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아도 같은 반 아이에게 무턱대고 짜증내버려서 머리가 하얘지는데, 리오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더더욱 어쩔 줄 몰라 쩔쩔맨다. 이치노세 양, 얼음처럼 굳어버렸잖아. 그저 전단지를 주려고 한 것뿐인데 화를 내버렸으니까 놀라는 게 당연해. 당장이라도 사과해야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갈피를 못 잡은 미야나기가 진땀을 뺐다.
“으응? 어어, 아니. 괜찮아! 이름으로 불러줘서 오히려 기뻤어.”
그러다 말고 이내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미야나기는 어떤 비난이라도 감내할 생각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는데, 어라. 조그마한 속삭임 속에 담긴 말은 예상 외로 다정한 내용이다.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 미야나기가 살짝 안심한 얼굴을 했다.
”응, 그래. 그럼 리오······로 괜찮을까. 리오.”
리오, 혀를 한 번 굴려 발음하는 이름이 상냥하게 들려 참 상냥하게 들렸다. 계속 불러보고 싶은 단어라고 생각하며 조금 웃은 미야나기는 꽉 쥐어주는 전단지를 두 손으로 건네 받았다. 으응, 그래. 카페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있는 듯했다. 물론 가게 근처니까 여기서 영업하고 있던 거겠지만. 리오를 따라 종종 걸으며 이것저것 설명 듣던 미야나기는, 곧 머리가 빙빙 도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메, 메이드 카페? 그렇지. 리오도 메이드복을 입고 있고 전단에도 그렇게 적혀있으니 당연히 메이드 카페겠지만? 어어 내가 진짜로 지금 메이드 카페를 가고 있는 거야? 진짜로? 그런 곳 도쿄에서도 가본 적 없는데······! 정말로 그곳에 도착하는 걸까, 약간 긴장한 미야나기의 앞에 두둥. ‘입구’가 나타나고 말아버렸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옆의 리오를 바라보는데. ······맙소사! 리오는 온데간데 없고 ‘메이드’ 리오 양이 옆에 서있다. 이윽고 울리는 딸랑딸랑 종소리와, 정돈된 여자아이달의 —안 돼! 그것만은 제발!
“어서 오세요, 주인님—!!”
미야나기는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이, 이 부끄러운 인사! 이 부끄러운 핑크빛 가게! 그, 그리고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주인님’이 되어버린 나······. 완전히 얼 빠진 얼굴로 횡설수설 당황한 미야나기가 저도 모르게 리오의 팔을 붙잡고 뒤로 숨어버린다. 아직 리오와 말을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은 사이라는 건 깜빡 잊은 채.
“저, 저기 리오. 최대한 구석으로······ 잘 안 보이는 자리로 가줄 수 없을까? ······그리고 이왕이면 저기, 저 아저씨들이랑 약간 떨어진 자리로 부탁해.”
오늘도 자신의 한량스러움을 뽐내는 놈. 점심 시간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저잣거리 술꾼과 다름 없는 모양새다. 옥상에 햇볕을 쬐는 것도 좋겠고, 교정에 앉아 군상의 형태를 보는 것도 좋겠다. 날씨가 좋으니 무얼 해도 괜찮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놈에게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으니, 이 밝은 날에도 어둠 끌어안은듯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신님이시겠다.
귀중한 시간 저리 누워있는 걸 보아하니 연애 놀음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 한량 놈이 곁에 다가간다해서 밀어낼 것 같은 인상도 아니다. 좋다. 한 번 말이나 걸어볼까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놈이 다가간다. 그렇다고 바로 말을 거냐? 그것 역시 아니다. 무언가 옆에서 꼼지락거리기를 잠시...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도 겉으로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지라, 깜짝스러운 일이 벌어지지고는 하지요. 이를테면..."
놈이 손을 내밀자 가위로 잘려진 종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야카의 옆모습을 본따 자른 것으로 일종의 페이퍼 커팅 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신으로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아닌지 그럴 듯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공연 준비는 순조로웠다. 기타의 상태도 좋았고 마이크의 상태도 좋았다. 연습도 합주도 제대로 해놨었고 컨디션도 좋았다.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을 느낌이었다. 저녁 하늘도 약간 파란색인 것도 마음에 들었으며 살짝 시원한것도 마음에 들었다. 오늘 컨디션이 좋다고 말해도 구태여 밴드의 두 살 위 언니는 자기파괴의 흔적이 있는지 손목을 꼭 확인해야겠다길래 소매도 걷어서 깨끗함을 보여주었다.
" 괜찮다니까. "
단독 콘서트도 아니고 꽤나 이름있는 밴드가 공연 하는것에 기대어서 오늘 하루 중 시간을 조금 배정받았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은 쉬이 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리오는 갑자기 긴장이 확 밀려왔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피크를 놓치면 어떡하지. 갑자기 정전이 나버리면 어떡하지. 관객석에서 토마토가 날아올지도 몰라. 한 번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스트레스가 밀려오면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 뾰족한 악의의 덩굴이 꿈틀거리며 점점 더 안으로 몰아세운다. 리오는 잠깐 화장실좀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 잘 할거야. 잘할 수 있어. "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한 곡 정도는 직접 노래하게 되었다. 팬서비스라고 할까, 한 번 정도는 괜찮잖냐~ 라고 말하는 통에 저도 모르게 덜컥 수락해버려서 긴장이 몇 배나 더 하게 되었다. 몸 한 쪽에 기타를 메고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빠져나와서는 가만히 정처없이 걸었다. 오늘 공연에 와줄 관객들을 미리 본다면 조금 걱정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리고 친한 친구를 만난 것은 거기에서였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자마자 리오는 검은 마스크 뒤로 미소를 크게 피우곤 도도도도 하고 달려갔다
" 미야- 미야-! 미쨩-! 미야-!!! "
기타가 떨어질까 한 손으로 꼭 쥐고 한 손으로는 손을 흔들면서 달려갔다. 꽤나 크게 불러서 주변에서 시선을 조금 받았지만 그 정도는 상관 없다는 듯 뛰어가서는 기타를 등 뒤로 돌려메고 두 손을 잡고 몇 번이나 흔들었다.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라고, 긴장되고 걱정돼서 혼났다고 말하면서 조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점심을 조금씩 먹는다는 것도 사야카에게는 그다지 익숙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단 노력해보겠다고 한 이상 먹긴 먹는 편이다. 여담으로 급식비 청구를 받은 신관님은 급식비.. 그렇구나.. 에? 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노기력.." 옥상의 그늘진 벤치에 누워서는 하늘 잠깐 보다가 눈을 붙이려 한 사야카에게 누군가 다가오고... 신이라는 걸 알 즈음에는 완전 가까운 것 같아서 왜 왔나 싶었는데... 꼼지락거리는 걸 쫓아보내기가 귀찮아서 놔뒀더니. 말을 건다. 귀찮은데... 그래도 말을 걸었으니 대답을 해야겠다.
"넌 연애 목적?" 너는 연애 목적으로 와서 나에게 그런 걸 묻느냐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줄이면 저렇게 됩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처음 보는 신을 올려다보고는 정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페이퍼아트를 집으려 하는군요.
" 응. 리오로 좋지만, 여기서는 안돼. 내 이름은 아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아리스) 할 때 그 아리스. "
그 큰 소리의 인사와 함께 이 세계에서의 이름을 알려주곤 리오는 귀에서 마스크를 벗어 에이프런의 앞 주머니의 넣어두고 미소를 지었다. 작위적으로 연습한 자연스러운 미소라는 녀석은 오늘만큼은 마음이 조금 편해서인지 더 제대로 된 모습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밖에서는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지만 이 세계에서는 메이드와 주인님인 것이다. 리오는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 네에 - 주인님 - "
잘 안 보이는 자리를 요청하자 리오는 'かしこまりました(잘 알겠습니다)' 하고 조금 당차게 대답하곤 손을 들어서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 아리스가 미야나기 주인님을 모실게요 - "
지금부터 시간을 카운트 해달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오늘은 곤란한 시간대의 시프트를 부탁받은 것이니 조금은 갑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어서 자잘한 자릿세라던가 시간대로 들어가는 돈 따위의 것들은 전부 빼버릴 생각이었다. 그 정도 능력은 되기도 하고 오늘은 부탁받은 입장이었으니까.
" 밖에서의 여행은 어떠셨나요 주인님 - ? 아리스도 밖의 이야기들, 주인님의 이야기를 잔뜩 듣고 싶어요오 - "
너 오늘 학교에서 만났잖아 같은 말을 하는 것은 NG. 이 곳에서는 이 곳의 규칙이 있는 법이라고 리오는 생각했다. 먼저 존댓말을 사용하고 확실히 주인님이라고 일러두거나 '학교 수업 지루하지~'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잘 보이지 않고 아저씨들과는 떨어진 자리. 바 테이블의 한쪽 구석에 안내하고는 '짐은 아리스가 맡아드릴게요' 하고 말하며 잔짐을 받아 정리해두었다.
" 오늘은 아리스랑 같이 오랜만에 돌아오신 주인님의 모에레벨☆ 잔뜩 채워보자구요. 일단 소프트 드링크로 원 드링크- 준비해드릴게요 "
달콤하고 새콤한 걸로. 봄의 인기 드링크라면 역시 사쿠라 버블티다. 리오는 능숙하게 버블티 한 잔을 가져와 건네주곤 바 테이블의 맞은편에 서서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 조금 적응하기 힘드려나..? 힘들면 이야기해줘. 거기에 맞춰서 또.. 이렇게 라던가 저렇게 라던가 가능하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와줬으니까 재밌게 즐기게 해줄게..! "
간단한 감상을 남긴 놈. 이런 부류는 인간 세상 살이도 쉽지 않다. 어찌되었건 인생보단 신생이 편리하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대충 순항하지 않고 있다는 걸로 알아들었다.
"예에ㅡ 아무래도 그렇긴 한데ㅡ"
놈이 말을 질질 끈다. 몇 번 연애를 해봤는데 썩 좋게 끝나지는 않았기 때문. 게다가 놈도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냥 스몰토크용으로 공통주제를 던졌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대충 손에 아트를 쥐어주고는 ㅡ선물 주는 것치고 성의가 없었는데, 상대의 반응을 보니 요란떨기 애매해서 그렇다.ㅡ 말을 이었다.
"난 포기할 거야. 다 관둘 거라고." 이노리: 관두고 싶어요? 으음.. 많이 힘들어도 괜찮아? 이럴 때는 신 님의 시련이에요? 응, 네 잘못이 아니야- 전-부 못된 운수신님이, 네게 질투가 나서 못된 장난 치는 거니까, 네 잘못 아니니까 맘껏 원망해도 돼요-? 그리고 조금만 더 해보면 될 지도 몰라요? 신 님 시련 이겨내는 거잖아? 멋져- 읏챠, 이노리가 착해 착해 해줄게- 착해 착해-
"계속 욕을 중얼거리는 사람을 보면?" 이노리: 응? 뭐라고 한 거야-? 앗-! 설마, 새학기라서 자기소개 한 거 에요?! 너! 시바루 군!! 시바루 조우나- 군이에요? 안녕!!! 시바루!!!
"좋아하는 친구와 다투게 되면 어떻게 해결해?" 이노리: 그게, 이노리가.. 화가 나서 친구 보고 말린 미역이라고, 해버렸어요..? 이노리는, 그게, 그렇게 말하려고 한 거 아닌데.. 그러니까...(옷깃 잡던 손 꼬물대다 그렁그렁) 으아앙- 미안해-!!! 이노리가 나쁜 말 했어- 용서해주세요- 으앙-
참 적응이 안 되는 걸까. 미야나기는 두 손을 곱게 모아 고개 숙이는 리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리, 리오? 아니지. 아리스? 이제 리오가 아니고 아리스 양이긴 하지만 대체 날 두고 혼자 어디로 가버린 거야 2학년 A반 리오야—!! 여긴 정말 아리스 양밖에 없는 거야? 아리스가 주인님을 모신다니, 아무리 일하는 중이라지만 그런 멘트 정말 괜찮은 걸까! 넋이 나간 미야나기와는 다르게 일하는 리오는 확실히 제법 프로답다. 자연스럽게 밖의 여행이라느니(‘나 학생인 거 알지 않아, 리오?’) 주인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느니(‘아까 학교에 같이 있었잖아. 그보다 주인님도 아니고!’) 역할에 몰입하는 게 진중하달까. 에잇! 모르겠다. 이왕 오게 된 거, 재미없게 굴면 오히려 불편할 거야. 애초에 본인 또한 연기는 전문이니 대놓고 당황한 기색은 넣어두고 최대한 콘셉트에 맞춰주기로 했다. 본인의 주문에 따라 안내된 구석진 바 테이블로 종종 걸어가며, 떨떠름하게 리오, 아니 메이드 아리스 양에게 가방을 건넨다. 이런 거 정말 시종 부리는 듯해서 불편하지만······. 미안해, 리오! 아무튼 저는 가만히 있는 동안 자동으로 척척 주문되고 앞까지 친히 대령되는 버블티 한 잔을 빤히 바라본다. 반짝반짝, 핑크색 조명에 투명하게 부서지는 게 예쁘긴 하다. 봄에 맞춰 나온 시즌 드링크이려나?
”아니야, 오히려 내가 너무 당황한 티를 내서 미안해! 메뉴 보여줄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아까 점심, 걸러서 배고프다.“
최대한 많이 남겨먹을 수 있는 걸로 주문하겠다는 사인이다. 아니, 역시 음식보다는 음료 쪽이 마진은 더 많이 남는다고 그랬던가? 아무튼 친구 좋은 게 뭐겠어! 아리스 양에게 도움되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결연한 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