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전투하는 일상이 취향이지만, 적대 관계라서 일상이 안 돌아가는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니까요. 그것을 위해 있는게 뒷세계 설정이랍니다. 어쨌건 뒷세계는 앞쪽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으니까요. 평범하게 앞쪽의 가게나, 길가에서 마주친다고 하면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답니다.
물론 그 이후에 어떻게 일상을 이어나갈지는 두 사람의 재량에 따라 다르지만, 거기까지 제가 참견 할 수는 없으므로..
대기업 딸이자 재벌집에서 살던 버릇 어디 안 가 세련되고 깔끔한 고층 빌딩 39층에서 살로메는 거대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낮에 그친 도시를 빛내는 네온사인은 한층 불빛이 사그라들어있고, 대신 포근한 햇살이 빌딩 숲 위로 담뿍 쏟아져내렸다. 그러나 빼곡한 빌딩으로 인해 그 밑은 빛이 들지 않아 심연과도 같이 어두웠고… 까만 점 위로 검붉은 눈이 그것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간단히 로브(문양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지만)를 챙겨 입고 걸음 했다.
1층에서 나오자 윗물만 햇볕에 노랗게 물든 채 자신이 발 디딘 곳은 푸른 그림자로만 가득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미로 같은 길을 이제는 헤매지 않으며 거닐었다. 여기서 자다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지, 며칠을 굶었었는지 이성 잃고 쓰레기통 뒤질 뻔한 건 여기였나. 지나는 곳곳이 흙탕물 뒹굴던 기억뿐이었다. 평생을 풍족하게 살 수 있었던 나를 여기로 밀어 트린 자들, 그녀를 불길 속으로 밀어 트린 자들, 황혼의 자식들-. 기어코 이 손으로 황혼 너머 지옥으로 떨어트리겠다 다짐하며 벙커의 아지트 문을 열어젖혔다.
열자마자 보인 얼굴은 아말 드레이븐, 벙커의 리더, 잘 만났다. 마침 볼 일이 있던 참이었다. 알 사람들은 알 수 있겠지만 그에게만 말해둔 게 있었다. 나는 선셋의 자식이고, 그들은 내가 가진 재산을 탐내 사고사로 위장한 화재를 일으켜 우리 모녀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고. 선셋들이 직접 오던가, 살인청부를 해 아발란치의 자들이 오던가. 그건 오는 족족 칼을 꽂아 넣어주면 될 일이고, 내가 알고 싶은 건 우리 모녀를 살해하려 한 방화범, 그 자식들의 신상이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얼 보고 있었다. 살로메는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그 앞까지 도달했다. 6개월 간 그를 관찰한 결과 그는 아발란치에 대해서도 심각했으나 별 것 아닌 거에도 심각한 표정을 짓곤 했다. 다른 종류의 포커페이스인가, 뭐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살로메는 책상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턱 끝을 쳐든 채, 몸에 밴 고아한 표정을 지으며.
"드레이븐, 무얼 보고 있는 거죠? 당신이 우리의 이정표가 될만치 적합한 리더란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혹여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단순 재미를 위한 짧은 영상들이라면 이 살로메, 몹시 실망하여 복수의 심지가 옮겨갈지도 모르는지라 무얼 보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누가봐도 작전에 대해 생각하는듯한 진지한 표정. 그러나 그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저것이 진짜 진지한건지 의심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책상에 앉아서 보는 노트북의 화면에는 별거 없는 고양이들이 뒹구는 영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 영상을 이 표정을 하고서 볼 수 있는거 자체가 여러 의미로 대단한거 아닐까?
"음?"
그는 살로메가 아지트로 들어오는것도 눈치채지 못한ㅡ건지 안한건지ㅡ채로 영상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고. 기어이 살로메가 책상을 건드리고 나서야 느릿하게 눈을 돌렸다. 뭘 보고 있냐고 묻는듯 했지만 아마 이 거리까지 다가온 살로메에게 이미 화면이 보이고 있을것이다. 애초에 이어폰도 안 꽂고 있고..
"동물의 왕국?"
일단 그가 말하는 프로그램과 하등 관계가 없는 채널일 뿐더러, 동물의 왕국은 봐도 좋다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한채로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른다는듯 살로메를 바라 볼 뿐이었다.
앗 타이밍이...! 으으으음 제프리 입장에서는 부딪혔다면 기억은 할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러면 딱 그런 녀석이 있었지 정도로만 할까요! 이후는 말씀해주신 대로 일할 때 마주치면 명령 있는 게 아닌 한 서로 어느정도는 거리를 두는 걸로 해보죠! 그럼 오늘은... 현장에 출동한 두 사람! 이라는 느낌으로 괜찮을까요? 싸울수도 있을거같긴 한데 괜찮으실까 미리 여쭤봐요!
성큼 발 구르는 소리에도 미동이 없다. 이 인간,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거야? 살로메는 신경 줄이 느릿하게 얇아지는 것을 느끼며 무얼 보는지 몸을 살풋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려고 했다. 한번의 감탄사 뒤에 따라오는 동물의 왕국? 같은 소리나 눈 앞에 뻔히 보이는 고양이 영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허어……. 이걸 그런 얼굴로? 속으로 헛웃음을 삼킨 살로메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표정에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나 지금 너무 어이가 없어, 같은.
"아발란치가 언제 활동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고양이 영상이라니… 물론 귀엽긴 하다만…, 아니지."
주제에서 벗어나려는 주둥이를 콱 다물음은 제 자존심이었음을. 이 둔감한(건지 척인 건지) 남자는 알까. 이 와중에 협상 시도…? 6개월 간, 감히 이 목숨 앗아가려 했던 놈들 꼬리도 못 잡았는데 고양이 꼬리나 보고 있고, 정말….
우아하게 팔짱을 낀 채 그를 빤히 응시하던 살로메는 의자 하나를 질질 끌고 와 그 옆에 둔 뒤 착석. 같이 고양이 영상이나 보자고 그러는 짓은 아니다, 절대, 절대로. 사뭇 새침한 얼굴이 흘긋 영상을 훔쳐보곤 다시 그를 향했다. 책상 위 팔을 괸 채 나긋이 한숨. 하아-.
"내 심지는 타고 있는데, 향할 곳을 찾지도 못했거든요. 진척은 있어요? 아니면 같이 찾으러 가던지."
황금의 속눈썹 사이 검붉은 빛이 진지하게 변모했다.
"알죠? 내 돈은 일정 금액 이상 못 써서 많은 지원 못해줘요, 추적 당할까 봐. 신분 한 피스piece도 찾지 못하면 직접 붙어 찾을 거야."
그 '많음'의 차이가 일반인들의 기준과는 퍽 달랐지만 말이다. 로브 자락 속 손을 꼼지락댔다. 만져지는 것은 붕대로 손잡이 부분이 단단히 감긴, 벼린 은색의 칼날.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확실히 살로메가 벙커에 소속된지 6개월. 아발란치의 움직임을 그가 놓친적은 없었고. 오히려 평소에 이러고 있는데 어디서 정보를 모으는건지 모르겠는게 더 공포스럽긴 하다만 아무튼 아발란치에 관해서라면 유능한 남자였다. 그 외의것이 하나도 안 되서 조직도 전혀 단결하지 못하고 있는게 문제였다만.
"애초에 지원 받으려고 애들 주워다니는거 아니라서 상관없는데?"
지원을 해준다면 거절하지는 않아도, 거기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그는 딱 그 정도의 인간이었다.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요령없는 멍청이도 아니다. 옆에 앉는 살로메를 무슨 생각인지 모를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더더욱 한심한 모습과 반대로 묘하게 가까워질 수 없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딱히 새로운 발견은 없지만, 그래.. 뭐 우리 아가씨께서 원한다면야 재밌는거나 보러갈까."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수축하는가 싶더니. 그는 일어나라는듯 턱짓한뒤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코트나 하나 걸치고 나가려는 모양새가 어딜봐도 동네 백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