 말세스럽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요이카의 논점은 약간 달랐다. 양손의 손가락을 세워서 머리를 쓱쓱 빗으며 걸는 중에 말했다. “남궁, 내가 걱정하는 건 그 반대야. 어지간히 양기 강한 인간이 아니면, 나하고 길동무라도 했다간 이유도 없이 개한테 물리거나 웅덩이에 빠지거나 하더라고⋯. 당신도 조심해. 경험상 이런 장소에서는 송충이를 머리에 맞아.”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혹시 어쩌나’가 침입해 온 것인지, 요이카는 시무룩한 얼굴로 살짝 멀어졌다. 인간이 아니니 액땜이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습관성이다.
“여름 축제까지 찾는 건 확정이야. 여름 축제는 1000년 뒤에도 일단 예정되어 있으니까. 중요한 건 키구치 요이카가 그때까지 사느냐는 거지.” 신이라서 수명에 대한 걱정은 없을 터이나 어째선지 인간 같은 말을 한다. “아니, 가미즈나는 처음이야. 오히려 나는 당신이 여기 신들이랑 아는 사이일까 싶었는데, 아니었군⋯.”
키구치 요이카는 뒤따라가는 입장이면서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보고 있는 듯했다. 숲이 깊어질수록 멀리 나온 인적은 드물어지고, 인간의 모습으로 「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도 신경쓰이지 않는 공간이 나무 그림자처럼 드문드문 이어진다. 돌풍이 돗자리를 모조리 뒤엎어 버리고 관광객을 모조리 쫓아낼 염려는 사그라들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요이카는, 불쑥 앞으로 튀어나가 눈앞에 보이는 제법 커다란 수양벚나무를 향해서 똑바로 걸어갔다. 길게 늘어진 벚나무 가지를 포렴처럼 걷어 헤치고 지나간다. 어느새인가 요이카의 귓가에도, 아무 구도 쓰지 않은 새하얀 탄자쿠 같은 귀걸이가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요이카의 눈은 코다마를 본다. 가지에 숨고 옹이에 들어가 모두 겁먹은 듯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을 본다. 원념이 일으켜 잠들지 않는 솔바람에 대고 송충이를 쏟아내는 반격을 준비하는 것을 본다. 침묵하는 벚나무의 줄기에 손바닥을 대고 읊조린다.
“나는 카모아시야마에서 온 은행나무야. 가지고 온 원한이 너희를 떨게 하겠지만, 액운을 쫓는 좋은 친구가 와 있으니까 괜찮아⋯.” 요이카는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코다마들이 두려움을 거두고 꽃잎으로 올라와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을 본다. “작은 부탁이 있어. 너희가 가미즈나에 선량한 서풍을 가져다주듯이, 나에게도 조금만 평화를 가져다 주렴.” 그리고 내가 여정을 마치는 순간까지 이 아름다운 고을에서 모두가 무사하기를.
벚나무에 이마를 가만히 대고 조용히 있던 요이카는, 이윽고 꽃가지가 드리운 차양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좋은 친구’라고 말해 버렸는데 괜찮지?”
궁금한건 아닌데요. 라는 말에 리오는 그럼 말고- 하고 조금은 싱거운 반응을 내비치곤 그저 헤헤 하고 웃을 뿐이었다. 옛날에는 조금 더 살가운 느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은 남아있지만 리오에게는 그런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리오에게 지금의 하레하네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해온 그 하레하네가 맞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여전히 연락할 때마다 받아주고 있고 여전히 친하게 지내주고 있고 여전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주고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냉장고에 갇혀있던 어린 아이를 구해주었던 그 때, 아니 그 이전부터 하레하네는 같은 사람이다. 리오는 보지도 않았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 보지 않아도 아는걸- 그럼 지금 볼까. "
리오는 핸드폰을 꺼내 머리장식 여기저기를 비춰보며 그게 뭐가 재밌는 것인지 꺄르륵 하고 웃을 뿐이었다. 머리 땋은게 예쁘다거나, 역시 손재주가 좋다거나 하는 말들. 걸어가는 와중에도 리오는 핸드폰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셀카를 몇 장이나 찍었다. 그리곤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역시 예쁘다던가, 하네는 대단하다던가 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 응. 인사부터 하러가자. "
신님한테 인사를 드린다. 리오는 그 말의 뜻은 알고 있었지만 마음 속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신이라는 것과 거리가 가까운 삶을 살지는 않았기에 깊게 와닿지 않았다. 이 마을의 전통이나 축제라는 것 쯤은 알고있었지만 그게 그래서 마음 속 깊이 다가왔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였다. 신이라던가 축제라던가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지금 하네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것 뿐이었으니까.
" 하레하네, 사진찍자 우리. "
혼자찍는 사진은 의미가 없으니까. 리오는 팔짱을 꼭 끼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괜찮은 스팟을 찾았다. 커다란 벚꽃나무가 있고 근처에 노점상이 몇 개 있어서 오렌지색 불빛이 예쁘게 보이는 자리. 오늘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외로울 때마다 본다던가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여전히 느슨하면서도 강하게 팔짱을 끼고 조금 더 몸을 가까이 붙인 리오는 몸을 돌려 하네를 바라보았다.
쿠궁!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화들짝 놀란 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야 못 보여줄 건 사실 또 전혀 없지만, 아무래도 이 선배······ 너무 건실하고 모범적인 데다 순진한 인상이라 차마 이자카야라고 소개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표면상 부장은 본인이었으니만큼 자신이 주도한 걸로 오인 받기도 알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실망한 선배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며 휘장을 향해 삐걱삐걱 돌아가는 꼴이 녹슨 로봇 같다. 그러면서 그녀는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는지—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해명의 말을 혼자 조잘댔다.
“절대 제가 하자고 한 게 아니라 이게 전국 무용과 행사 관례라고 해서······. 진짜 멀쩡한 데예요. 끽해야 버터맥주고, 전부 알콜프리 음료에 칵테일도 논 알콜! 아이 건전해.”
내부는 흔히 볼 수 있는 이자카야 컨셉의 노점상이다. 구석 한 켠에 마련된 공연 포스터, 어느새 전시되어 있는 푸른색 로맨틱 튜튜 의상과 그 둘레를 따라 둥글게 놓아둔 여러 켤레의 슈즈를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주점에 어울리지 않는 어중간한 시간대인 터라 손님은 둘뿐이다. 길게 둘러진 다찌 테이블 안쪽 공간에서 몇몇 부원들이 분주하게 자재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야나기는 그들을 향해 잠깐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이내 다시 케이를 휙 돌아보느라 나풀대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여기보다는 다른 데가 낫지 않을까요? 메뉴가 죄다 안주 아니면 주전부리밖에 없거든요. 보통은 저녁들 먹고 많이 오세요.“
#자캐가_무서운이야기를_듣는다면 “돌아보니까 거기에는 귀신이!”: 본인이 현재 귀신 비스무리한 존재라 감흥이 없습니다 “나무에 사람이 걸려 있었대!”: ‘아, 그거 나도 겪어 봤어. 태풍에 소가 날아와서⋯.’ 공감썰이네요 “그러고 보니 나 하천에서 불장난 한 적이 있는데,”: 뭐, 뭐야, 그런 이야기 하지 마. 안색이 어두워지고 조금 쭈굴쭈굴해져요
#자캐의_가방_속 물통은 필수품이에요. 스이카도 최근 클래스메이트의 걱정 섞인 제의에 장만했지만 이상하게 생긴 명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