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배려에 그녀는 살짝 시선을 낮게 깔고 중얼거리더니, 짐짓 고민하는 얼굴을 짓다가 별안간 다시 말을 흘려내었다.
"...하지만 눈을 감을 필요는 없어요... 당초, 제가 눈을 사용할 필요가 생긴 건 필멸자를 본뜬 모습을 하게 되었기 때문일테니까요. 이 모습은, 확실히 제약은 많습니다만... 필멸자들 사이에 섞여 지내기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필멸자들의 인세로 내려왔다면 결국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 앞으로를 생각하면 제일 좋은 방법이겠죠."
그것은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붕뜬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뭇 진지해보인다. 밤에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발간 입술 사이로 느릿하지만 꾸준하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점이 으스스해보이기도 하고, 범인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인물이라고 짐작케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신이 무녀였기에 망정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무서워져서라도 그녀를 떼어놓고 갔을테니...
"게다가...... 필멸자와 뛰노는 생령들의 사이에서 눈을 감고 생활해야 할 만큼 저는 무르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그렇다는 걸 방금 떠올렸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괜스럽게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당신과 이 기묘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제 나름의 어떠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가, 그녀의 자색 눈은 여전히 멍한 그대로였지만 그 깊은 안쪽에는 확신의 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려 반쯤 엎드려 있던 중에, 뜬금없이 들려온 신문 군을 데리러 왔다는 외침을 듣자마자 척수반사적으로 반박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게, 이 녀석은 매번 날 신문부원이라는 이유에서인지 '신문 군'이라고 불러대곤 하니까. 그보다... 이런 무거운 공기를 뚫고 저렇게 난리통을 부릴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한 수준이다.
"어, 어... 네. 과제... 과제를 또 하기로 제가 약속을 해 가지고 지금..."
반도 다르지만 어쨌든 아무튼 그렇다! 과연 이런 소리에 속아넘어가 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편집장 아니 부장은 다크서클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마저 귀찮다는 듯 그냥 손을 저어서 빨리 가라는 시늉을 하셨다. 방해받는 것 보단, 그냥 줄 거 줘버리는게 낫다고 판단하신거겠지. 내 경우엔 남아서 더이상 의미있게 할만한 것도 없기도 하고...
짐을 챙겨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곤 재빨리 무쿠루마를 데리고 부실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잠깐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조금 복도를 경보로 걸어 현장을 벗어나서는, 코너를 돌고 나서야 겨우 참았던 걸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너... 생명의 은인인건 고마운데 진짜 뜬금없고 무모하다. 그래서, 오늘은 또 뭐야?"
평소에 이 녀석이랑 얽히면 재미는 있긴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피곤해진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이다. 저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틀어박혀 있었으면 '피곤'으로는 끝나지 않았을테니까. 마치 감옥에서라도 탈출한 사람 마냥, 낮은 각도로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여우는 영악하지만 영리하기도 한 동물이다 당장 지금도 미카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주변을 맴돌며 냄새를 맡고 있지 않는가 미카는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는다 이윽고 꺼내든 건 비닐봉지에 둘둘 감싸둔, 점심 급식으로 나왔었던 사과 한 조각이다 누가 베어먹은 이빨 자국도 없고 깨끗하다 시간이 꽤 지나서인지 표면이 누렇게 갈변되었지만 상큼한 냄새를 맡아보면 아직 신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먹어봐."
미카는 비닐에 감싸인 사과를 꺼내서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먹을까? 안 먹을까? 여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부담스럽다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거 같기도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흘러나오는 암울함, 무쿠루마조차도 살풋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마감 지옥의 광경.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느글함에 콜라 일 리터 같은 호러를 제 입에 콸콸 넣어줘야 살 것 같았다. 이쪽도 나름 지옥이라구! 그때, 우중충한 공기 사이를 신문 군의 타박이 뚫고 오려다 힘을 잃었다. 아무래도 마감에 쫓기는 자들 사이에서 함부로 소리칠 자신까지는 없었던 것 아닐까? 나야, 다른 동아리니까 상관없지만. 어쩐지 자그마한 승리감에 몰래 에헤, 웃고 말았다. 못 봤겠지? 봐도 상관없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신문 군을 빼돌리기에 성공했다는 거다. 야호! 마음속에 피어난 성취감을 눈빛으로 뽐내며 지어지는 웃음을 숨기려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아─!"
그리고는 탁. 신문부실의 문은 닫혔고 이곳은 밖인데 탈환한 신문 군이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걸었기에 걸음을 따라잡으려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뒤따라갈 뿐이었다. 그러다 코너를 돌 때엔 등에 코를 박을 뻔해 으얏,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급정거는 경고음 필수! 하는 속마음과는 달리 무쿠루마는 활짝 웃으면서 기지개를 켜는 신문 군의 눈앞에 호러 책자를 불쑥 가져다 대었다. 가미즈나 고교 뒷산⋯⋯ 뒤에 있는 뒷산에 관한 정보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분다거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거나 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파보면 핏물이 묻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혹자는, 누군가 이곳에서 분신사바를 하다가 나타난 귀신에게 잡혀먹었다고도 말했다고 덧붙여있었다.
"가미즈나 고교 뒷산의 뒷산! 가자! 분신사바 재료는 내가 전부 챙겨놨어."
잘했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툭툭, 하고 크로스백을 쳤다.
"신문 군은 기삿거리 쟁취, 나는 그냥 즐겁고! 일석이조!"
. . .
"그렇게 해서 가미즈나 고교 뒷산의 뒷산에 왔습니다!"─무쿠루마는 자신이 취재진이라도 되는 양 신나서 외쳤다. 봄의 방과 후는 밤이 오는 게 느린 편이 아니라서 스멀스멀 푸른 기가 올라와 어둑했다. 우거진 숲의 나뭇잎들이 서로를 비벼대며 바스락 대는 소리를 연신 울려댔다.
>>177 그러니 앞으로 이 카와이이한 선배님에게 우마이한 공물을 많이많이 바치도록 하세요!! 큨ㅋㅋㅋㅋㅋㅋ ....죄송합니다 🙄 >>175 >>179 맞아요 뭔가 잔잔하고 무해한 모습이 닮았어. 아무튼 미야쨩의 멘트가 들릴까욬ㅋㅋㅋㅋ 스산한 기운에 뭔가 엄청 머릿속으로 아부나이를 외칠테야..! >>181 거기에서도 A, B, C 세 반이 있으니까 이 무슨 멋진 확률 🥰 ..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힣ㅎㅎㅎㅎ 마니또 공지 감사해요!!
>>183 그류큰뇨..! 역시 산토낗ㅎㅎ는 너무 쿠미쵸 느낌이구 으음 쿨뷰티 끼토신님 그런 느낌? 이 무슨 가볍고 되먹지 못한 궁예질이었습니다 🙄 >>185 빠밤 ─━☆ 괴롭힌다고 하니 「무서운게 딱 좋아 / 무서운게 딱 싫어」 파로 엄격하게 갈리는 시츄가 떠올랐어요 🤔 아무리 신님이라도 공포, 미스테리물에는 심약할 수 있단 말이여!
스멀스멀 땅거미가 내리는 산길을 랜턴 불빛을 비춰가며 걸어올라간다. 특히나 산길을 정말로 위험하기 때문에, 바리바리 장비를 싸들어야 한다. 풀숲을 헤칠 정글칼 같은것부터, 내 시점을 찍을 바디캠이라던가... 하나같이 용돈 아껴가며 구한 귀중한 물건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 목숨을 지켜줄 물건들이다.
"그렇게 대놓고 공포 분위기를 유발하는 지도라니, 오히려 뭔가 미심쩍은걸?"
'진짜'들은 보통 저렇게 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빙빙 돌리고 꼬고, 헛소리 같은 말로 갈피조차 못 잡게 만든다. 물론 대부분은 정말 찾아내서는 안될 것들 뿐이지만... 하긴 여태 늘 그랬다.
"냄새가 나. 냄새가. 프로는 아니지만 오컬티스트로서의... 피 냄새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게 피가 아니라 케찹... 아니. 내가 뭐라는거지? 아무튼 그렇게까지 신빙성이 있어보이진 않아."
겁쟁이들 특) 무서우면 말 많아짐. 그것도 지금은 자길 지켜줄 도구나 장비 같은것도 없으니까 더더욱 말이 많아진다. 여자애 앞이니까 폼 잡고 안무서운 척 하는 것 따위 내 사전에 없다. 아쉽게도...
신문 군은 랜턴, 나는 지도. 완벽한 역할 분배다. 사실 자신에게는 불빛이 없어도 상관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 이유는 겁도 겁이지만 균형감각이 좋은 편이라 산길을 잘 타기 때문이었다. 무쿠루마는 제 팔이며 볼을 간질이거나 긁는 잎사귀나 나뭇가지 따위를 무심하게 손을 휘저어 쳐내며 시큰둥하게 신문 군에게 말을 붙였다.
"어레, 안 챙겼어? 신문부원으로서 자격 박탈이네, 신문 군~."
자신이 막무가내로 끌고 온 것은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무쿠루마는 그 외 것들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흥분되어 있었다. 신문 군은 오히려 미심쩍다 했지만, 뭐 어떤가! 호러 장치라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이런 게 좋은 거라구? 거기서 골라 맛볼 수 있잖아. 다다익선이지, 응."
그 말을 여기다 쓰는 건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무쿠루마는 되는 대로 지껄였다. 어찌 되었든, 신경은 직접 괴기현상을 목격할 목적을 향해 일직선으로 가 있었다. 근데⋯⋯. 지도를 향해 얼굴을 파묻고 있던 무쿠루마가 슬쩍 눈을 굴려 신문 군을 올려다보았다. 신문 군⋯⋯ 어째 말이 좀 많아진 것 같지? 혹시⋯⋯.
"신문 군, 혹시 무서워?"
말똥말똥한 눈이 신문 군을 향했다.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한껏 억누르려 최대한 노력했지만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놀릴 건수를 잡았다!'라는 기색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신문 군이 못 알아챈 채 제 장난에 걸려주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슬슬 발바닥이 아려올 즈음 어둠 속에 잠긴 정좌를 발견했다. "찾았다!"고 외친 무쿠루마는 쏜살같이 달려가 정좌 위에 O/X라 쓰인 종이를 펼쳤다. 필기통에서 빨간 볼펜을 꺼내 쥔 무쿠루마가 신문 군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