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An apple doesn't fall far from the tree.
(SSAL.haqGc)
2023-01-08 (내일 월요일) 00:21:06
어머니는 두 번의 재혼을 하셨다. 아베느의 성씨를 가졌던 내 첫 부친은 일찍이 돌아가신지 오래였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던가. 그렇다, 금고에 처박아둔 재산은 삼 대가 먹고 살 수 있을 규모의 금액이었다. 다만 우리의 아름다운 모친께선 명예와 권력에 미쳐있으신 분인지라 재산 상속은 상속이고, 명예는 명예였다.
두 번째 부친은 깨나 이름 날린 재벌가에서 내놓은 유명 칼럼니스트였다. 그의 평론은 영화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더불어 끌밋한 외양에 봉사나 기부 같은 선행도 여럿 베풀어 인지도도 높았다. 하지만 그는 재벌가의 자제라는 것을 밝히기 싫어했고 그 따위 이유로 이혼했다.
세 번째 부친은 모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었다. 끌밋한 외양에 걸출한 능력…… 그래, 그 칼럼니스트의 형 되시는 분이다. 재벌이 괜히 재벌이겠나, 무언가 일을 벌였으니 재벌이겠지. 세 번째 부친은 어머니의 욕망에 걸맞게도 집안의 대를 이어 회사를 상속받을 예정이시란다. 그쪽에선 무얼 보고, 왜, 두 번이나 멀끔한 자식과 명예와 권력에 미친 여자가 혼인하는 걸 두고 봤냐고? 거긴 돈에 미쳐있었으니까. 내놓은 유명 칼럼니스트도 재능으로 입양되었다가 가족애라곤 쥐뿔도 없는 집안에 진저리가 나 막무가내로 나가기 시작하자 내놓은 것이다. 모친께서는 아니나 그 자식, 프랑스 방계 후손 가스파르 '아베느'의 딸, 마지막 남은 아베느의 핏줄, 살로메 아베느. 즉, 내겐 아베느 가家의 모든 재산이 상속됐다.
이쯤되니 떠오르는 또 다른 의문. 첫 번째 부친, 가스파르 아베느는 왜 우리의 모친 로잘린 피사로를 만났는가? 실상은 의외로 간단했다. 가스파르는 순진했고, 로잘린은 독기 가득한 구미호 였다. 그와 만나고 그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순간까지도 그녀는 지고지순한 현모양처 연기를 했다. 본색을 아는 나조차 깜빡 속을만큼. 어쩌면 수십 년의 연기를 하며 정말 자신을 착각했을 수도 있다. 가스파르의 입장에선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행복한 평생을 살다 간 것이니 모친께선 인생을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글쎄……. 그만큼을 같이 살았는데 임종 때의 흘린 눈물만큼은 진실이겠거니 하고 있다.
명백한 건, 로잘린은 행복했을 것이다. 더 이상 물로 배를 채우고 남루한 원피스 차림 하나로 돌아다니며 남들의 눈 요깃거리나 될 뿐인 무희 짓을 관둬도 됐으니까. 그녀는 이따금 내게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종내엔 황홀한 낯으로 웅장한 자택 내부를 둘러보며 속삭였다. 정성껏 세공하여 깎아올린 귀중품들 사이에 파묻혀있으면 나도 그것들처럼 고귀한 것이 된 것 같단다……. 달콤한 목소리가 우아한 대리석 벽면에 가닿아 울렸다. 그 작은 울림이 어쩐지 뇌리에 박혀 떠올릴 때면 심장 고동에 내부가 울리듯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결혼이 사랑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랑 없는 결혼도 있을 수 있겠지. 사랑 대신 차지한 것들을 주고 받으며 평화롭게 일생을 보냈다면 더럽다 욕하긴 했겠으나 이 정도의 증오를 품진 않았으리라.
빈곤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으며, 또 고결하게 살기 위해 삼십 년을 넘게 연기해 돌다 못해 360도로 돌아 정상처럼 보이는 미친 여자와 어째서 혼인을 허락했냐는 대목을 기억하는가. 미친 건 모친뿐만이 아니다. 내 세 번째 부친께서도, 아니, 그 가문 전체가 돈에 미쳐있었다. 거기에 우리 모녀는 입이 늘어날 뿐인 일개 장애물이었으니. 거슬리다 못해 눈에 치우지 않으면 못 배기겠는지 그들은 청부살인을 의뢰했다. 우리를 치워버리고 아베느의 재산을 모조리 차지하려고. 의뢰 내용은 화재 사고로 위장한 살인일 게 자명했다. 안 그랬으면 정확히 모녀가 같이 집에 있을 시간에 불길에 거대한 저택이 깡그리 타버릴 일이 흔하겠는가, 그것도 철저한 사용인들이 내부를 관리하는 마당에? 한시라도 빨리 자택의 비상 통로를 통해 대피하지 않았으면 한 줌의 재가 됐을거다, 마치 로잘린처럼. 나는 비상 통로의 존재도 몰랐지만 모친께선 알고 계셨다. 이런 일이 오리란 걸 예상하고 대비라도 했나 싶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산 것은, 내 등을 통로로 떠미는 앙상한 손가락처럼 간절한 일이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나는 내 어미 같은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같이 산 세월이 무섭긴 무서웠는지, 거센 불길이 너무나 욕망으로 가득한 입을 벌리고 있어서였는지, 마지막 그 손가락의 뼈마디가 너무 말랐어서인지, 선셋의 재산은 사용할 수 없었으나 아베느의 금고에서 빼돌린 재물들은 제 것이었다. 초기 자금으로 차고 넘쳤다. 이대로 멀리 도망쳐 한가로이 살 수도 있었지만 우리 모녀를 살해하려 했던 것들의 목 정도는 따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예상한 답변이라는듯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람은 누구나 신념을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것이 강대한 것이든 약소한 것이든, 중대한 것이든 하찮은 것이든, 모두를 위해서든 지극히 개인을 위해서든... 물론 그 신념이란게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꺾일 수도 있다만 그건 그 사람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녀의 경우에는? 결단코 꺾이지 않는 신념이었으나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와, 무슨 담당일진인 것마냥 얘기하네. 혹시 왕년에 삥 좀 뜯으셨어요? ...생긴거 봐선 범생이 같은데..."
갑작스레 기울어진 화면, 당혹스러운듯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소위 말하는 '그렇게 안 봤는데...' 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물론 외모만 가지고선 판단할 수 없겠다만, 최소한 그녀의 시선에선 '문제아' 같은 이미지는 느껴지지 않았음이 확실했다.
"그래봤자 극적으로 작은건 또 아니라지만요~ 오, 슬슬 보이려나?"
이미 해는 들어간지 좀 되었으니 어둑어둑한 하늘에 빛나는 것은 별가루와 환한 달이었다. 세상은 요지경이어도 달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그녀는 먼 우주로부터 반사된 빛을 담아내려는듯 그쪽으로 휴대폰을 들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