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있는 발언, 살로메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야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내심 어떠한 대결에서 진 것 같은 기분에 부루퉁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가 곧장 갈무리했다. 아직도 표정 하나 조절 못하다니. 아말 드레이븐……. 맨날 무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일은 잘하고 말이야. 복수는 복수고, 그것과 별개로 이 남자의 추적 루트를 캐내고 싶다. 괜스레 승부욕이 돋았다.
"그거 참 다행이네…!"
그러다 상관없다는 말에 참지 못하고 빽, 고사리 같은 손도 꽉. 다만 특유의 목소리 탓에 카랑카랑한 느낌이 섞이진 않았다. 금전 문제로 소식이 없던 게 아니었단 말이야?
"재밌는 거?"
느닷없이 일어나는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며, 주춤 일어났다. 아가씨라는 명칭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재수 없을 만큼 익숙하다는 낯짝이다. 동네 백수 같은 꼴에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더니, 그래도 리더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 뒤를 졸졸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 몸에 먼지 하나 묻혀보라지, 그땐 핏물로 샤워 시켜줄 것이니."
나타나지도 않은 적을 위협하는 말이며, 그닥 전투 실력도 좋지 않으면서 입만 나불나불댄다.
하루의 시작은 모르그에서 잠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그는 업무용 단말기에 찍힌 번호를 확인하며 전화를 받았다. 예, 예.. 예에.. 네. 아.. 네. 두어 번 반복하던 상투적인 대답과 최대한 빨리 와달라며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를 뒤로, 그는 책상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목과 허리에 실렸던 압력에 무게를 싣지 않기 위해 천천히, 느릿하게 일어섰다. 느림의 미학은 그걸로 끝이다. 이제 일할 시간이다.
준비를 끝마치고 나오니 나머지 일은 수월했다. 만일을 대비해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지 않은 채 대충 주차하고, 관을 꺼내 등에 짊어맸다. 관의 무게 때문에 휘청대다가도 금세 중심을 잡은 그는 건물로 들어섰다.
피는 이곳저곳에 튀었고, 시체는 눈도 감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다. 도망치던 피해자를 쫓았는지 이곳저곳 묻은 꼴이 끔찍하다. 현장을 보니 오늘도 청부 살인인 모양이다. 거기에 장기 밀매까지 겸한 건가? 시대가 언제인데 장기 밀매람. 그는 시체 주변에 쪼그려 앉아 장갑 낀 손으로 늘어진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꾹꾹 눌러 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은 지 24시간은 안 넘은 듯싶다.
“썩지 않아 다행이군.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겠어.”
원래 시체와 같은 경우에는 경찰을 불러 사인을 조사하거나 신원을 조사하겠지만, 이곳은 양지와는 달랐다. 장의사가 검시관을 겸해 맡을 정도로 많은 것이 뒤틀렸으니. 그렇지만 암묵적인 룰 말고, 오늘은 아지트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시체 냄새에 경멸하는 표정을 안 볼 수 있고, 간만에 침대에서 잘 수 있겠다. 이것저것 떠올리느라 여념이 없던 그는 시체를 미리 준비해둔 천에 감싸고, 관에 담고 나서야 인기척에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시계를 봤다.
아발란치의 리더. 그 이름값 하나만으로 뒷세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그녀의 경우는 겉모습과의 갭이 크기에 유명세는 뒷세계에 나타났을때부터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뒷세계에서 어린 외형이 그렇게까지 특이한건 아니다. 하지만 저런 외형을 달고서 눈앞에 보이는건 죄다 죽여버린다면? 그녀가 아발란치에서 리더의 자리에 오를때까지 방해되는 물건은 전부 처리해왔다. 물론 그것은 당대의 리더도 마찬가지였고. 오로지 '무력' 하나만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것이다.
그녀가 호스트와 연결되어 있는것도 리더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밝혀졌고. 그 전까지는 전부 힘으로 찍어 눌러왔다. 리더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그녀는 무의미한 살육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무의미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잔인하게 변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건 그 무의미의 기준이 오롯이 자신의 중심에서 이뤄진다는거겠지.
"왜 그래? 복수하겠다며?!"
그리고 자신에게 덤비는 이들을 처리하는것은 그녀에게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전장에서 그녀의 겉모습만 보고 덤볐던 벙커의 조직원들, 혹은 복수심에 덤비는 녀석들을, 그녀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작은 몸으로, 사람의 머리를 잡아 뜯는 모습은 악몽에서 나올 수준이었다.
숙청의 기준은 꽤나 까다롭다. 선셋가에 속해있더라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쪽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숙청 대상이다. 물론 반대로 살로메쪽도 아슬아슬하게 뒷세계에 속하게 된 일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는 그거에 관해서도 조사하고 있으니 일단은 가능성을 놓은건 아니라며 답했다.
"그래.. 그러면 조금 처리해야 될 적이 많을지도 모르겠군. 꽤 여러가지로 얽혀있는거 같거든."
그는 살로메의 표정을 감상하다가, 식료품점 입구가 아닌 옆 창문쪽으로 돌아가며 검지를 자신의 입에 대며 조용하라는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창문을 가리켰는데, 살로메가 안을 들여다본다면.
- 간부님들께서 이번에 해외로 '출장' 나가신단 말이야. 어서 내놔. - 그렇다고 돈도 안 내고.. - 으엉?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아발란치로 추정되는 인물 둘이서 가게를 무수며 점주를 위협하고 있었다. 저 광경 자체는 흔해보이지만. 살로메에게 있어서 중요한건 맨 처음 부분의 대화였을것이다.
"들었나? 아무래도 해외쪽 일에는 반드시 간부라는 놈들이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야."
이 정보를 들려주기 위해 데리고 온걸까? 그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호스트에 대한 정보는 너무 적어, 솔직히 존재를 확인한것도 기적이었지. 다이렉트로 호스트를 파내는건 무리라고 봐야해." "그렇다고 말단만 패봤자 역시 아무것도 안 나와. 귀찮지만 중간부터 파고 들어야겠지."
일 안하고 먹고살 수는 없나? 그런 생각을 한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뒷세계에 들어서기 전에도 결국 하는 일은 청소 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이 이어지다가 들어온 뒷세계에서도 평소 하는 일은 마찬가지였다. 청소, 닦아내는 것이 좀 더 비릿하고, 치워야 할 게 좀 더 커진데다가 흐느적댄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물론 가끔 호스트가 주는 일을 하면 돈은 충분했지만 결국 그것도 일을 하는 거잖아.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현장을 청소해달라는 말에 투덜대며 바깥으로 나갔다. 거리가 그리 많이 멀지는 않았기에 조금 느긋하게 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더니...
"얼씨구, 그걸 또 세고 있었어? 그럼 미리 좀 치워놓지 그랬수. 귀찮아 죽겠구만..."
쯧, 하며 혀를 찬 뒤 여기저기 튄 핏자국을 보다가 가면을 쓴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벙커라는 조직은 그렇게까지 특출난 조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벙커의 리더인 그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다. 그나마 최근 아발란치와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웬 미친 조직이 있다며 유명해지기 시작한 정도일까. 애초에 그는 눈에 띄는 요소라곤 없었다. 겉모습이 특출난것도 아니고 외부에 알려진 대단한 업적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처음 벙커에 들어온 이들도 그의 모습을 못미덥게 봤고. 실제로 현재로서도 벙커는 조직으로서 안정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벙커가 유지가 되는 이유라면, 이것도 반대로 그의 존재 때문이다. 일단 벙커와 아발란치의 개개인의 전투력은 의외로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는것은 아니다. 아발란치가 조금 더 우세한 정도일까. 그렇다면 최대의 문제는 유토의 존재이다. 그녀는 벙커에게 있어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왜 그래? 지쳤나?"
그렇기에 직접 보기전까지는 아무도 상상도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가 유토를 상대하는 광경따윈. 유토가 벙커의 잡졸 따위는 눈감고도 썰고 다닌다면, 아말도 똑같았다. 둘의 힘 자체는 호각으로 보였으나 싸우는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의 모습엔 유토마저 혀를 내둘렀다.
"이 새x.. 더럽게 재미없네." "너같은 꼬마를 괴롭히고 있는 내 입장도 생각해줬으면 하는데." "뭐 이 xxx??"
도발조차 무표정하게 하는 모습은 벙커쪽에서도, 아발란치 측에서도 어이없을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피해 받은 쪽인 우리가 본래 뒷세계에 속해있지 않은 인간들이었으니 호스트의 개입일 확률이 높다는 말인가. 납득이 되었다. 우리야 그다지 범죄와 연관될 일 적고 모친께선 그런 것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다만 권력과 명예를 얻으셨으니 내가 모를 일 한두 가지쯤 했을 수도 있겠지.
"여러 가지로요? 아-."
입을 열려던 살로메는 침묵하라는 손짓에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향한 곳은 창문, 저 사람들… 아발란치? 잠깐 방금 해외라고 한 거야? 살로메는 들여다보느라 굽힌 상반신은 조심스럽게 뒤로 내빼며 그를 돌아봤다. 무언가 깨달은 듯이 살짝 눈이 커진 채 굳었다.
"그거… 간부거나 의로 받은 게 간부일지도 모른다는 소리?"
말단도 아니고 설마 간부까지 얽혀있나, 이 사건에? 선셋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진저리가 나려고 했으나, 살로메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살짝 긴장한 기색은 서려있었다.
"그리고 그건… 간부랑 전투하겠다는 거…?"
리더의 마지막 문장으로 인해. 막상 전투를 한다고 생각하면 본능적인 떨림은 미세하게나마 새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증오는 만반이었으나 경험은 전무했다. 살로메는 입술을 살풋 짓눌렀다가 다물었다. 다짐이라도 한 양 입매가 단단했다.
애초에 이런 뒷세계에서 간부라는게 꼭 전투력으로 정해지는것이 아니다. 돈으로 생각해본다면. 선셋 가문 자체에 간부급이 있다고해도 이상할건 없을거라며 그는 답했다.
"뭐 간부 자체는 별거 아닐테지만."
물론 그것은 그의 기준에서의 이야기였다. 간부라한들 유토에 비할 정도는 아닐테니까. 유토를 상대할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 간부급 정도는 별거 아닐테지만.. 살로메나 다른 조직원들에겐 그렇지 않을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살로메의 반응을 보며 무심하게도 '쫄았냐' 라고 덧붙였다.
"음, 일단 정리는 해둬야겠군."
그러나 마침 점주가 위험해보였기에 그의 놀림은 중단되었고. 그는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갔다. 살로메에겐 천천히 들어오라고 하고나서 전투가 끝날때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저 아발란치 조직원 둘이 그에게 사정없이 밟혔을 뿐이다. 여전히 아발란치에겐 자비가 없어보인다.
설렁대듯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그와 사뭇 달랐다. 그는 투덜거림이 익숙하기라도 한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피가 좀 많이 튀긴 했네, 도와줬어야 하나? 그 또한 마찬가지로 안경 쓴 얼굴을 가면 너머로 빤히 마주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마주해서 알겠지만 내 일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지, 자네처럼 청소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피 굳기 전에 미리 왔어야지.”
아니지. 애초에 일하는 게 다르잖아. 그에겐 마땅한 청소 도구가 없었다. 관 뚜껑을 닫으려던 찰나, 그가 고개를 잠시 돌려 시체를 쳐다봤다. 눈도 못 감고 죽은 시체, 남성, 시체, 남성.. 두 번 정도 훑고 아예 멈추는 걸 보니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의 침묵하는 특성 때문인지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야 대답이 나온다.
“그… 보통 사람은 이 정도면 죽소.”
가면 너머로도 노골적일 정도로 황당한 시선이 비쳤다. 아발란치 놈들은 이 정도에도 안 죽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뿐, 다음 번에 이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할 때 지저분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지, 어차피 뒷세계에서 서로 죽고 죽여가며 살면서 생긴 버릇인가? 자기가 있었던 자리를, 자신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듯 남기고 싶은 게 본능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편하고 좋겠어, 시체만 덜렁 들고 가면 되고."
쯧, 할 거면 시체까지 정리하고 가던가. 꼭 뒷정리할 걸 남겨놓는다고 투덜댄다. 대답이 또 한참 걸려 돌아오니 기다리는 동안 미간을 찡그리고 발을 탁탁 두드리듯 땅에 딛는다.
"그거야 모르는 거지, 어쨌건 확인은 해야 돼."
꺼내주지는 않겠다는 듯,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말에 꺼내주면 어디 덧나냐며 한소리 덧붙인 뒤 핏자국을 밟아가며 관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윽, 피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