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정한 허리를 손가로 받친 노파가 청년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이 시간만 되면 신선한 식재료를 사 가는, 나인이 기특한 모양이었다. 하긴 매번 저리 알뜰살뜰 식재료를 살펴보는 폼이 그 나이의 또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긴 했다.
그가 이 시장 바닥에서 얼굴이 자자한 이유는 '알뜰하다'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리라. 벌써 7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일한 시간대에 시장을 방문한다는 점과 요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한 외형이라는 점이 그네들의 이목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반듯한 성격은 어땠지? 곤란한 일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일이 없었다. 가령 다 나간 전구를 갈아끼우는 쉬운 일부터 지붕을 고쳐주는 일도 묵묵히 해결하곤 했었다. 그 덕에 가게 몇몇 곳에서 나인이 떴다 하면 뭐라도 더 챙겨주려, 덤 아닌 덤을 억지로 쥐여주곤 해, 그를 당황하게 했다. 사실 나인 본인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라자냐를 만들어 보려고요." "라자냐 좋지~ 내 손녀도 그걸 아주 좋아한 다우. 내가 만든 라자냐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면서 어찌 호들갑을 떨던지. 우리 집은 내 특제 비법 소스가 들어가거든 호호."
볼을 발갛게 물든 노파는 마치 소녀같이 수줍게 입가를 가려 웃었다. 그에 그가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따라 미소 지었다. 그 나름대로 대화에 대한 무언의 반응이었겠지만 이 순간 미소 짓고 있는 그의 표정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딱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면 저렇지 않을까? 허나 그런 간단한 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숱한 노력에도 매끄러운 미소를 만드는 일만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얼굴 근육이 제 통제를 벗어난 기분을 들게 했다.
"이리 양이 많은 걸 보니 그것도 안식구들 몫인 모양이야?" "아뇨. 제가 식성이 워낙 좋아서 말입니다. 그것보다 오늘은 어디 불편하지는 않으시고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파는 쉼 없이 재잘거렸고 응대하듯 그도 예의 바르게 대꾸해 주었다. 다만 사생활에 대한 질문에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리는 걸 빼먹지 않았다. 삐꺼덕 올라간 입꼬리가 어느새 일자로 굳어지고 다행히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한술 더 떠, 그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깨진 가판대를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너스레를 떨며 부탁까지 해왔다.
허나 나인에게 있어 차라리 그편이 더 편했다.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하기보다는 제가 베풀 선의에 중점을 두는 게 더 나았다. 아마 벙커의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겠지. 그저 과거의 나인보다 현재의 나인을 봐주길 바라는건 역시 어리광일지도.
"그럴까요? 대신 그 비법 소스, 알려주시는 겁니다?"
장바구니에 담긴 갖가지 재료들을 계산대에 올려두고는 의수 반대 편 소매를 걷어붙인다. 잔근육이 만연한 팔뚝에 과거의 잔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너무 옅어 눈에 잘 보이지 않을것이다. 그날의 기억들도 그렇게 옅어져 가리라.
이런, 빗나갔잖아. 역시 이 정도 거리에서는 아직 맞추기 어렵네. 칫, 하고 혀를 차며 아쉬움을 달랬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부터 기지 터치를 막을 수 없게 되었지만 어차피 건물 밖에서도 막는 것은 무리다. 마침 저쪽도 리타이어 시키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한 듯하니 훈련하기 제격이었다.
뒤이어 한쪽 눈을 감고 좀 더 세밀하게 조준하려 했으나, 시야는 손가락과 손등 사이로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깨어졌고 살로메는 손을 탁탁 흔들며 물감을 털어냈다. 이런 내 살이 발갛게 올랐잖아.
이 살로메, 이렇게 맞고서 되돌려주지 않을 수 없지!
탁, 탁, 탁, 탁-! 조금은 조급하고 열받은 듯이 방아쇠를 당기는 손이 거칠었다. 헤드샷 같이 맞추기 힘든 부위가 아닌 상반신 전체를 노렸으니 아무데나 한 군데 정도는 맞겠지. 에잇. 하고 다소 막무가내 식으로…….
당신이 안심하는 표정을 보인 후 그는 손까지 탁탁 털며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과시했다. 당신이 그에게서 등을 돌려 냄비를 꺼내오면 순간 "워!" 하는 의성어와 함께 당신의 눈 앞에 적갈색 무언가가 보일 것이다. 초점이 맞춰진다면 그게 팥알이란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걸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받쳐 들고 있던 그는 그 손을 치우며 웃음소리 내고 있었던가.
"아, 이제 그만할게요. 친구 만난지 하도 오래된 지라, 남을 못 괴롭혀서 몸이 근질거렸었거든요."
"즐거워라." 그런 가학적인...? 살기 어린 농을 하더니 당신의 질문에 곧 말문이 막혔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에 대해 고찰하던 것이라 그의 침묵은 짧았다만.
"일이 없다면 집에 가는 편인데, 제가 이상한 데서 경계심이 많아서 말이죠. 누군가 제 양지쪽 거주지를 알게 될까봐 자주는 안 가게 되네요." "어짜피 여기 머물든, 거기로 가든 혼자인건 변함 없지만요. 그쪽은 여기 살았던가? 아, 저녁약속 운운하던거 보면 가족도 계신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