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소녀가 들어간 뒤 자신도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건만... 일단 따라 들어가긴 했으나 손목이 잡힌 채 확 끌어당겨진 그녀의 입방정도 뭉개져 딸려갔다. 게다가 상대방이 직접 자리까지 잡고는 그곳까지 질질 끌고 온 자신을 자리에 앉히지 않는가, 오호라, 통제라. 매너는 인간을 만드는 법이거늘, 아무래도 그녀는 젠틀해지긴 글렀나보다. 어쩌면 이미 글렀던 걸지도 모르지만,
"아하하하하... 미안~ 혹시 화났어...?"
아까부터 썩 좋지 않았던 시선이나 힘으로 자신을 잡아끌었던 것에서 상대방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알게 된 그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소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턱까지 괴고서 창쪽에 시선을 둔 채 테이블까지 두드리고 있으니, 아마 여간 골이 상한게 아니겠지.
"그... 일단 내가 추천하는-아까 말했던- 것도 있지만 또 흥미가 생기는게 있다면 골라봐도 좋아! 음료라던지! 내가 산다고 했던만큼 부담가지지 말구! 소식하는 편인지는 내가 자세힌 모르지만... 일단 조각을 기준으로 나오니 크게 부담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메뉴판을 소녀쪽으로 돌려 보여주었을까? 그 외의 것들은 필요없다고 답이 돌아오든, 아니면 골라서 지정해주든 그녀는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찰나의 시간이라고 한들 누군가에게는 짧게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같은 상황이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그녀들은 서로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공간'은 절대적이다 한 순간에 적막함이 찾아 온 이 공간
"...하아."
시구레쪽에서 먼저 적막을 깨고 한숨을 뱉었다
"조금 쏘아붙혔다고 너무 그러고 있지 말지. 오히려 내쪽이 너무했던 것 같잖아."
방금까지는 잘도 떠들었으면서, 왜 지금은 또 이렇게 풀 죽어있는 건지 물론 상대의 기분따위는 전혀 알바가 아니지만, 곧 주문한 디저트가 오는데 내내 이런 분위기로 단 것을 삼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안 될 소리를 한 적은 없다
구부정한 허리를 손가로 받친 노파가 청년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이 시간만 되면 신선한 식재료를 사 가는, 나인이 기특한 모양이었다. 하긴 매번 저리 알뜰살뜰 식재료를 살펴보는 폼이 그 나이의 또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긴 했다.
그가 이 시장 바닥에서 얼굴이 자자한 이유는 '알뜰하다'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리라. 벌써 7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일한 시간대에 시장을 방문한다는 점과 요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한 외형이라는 점이 그네들의 이목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반듯한 성격은 어땠지? 곤란한 일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일이 없었다. 가령 다 나간 전구를 갈아끼우는 쉬운 일부터 지붕을 고쳐주는 일도 묵묵히 해결하곤 했었다. 그 덕에 가게 몇몇 곳에서 나인이 떴다 하면 뭐라도 더 챙겨주려, 덤 아닌 덤을 억지로 쥐여주곤 해, 그를 당황하게 했다. 사실 나인 본인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라자냐를 만들어 보려고요." "라자냐 좋지~ 내 손녀도 그걸 아주 좋아한 다우. 내가 만든 라자냐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면서 어찌 호들갑을 떨던지. 우리 집은 내 특제 비법 소스가 들어가거든 호호."
볼을 발갛게 물든 노파는 마치 소녀같이 수줍게 입가를 가려 웃었다. 그에 그가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따라 미소 지었다. 그 나름대로 대화에 대한 무언의 반응이었겠지만 이 순간 미소 짓고 있는 그의 표정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딱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면 저렇지 않을까? 허나 그런 간단한 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숱한 노력에도 매끄러운 미소를 만드는 일만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얼굴 근육이 제 통제를 벗어난 기분을 들게 했다.
"이리 양이 많은 걸 보니 그것도 안식구들 몫인 모양이야?" "아뇨. 제가 식성이 워낙 좋아서 말입니다. 그것보다 오늘은 어디 불편하지는 않으시고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파는 쉼 없이 재잘거렸고 응대하듯 그도 예의 바르게 대꾸해 주었다. 다만 사생활에 대한 질문에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리는 걸 빼먹지 않았다. 삐꺼덕 올라간 입꼬리가 어느새 일자로 굳어지고 다행히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한술 더 떠, 그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깨진 가판대를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너스레를 떨며 부탁까지 해왔다.
허나 나인에게 있어 차라리 그편이 더 편했다.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하기보다는 제가 베풀 선의에 중점을 두는 게 더 나았다. 아마 벙커의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겠지. 그저 과거의 나인보다 현재의 나인을 봐주길 바라는건 역시 어리광일지도.
"그럴까요? 대신 그 비법 소스, 알려주시는 겁니다?"
장바구니에 담긴 갖가지 재료들을 계산대에 올려두고는 의수 반대 편 소매를 걷어붙인다. 잔근육이 만연한 팔뚝에 과거의 잔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너무 옅어 눈에 잘 보이지 않을것이다. 그날의 기억들도 그렇게 옅어져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