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715072> 자유 상황극 스레 4 :: 505

이름 없음

2022-12-31 16:48:08 - 2024-09-05 17:41:22

0 이름 없음 (kJ8MtbJ//I)

2022-12-31 (파란날) 16:48:08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104 이름 없음 (JWdn9wLzLA)

2023-01-13 (불탄다..!) 01:20:06

>>94

그는 떠돌이에 가까운 사람이다. 타인과 무리지어 어울리는 일이 익숙치 않다. 그리고 어울리는 일이 많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소문에 어둡지는 않다. 오히려, 떠도는 소문에 상당히 해박한 편이 속했다. 당연한 일이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조연을 의식하는 주연을 본 적이 있는가? 하물며 배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연 중 하나는? 그러니 그가 부유하는 소문을 잘 잡아채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아는 것도.

케시 라일리: 뱀파이어를 닮은 밴드 클럽의 보컬리스트이자 베이스 기타리스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괴짜.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답변에 당황하기도 잠시, 그는 당신을 휘감고 있던 소문을 떠올렸다. 평소 소문을 신뢰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신빙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치 당신의 언어는 독특했다. 여러모로 시에 가까운 구석이 있었다. 시는 대체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한 번에 깊은 의미를 짚어내기는 어렵다. 그런 이유로 그는 당신의 말을 해독하기를 관두었다. 대신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말로 옮겼다. 시를 읽으며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마음에 와닿는 것만을 느끼고자 하는 이들도 많으므로, 그리고 그런 감상 역시 무의미하지는 않으므로 이런 방식의 대화 역시 당신에게 닿기는 할 것이라 생각하여.

"멋지네요."

물론 당신의 표정을 보자면 또 모를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득한 것이 꼭 당신이 입에 담은 우주와 닮아 보여서, 당신이 저와 여기에 있는 것이 맞나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노을빛에 눈을 잠시 찡그리던 그는 곧 시선을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저는 따지자면 겁쟁이라, 당신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거든요. 강렬한 건 사람을 사로잡는 화려함이 있지만…그래도 무섭지 않아요? 그렇게 빠르게 사그라든다는 점에서."

물론 그 점을 매력이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요. 짧게 덧붙인다. 여전히 시선은 당신을 향한 채다. 조금은 집요하다.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 사이에서 굳이 색 없는 것을 눈에 담고자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아뇨. 사실 갈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안 갔을 것 같기도 하고요. 말했다시피 겁쟁이라서요,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 편이 안심돼요."

그는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혹은 그저 무의미함 행동일 수도 있으나- 땅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나즉하나 무게감 없는 목소리가 말을 잇는다.

"그러면 당신은요? 아직은 전자인가요, 터뜨리기 전의?"


/답레가 늦어서 죄송해요. 제가 손이 빠른 편은 아니라 계속 이 정도 템포일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105 이름 없음 (5RLqYjLLYM)

2023-01-13 (불탄다..!) 01:24:31

>>103

검정색 머리카락 아래로 적황색의 눈동자가 여인을 응시한다. 아까전까지 거대한 봇짐을 매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여린 몸에 그에 어울리는 금발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전의 흙투성이가 무색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의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씻겨놓고 보니 더욱 어울리는 모습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탄탄한 근육과 용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구빛 피부가 횐히 비추는 요람의 불빛에 비춰지며 부드러운 미소에 색감을 더해간다. 블랑느와르(Blancnoir), 흑룡에 걸맞지 않은 이름이 지금에서야 빛을 발하는 건 절대로 착각이 아닐 것이리라. 그 순간 여인의 날카롭고도 당연한 질문이 흑룡에게 날아든다. 그 신중함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당연함이 섞인 말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당연히 의문을 가질만 하지. 다른 종족, 거기에 인간들을 우습게 보는 용족이 갑작스레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했다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 앉은뒤 손가락을 튕겼고, 어느새 상석 바로 옆에 있는 귀빈석에 해당하는 위치의 의자가 자리를 잡는다. 그가 재차 손가락을 튕기자 레드와인이 병채 떠올라 유리잔을 채웠고, 용은 재차 자리를 권하는 듯 의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 자신이 가리킨 곳이 여인의 자리가 맞다는 듯이 말이다.

"신중함이란 매우 중요한 것일세.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왜? 가 아닌 왜 안돼? 라는 시선으로 봐야하는 것 처럼 말이지. 하지만 그 의심도 적당한 선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면에서 그대가 떠올린 의문은 정말로 당연한 것이고."

탁자위에 올려둔 책이 시선으로 들어온다. 식사 직전, 즉 여인이 들어오기 전이기에 미처 치우지 못했던 책, 그것은 이미 멸망한 어느 제국의 역사서였다. 대륙 공용어로 발매 되어지긴 하였으나 지금은 대다수가 소실되어 사라진, 구할 수 없다고 알려진 몇권 안되는 책이 지금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개의치 않는듯 천천히 책 위에 손을 올려둔 뒤 천천히 레드와인을 한모금 들이켰다. 이로서 식사가 시작 되었고, 여인이 식사를 해도 된다는 간접적인 의사를 더한 것이리라.

"자네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우연일수도 있네, 내 가고일들은 어제 저녘부터 내일 아침까지 재조정에 들어갔고, 지금 지세가 많이 약해져서 이 산에 쳐두었던 결계가 근 몇년간 약해져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우연에 우연이 겹쳐진 경우라면 그것은 전부 운명인 셈이지. 그러니까 나는 그 운명에 따른 손님을 대접할 의무가 있는 셈이고."

용이 싱긋 웃어보인다. 대답으로 부족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을 해보인다.

"그리고 그대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두지, 탐구심과 그 학습에 대한 열망, 후배에 대한 선배의 배려라고 덧붙여서 들어도 된다네."

//저어언부 묘사해드렸습니다!!

오늘만 버티면 불금이에요!! 파이팅 하세요!!

106 이름 없음 (Jl/XcOwvXs)

2023-01-13 (불탄다..!) 02:34:37

>>83

이 도시라고도, 깡촌이라고도 못할 애매모호한 지역으로 전근, 아니 좌천되어 버린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한창 프로젝트의 주역이니 뭐니 떠받들어 줄 때는 언제고, 자기 라인 손절치니까 바로 권력을 썼는지 뭘 어쨌는지,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며 사람을 이런 데로 보내버렸다.
아랫사람 입장에서 짤리지 않으려면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그저 동네 슈퍼에서 라면을 비롯한 먹거리와 술을 사서 터덜터덜 다 떨어진 슬리퍼를 끌고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남한테 깔려서 더러운 건 도맡아 다 하고, 너덜너덜해진...

"...어휴. 내 인생이 그렇지 뭐."

그런 아무도 듣지 못할 신세한탄이나 하던 중에, 이 소리가 듣기 싫었던 하늘의 천벌인지 뭔지 몰라도 사무직의 연약한 척추를 무겁게 짓누르는 위협에 그만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아이고, 허리야! 하는 비명조차 채 외치지 못하고서 얼이 빠진 채 들여오는 의문에 마주 의문으로 답했다.

"너, 너, 너야말로 뭐야?!"

107 이름 없음 (jRNf2JFX36)

2023-01-13 (불탄다..!) 11:48:07

>>102 (품에 파고들자마자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달래듯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남아있던 불쾌감과 두려움이 씻기듯 사라졌다. 안기자마자 괜찮아졌긴 하지만 더 어리광 부리고 싶네. 남편의 허리 쯤에 팔을 두르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자상하게 위로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하기사, 느닷없이 대학 신입생 시절로 되돌아가고 느닷없이 회화과인 것부터가 말도 안되긴 했어요. 신이네 비늘이네 하는 건 물론이고... (그래도 효의 씨랑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도 서러웠다고 칭얼거릴까, 하고 잠시 고민했으나, 다음 순간 그 고민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실제로 집적거려 온 사람이 있냐며 남편이 걱정해왔기 때문이었다.) 에이, 전혀요. 주변 사람들 내가 팔불출인거 모르는 사람 없는걸요. ...아, 그러고보니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언제 뮤지컬 보고 엄청 치를 떨었잖아요. 그거 영화 원작도 있다길래 친구랑 같이 봤거든요. 뮤지컬화했다가 시간제한 때문에 스토리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니까 원작은 다를 수도 있다고. 근데 똑같더라구요. 거기에 제자가 죽은 전여친의 환생이라고 무작정 자길 기억해내라고 대쉬하는 교사가 나오는데, 아마 그게 기억에 안좋게 남아서 비슷하게 꿈에 나왔나봐요. (내가 진짜로 위험한 상황일까봐 걱정했구나.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을 놓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호연은 남편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노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럴싸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꿈스럽게 이거저거 섞어찌개해서 구성해봤는데 웃기다니 다행이네! 모티브 중에 번점도 있어서 답레에도 반영해봤어ㅋㅋㅋ 옛날 컨텐츠긴 하지만

108 이름 없음 (zTKwMsKxWg)

2023-01-13 (불탄다..!) 13:37:38

>>104

ㅤ속눈썹 사이에 탁한 푸른 눈이 과거를 헤매기 시작했다. 가시덩굴처럼 얼기설기 엉켜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의 근원지를 찾아 되돌아가다 보면 심연 같은 수풀, 과거의 숲. 한때 자신도 폭죽이었던 적이 있었다. 우주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지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러나 그 구형 안에서였기에 또 머나먼 목표를 두었기에 눈부셨던.

ㅤ케시 라일리의 꿈. …마르커스 라일리의 꿈.

ㅤ돌아가신 아버지, 마르커스 라일리는 말 그대로 우주비행사 훈련생이었다. 고된 중력 적응 훈련을 하면서 곧은 치열을 보이며 반짝이는 웃음을 선보였던 아버지. 케시 라일리와는 그 분위기가 딴판으로, 마치 두 부자는 낮과 밤 같았다. 허나 케시 라일리도 태양만큼은 아니더라도 달만큼은 빛내던 때 있었으니. 그의 꼬리를 따라가듯 자신도 우주비행을 꿈꿨을 때였다. 다만 그 꿈은 별의 추락처럼 찰나라, 그는 실제 우주비행을 앞두고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고 케시 라일리는 그의 생이 꼭 별똥별 내지는 폭죽 같다고 생각했다. 삶의 궤적은 그의 노력만큼이나 빛났으나 밤이 찾아오자 숨어드는 태양처럼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으니 어찌 다르다 할 수 있을까. 케시 라일리는 그래서, 그래서 그 별의 꼬리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궤적을 그리며… 결국 터져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겠지만 그 무엇보다 환하게. 누구도 잊지 못하게. 마르커스 라일리를 대신하여.

ㅤ아버지…….

ㅤ과거의 숲을 헤매다 순식간에 빠져나온 푸른 눈이 땅 위를 딛고 있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 가시덩굴이 얽혀있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이것도, 우주를 향하면 끊어질 것에 그치지 않는 족쇄다. 그리고 다시 위로. 케시 라일리는 여전히 환상 속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당신을 응시했다.

ㅤ"태양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생명이 있듯이 그런 거지.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거야……. 아니면 태양에 눈이 멀어버렸던가."

ㅤ후일 따위, 내 생명이 다하면 끝이니.

ㅤ노을빛처럼 찔러오는 시선을 나른히 마주한 채였다. 케시 라일리는 자신과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듯한 당신과의 이야기가 썩 괜찮고 호기심이 동했는지 얼굴 낱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정은 그다지 그렇게 보이지 않고 멍한 얼굴이었대도. 늘상 무기력해 보이는 눈과 달리 저도 모르게 속내를 찾아헤매는 빛이었다.

ㅤ"한 번쯤은 시도해 볼 법해. 살면서 남다른 발자국 정도는 남겨봐야 하지 않겠니."

ㅤ미풍처럼 가벼운 청유. 그러고선 저가 들고 있던 기타에 시선을 옮겼다. 남다른 발자국……. 자신이 한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ㅤ우주비행사의 꿈은 예전에 떠나보냈다. 마르커스 라일리가 세상을 등진 것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관둬야 했다.

ㅤ"이미 재투성이. 터지고 말았지……. 이제 새로운 폭죽을 터트릴 차례야…."

ㅤ케시 라일리는 이제 마르커스 라일리의 꼬리를 따라가는 것에서 발을 돌려 새로운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ㅤ"터질 듯한 음악, 포효하는 비명, 팽창하는 감정의 고조- 이게 우주를 향하는 폭죽이 아니면 무엇이겠니."


/ 괜찮아요, 저도 현생이나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상당히 느려요! 🥹

109 이름 없음 (v7tysqXVqw)

2023-01-13 (불탄다..!) 18:55:44

>>107 (꿈이 터무니없다고 하나하나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반려자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했다. 늦지 않게 깨서 다행이다. 반려자가 울적하고 불안한 기분으로 밤을 지새는 것은 상상하기도 서러웠으므로. 그렇게 마음 놓을 때, 반려자가 허무맹랑한 꿈을 꾼 원인을 되짚기 시작했다. 일전에 본 뮤지컬과 그 뮤지컬의 원작인 영화가 원인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듣기에도 이상한 내용이긴 했다. 사랑한다면서 상대의 현재 상황이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길 알아봐 주는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결혼도 하고 이혼은 마다하던 파렴치한 인물의 서사였다. 더 어이없는 것은 사별한 이와 동시대에 재회하는 기적을 겪고도 고작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결말이었다. 동시대에 같은 종으로 환생한다는 보장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 그 안일한 서사의 여파로 고약한 꿈을 꾸었구나. 반려자를 어떻게 위로할지 궁리하는데, 등을 쓸어내리는 상냥한 손길이 느껴졌다. 오히려 내 걱정을 해 줄 줄이야. 뭉클해진 나머지 반려자를 꼭 그러안았다.) 나쁜 일은 없었다니 다행이에요. 이제 잘까요? 안 자면 낮에 힘들잖아요. (내일이 휴일이라도 밤에 잠을 설쳐 낮밤이 바뀌면 좋을 게 없다. 그래서 정효의는 아기를 재우느라 토닥거리는 사람처럼 반려자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대강 아는 영화고 치를 떨었다는 거 보니 정효의한테도 얘기했을 거 같아서 반영해서 이어 봤어~ 뮤지컬로도 나왔을 줄은 몰랐네;

110 이름 없음 (jRNf2JFX36)

2023-01-13 (불탄다..!) 19:54:22

(기운 내서 이것저것 투덜거리다 슬쩍 고개를 들고 보니, 점차 걱정으로 물들었던 남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번지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오밤중에 식겁하게 해서 미안할 뻔 했는데. 그래도 제 걱정은 덜 했으면 해서 등을 살살 문지르자니, 그가 더욱 힘주어 호연을 끌어안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듯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팔의 감촉에, 따뜻한 품에서 느껴지는 힘찬 심장박동에, 한없이 편안하면서도 어쩐지 다시 심장께가 간지러웠다.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라, 괜히 남편의 잠옷자락을 손으로 쥐고서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안긴 게 드문일은 아닌데도, 새삼스럽게 설렜다. 그러고 있으려니, 남편이 안 자면 낮에 힘들 테니 이제 자자며,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다독여왔다. 내가 깨웠으니까 내가 재우려고 했는데. 그래도 얌전히 자는 편이 안심되려나.) 그래야겠어요. 내일 휴일이긴 하지만 모레는 일정 있으니까... 그래도 효의 씨가 달래준 덕에 이번엔 꿈 안 꾸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하다보니, 마음이 푹 놓인 나머지 하품이 나왔다. 하품을 뱉고 보니, 졸음이 눈꺼풀에 무겁게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효의 씨를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간 상황이라서 더 무서웠다는 대신 해볼만한 말이 생각났다. 호연은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반쯤 잠꼬대같은 투로 웅얼거렸다.) 고마워요, 달래줘서... 그리고 나랑 결혼해준 것도요. (갑작스러웠으려나? 그 전에 무슨 뜻인지 잘 들렸으려나? 그런 생각을 떠올릴 새도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효의 엄청 시원하게 잘 깐다ㅋㅋㅋ 나는 뮤지컬로 처음 알았는데 보면서 공감했던 내용이라 속이 다 시원했어XD 호연이한테 말랑하고 스윗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네! 갭모에다ㅋㅋㅋ
쓰다 보니 마무리 느낌으로 나왔네. 이걸 막레 삼아줘도, 막레를 달아줘도 좋을 것 같아! 조건 되게 까다롭게 내걸었는데도 충분히 스윗하고 공감능력 좋고 귀여운 배우자 캐로 이어줘서 고마워XD 덕분에 즐거웠어!

111 이름 없음 (EiYfbdABXQ)

2023-01-13 (불탄다..!) 20:18:35

>>105
석양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절로 긴장이 되었다. 아무리 부드러운 표정에 여느 신사 이상으로 점잖은 태도를 보인대도 상대는 용이다. 물론 마주하자마자 압도될 수밖에 없었던 끝 모를 암흑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라곤 검디검은 머리칼뿐이지만, 지금 흑룡은 다른 데서 봤다면 체격까지 조각 같은 것이 보기 드물게 호쾌한 인상의 미남이라고 감탄했을 외양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무리 긴장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할 태세를 갖춰 봤자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뭘 하든 끝장일 테니.

떨림을 억누르고자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무는데, 당연한 의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선선한 어조가 어쩐지 격려처럼 느껴져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흑룡의 말이 상념을 불러왔다. 인간을 우습게 보는 용족이라, 흑룡이 앞서 일러 준 내용과 종합하면 인간 사회에 섞여 지내는 걸 즐기는 용도 있고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용도 있는 모양이다. 인간을 하찮게 여기면서도 인간 사회에서 아등바등하는 인간 구경은 즐기는 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개체마다 다르다는 건데, 거기 생각이 미치자 그간 애매모호한 서술투성이라고 여겨 왔던 용에 관한 서적들이 실상은 치열한 고민의 산물인지도 모른다는 혼란이 일었다. 용을 직접 보면서 확인한 정보만 기록해 보자고 왔는데, 그게 앞선 연구자들이 이미 해낸 작업의 되풀이에 불과하다면?

목숨이 언제 오락가락할지 모르는 마당에 사치스러운 걱정이라고 속으로 자조할 때, 흑룡이 마치 한평생 연구에 매진해 온 학자 같은 발언을 하면서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성이 앉기 편하게 에스코트라도 할 것처럼 의자가 움직이고 와인이 저절로 따라지는 기현상은 이제 놀랍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일을 목도하며 덤덤한 스스로에게 놀랄 지경이었다. '왜 안 돼?'라는 저 자신감은 불가능한 게 없다시피 한 용이라 생기는 걸까? 그래도 맞는 말이긴 하다. 기존의 자료와 별반 다를 게 없더라도 역시 자료는 더 있는 게 낫다. 자료가 누적될수록 참고할 가치를 지닌 자료가 생길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까. 내가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거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거인이 딛고 올라갈 디딤돌의 일부는 될 수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흑룡이 권한 자리에 앉고 보니, 그가 읽던 책이 눈에 확 뜨였다. 󰡔카다로스 제국사󰡕? 초대 황제가 무려 이 페레스 대륙의 6할을 정복하고 세웠다는, 그러나 몇 년 못 가 황태자가 백주대낮에 친동생에게 살해당하는 홍역을 치렀다는 제국. 이후 형을 살해한 황자가 황위를 계승하고 폐태자의 비를 황후로 삼았는데, 그 대에 제국이 거짓말처럼 분열되어 멸망했다던가? 건국부터 멸망까지가 워낙 극적인 대제국이라 대략적인 내용이야 들어 봤지만, 그 역사를 상세히 담은 책을 보기는 처음이다. 하기야 왕가의 서고에도 있을까 말까인 희귀 서적인데 일개 연구원인 여성이 접할 수 있을 리가. 그 대제국이 순식간에 몰락할 때 과연 무슨 일들이 터졌을까? 제 연구 분야와 무관한, 순전히 호사가스러운 호기심이 솟았지만, 그보다야 흑룡의 말을 듣는 게 우선이었다. 살고 봐야지.

그 사이 흑룡은 투명하게 검붉은 와인을 너무나도 인간처럼, 인간 중에서도 특히나 우아한 귀족처럼 마시더니, 여성이 흑룡의 동굴에 도달할 수 있었던 원인을 설명했다. 요컨대 그가 말한 것 중 하나라도 어그러졌다면 가고일에게 이미 죽었거나 흑룡의 동굴에 이르지 못했을 것 같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나 본데 그래도 운명이라니? 그런 타령은 오래도록 사신 어르신들이나 할 줄 알았는데. 그랬기에 흑룡의 미소가 보기에도 설레게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앞섰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가 운명에 따르네 어쩌네 할 줄이야. 아니면 뭐 운명론자가 될 만한 계기라도 있었나? 인간 어르신이 살아 온 세월의 수십 배 이상을 거치다 보면 저 엄청난 능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기구한 일도 겪게 될까?

그러나 그 의문은 흑룡의 다음 말에 납작 뭉개졌다. 눈빛?? 아니 아무리 압도적인 힘이 있어도 그렇지, 이종족이 하는 말을 의심조차 안 해? 너무 무방비한 거 아냐? 답답했지만 자신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저 용이 그래도 될 만큼 강한 건 둘째 치고 이 상황에 무방비하다고 지적하는 건 나를 의심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니까. 무덤 파는 짓이다. 관두자. 그러나 얼마 못 가 여성은 눈앞의 와인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술기운으로 무모해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목구멍부터 뱃속까지 이어지는 통로가 타는 듯 후끈해지더니 이내 알딸딸한 기운이 올랐다.

"저, 익히 아시겠지만, 인간은 연기라는 것도 합니다. 제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이면 어쩌시게요? 진귀한 물건은 없다고 하셨지만 당장 그 책부터가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귀중품이고, 인간들 사이엔 용의 피를 뒤집어쓰면 불로불사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용님이 아무리 강해도 무방비 상태일 때도 있을 거 아닙니까?"

제 지껄임을 들을수록 우스웠다. 이거야말로 쥐가 고양이 걱정하는 꼴이네. 듣는 고양이는 가소롭겠다. 쥐가 어떤 심정인지 알면 더... 가만, 그러고 보니 용은 마법을 쓸 줄 알잖아. 그러면...

"...혹시 독심술도 하십니까?"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궁금해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서술해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거의 지나가는 내용으로 드문드문 넣은 여성의 외모 설정을 기억하고 계시는 거에도 놀랐고요 그렇게 공들여 주신 보람이 있는 답레여야 할 텐데요

112 이름 없음 (cgt883Wn6g)

2023-01-14 (파란날) 00:50:56

>>111

"천천히, 천천히. 숨 넘어가겠네, 그려. 자, 천천히 하나씩 이야기 해보는 것으로 하나씩 풀어가보도록 하지. 그 또한 즐거움 아니겠는가."

단숨에 와인잔을 비운채 자신의 존재 마저 무시하고 따지고 드는 듯한 여인의 태도에 기꺼운 듯이 그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와인잔을 비워낸다. 급하게 비워내는 여인의 반주라도 맞추듯, 천천히 마시는 듯하면서도 순식간에 비워낸 술잔 너머로 여인의 금발이 아름답게 찰랑거린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듯 이번에 잔을 채워내는 것은 차가운 냉수였고, 어느샌가 테이블 위에서 조금식 음식을 뜯어먹고 있는 정령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흐뭇한 미소를 머금던 그는, 이내 그 시선을 여인에게 돌리며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나이 차이는 얼마 안나는 서로의 모습이었으나, 분위기만으로 따지자면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노인과 소녀의 모습과도 비슷하였다.

"그대가 걱정하는 바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네. 나 또한 생명체고 이 대지 위를 살아가는 존재들 중 하나이니까. 그저 이 거대한 땅 위에서 숨을 쉬고 같이 걸어가는 존재들 중 하나인 것이니까 말이지. 나또한 칼을 찌르면 죽을수 있고, 무슨 연유로 죽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 순간 그가 잠시간 허공을 응시한다. 지금 그가 모두 이룩해낸 것은 정말, 아주 정말 작디 작은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렸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여인을 응시한채 미세하게, 자세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채 가만히 여인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맞네, 우리 종족 또한 불사의 존재는 아니지, 나이를 먹음으로서 강해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해진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국 그 육신의 한계를 맞이하고 또 쇠해가는 존재인 것이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순간이었네. 정말 찰나지간으로, 자그마한 생각이 들은 것은 말일세."

그가 물을 들이킨다. 마치 먼 옛날을 바라보는 것 마냥 말이다. 그의 나이 2천살, 7백의 나이부터 시작되어온 작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고, 이 요람 계획은 앞으로도 그가 죽을때까지 이어질 보고였다. 과연 그가 이 모든 것을 생각없이 진행한 것일까, 결단코 아니다. 아니, 이제는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어쩌면 그 스스로가 말한대로 우연과 우연이 겹쳐질대로 겹쳐진 이 필연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톱니바퀴를 지금 끼워넣는 행위를 말이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는 누군가 말한 것 마냥 후대에, 그 조차도 모를 후대에 만들어지지 않을까.

"우리가 끝이 있는 것처럼, 모든 생명들에겐, 모든 종들에겐 끝이 있는 법이지. 그렇기에 나는 생각했다네, 과연 최후에 최후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인물들에게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은채 남게 된다면? 당장 관조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우리 용족들도 갈수록 줄어들어가고 있는 판국에, 과연 그들을 이끌어줄 누군가가 없게 된다면? 이 요람은 그 걱정으로부터 시작되어진 것이지."

자신의 연구는 거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인간들을 비롯해 아종족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으뜸이었던 존재들은 다름아닌 인간들 본인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하나, 그 과정에서 남겨두고 남겨진 기록들은 전부 구술되고 전해져 내려가 이렇게 책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녀가 말한대로 자신은 지금 유희를 즐긴지 너무나도 오래되어, 정령들을 이용해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이 요람을 구축하는 것 외엔, 각종 사료들을 통한 연구를 통해 다듬어진 날카로운 직관만이 그의 무기가 된지 오래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돌아가도록 하지, 의외지만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네. 운명이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 나는 그것을 인간들이 이룩해낸 업적을 통해 믿고 있다네. 도중도중 유희중인 우리 동족들의 행동이 개입 되어진 적이 없다고는 할수 없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그대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해낸 것이야. 인간들의 욕심과 욕망을 나는 그릇되게 보지 않는다네, 그것을 올바르게 이끌어낸다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된 답을 찾아 낼 것이니까. 이 요람은, 세운건 나겠지만 채운 것은 그대들이라네."

인간 찬가, 인간을 긍정하는 말이 장명종의 대표자인 용으로부터 나왔다.

"자, 또 궁금한 것이 있는가? 이 또한 대답이 모자른다면 다른 답변을 해주겠네만."


//4시간동안 잠시 다른데에 붙잡혀 있었다는게 많이 슬프군요 흑흑..... 저야말로 부디 만족할만한 답레여야 할텐데요!!

그렇습니다. 블랑쿤은 정말로 단순하게 아주 자그마한 기우 하나 때문에 이 요람이라는 대 공사를 한겁니다(?)

심지어 아직도 확장 공사중이에요(?!)

113 이름 없음 (PA5Dxlejg2)

2023-01-14 (파란날) 03:47:08

>>112
미친 짓이었다, 내 생사여탈을 쥔 존재에게 내가 당신이 지닌 것을 탐해 당신을 속였을지도 모른다고 지껄인 건. 쌩초면인 이종족이 하는 소릴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순진함이 깝깝해서 그 미친 짓을 했다. 기왕 미칠 거 화끈하게 돌아 보자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퍼먹고서. 그런데, 그 결과가... 너털웃음이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알겠다면서?

기운이 쭉 빠졌다. 골이 지끈거리는 게 술 때문인지 저 태평한 용 때문인지 헷갈렸다. 동족이든 이종족이든 속내를 다 꿰뚫어볼 수 있거나 아예 불사신이면 모르겠는데 듣자니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경계심이 없냐고?! 하지만 따지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좀 전까지 기운을 북돋아 주던 술기운이 이제는 온 몸을 짓눌러 흑룡이 준비해 준 냉수조차 마실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술 안 먹을래. 지켜질지 불확실한 다짐과 함께 숨을 쌕쌕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고열이라도 난 사람(하얀 얼굴이 벌겋게 익을 만큼 술기운에 열이 오르긴 했다.)처럼 몽롱해진 와중에 전혀 생각도 못한, 맨 정신에 친지에게서 들었다면 뭔 소리냐며 웃어넘겼을지도 모를 말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모든 생명체가 사멸해 가는 시기가 온다?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다. 여성에게는 인류의 존속이 해가 뜨면 지는 것처럼 당연했다. 설령 언젠간 멸종하리라고 판단한 적이 있었더라도, 이내 잊어버렸을 것이다.

다만 흐리멍덩한 정신에도 용족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은 똑똑히 새겨졌다. 용의 수명이 수천 년이라면 사망하는 용은 드물 텐데, 그런데도 용족이 줄어들고 있다면 새로 태어나는 용이나 성체가 되기까지 성장하는 용이 극소수라는 의미겠지. 이를 수치화하면 유의미한 연구가 되겠다. 까마득히 먼 미래의 생명체를 위해 방대한 지식의 보고를 준비했다는 용의 고백을 듣고서도 떠올리는 게 고작 당장의 연구 과제라니. 역시나 인간은 수천 년을 살아온 (그러면서 생명체의 등장과 멸종을 숱하게 지켜봤을) 용과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나 보다.

그대로 잠들 뻔한 순간, 무언가 뇌리에 번뜩였다. 이 요람을 채운 건 인간들이라는 흑룡의 말마따나 이곳에 있는 책은 인간의 언어로 쓰였고, 그 내용 역시 인간 사회에 특화된 지식들 같았다. 그런즉 인간이 아닌 종족에게는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가령 군사학은 (여성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군사학에 관한 책도 이곳에 있었다.) 용을 비롯해 다수의 군사를 지휘할 일이 없는 종족에게는 익히나 마나다. 만약 이 흑룡이 대비하려는 미래에 인간이 멸종하고 없다면? 이곳은 무의미한 공간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여성은 안간힘을 써서 엄지손톱으로 손가락을 찍어 눌렀다. 아직 눈이 뻑뻑하고 눈꺼풀도 무거웠지만 좀은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인간 말고, 지성 있는 다른 생물..을 위한 책도 있습니까? ...말씀하신 마지막..에 살아남는 종이..인류가 아닐지도 모르잖습니까... 수명만 해도.. 용족이 더 긴데..."

정신이 들긴 한 걸까? 잠꼬대인지 웅얼거림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꿈 속인지도.


//사적인 공간일 줄 알았는데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는 공간이었네요 그런 빅피챠 그릴 줄 모르는 연구원 씨는 용구 감소에 더 주목했다가 술주정 2탄 시전 (._.)...

114 이름 없음 (cgt883Wn6g)

2023-01-14 (파란날) 10:32:04

>>113

"하하하핫!! 이제야 좀 긴장이 풀린게로구만!!"

잠꼬대와 비슷한 옹알이에 박장태소를 터트리며 그가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린다. 여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이내 사과 하나를 부여잡고 오독오독 씹어 먹는 운디네 한마리를 불러다가 여인에게 찬물을 직접 먹여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만 운디네도 지금 당장 먹고 있던 사과를 마저 먹고 싶다는 눈치였던 것인지는 몰라도 잠깐동안 용을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이내 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준뒤 천천히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여인의 말에 답변을 재차 하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네. 요람이 괜히 요람이 아닌 셈이지, 지식의 요람은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법이네, 나 또한 1300년이라는 기간동안 마구잡이로 생각한 것임은 아니니까,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도 아마 이 작업은 계속 될 것이지."

여인의 옹알이에 가까운 행동에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무것도 안먹고 그렇게 빈속에 술을 마시면 속 버린다네, 아름다운 얼굴 다 망가지겠어, 가벼운 농을 곁들인 용의 한마디에 정령들이 까르르 웃어대기 시작했고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신 앞에 놓여진 스테이크를 매우 크게 썰어 한입에 넣어버린뒤 잠시간 우물거리다가 이내 그것을 꿀떡-넘겨버리고는 가만히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니야. 하지만 수는 많을 수록 좋지, 이토록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그대들 역사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니까. 나는 그대가 말하는 마지막이 오지 않길 바라는 존재 중 하나일세.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노망난 늙은이의 미친 짓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정도지.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를 대비하는 것은, 어쩌면 생명체 그 자체를 아끼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헛된 지식은 없다, 종족은 비슷하면서 전부 다 다르니까, 여인의 말대로 어떠한 정보는 그들에게 있어서 필요가 없을 테고, 어떠한 종족은 그 크기가 달라 결국 하나를 취하더라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생각한다. 각자가 쌓아 올린 정보들은 각각의 존재들에게 전해져 다시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키고, 또 남겨진 자들에게는 앞서나간 이들이 무얼 말하고자 했는지, 아니라면 무엇을 후회하고 고찰했는지 그것을 남기고자 하는 행동임을. 그리고 그 분야에서 가장 앞서나간 종족은 바로 인간들임을 말이다.

"여인이여,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해 망설이지 말게나, 수명이 길다는 것은 먼 미래를 그리는 도중 함정에 빠질수 있고, 수명이 짧다고 해서 먼 미래를 그리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쌓아 나가게, 성벽의 외피를 만드는 것은 거대한 돌이나, 성벽의 안을 채우는 것은 자그마하고 버려지는 돌들이니,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대화를 나눈다면 결코 내가 생각한 최악의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사과를 다먹은 운디네 한 마리가 쫄래쫄래 여인을 따라가 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물을 직접 먹이는 것보다는 냉기가 그녀의 몸을 식혀주길 바라는, 꼬마정령의 배려일지도 모르리라.

//진실은 묘수충이라 카더라요(....)

상대적으로 머리가 복잡한 여신(?)님과 다르게 투머치토커가 되버린 우리의 블랑쿤....

115 이름 없음 (yLCncSof2E)

2023-01-14 (파란날) 10:37:25

>>114 이 파트만 수정할께요!!

나는 그대가 말하는 마지막이 오지 않길 바라는 존재 중 하나일세

-> 나는 내가 그대에게 말한, 내가 생각하는 마지막이 오지 않길 바라는 존재 중 하나일세

116 이름 없음 (NLuLe/84NM)

2023-01-14 (파란날) 15:53:44

>>114-115
수마(睡魔)에 잠식되다시피 한 정신을 깨운 것은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여전히 골이 지끈거리고 사지가 무지근하고 눈도 감길 것 같았지만, 의식은 한결 또렷해진 기분이었다. 여성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머리를 파르르 흔들고는 흑룡의 말에 집중했다. 인간 외의 지성체를 위한 책도 있다니 용의 책은 어떨지 궁금했다. 용이 문자로 기록을 남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문자는 사회를 이루고 안면이 전혀 없는 상대와도 (의도했든 아니든)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종이나 사용할 줄 알았는데, 용도 문자를 쓰는구나. 어떤 형태일까? 인간들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접하는 순간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전해져 오는 일종의 울림은 아닐까? 어떤 문자든 확인해서 소개할 수 있다면 엄청나겠는데.

그러나 들뜬 마음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흑룡이 무려 1,300년간 요람을 가꾸어 왔고 남은 평생도 그럴 것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1,300년이라니 인간이 세운 국가가 몇 번(카다로스 제국처럼 2대 만에 망하고 마는 나라도 적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어쩌면 십수 번 이상)은 바뀌었을 세월이다. 그처럼 공들인 공간인데 남은 평생이면, 그 평생이 인간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세월일지라도, 그 뒤는? 흑룡이 말한,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까지 이곳이 온전하려면 누군가는 관리를 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이 흑룡보다 나중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존재에게 뒷일을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무난한 존재는 역시 자손일 텐데, 인간 식으로 표현하자면 가업(家業)이 되는 셈일까? 그런데 용은 일가를 어떻게 이룬다? 짝짓기를 한 둘이 동거하면서 자식들을 낳고 키우려나, 인간들처럼?

제대로 물으려고 자세를 고쳐 앉는데 농담조의 걱정에 술기운만은 아닌 열기가 얼굴로 몰렸다. 아름답다니 농담조라도 전혀 뜻밖이었다. 미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지는 않지만, 착실해 보이고 호감 가는 인상이라며 연구원이 되기까지 알게 모르게 덕도 많이 봤지만, 그건 인간들 사이에선데. 만약 용의 미적 기준이 인간과 비슷하다면 그건 그거대로 놀랄 노 자다. 용과 인간은 생김새가 전혀 다르니까. 아,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보기 드문 미남형으로 변신했을 정도면 인간의 미적 기준쯤은 익히 알고도 남겠구나. 그리 생각하니 납득은 됐지만 낯이 홧홧한 게 가시지는 않았다. 한 가지 위안(?) 삼자면 고기를 썰어 먹는 흑룡이 유쾌해 보인다는 것 정도? 어쨌거나 확실한 건, 술은 마실 게 못 된다.

여성이 머쓱해하는 사이 흑룡은 말을 이어 갔다. 원치는 않지만 자신의 우려가 기어이 현실이 되고 만다면, 최대한 다양한 종에게 이곳의 지식이 전해지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흑룡이 생판 처음 보는 이종족에게 굳이 이곳을 소개해 준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면 책을 천년만년 모아 봤자 누구도 써먹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낯선 이가 하는 소릴 곧이곧대로 믿고 경계를 푸는 게 너무 대책 없다는 점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럼 아예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건 어떠려나? 모르긴 해도 이곳이 알려지면 학자들은 뼈를 묻을 작정으로 앞다투어 오지 싶은데.

그 제안을 해 보려다 노망난 늙은이라는 표현에 그만 아연해졌다. 여길 준비한 기간만 1,300년에 성체가 되기까지 걸렸을 세월까지 합하면 인간 기준으로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이긴 한데...이 흑룡은 용족 기준으로도 꽤나 고령인 모양이다. 인간의 20년이 하루살이에게는 억겁이나 다름없겠지만, 인간은 하루살이와 시간 감각이 다르기에 20살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늙은이라 칭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용의 평균적인 기대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원래는 이런 동물학적 정보나 조사하러 왔던 건데 어쩌다 보니 천 년도 넘게 진행 중인 대사업 사연까지 듣고 있네. 인생 참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이 읽힌 걸까? (흑룡이 독심술을 쓸 줄 안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못 쓴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모를 일이다.) 흑룡이 당장의 사소한 일에 매진해도 좋다는 듯한 말을 덧붙였다. 거인을 위한 디딤돌의 일부라도 되어 보자는 다짐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원래 목적했던, 용의 생태와 습성 조사. 용족의 특성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는 특징은 별로 없는 듯해 다른 개체도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지만(그 용이 이 흑룡처럼 점잖고 순진할 리는 없으니 그땐 정말 조심해야겠지만) 선호하는 서식지, 사냥 방법, 먹이의 종류와 양, 계절의 변화에 따른 활동, 짝짓기 시기나 방법, 유년기 생활, 성체가 되기까지 걸리는 세월 같은 걸 낱낱이 확인하고 싶었다.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내가 알고 싶고, 어느 날 누군가는 알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거면 충분하다.

마음을 다잡은 김에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술기운을 내쫓고자 손톱으로 손가락을 찍어 누르는데 너무나도 낙관적인 말이 들려왔다. 다른 종족끼리 서로 의지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당장 용만 해도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개체가 적지 않은 모양이고, 인간 중에도 용을 두려워하거나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아니, 그런 종족 인식 이전에 언어가 통하나? 인간의 언어를 아는 용은 지금 이렇게 눈앞에 있지만, 용의 언어를 안다는 인간은 듣도 보도 못 했다. 말이 안 통하는데 교류를 어떻게 해? 타 종족에 대한 인식을 바꾸면서 서로의 언어도 익히게끔 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여성으로선 감도 오지 않았다.

그때 흑룡의 곁에 있던, 영적인 존재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개체가 여성의 정수리-풀어헤친 금발 위-로 올라왔다. 그 돌발 상황을 얼떨떨해하기도 전에 정신을 몽롱하게 하던 열기가 식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술을 깨게 해 주려고 온 거구나. 여성은 파란 눈망울을 들어 작은 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마움을 표하고자 고개를 까딱였다가 화들짝하며 얼른 영을 받쳤다. 인사하려다 떨어뜨릴 뻔했네. 그래도 술기운은 확실히 가라앉았다. 그에 힘입어 들은 얘기를 차근차근 정리하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남은 평생 여기를 가꾸시겠다 하셨는데, 그 뒤에는 어찌 됩니까? 누구 다른 이에게 맡기실 예정이십니까? 또 이곳이 훗날 쓰이길 바라시고 이종족이 서로 교류하기도 바라신다면,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이곳을 홍보하시거나 용의 언어를 인간에게 가르치실 생각도 있으십니까?"


//내적 TMI가 많은 연구원 씨입니다 겉만 곱상하지 그냥 너드예요ㅋ
그리고 용님이 투머치토커라기보다 제가 용님의 대사에 그때그때 반응하는 서술을 잘 못 써서 막판에 몰아넣는 탓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묘수충이 무슨 뜻인가요?

117 이름 없음 (c4sS6G/sYQ)

2023-01-14 (파란날) 16:12:44

>>110 답레 써 줬었구나 이제야 봤어XO.. 호연 씨도 까칠한 타입일 줄 알았는데 세상 순둥이네 정효의 안심하라고 얌전히 자겠다니 찐사랑이다
너참치 말대로 막레 분위기라 그대로 받을게 정효의가 바로 안 자면 호연 씨가 걱정할 거 같다ㅎ 나도 재밌었고 즐거운 주말 되길 바라~

118 이름 없음 (NV4TC410tg)

2023-01-14 (파란날) 17:24:39

>>106

작은 여우는 드디어 인간으로 둔갑한 사실을 기뻐해야할 지 말아야할 지 혼란스러웠다. 너야말로 뭐냐나, 낯선 인간에게 정체를 들켰다면 인간 세상에 녹아들어 살고 있는 동족들도 숲 속에 남은 동족들도 모두의 안전이 흔들린다. 작은 여우는 일단 이 사람을 계속 깔아뭉개고 있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일어났다. 한 1초 정도 일어났다가, 영 인간으로 둔갑할 일은 없을 줄 알고서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간은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땅을 디딘다는 사실이 스쳐가듯 떠올랐지만 이미 넘어지는 중이었다. 다행히 이미 깔아뭉개버린 사람의 위로 한 번 더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인간들의 길바닥이 너무 딱딱하고 거칠어서 푹신한 흙바닥과 나뭇잎들이 그리워졌다. 아야—외치고 싶은 소리를 욱여넣고 아마도 아직 바닥에 엎어져있을 사람을 바라봤다.

"내, 내가 뭐 같은데?!"

작은 여우는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오기를 마음 속으로 꾹 빌었다. 초조하고 당황스러운 이 경험에 대한 인상을 표정 위에 다 드러나 오늘이 새로운 최악의 생일이라 느꼈다.

#묻힌 줄 알았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T.T

119 이름 없음 (DaG6SLLghs)

2023-01-14 (파란날) 18:26:04

>>116

"남은 평생을 모두 마무리 지은뒤 차원의 틈 사이에 가둬둘까 하네, 트리거의 경우는 종의 멸절 상태 여부를 체크해서 위치 포인트를 정해둔디면 분명 연자가 와서 찾아가겠지. 관리의 경우....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연구다만, 나의 인격을 복제해서 골렘이나 호문클루스를 만들어내어 이곳에 남겨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낙관적이고도 무덤덤하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최후 너머를 이야기 하는 모습은 마치 최후를 바라보고 있는 현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젊고 곱상한 외모와 더불어, 용이었던 때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대조되는 그 심유한 모습은 마치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인지 은근 슬쩍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낸 모습은 마치 동급생의 그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자네, 아까 내가 독심술이라도 쓰는건 아닌지, 라고 물어보지 않았나?"

글쎄? 과연 어떨까? 내가 지금 여기서 독심술을 쓴다고 이야기를 해봤자 믿어버릴거 같다만, 그래서야 재미없지 않을까. 그는 속으로 어떻게 해야 이 순진하지만 경계심 많은 소동물을 골려먹을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속안으로 그의 버릇 마냥 턱을 슬슬 쓸으며 천천히 책 한권을 다시 가벼운 마력 사용을 통해 책을 가지고 가볍게 장난을 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용에게 독심술은 없다네. 하지만 자네와 내가 살아온 세월의 차이가 얼마인가? 즉 연륜으로 하여금 자네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거네. 그리고 말이지."

그가 아주 짖궃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선다. 마치 동급생 여자아이에게 다가서는 남자학생 마냥 그가 거리를 좁혀온다. 그러나 일정 이상을 다가서지 않는 것은, 그저 지금 이 눈앞의 여성에게 최소한의 배려라는 것을 베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녀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몰라도, 결국 이 또한 그가 그녀에게 종의 차이로서의 존중을 던지는 것이리라.

"자네가 생각보다 표정을 읽기 쉬운것도 있네. 생명체의 표정은 정말로 많은 것을 담고 있으니까. 그 중에서도 인간이 그 으뜸이지만은 그대는 정말로 많은 것를 알려주고 있다네. 허나 반면으로 안타깝기도 하지. 그대가 아까 한 말을 기억하는가?"

아까전부터 했던 대화의 내용을 떠올려보자,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온다. 그제서야 상대도 기억나지 않을까.

—인간은 연기라는 것도 합니다. 제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이면 어쩌시게요?

"자네, 역으로 내가 묻겠네. 용은 연기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네가 생각보다 매력적이라는 것도 좀 알아야한다네."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인채 가만히 여인을 응시한다. 사실 그가 책을 수집하면서 여러가지 경우의 모습을 봐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기준으로 지금 이 눈앞의 여인은 생각보다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진실이라는 미끼를 이용해, 지금 눈앞의 여인에게 장난을 치고자 하는 것이리라.

//말그대로 묘수에 미친 놈이란 뜻 정도로만 알고 계심 됩니다!!

어차피 거의 속어라서.... 좋은 뜻은 아닌고로.... 그리고 금발 미녀 너드..... 씁 취향인ㄷ....(읍읍)

120 이름 없음 (e39k1XvKfY)

2023-01-14 (파란날) 22:44:03

>>108

"이카로스처럼?"

짤막한 물음이 던져졌다.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인지, 조금은 몽롱한 어조다. 태양을 동경해 아버지의 경고마저 등지고 날아올랐던 이카로스. 밀랍이 녹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혹은 맹목적인 감정에 휩싸여 두려움을 잊은 자.

"사람은 애정하는 것을 닮게 된다더니, 이런 부분에서마저 그 말이 맞나 보네요."

맹목은 그 자신을 불사른다. 그 자신을 태워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태양과도 같다. 그런 폭발적인 에너지는 사람을 섬뜩하리만치 두렵게 하거나, 매혹해 열광하게 한다. 때로는 상반된 두 감정 모두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나 어쨌건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저 자신은 결코 걸을 일 없는 길이며 써내려갈 일 없는 서사이니.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러기에 저는 지나치게-"

불현듯 그는 말을 멈춘다.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입술만 잠시 달싹이다 만다.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얕은 숨소리만이 허공을 떠돈다. 집요했던 시선은 생각에 잠겨 초점을 잃었다. 그는 습관처럼 건조한 입술을 잘근대다가, 혀로 그 위를 한 번 쓴다.

"따분한 인간이거든요. 아마 두려움을 미뤄두더라도 갈 방법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할 거예요."

흘러나온 것은 느릿느릿한 목소리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 와 같은 사실을 전달하듯 단조롭다. 그 끝에 그는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는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상당히 낭만적인 표현이네요."

우주를 향하는, 팽창, 폭죽과 비명. 단어를 잠시 곱씹던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내내 무감하던 얼굴에 약간의 즐거움이 번진다. 당신의 말로부터 떠오른 심상이 퍽 재밌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주선 역시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팽창이나 폭발, 고조된 감정으로 인한 비명 따위의…당신이 입에 담은 것과 유사한. 그는 문득 떠오른 제 생각을 그대로 말로 옮겼다.

"그러면 당신은 우주선의 선장쯤 되는 걸까요? 아니면 항해사?"

곧이어 그는 지나치게 날 것의 생각을 전했다 느꼈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역시도 지나치게 짧았고, 제대로 된 설명이라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말이다.

"우주를 향해 이끈다는 점에서요."

마치 승객을 미지의 우주로 이끄는 우주선의 선장과도 같이, 당신은 관객을 저와 함께 우주로 이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같이 우주 속을 유영하자며 끌어들인다 할 수 있지 않나.


/아앗…😂😂 그렇다면 같이 힘내서 현생을 이겨내는 걸로…!

121 이름 없음 (DUTC.pFVZI)

2023-01-14 (파란날) 23:17:05

>>120

ㅤ이카로스, 이카로스로구나. 당신의 말이 마음에 들은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 밑으로 기타의 매끈하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 다음 곡의 제목은 이카로스가 좋겠다. 케시 라일리는 순식간에 남들 모르게 곡을 지어냈다. 테마는 아마… 우주, 그리고 태양.

ㅤ사색에 빠졌던 케시 라일리는 잇따라 들려오는 말에 의문 가득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닮았다는 거니, 태양과?

ㅤ"그거 참 이상한 말이구나……."

ㅤ질타하는 듯한 문장이나 표정만큼은 요상하게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기본 베이스인 무표정, 차가운 입매가 아주 살짝이나마 올라간 것으로 썩 온화한 낯짝으로 변모했다. 그 말은 꼭 자신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던 까닭이었다.

ㅤ케시 라일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목을 덮는 기장의 흑발이 사르륵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것인지 움찔거리던 입술은 이어지는 당신의 말에 다물었다. 참으로 겁 많은 아이구나, 그리 생각하며 조소를 머금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일렁였다.

ㅤ 돌이켜보면, 제 주변에는 불꽃같은 녀석들만 가득했다. 전부 자신과 닮은 녀석들이라 꽂힌 하나에 온몸 불사르는 부나방 같은 것들이었다. 케시 라일리는 제 인생에서 드문 유형의 당신이 퍽 생소했고 제 궤적을 한번 밟아봤으면 했다. 그래서 케시 라일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묻고 마는 것이다. 그렇담.
ㅤ 그렇다면.

ㅤ"내 우주선에 타보겠니─"

ㅤ ─상당히 거친 운행이겠지만, 폭발의 마지막 불씨까지 함께해줄 테니.


ㅤ케시 라일리는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 건넸다.
ㅤ케시 라일리가 속한 밴드부의 공연 티켓이었다.

122 이름 없음 (8j9U9Qn8yg)

2023-01-15 (내일 월요일) 00:15:33

>>119
흑룡은 아득한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여성의 질문에 답했다. 선이 굵고 시원시원하면서도 기품이 엿보이는 미려한 용모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인간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모습을 참 기막히게도 구현했다. (앞으로 인간 중에 외모가 유달리 빼어난 이를 보면 혹시 용은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될 것 같다.) 나도 계속 연구하면 용의 미적 기준을 잘 알게 될까? 아무튼 용은 이곳을 누구에게 맡길 의향이나 이종족 간 교류를 주도할 계획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론상의 연구라면 호문클루스나 골렘 같은 건 구현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건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 치고는 허술한 것 같아 일순 당황했으나, 터무니없게도 동질감 비슷한 게 드는 것도 같았다. 100년도 살기 힘든 인간이나 수천 년을 사는 용이나 사후를 완벽하게 대비하기는 어렵나 보다고.

그런데 돌연 흑룡이 표정을 바꾸어 여성이 술을 들이키고 했던, 독심술도 하냐는 질문을 되짚었다. 실체를 모르고서는 여성의 또래로밖에 안 보이는, 영락없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무색하게 그는 연륜의 차이를 언급했다. 어린아이의 행동 동기가 성인 눈에 어느 정도 보이는 것과 비슷할까? 어쨌거나 고양이 걱정인 쥐 같은 속내도 알아챘다면... 여성은 흑룡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려다 제 머리 위의 영을 의식해 멈칫했다. 민망하다. 쪽팔려.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흑룡이 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히 거리를 좁혀 섰다.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칼에 손이 갔다.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소용없는 짓이라고 자제했겠으나, 맹수를 넘어 초월자에 가까운 존재와 가까워지자 그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만 생존 본능이 앞서 버린 것이다. 그 두려움을 헤아리고 있었던 걸까? 흑룡은 어느 시점에 딱 멈추더니 여성의 표정이 읽기 쉽단다. 여성은 등줄기에 솟았던 땀이 식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마른침을 넘겼다. 칼자루에 닿은 손은 아직 떨림이 주체가 안 됐다. 지금 표정 가관이겠네.

제풀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데, 흑룡이 또다시 여성이 했던 말을 상기시키더니 거꾸로 용은 연기를 안 하겠냐고 물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흑룡이 지적한 대로 반대의 가능성은 생각조차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용은 인간을 속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인간들과 섞여 놀겠다고 인간인 척하는 용이면 모를까,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범한 인간과 마주한 용이, 뭣하러?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더 불가해했다. 매력적이라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용이 인간을 속일 가능성과는 무슨 상관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미간만 구겨질 따름이었다.


//연구원은(는) 혼란에 빠졌다! 고로 대사가 없습니다 (._.)...
용 으르신이 연세에 비해 짓궂으시네요 ㅎㅎ

123 이름 없음 (RvtE.oshEk)

2023-01-15 (내일 월요일) 00:35:32

>>118

"뭐 같기는! 아이고, 허리야... 이 한밤중에 뜬금없이 행인 허리 위로 떨어지는 사람이면 요괴나 도둑밖에 더 되겠냐?"

사람 위에 넘어져 놓고 자기가 뭐 같냐고 묻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잠깐. 뭘로 보이냐고? 이제보니 내 안경이 떨어질 때 충격으로 벗겨졌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경 좀 자주자주 바꿀 걸 그랬다. 낡아서 그런지 자꾸 안경테가 흘러내리니 일이 이렇게 되지.
어찌되었든 맨눈으로 보았을 때 저 실루엣은 확실히 사람이다.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아마 눈코입은 있을거고, 두 발에 두 다리 형상 비슷한게 보이는 것을 보니 분명 사람이다.
뭐 머리 위에 이런저런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 처럼 귀나 꼬리나 뿔 같은 이상한 게 달려 있는지 아니면 뭐 달걀귀신인지는 아프기도 하고 자세히 볼 겨를도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일단 보이는대로 봤을 때 결국 사람의 실루엣인 것은 확실했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요괴 같은게 어딨어? 밤이슬 맞고 다니는 도둑이나... 아니면...

...아니면. 어쩌면.

"너... 솔직히 말해봐. 진짜 도둑이냐? 아니면... 그, 포기하려고 한거야?"

요즘같은 때에 마음이 꺾이는 이들 또한 수도 없이 많다. 어쩌면 여기 있는 이 사람도 그랬을 가능 성이 있다.
한 때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결정을 내릴 뻔 한 사람으로서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으로, 차라리 전자인 쪽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경찰에만 맡기면 되니까.

124 이름 없음 (zwkV3DU9NY)

2023-01-15 (내일 월요일) 23:20:32

>>122

'호오.'

책에서 읽은대로라면, 지금 이 여인은 분명히 반응이 재밌는 쪽이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발이 넓지 않은 그로서는 이러한 모습을 관측 하는 것 자체로도 상당히 연구심을 자극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칼을 뽑으려고 하는 순간, 솔직히 한번쯤은 휘둘러도 너그러이 용서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인은 분명히 자신에게 꽤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꽤 오랫만에 만난 다른 인물, 그것도 충분히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상대가 자신과 말이 통하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면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여인은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 편협되지 않으면서 충분히 경계심을 가지고 만물을 바라보는 태도는 매우 훌륭하기 그지 없었고, 외적으로도 ─여인 본인은 정말 인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미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렇게 자신하고 문답을 자연스레 문답을 주고 받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그녀를 매우 높이 평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간을 구기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고민하고 있군.'

나쁘지 않다, 의중을 파악할 수 없으니 계속 고민하게 되고 수성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안전하게 나서는 것만으로 분명히 반은 먹고 들어가고, 수성이야 말로 공성전의 기본이니까, 생각을 나누고 대화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면 마찬가지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지금 그녀의 대처는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공세에 나서야지 적에게서 승기를 잡을수 있는 법인데 그 부분이 아쉬운 것은 어째서일까? 그리고 그에 반해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 사랑, 즉 첫눈에 반했다 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 아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딱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성적인 의미로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다른 의미의 소유욕, 인간을 뛰어넘은 훌륭한 마음가짐, 만약 그녀에게 길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히 훌륭한 재목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속으로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그래, 솔직히 인간들에게 넘겨주긴 너무나도 아까운 재목이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하핫!! 장난이 너무 심했군, 그래도 내가 말한 것 중에 9할은 전부 진심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그리고 눈앞에 놓인 음식을 두고 인상을 굳히는 것도 좋지 않은 법일세. 그러니 천천히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걸로 하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은 솔직한 심정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리빙아머에게 술식을 새겼을때 차라리 모래를 요리해도 이것보다는 맛있겠다 느꼈었는데 몇년간의 수정을 걸치고 지금까지도 개량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정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흡족한 생각을 하던 와중, 그는 마침내 자신의 최고의 걸작, 요람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랬다, 여인의 말대로였다. 이 곳은 어디까지나 용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곳, 과연 타종족인 그녀의 시선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그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전의 장난스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매우 진지한 태도였다.

"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음식 먹으면서 대답해도 되니까 천천히 대답해주게나."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떨어졌다.

"자네, 이 요람을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가 보는 시점으로 뭐든 말해주게, 좋은 점, 나쁜 점,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면 뭐든 좋네. 바난도 비방도 전부 수용하지. 절대 화는 내지 않겠네."

//많이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 장난기만 남는다 카더라요.... 그리고 사실 지금 용님이 보는 여인에 대한 모습은 훌륭한 대학원ㅅ.... 아, 아닙니다

125 이름 없음 (CyTgkUx7mM)

2023-01-16 (모두 수고..) 04:14:03

>>124
난제를 접한 열등생처럼 끙끙대던 중 문득 흑룡의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눈에 눈길이 갔다. 물감 같은 인공적인 수단으로는 절대 구현하지 못할 것 같은, 석양의 그윽하면서도 선연한 빛을 오롯이 담은 듯한 눈동자가 흰자와 보기 좋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용을 마주보기는 두렵거니와 너무 빤히 보는 건 결례 같아 자중하려 해도 그 의지에 반(反)해 끌려들고 마는, 그래서 스스로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불안해지는 그런 눈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말려는 찰나, 흑룡의 눈에서 어쩐지 익숙한 빛이 비쳤다. 용이 변신한 모습이니 진짜 인간과 비슷할지 미지수이지만, 저 반짝임은 여성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찾았거나, 한창 연구에 몰두할 때 드러나는 총기와 비슷했다. 설마 이 용이 날 관찰해서 인간을 연구하려는 건가? 그래서 매력적이라고 한 거고? 또다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인간이 용을 속이는 건 당연시해도 용이 인간을 속이는 건 상상도 못했던 것처럼) 용을 연구하는 인간이 있는 건 당연시했으면서 용이 인간을 연구하려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바보네, 나.

실소가 나오면서도 안심이 됐다. 흑룡이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젓는 모습도 연구로 머리가 복잡해진 연구원처럼 보여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가치가 있으면 죽이지야 않겠지. (본능적인 공포로 칼을 뽑을 뻔하긴 했지만 여성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했다뿐 이미 흑룡이 살의를 품을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못 먹는 술을 마셔 가며 군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에게든 용에게든 받기만 하는 건 경우가 아니다. 무례를 용서해 준 데다 욕탕을 빌려 주고 만찬까지 베풀어 준 걸 다 갚기는 어렵겠지만, 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내어 주는 게 도리일 거다. 그러니 흑룡이 인간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적극 협조하자. 그러면서 용의 생태와 습성에 대해 들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리 결론짓고 흑룡의 저의를 확인하려는데, 그가 파안대소하며 장난이었단다. 맥 빠지는 결말이다. 지금 제 표정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해 보일 것 같다는 민망함은 덤이었다. 그런데 또 9할은 진심이라니 더 혼란스럽다. 결국 여성은 식사를 마저 하자며 자리로 돌아간 흑룡에게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9할이 진심이고 나머지 1할은 연기라는 겁니까? 그럼 어떤 말씀이 9할이고 어떤 말씀이 1할입니까? 전 인간을 연구하고 싶으시면 협조하겠다고 말씀드리려던 참인데요.."

투덜거리면서도 우스웠다. 내가 이런 걸 따져 물어도 되는 입장이던가? 맥 빠진 건 내 사정이고, 자기 얘기를 할 의무 같은 거 저 용한텐 없는데. 몰라. 내키면 말씀하시겠지. 체념하고 흑룡이 말한 대로 식사나 하려는데 한참 긴장하고 기가 빨렸던 여파일까? 아까 배꼽시계가 요란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입맛이 없었다. 뱃속도 빈 건지 찬 건지 모르겠다. 테이블만 톡톡 건드리던 중 제 머리 위의 영이 사과를 앙증맞게 먹던 것이 떠올라, 사과를 집어 제 머리 위에 있는 영에게 권하듯 들어 보였다.

그때, 흑룡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표정도 어조도 아까까지와는 딴판으로, 진중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요람이 온 생애를 바친 사업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나 보다. 세기의 연기자라도 저런 눈빛을 연기해 내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저 간절함이 과연 내 말로 충족이 될까?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쥐어짜려다 마른세수를 하고 숨을 골랐다. 초월자에 가까운 존재가 천 년이 넘도록 고심해서 이룩한 공간이다. 잠깐 봤을 뿐인 내가 뭐 얼마나 보탬이 되겠는가. 큰 차이 없을 테니 솔직하게나 말하자.

"글쎄요... 인간 말고 다른 지성체의 서적도 필요하겠다 생각했는데 애초에 그렇게 준비하신 것 같고, 훗날 살아남은 이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홍보라도 해야 하나 했는데 이미 적절한 때에 이곳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다니 홍보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려하시는 마지막을 막는 데에 이종족 간 교류와 협력이 중요하다면, 우선 종족 간 언어 장벽을 낮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용님도 인간의 언어를 아시니 저 같은 인간의 말도 들어 주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또 타 종족에 대한 선입견을 줄일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종족이 섞여 지낼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말하다 보니 이건 서고가 아니라 학교가 필요하다는 소리 같네. 용과 인간이 함께 다니는 학교라니, 목숨 안 걸고는 못 다니겠는데? 말을 꺼낸 당사자면서 편견 잔뜩인 게 부끄러워 여성은 제 머리칼을 검지로 배배 꼬면서 덧붙였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또 뭐가 있을까? 흑룡의 말을 되짚다 보니 흑룡이 이론상의 연구라고 밝혔던 골렘과 호문클루스가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흑룡의 장난(?)에 허를 찔린 것도 생각났다. 인간 입장만 고려해서 반대 경우는 상상도 못했는데... 가만, 이 용이 걱정하는 최후가 예상보다 빨리 오면 어떻게 되지?

"그 외에는 말씀하신 골렘과 호문클루스가 완성 가능한 것인지, 완성을 못 하면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했습니다만...지금은 다른 걸 여쭙고 싶습니다. 만약 용님이 대비하시려는 그 마지막이, 용님 생전에 닥쳐 버리면 여긴 어떻게 됩니까?"


//별 말씀을요 그간 엄청 빨리 이어 주신 거죠~
똘똘한 원생을 지도학생 삼고 싶어 하는 교수님 같기는 합니다 용님이:) 연구원 씨가 과연 똘똘한 원생일지는 모릅니다만ㅎㅎ
그나저나 연구원 씨 말이 많아졌네요 메타적으로는 용님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해 사투라도 벌이려나 궁금합니다ㅋㅋ

126 이름 없음 (mCXZvFWO56)

2023-01-16 (모두 수고..) 18:58:35

>>123

"ㅁㅝ머무뭐?! 요괴?! 도두욱?!!"

억울함이 욱 하고 올라온 작은 여우는 답답함이 사무쳤다. 우리 여우 일족만큼 신비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또 어딨겠느냐—는 말을 듣고 자란 탓에 어이가 없어졌다. 요괴같이 삿되고 하찮은 존재도 아니고, 도둑같이 좀스럽고 얍삽한 존재도 아니었다. 인간 세상 속 여우는 요사스럽고 야비하게 그려져서인지 더 억울한 듯 했다.

"사과해! 실례잖아!"

그런 탓에 작은 여우는 자신이 먼저 사과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니 뻔뻔하게도 사과를 요구하며 소리지를 수 있었다. 작은 여우는 씩씩거리고 싶은 걸 참고 저에게 실례를 저지른 인간을 노려보다가, 문득 시야 속에서 안경을 발견했다. 주인은 아마도...

"도둑 아니라니, ㅇ어? 어떻게 알았어?"

무례하긴 하지만 사람을, 아니 여우를 잘 꿰뚫어보는 이 인간의 것 같다. 작은 여우는 인간의 약점으로 잡을 생각으로 안경을 슬쩍 주워왔다. 부러뜨린다고 협박하고 도망가야지—이게 계획이었다.

127 이름 없음 (9GGIzxOQqU)

2023-01-16 (모두 수고..) 23:39:16

>>125

"하하하!! 그대들은 그대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연구해왔는지 모르는군, 걱정 말게!! 자료는 충분하고 사료도 많이 봐왔으니 내 자네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일은 없을것이야! 하하하하하!! 아, 미안하네. 자네의 말은 허를 찌르지 못한 듯 허를 찔러서 나를 충분히 재밌게 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근 100년간 이렇게 재밌는 대화는 없을 것이야!!"

용의 진심어린 말투였다. 별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연구에만 매진하다 보니 누군가를 만날 기회 자체가 적었다. 그렇기에 오랫만에 손님 대접을 융숭하게 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의 견해를 듣고 나누며 공유하는 것 만큼 정말 재밌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닐지 잠깐 동안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윗자리는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조금은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그였다. 어쩔수 없다, 만약에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나 공손히 대한다면 상대가 그만큼 자신을 어려워 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까 딱 이정도 선이 매우 적당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손에 깍지를 끼고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종족 간의 언어 장벽, 실제로도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맹점이었다. 생각을 안할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이 곳에 호문클루스나 사념이 깃든 골렘을 만든다면 문제는 없을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본인이 용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그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서야 이 공간은 열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에 따라 달라진 언어는 또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이며, 만에 하나 다른 이종족이 적인줄 알고 공격을 한다면..... 여인의 의견이 타당한 것인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는게 정확하군, 내 기준에서만 보던 문제를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 말이야. 그대가 생각한 바가 옳다고 느껴지네. 내가 호문클루스를 제작하면서, 다른 종족들을 넣는 것으로 그것을 대안해보겠네."

일석이조였다. 여인이 생각하는 것을 읽은 바는 아니지만, 오히려 용은 그 안에서 꽤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교육, 말 그대로 이 지식들을 활용할 수 있게 교육을 하는 것, 누구나 배울수 있고 누구나 가르침 받을수 있는 이 공간을, 후세인들이 익히고 배울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그 순간 그는 그의 시선이 여인을 향한다. 생각보다 매우 유능하고 생각보다 훨씬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닫지 못한 이 여인을 자신의 측으로 끌어 들인다, 생각보다 괜찮지 아니한가? 요람의 총책임자의 비서, 즉 인간들 사이에서 교수와 조교의 역할과 비슷한 느낌으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은 뒤 여인의 질문에, 별 문제 아니라는 교수 마냥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호문클루스니, 골렘이니 그런건 완성이 어려운게 아닐세. 제작을 하고, 인격을 부여 하는 것,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지."

하지만 용의 걱정은 거기서 더 나아간 문제였다.

"자, 잘 생각해보자고. 나를 복제한 호문클루스에 내 인격을 최대한 복제해서 넣었네. 활동 시점은 내가 죽고난뒤 깨어나는 것으로 설정해두면 되니까. 정말 뛰어나게 복제를 해서, 99퍼센트에 가까운 내가 태어났다고 가정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게 진짜 내가 생각한 결과를 가져다 줄까? 우리가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나 완전히 똑같이 생활하더라도 결국 차이점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지. 1퍼센트의 차이는 크네, 그 1퍼센트의 다름이, 요람의 결말을 어떻게 맺을지가 나는 조금 두려울 뿐이야."

그리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여인을 향한다. 재차 와인을 한잔 따라주며 그는 부드러운 표정을 머금은채 입을 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대가 점점 마음에 드는군, 아,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니까 걱정말게나. 내가 마음에 든다는 것은, 그대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즉 학술적인 의미로서 마음에 든다는 의미니까, 그러니까.... 이 곳에서 일해볼 생각 없는가? 그대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겠네."

//용의 조교수 제의!! 무려 제일 첫빠따라 교직으로 따지자면 다음에 들어올 아이들보다 제일 짬밥이 높아지는 거라고요?!

죄송합니다 흑흑 최근 일이 있어서 너무 늦게 답레가 가네요..... 메타 발언이라고 말한다면 만약 진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온다면 용들의 규율─현세에 너무 간섭하기 금지─을 어기고 전면개입할껍니다. 진짜 있는대로 개입해가지고 최대한 틀어막은 뒤 죗값을 단단히 받을꺼에요. 별종이라고 불리우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강한 편이니까요.

128 이름 없음 (Ja8OvjRSWg)

2023-01-17 (FIRE!) 09:54:45

>>127

//용도 지켜야 하는 룰이 있었군요 그렇게 되면 자기희생적 결말의 슈퍼히어로물 비슷하게 되겠네요:) 용님이 능력도 그렇고 인간 친화적인 성향도 그렇고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신 같다는 느낌입니다ㅎㅎ
그리고 충분히 빠르신데요 묻힌 줄 알았던 거 따박따박 이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도 어제 못 이었는데... 그 연구원 씨 머리에 자리 잡은 운디네가 사과를 받아먹었을까요 배부르다고 마다했을까요? 제 캐가 아닌지라 임의로 서술해 버리면 결례일 것 같아서요.

129 이름 없음 (oBUDTjL/mE)

2023-01-17 (FIRE!) 12:44:10

>>128 //앗 그부분을 서술 까먹었네요!! 지금 가볍게 적어드릴께요!!

>>127 추가 서술

이렇게 둘이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이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자그마한 소녀는 잠시간 눈을 끔뻑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화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어느새 자신의 품안에 사과를 건네주는 여인의 모습에 사과를 받아든 뒤, 눈을 가볍게 끔뻑이여 그녀를 응시한다.

—꺄아!

그와 동시에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사과를 팔 아래로 끌듯이 내린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한 물의 정령은 싱그러이 웃으며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문 뒤 다시 저편으로 자리를 잡고는, 여인이 준 사과를 진수성찬인 마냥 입안 가득 넣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던 용의 시선에는, 상당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대, 이런쪽으로 꽤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구만, 정령들은 함부로 남들이 주는 물건에 대해 경계심이 강한데.... 뭐 따로 적성에 관련된 검사 같은 거 받은게 있는가?"

//메타 발언 추가 : 실제로 서양의 드래곤보다는 동양의 용과 북유럽신화의 요르문간드의 성향이 강할꺼에요. 중립선의 영향은 동양의 용, 동족과 사이가 별로 안좋은데에 대한 이유는 그런 신(즉 드래곤)들에게 이골이 난 요르문간드의 성향을 보면 돨꺼에요

혹시 몰라 테마곡도 하나 남겨두니 들으면서 천천히 써와주새요!! 오늘 하루도 파이팅!!

130 이름 없음 (oBUDTjL/mE)

2023-01-17 (FIRE!) 13:15:07

>>129 //잘려버렸네요... 다시한번 더!

131 이름 없음 (JfESHRTrP2)

2023-01-17 (FIRE!) 21:02:00

>>127 >>129-130
어지간히도 즐거운지 그야말로 폭소를 하는 용을 보며 여성은 제 추측이 터무니없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하기야 사학을 살피면 어지간한 인간 군상 다 확인할 수 있고, 의학을 살피면 인간의 몸이 용과 얼마나 다른지도 파악이 될 것이며, 인간의 생활 양식도 인간 사회에서 한 몇 년(그 정도야 용에겐 짧은 시간이겠지.) 지내 보면 웬만큼은 가늠되겠다. 굳이 인간 개체 하나 두고 볼 필요가 없네. 머쓱함에 애꿎은 머리칼을 쥐었다 꼬았다 했다. 결국 뭐가 참말이었고 뭐가 연기였는지는 알 수 없게 됐네. 다시 물을까 했으나 그만두었다. 사람 속도 깊디 깊은 물속보다 알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하물며 용의 속이 몇 마디 듣는다고 알아질까? 일단 재밌다는 건 진심 같으니 사서 골치 썩지 말자.

그런데 여성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끄집어내자 흑룡은 앞서 껄껄거리던 게 무색하게 진지해졌다. 번득이는 눈빛이며 집중한 표정이며 깍지를 낀 손이 경견하게까지 느껴졌다. 내로라 하는 학자들의 연구회에서도 저렇게까지 경청하는 이는 못 봤다(그런 자리에선 잔심부름이나 맡는 게 고작이긴 했지만). 이윽고 흑룡은 호문클루스를 다양한 종족으로 제작하겠다고 밝혔다. 솔직히 놀랐다. 자신이 매진한 분야이고 그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다른 의견에 귀기울이기 어렵고 용에게 인간은 여러모로 부족한 존재일 텐데, 무려 천 년 이상 온 노력을 기울인 일에서 저토록 유연한 태도를 지닐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과 그 일이 완벽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겸허함의 균형, 그것도 (물리적인 강함이나 마력 못지않은) 저 용의 저력 아닐까?

그때 흑룡이 선이 뚜렷하면서도 섬세한 눈매의, 석양빛 눈동자가 두드러지는 눈으로 여성을 주시했다. 뜨끔했다. 감히 평가하고 앉았던 걸 들킨 기분이었다. (흑룡이 독심술은 못한다고 답하긴 했지만, 앞서 한 말 중 진짜는 9할이라고도 했으니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난감한데도 눈을 떼지는 못하겠다. 잘생기고 고운 사람이 구경하기 좋긴 하지만 이 정도로 앞뒤 못 가린 적은 없는데. 심지어 진짜 사람도 아니고 변신한 용인데! 저 눈에 진짜 시선을 붙드는 마력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나마 다행인 건, 이어지는 말이 여성의 잡념과는 아예 무관한 내용이었다는 거다. 호문클루스와 골렘의 완성은 쉽단다. 진짜? 그게?! 인간들에게는 신의 영역을 범하는 무모한 짓으로 여겨질(실제로 시도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했나? 어쩐지 골이 띵해져 여성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하기야 손 한 번 튕기면 마법 기사들도 뚝딱인 용한테는 쉽겠네. 내로라 하는 성직자들이 갖은 노력을 쏟고도 존재를 제대로 입증하지는 못한 절대신보다 이 용을 신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마저 들어, 잡념을 털듯이 머리를 두들겼다. 이런 신성 모독적인 발상, 어디서 들켰다간 화형당하기 딱 좋다.

그래도 흑룡이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는 와닿았다. 신이 아닌가 싶은 능력을 지녔어도 미래까지는 모르나 보다. (하긴 미래를 알았다면 이곳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부터 이미 알고 있겠다.) 그렇다면 설령 흑룡이 언급한 1퍼센트의 차이조차 없이 완전히 똑같은 존재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존재가 훗날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을 거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비슷하긴 해도 다른 점도 적지 않듯이, 미래의 용이 현재와는 다른 성향을 지닐 가능성도 0은 아닐 테니까. 자신이 관여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어서 생기는 불확실성을 우려하는구나. 혹시 지금 만들어서 흑룡이 바라는 바를 꾸준히 주입시키면 좀 나을까? 잠시 궁리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이건 미래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 말을 얹어서는 안 될 영역 같았다.

머릿속을 갈무리하는데 잔에 다시 와인이 찼다. 순수한 호의가 담겼음은 알고도 남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영을 의식하고는 주제 파악을 하기로 했다. 술은... 인제 안 먹을래. 아니, 못 먹는다. 아무리 암벽 등반을 하고 빈속에 원샷을 했어도 그렇지, 와인 한 잔에 맛이 갈 정도면 아예 마시질 말아야 되는 거다. 그때 흑룡의 눈매가 부드럽게 실그러지며 그 마성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 눈을 가리기라도 해야 하나 싶어질 찰나, 그 난처함이 거짓말처럼 날아가는 제안이 이어졌다. 잘못 들었나? 애초에 종이 다르니 마음에 든다는 게 연심(戀心)과 무관하다는 거야 굳이 언급하는 게 더 어색할 정도로 명백하겠지만, 요람에 대한 여성의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해 준 것도 알겠다지만, 일? 여기서?! 내가?!?

얼떨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용은 노동력을 얻기 위해 금전을 지불하는 일 아닌가. 용이 인간한테 금전을 지불하겠다고 한 건가, 지금? 아니, 그 이전에 미래를 모르는 것 빼고는 뭐든지 할 수 있고 심부름꾼도 내키는 대로 만들 수 있으면서 고용? 솔직히 여성에게는 나쁠 게 없다시피 한 제안이었다. 원래는 사비를 들여 용의 생태와 습성을 조사할 계획이었는데, 도리어 돈을 벌면서 용을 관찰할 수 있다? 게다가 용이 구축 중인 사상 최대의 대서고도 기록할 만한 가치는 차고 넘치고, 잘하면 용들의 문자까지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다로스 제국사>를 필사해 두면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왕실 서고에도 있을까 말까인 책의 내용을 외워서 썼다고 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여성이 얻을 수 있는 건 한가득인 데에 비해 흑룡이 얻을 수 있는 건 불투명해 보였다. 심지어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도 감이 안 온다. 그러면 돈을(혹은 용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보석을) 받겠대도 시원찮을 텐데 도리어 돈을 주겠다고? 눈앞의 잔이 그대로 차 있지 않았다면 여성은 또 술을 마셔 버렸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데 작은 영이 환호성과 함께 사과를 답삭 안았다. 이어 영은 고맙다는 듯 여성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여성의 주변을 뱅뱅 돌더니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도 같고 놀란 것도 같은 기분으로 여성은 영이 입맞춤한 자리를 어루만졌다. 다 같이 먹던 거 건네만 준 건데, 낯가림이 없구나. 그런데 흑룡이 도리어 놀랐다는 듯이 정령은 남이 주는 물건을 꺼린다며 적성 검사 같은 걸 받아 봤냔다. 그런 것도 있었나? 곰곰 생각해 보니 마법 재능을 지닌 학생들은 영적인 능력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고 들은 것도 같다. 그러나 마법에는 자질이 없다시피 한 여성에게는 완전히 딴 세상 얘기였다.

"아니요. 영을 직접 본 것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원래 이 테이블에 있던 사과라 경계를 덜한 거 아닐까요?"

어쨌거나, 제 몸만 한 사과를 맹렬히 먹는 영은 깜찍했다. 술 깨워 줄 때도 귀엽더니. 용은 다른 개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들어서 용의 거처는 적적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여긴 인간들의 가정 못지않게 따뜻한 분위기다. 그 덕에 긴장이 풀린 걸까? 상상 밖의 제안에 어떻게 답할지도 조금씩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심부름꾼이라면 용님이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고, 대화 상대라면 인간 사회만 뒤져도 저보다 빼어난 사람이 숱하니까요. 그래도 제게는 좋은 기회라 거절할 염치까지는 솔직히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1달 뒤에도 지금과 같은 의향이시라면 그때 다시 제안해 주시겠습니까? 그 사이에 맡기시는 일은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카다로스 제국사>를 필사하도록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맡기려는지는 몰라도 1달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겠지. 결국엔 후자여서 흑룡의 마음이 바뀌더라도 그 사이 흑룡과 용족에 관한 정보를 얻고 <카다로스 제국사> 필사본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성과가 될 거다. 원래도 1달은 이 산에 머물 예정이었으니 일정도 문제없다. 흑룡이 받아들여 줘야 가능한 얘기지만. 여성은 흑룡을 응시하며 답을 기다렸다.


//쓰다 보니 길어지고 늦어지고 난리네요8ㅁ8 읽다 기 빨리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_.)...
맛있는 밥과 왕족 안 부러운 온천욕이 보장된 평생 직장이라,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저는 졌어요XO
쪼꼬미 운디네 >>114에서도 커엽더니 귀염뽀짝한 데가 있네요:)
그런데 남기신 테마곡은 제가 못 찾았습니다8ㅁ8...제목 알려 주시면 검색해서 들어 볼게요!

132 이름 없음 (pRpjNpN.fo)

2023-01-18 (水) 01:18:13


>>131

"고작 그 정도가지고 정령들이 이정도로 친밀감을 가지는건 극히 드문일이야. 그대들 인간 말로는, '0퍼센트에 수렴한다.'라고 할 수 있지. 모든 일에는 항상 원인과 결과가 있다지? 그대는 한번 정확히 자신에 대해 직관 하는 것이 좋을거 같다고 생각한다만...."

그가 버릇마냥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재차 열었다. 확실히 희귀했다. 자신 또한 정령왕들과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종족을 생각한다면 아주 어려운 일만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지 않은가, 실제로 다른 피가 섞였다고 하기에는 다른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자신이 직접 세부 조사를 해보면 된다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사안을 개인의 허락 없이는 진행하고 싶지 않은게 자신의 진실한 속마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어린 물의 정령을 따라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각종 정령들이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한없이 맑은 눈들이 그녀를 경계심없이 바라보고 어느새 쫄래쫄래 다가와 그녀를 올려다 보기 시작한다. 조그마한 난쟁이 같은 노움, 작은 새끼 도마뱀 같은 샐러맨더, 운디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딘지 장난기 가득한 실프, 그 외에 각종 여러 종류의 정령들이 어느새인가 그녀의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대가족같은 모습에, 그는 신기함 반, 인자함 반이 담긴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말이 고용이지, 동업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네. 물론 금전 뿐만이 아닌 여러가지 방면으로 지원을 예상중이니.... 일단은 자네의 제안에 수락을 더하며 이것을 넘겨주지."

그가 천천히 고서를 내밈과 동시에 자그마한 명판 하나를 책 위에 올려두었다. 백금의 판 위로 금으로 하나하나 새겨둔 여러가지 마법진들은 한눈에 봐도 고급지게 보이는 물건이었다. 어느새 식사를 어느정도 끝마쳤다는 것일까, 용은 어느새 여성형 갑주의 리빙아머가 따라주는 홍차를 한모금 마시며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긋한 내음, 속 안으로 퍼지는 따스한 기운, 이것 때문에 인간들은 차를 매번 마시는구나 싶다. 인간의 문화 따위 배워봤자 어디 쓰냐는 것이 동족들의 입버릇이었지만, 그 인간 문화에 가장 많이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은 다름아닌 우리 용족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린뒤 한모금 들이키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책 한권만으로는 부족하겠지. 그건 요람의 출입증이자, 허가증이라고 해두겠네."

그가 조용히 한쪽는만 반개한채 그녀를 장난스레 바라본다. 사실 그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저 슬슬 자신도 나가봐야 할 일들이 점점 많아질 수 있으니 이 요람의 부관리자겸 지금 그대로 진행하던 연구를 계속 하면서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의견을 내고 피드백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은 다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인물이 해도 된다고는 하지만, 역으로 그녀가 자신의 마음에 들었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즉 다른 인물들이었다면 진즉에 축객령을 냈을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그녀가 자신의 가능성을 얼마나 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기해도 좋네. 그대가, 나의 제안을 거절하는게 빠를지, 아니면 내가 의견을 철회하는 것이 빠를지 말일세. 역으로 나도 하나 제안하겠네. 1달 뒤, 내가 그대에게 제안하러 오겠네. 그 때 그 명판을 나에게 건넬지, 아니면 그대가 가질지 정하는 것이야."

속으로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안을 수락하기를, 그리고 자신과 함께 이 요람을 책임질 제 1 사서겸 관리인이 되기를 말이다. 그녀는 그녀 본인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당장 정령들에게 저렇게 사랑받는 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그녀의 가치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그녀 자신은 그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당장 용이 바라본 그녀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는 돼지들 어금니에 겨우 간당간당하게 걸려진 '흑진주 반지'였다. 주인도 제대로 없는 물건이라면 그 가치를 아는 존재가 써야됨이 바람직하지 아니한가.

"어떤가? 수락해보겠나?"
─언니, 여기서 지내는거야?
─큐르르....
─같이 더 노는거지?

그의 질문과 동시에 정령들의 소란스러움이 배가된다. 사실 그로서는 가볍게 말리고 싶었지만, 저렇게 정령들이 신나하는 것도 볼만한 장면이었으니 가만히 놔두는 걸로 답변을 기다리며, 리빙아머에게 조용히 그녀의 와인잔을 치우고 우유를 넣은 홍차에 각설탕 몇개를 같이 대접해 주라는 명령을 내린뒤 그 따스한 장면을 지켜보았다.

//특전 : 아가씨도 호문클루스로 여기 박?제 된다고요?
참고로 말이 대학원생이지 원하는 연구 마음대로 해도 되고, 성과 안나온다고 난리도 피우지 않습니다! 써놓고 보니 저도 부럽네요 젠장
그렇게 운디네를 비롯한 각종 정령들에게 관심받게된 아가씨올씨다.... 정령 얼라들의 야단법석 공격!! 효과는 읍읍
여담으로 곡은 james paget의 possibilities입니다, 휴식 시간 끝나서 올라가는 것만 보고 껐더니 결국은 안올라 갔나 보네요 ㅂㄷㅂㄷ 혹시 모르니 한번 더 링크로 올려봅니다!
추가로 tiberian son의 the devil's spear도 포함되요! 전자는 그가 탐구하고 명상하는 분위기라면, 후자는 연구하면서 그가 인간들에게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간찬가가 극도로 표현된 거라 보시면 됩니다!

133 이름 없음 (NcndAMX4r2)

2023-01-18 (水) 20:12:26

>>132
흑룡은 정령에 대한 여성의 추측을 부정하며 여성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길 권했지만, 도무지 건덕지가 없었다. 마법 재능이 없는 건 확실했고,(있었다면 하늘을 날아서 통학하거나 한겨울의 빙판길을 녹이는 식으로 쏠쏠히 써먹었을 텐데. 오늘도 암벽을 타는 대신 마법을 쓰지 않았을까?)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영적 존재라고는 못 봤다. 그렇다고 가문에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일화조차 전혀 없었다. 흑룡의 말마따나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것이나, 규명해 내지 못한 원인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여기 오기 전엔 정령 비슷한 존재도 본 적이 없고, 저희 집안도 대대로 농장을 일구어 왔을 뿐 정령과는 접점이 없어서요." 그래도 단서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는 못한 듯 여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곱슬곱슬한 금발을 꼬았다 폈다 하며 덧붙였다. "제가 매사 진지하게 반응하니까 어린아이나 동물이 잘 따르는 것 같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제더라? 점심으로 흰 빵을 먹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오기에 조금 떼어 줬더니, 그 고양이가 동료들을 떼로 데려와 그 빵을 통째로 내주고 만 적이 있었다. 그러고 돌아가나 했는데 또다시 찾아오는 통에 주머니를 탈탈 털어 가며 먹을 거 없다고 떽떽거렸었지. 그때 동기가 넌 무슨 고양이를 사람처럼 납득시키려고 하냐고 웃어 젖히고는 그런 말을 했었다. 정말로 짐작 가는 게 없다 보니 꺼내 본 소리지만, 이런 게 과연 정령과도 상관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온갖 정령들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여성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평생 볼 정령을 오늘 다 보는 거 같네. 저쪽도 인간을 직접 보긴 처음인 걸까? 궁금증이 이는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시선이 집중되니 눈 둘 데를 모르겠다. 여성은 발개져 가는 얼굴을 두 손으로 반나마 가리고는 파란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때 흑룡이 다시금 귀가 의심스러워지는 소릴 꺼냈다. 동업?? 내가 기적적으로 일을 잘해서 여기 평생 머문다 해도, 용에게 그 시간은 아주 잠깐 아닌가?

"..저, 아시겠지만, 인간은 백 년도 살기 힘듭니다. 그런데 동업이라니요? 여길 평생 관리하실 거 아닙니까?"

'저만큼만 사시고 마실 거 아니잖아요?!'라는 소리까지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켰다. 수천 년을 사는 용에겐 악담도 그런 악담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진짜 무슨 생각이지? 일그러진 표정에 드러났을 심정이 흑룡에게 읽힐까 봐 여성은 두 손으로 온 얼굴을 가렸다. 그리하여 눈에 뵈는 게 없어지자 (불가해한 상황은 그대로지만) 마음이 가라앉으며 차근차근 머리가 굴러갔다. 아까 용이 여러 종족의 호문클루스를 만들겠다고 했으니, 아마 인간형도 만들겠지? 혹시 그걸 날 본따서 만들려는 걸까?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흑룡의 목적이라면 확실히 그도 얻는 게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기왕 인간형을 만든다면 굳이 자신을 본뜰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인간 중엔, 아니 인간 전체까지 갈 것도 없이 연구원 동기들만 보아도 자신보다 훨씬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이 수두룩하니까. (왕립 연구원인 만큼 여성도 자신의 지성이 여느 인간보다 낫다는 자부심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흑룡이 만들 호문클루스는, 모르긴 해도 요람을 안내하는 인간형 대표 비슷한 존재일 것 같았기에, 보다 유능한 인간을 본따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얼굴까지 가렸으면 아마 모르려나?) 흑룡은 책은 물론 요람의 출입증까지 주겠다는 소리까지 태연스레 했다. 미치겠네.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고 보니, <카다로스 제국사> 위에 한눈에도 신비스러워 보이는 문양을 금으로 새겨 놓은 백금판이 놓여 있었다. 철판 깔고 받아도 될지 재고해 보라고 권해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흑룡은 어쩐지 즐겁게까지 느껴지는 어조로 자신의 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라며 출입증을 돌려줄지 말지는 1달 뒤에 정해 보라고 제안했다. 1%의 차이로 인한 불확실성도 불안해하던 용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건 어째서일까?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정령들이 제각기 여기서 지낼 거냐고(인간의 언어로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었지만) 물어 왔다. 신기하기도 하지, 초면이고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여 주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 기대에 찬 눈들을 보고 있자니 까짓거 한번 해 보자는 심정이 되었다. 1달이니까. 별로면 관두겠지. 인간의 평생도 용에겐 잠깐인데 1달쯤이야, 시간 낭비랄 것도 없을 거다. 무엇보다,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다. 여성은 마법 기사가 잔을 치우고 차를 내오는 동안 잠자코 있다가, 기사가 물러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흑룡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1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특전 때문에 오히려 더 망설인 소심이 연구원 씨였네요ㅎㅎ 그랬다가 정령들의 폭발적인 호응에 대범(??)해졌습니다ㅋㅋ 막레 분위기인데 이대로 마무리해도 어울릴 것 같고, 내키시면 용님의 반응으로 마무리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링크해 주신 노래 좋네요 오늘 종일 들었습니다:) 멜로디가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라 용님한테 잘 어울리는 곡 같습니다 the devil's spear라는 곡도 뭐랄까 끝없이 비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용님이 인간들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했고요
용님을 보다 보니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줘서 벌 받았다는 프로메테우스가 생각났는데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개입하면 처벌을 받는다고 알려 주셔서 더 그런 듯합니다ㅎ) 그래서 메타적으로 또 궁금해진 게, 요람을 통해 용족 고유의 지식이 타 종족에게 전해질 경우 용님이 무슨 불이익을 받게 되는 건 아닌가요?

134 이름 없음 (UmJ0MZL2SU)

2023-01-18 (水) 23:18:20

>>126

과연 지금 상황은 누가 누구에게 사과를 해야만 하는걸까. 물론 사람을 다짜고짜 도둑으로 몬 것도 잘못은 맞다.
하지만 누군가의 척추에 질량을 그대로 때려박았다면 아마 그쪽의 잘못이 더 중한게 아닐까?
잘잘못을 따질만한 것도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역시 그랬나..."

상당히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에게 과연 내가 뭘 해줘야만 할까?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걸 일깨워주기엔 나도 이미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여전히 그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살아갈 뿐인, 한심한 소시민일 뿐이다.

"그럼 일단 내 안경부터 좀 줄래? 내가 눈이 많이 안좋거든."

그래서 지금 눈앞의 너도 똑바로 안 보여, 라고 덧붙이며 손을 내민다.
설마 금방이라도 세상을 하직하려 드는 인물이 남의 안경을 훔쳐서 달아날 양아치같은 짓을 하진 않겠지?
부디 그래야만 한다. 이미 자기 잘못을 모르는 양아치인건 체감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135 이름 없음 (wMwjmxH7FU)

2023-01-19 (거의 끝나감) 00:28:48

>>133

"흐음......"

여인의 당연스러운 반응에 그는 결국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연구자 특유의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깊게 고민에 잠긴 듯한 그의 모습에서는 마치 세상 만물을 뒤지겠다는 듯한 강렬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고 그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지식이 흘러들어가고 다시 흘러나가며 여러가지를 톱니바퀴 짜맞추듯 흘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첫 톱니바퀴를 끼우려던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금 손님 대접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상념에서 순식간에 벗어나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이내 그녀에게 건넨 출입증을 보았다.

"뭐 여러가지로 마법처리를 해놓아서, 그거 아마 그대밖에 못쓸걸세, 혹여나 남에게 강제로 양도하거나 도둑을 맞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야."

그렇게 덧붙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녀에게 말을 덧붙인다. 애시당초 여러가지를 떠져본다면 아마 그녀보다도 더 나은 선택지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로서의 감이, 그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이번 결정이 아마 이번 요람 계획의 가장 큰 첫 단추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한 직감은 전혀 틀리지 않아왔고 지금까지도 자신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중 하나였다.
정령들의 행동도 그의 결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정령들은 본디 마음이 깨끗한 이들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저렇게 친근한건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령들의 시선 만큼은 자신의 그것보다도 맑고 투명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이 아이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앞으로 요람을 책임질 한 팔을 자신의 곁에 두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 결정이야 말로 분명히....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찻잔을 기울였고, 이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여인이 생각한 것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내기에 응한 것으로 알겠네, 자네가 이기면 이번 제안을 없던 것으로 하고 내가 이기면 자네는 이 요람에서 지내는 것이네."

아마 여인은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딱히 인간세상에서 지내는 일을 제한한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있어서 좋은 조건만 내세운 셈이니까, 물론 그라고 해서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니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라 속으로 생각 하면서 그는 정령들의 환호를 받는 여인의 모습에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제 1 서고 관리자 겸 수석 비서, 오늘부터 견습 1달간 잘 부탁하겠네."

그 빙긋 웃어보인 미소 속에서 장난기와 절대 지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보인 것은 절대로 착각이 아닐 것이리라.

//그래서 마무리 지어드렸습니다!!
메타 발언으로 질문을 답변 드리자면 위에서 성향중에 요르문간드로 답변이 가능합니다. 애시당초 그런 구조를 제대로 들은 기억도 없거니와 만에 하나 누가 그거가지고 태클을 건다면 아마 아주 당당하게 '몰?루 내가 왜 그거 들어줘야 함? 지식은 나눠서 커지라고 있는거지 스투마냥 뭉뚱그려놓고 끓여 먹으라고 있는거 아님.'이라고 답변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애시당초 그런거 신경 안썼으면 요람도 안 만들었을꺼고 만들더라도 이렇게 대책없이 크게 만들지 않았을거 같습니다!!
괜히 머리 복잡하게 해드렸던건 아닐지 걱정 반인데요! 재밌으셨나요? 재밌으셨어야 할텐데!! 8□8

136 이름 없음 (ARgZoxxkes)

2023-01-19 (거의 끝나감) 00:54:56

>>135

//마무리 레스와 답변 감사합니다! 세상에 개입하면 벌을 받지만 지식을 유출한다고 벌을 받지는 않는 거군요 인간들한테 불 줬다가 간 뜯겼다는 프로메테우스와는 확실히 다르네요ㅎ
묻힌 줄 알았는데 이어져서 기뻤고 내용도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글 쓰는 게 느려서 칼답까지는 못 드렸습니다만 답텀 나름 준수하지 않았나요?ㅋ 답텀은 그짓말을 하지 않습니다ㅎㅎ
그런 의미에서 용님 오너님도 즐겨 주신 거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즐참치하시길!!

137 이름 없음 (Pz1Xs2EGOs)

2023-01-24 (FIRE!) 00:47:03

>>121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전 공통점이 꽤 많다고 생각했는데도요."

뭐,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흘끔 살펴본 당신의 얼굴에는 선명하진 않더라도 분명 미소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자리해 있었다. 제 말의 어디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일까?

당신의 제안에 그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마치,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는 거죠?'하고 묻듯이 당신과 밴드부 공연 티켓을 여러 번 번갈아 보았다. 흡사 태양이 역행하고 있다는 소릴 들은 사람 같다. 어쩌면 당연하다. 우주에 가본 적 없으며, 가볼 계획조차 없다 이야기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해 봤자 몇 분이나 지났겠지. 그런데 당신은 그에 대고, 그렇다면 저를 따라 우주에 한 번 와보라 손 내밀고 있었다. 황당무계한 소릴 하고 있었다. 골치가 아플 정도다. 그는 당신과 티켓을 한 번 더 번갈아 본다. 흘러 내려온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생각한다.

…더 골치 아픈 사실은, 그 황당한 말에 제가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게, 내가 당신은 태양을 닮았다고 말했잖아. 그는 속으로 한탄하듯 독백한다. 스스로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 것도, 사람을 매혹하고 마는 것도 태양을 닮았다니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네요."

그리고 난 그래서 당신같은 싫어. 한숨을 참지 못하고 내쉬는 사람처럼 그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글쎄요, 그러니까…"

목소리 끝이 흐려진다. 영 자신감 없는 사람처럼 그는 눈동자를 굴렸다. 입술을 혀로 축인 후에야 말을 이어 한다.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역시 겁부터 덜컥 나는데 말이에요."

그는 옅게 미소 지었다. 애써 긴장을 풀려 하는 사람처럼 조금은 경직되어 있다.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은 역시 싫다. 옆에 있으면 속절없이 휘말리게 되고 마니까. 폭풍 옆의 나비처럼 어느새 휩쓸리게 되고 말아서.

"뭐, 음, 그래도 한 번쯤이라면…싶기도 하네요. 무섭긴 매한가지지만요. 탑승자 대신 참여-관찰자 정도의 위치는 안 되냐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싫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신이 건넨 티켓을 건네받았다. 잠시 티켓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던 그는 한마디를 더한다.

"역시 따진다면 당신은 선장이 맞는 것 같아요. 이런 식의 제안을 건네는 건 아무래도 선장의 몫이잖아요?"

겁난다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경쾌한 목소리다.


/먼저 답레가 정말 늦어버려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릴게요. 사정을 자세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번 구정 전후로 일이 많아 바빴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늦는다고 글이라도 하나 남겨놓을 걸 그랬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38 이름 없음 (opjSL5OHvo)

2023-01-30 (모두 수고..) 09:34:45

>>137
/안녕하세요, 저야말로 답이 늦어 죄송해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죄송한 말이지만, 상황극은 여기서 종료해도 될까요? 🥲 물론 핑퐁하면서 정말 다음이 기대되고 즐거웠지만.... 현생에 쥐어짜인 머리가 굳어서인지 더이상 아이디어도 생각나지 않고 또 간단하게 캐릭터를 짜다 보니 더 나올 것이 없다 판단 되어서요 🥹

139 이름 없음 (vmecnZvpf6)

2023-02-02 (거의 끝나감) 23:10:49

>>138 물론 괜찮죠. 충분히 이해가는 일인 걸요. 저도 오랜만에 핑퐁하면서 무척 즐거웠어요. 케시와 같이 멋진 친구와 놀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고요. 행복한 2023년 보내시기를 바라요, 케시주!

140 이름 없음 (LM22OvUY.I)

2023-02-09 (거의 끝나감) 21:13:53

"여기가 정상이구나."

한 발 앞으로 내딛자, 거친 바람이 일거에 잦아들었다. 내내 등반을 방해하던 폭설은 바람이 사라지자 포근한 함박눈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었다. 그 고요한 무풍지대 안으로, 좁지만 평탄한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까지의 험준한 등반로를 무색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무수한 등반자들의 시신을 품에 묻은 대륙 최고봉의 정상이 이렇게도 평범하고 안온한 모습이라는 아이러니가 지친 여행자를 조금은 허탈하게 만든 모양이다.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은 그녀는, 그대로 앉아서 거친 산행에 너덜너덜해진 코트를 갈무리하며 조금이나마 숨을 골랐다. 이미 오를 경사도, 겪을 고난도 남지 않았지만, 평지를 느긋하게 걷는 평범한 산책마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여행자는 휴식에 굶주려 있었다.

그대로 앉아 있으려니 당분간은 일어날 생각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등산루트 중이었더라면 그 풀려버리는 긴장이 즉각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스위치로 작용했을 터이지만, 지금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다만 체온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품에서 조금의 건조된 식량을 꺼내어 입에 넣은 채로, 여행자는 보다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문득 등에 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툭 치고서는 중얼거렸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있으면 너를 살릴 수 있어."

마치 누군가에게 대화를 걸듯이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순간 간절함이 비쳤다.

"네가 깨어나면, 해주고픈 이야기가 내게는 잔뜩 있는 걸.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계속 중얼거리던 여행자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던 직전까지에 비하면 기이할 정도로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다시 생겨났는지, 여행자는 곧장 상자를 고쳐 매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곧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난 여행자는 힘찬 보폭으로 설경 안으로 발을 들이밀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세계의 정상에 숨은 마법사라면 반드시 널 살릴 수 있을 테니까."


/맥커터만 아니면 어떤 이야기든 좋아

141 이름 없음 (4U9xeElEvw)

2023-02-12 (내일 월요일) 23:40:53

제자야, 정말로 너니? 네가 돌아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치도 못했단다. (안대로 눈을 가린, 소복 차림의 남성이 반가운 듯이 문지방에 서서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142 이름 없음 (WD41nXytsI)

2023-02-12 (내일 월요일) 23:47:09

>>141
(제자라고 불린 존재는 대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다, 겨우 그리 말했다.) ...예. 스승님. 불초 제자가 돌아왔습니다.

143 이름 없음 (4U9xeElEvw)

2023-02-12 (내일 월요일) 23:52:11

>>142
아니다. 나는 진정 온 마음으로 네가 돌아온 것에 대해 기쁨을 느끼고 있단다. (시린 겨울숲 바람에 섞여 날아간 옅은 숨 속에는 웃음기와 울음기가 절묘히 섞여있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손을 잡아다오.

144 이름 없음 (QwLUTxLVnk)

2023-02-13 (모두 수고..) 00:20:02

>>143
(스승의 목소리에 담긴 복잡미묘한 울림을 알아들었는지, 그 존재는 한순간 쓰라린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조용히 깨물었다. 가까이 오라는 스스승의 부름에도 걸음은 선뜻 나서지 못 하고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스승님. (그는 한 걸음도 떼지 못 한 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말하고 고개만 숙였다.)

145 이름 없음 (0T1TGbBb3Y)

2023-02-13 (모두 수고..) 01:53:09

있잖아, 사실 나는 죽고 싶어.

가녀린 몸이 난간에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무언가라도 움켜잡을 듯 뻗은 팔, 바람에 스치듯 휘날리는 머리칼, 그러나 어느 무엇도 지나치게 평온해 보이는 얼굴에 흠집내지는 못 하고. 눈동자가 누군가를 향했다. 웃었다. 있잖아, 언젠가 나랑 같이 죽어 줄래.

146 이름 없음 (VT/cgtLUQw)

2023-02-13 (모두 수고..) 10:43:44

>>145

" 또 쓸모없는 얘기를. "

눈쌀을 찌푸린다. 이렇게 같이 있다보면 대뜸 이상한 소리를 하는 녀석에게 나는 오늘도 똑같은 대답을 건네주었다. 뻗은 팔의 손목을 약하게 잡아서 말없이 당겨준다. 가녀린 몸과 같이 손목도 너무나도 가늘다.

" 그렇게 죽고싶으면 나 죽고나서 죽어. "

그때되면 나 말고 이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허나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은 언제든 떠나갈 수 있을거란 미약한 불안감을 자극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147 이름 없음 (ppUbGyjPj.)

2023-02-13 (모두 수고..) 15:50:38

>>146

의외로 마른 몸은 저항 없이 가볍게 이끌리며 난간에서 멀어지고. 그래, 언제나와 똑같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네가 대답하고, 그러면 난간에서 내려오고.
얼굴을 마주한다. 죽고 싶으면 자신이 죽은 뒤에 죽으라고. 예의 평온한 얼굴로 멀뚱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 당신을 관찰하는 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럼, 그 때까지 같이 있어주는 거야?"

이번에는 눈을 접어 웃었다. 상냥하구나. 제멋대로인 판단을 들이밀며 장난스럽게.

148 이름 없음 (bkeQ/fk3e6)

2023-02-13 (모두 수고..) 16:07:46

>>147

그 가녀린 몸이 혹여나 난간에서 내려오다 넘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쩜 저런 얼굴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조금은 쌀쌀한 바람에 너의 어깨에 내가 입고있던 외투를 벗어서 걸쳐주며 말한다.

" 어. 대신 너가 질려서 가라고해도 안갈꺼니까 그렇게 알아. "

웃는 모습에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얘기한다. 평온한 표정에서 지어내는 저렇게 무해한 웃음이라니 보는 사람마저 녹아드는듯 하다.

" 그리고 밖에 나올꺼면 따뜻하게 나오라고 했잖아. "

햇빛이 따뜻해보여도 아직 바람은 차다고, 작게 잔소리를 해본다.

149 이름 없음 (ppUbGyjPj.)

2023-02-13 (모두 수고..) 16:26:27

>>148

아하핫! 자그락거리는 햇살같은 웃음소리, 시선을 피하는 당신의 얼굴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는다. 그래, 너에게서 이런 얼굴, 이런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게 좋았다. 짓궂은 마음은 몰래 숨기고.

"햇빛이 이렇게 좋은데도."

퍽 아쉬운 얼굴. 과연, 아직 쌀쌀한 한기가 다 가시지 않은 날들이었다. 초봄. 아무것도 없는 대지에 곧 생명이 약동할.
난 바보라서 감기 잘 안 걸리는데? 설득력 없는 변명 따위를 늘어놓으며, 그러나 어깨에 걸린 당신의 외투는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끄트머리를 그러쥐고.

"소풍 가자."

퍽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꽃팔찌 만들고 싶어.

150 이름 없음 (bkeQ/fk3e6)

2023-02-13 (모두 수고..) 18:35:14

>>149

꽃봉오리가 꽃을 피우듯 터져나오는 너의 웃음소리에 나는 결국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울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일부러 짖궂게 행동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미소가 아름답기에 어쩔 수 없었다.

" 너랑 같이 있는 내가 걸려. "

쌀쌀하다고 해서 외투를 챙겨왔지만 정작 그 외투는 너의 어깨에 걸려있다. 그래도 흘러내리지 않게 꼭 잡고 있는 너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굳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고서, 비어있는 다른 쪽 손을 살며시 잡으려하며 말했다.

" 도시락은 너가 싸주는거야? "

소풍이라, 그런 따뜻한 단어를 써본지도 꽤나 오래 되었다. 어릴적의 소풍이란 듣기만 해도 설레서 전날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는데. 너가 소풍이라는 단어를 꺼내니 그때처럼 다시금 설레오는 이 감정은 어릴적의 그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 그래, 가자. "

도시락은 그저 농담일뿐이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151 이름 없음 (lPgyUVrT4g)

2023-02-13 (모두 수고..) 21:21:52

>>140 "잠시 멈춰주시겠습니까. 이 곳은 사유지라서 말입니다."

나지막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기색이 어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여행자를 막아서듯 울렸다. 한 남성이 기척도 없이, 가깝지는 않으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30대 초반 쯤 되어보이는 남성의 체격은 여행자보다는 조금 큰 정도였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듯한 회갈색 털옷으로 온 몸을 감싼 데다, 상의에 달린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있어, 드러난 것은 가무잡잡한 피부와 다부지고 각진 턱선, 길고 번듯한 코, 꾹 다물려 단호한 인상을 주는 입술 정도였다.

"저는 이 산 정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 곳에는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는지요."

후드 밖으로 드러난 남성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어투에서는 제 주거지를 방문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묻어났으나, 적의는 서려있지 않았다. 남성의 떡 벌어진 어깨 너머 눈 발 사이로, 지붕에 눈이 하얗게 오두막이 한 채 보였다. 그가 사는 집인 모양이었다.

152 이름 없음 (QLaLYylaIo)

2023-02-13 (모두 수고..) 22:06:53

>>150

넌 너무 상냥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차가웠던 손 끝이 온기로 물들자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을 뿐이다. 가볍게 잡힌 손을 그러모아 꾹 주먹쥐었다. 새삼 느껴지는 손 크기라던가, 촉감이라던가, 기묘하게 낯선 것. 이상하네.

"자신 있어?"

내 요리 실력 믿어? 작은 키득거림. 원한다면 싸 주지 못 할 것도 없었다. 투박하게 생긴 유부초밥이나 주먹밥 같은 거라도 괜찮다면. 그런데,

"나는 지금, 가고 싶은 거였는데."

어때? 어디로든. 잡혀있던 손을 풀어 너의 손을 마주잡고,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이끌면서.

153 이름 없음 (smpIYXrrBE)

2023-02-13 (모두 수고..) 23:37:50

>>152

잡은 네 손에 작은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도 쌀쌀한 날씨를 증명하듯 너의 손도 냉기를 머금어 차갑게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네 손을 살살 쓸어주고 있을때 자신 있냐는 물음이 들려왔다.

" 못 먹을 수준은 아니잖아? "

거창한걸 원하는 것도 아니고 소풍이란 그저 너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니까. 네 손으로 꾹꾹 눌러 만든 주먹밥도 분명히 맛있을테니까. 하지만 이어진 너의 말에 나는 결국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 너가 가고싶은 곳이라면 어디던. "

그렇게 마주잡은 손을 너가 이끌고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스르르 이끌렸다. 그야 너가 어디에 있어도 내가 함께 있을테니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말이다.

" 차도 가져왔으니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갈 수 있어. "

언제든 말만 하면 데려다줄 수 있어.

154 이름 없음 (cOQHqwdNb.)

2023-02-14 (FIRE!) 00:15:17

>>153

옅은 미소에 화답하듯 이끄는 발걸음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춤추듯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 차분한 목소리로 재잘거린다. 꽃이나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이왕이면 볕이 잘 드는 곳이 좋을 것 같아. 잘 아는 장소가 있어.

어느새 건물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의 인영, 앞서가는 손길은 익숙하게 어딘가로 당신을 안내하고. 눈을 감아, 내가 다 왔다고 하면 눈을 뜨는 거야. 알겠지. 마법이라도 거는 듯 한 속삭임으로 당신의 눈을 가리고서는.

발바닥에 밟히는 것은 딱딱한 콘크리트에서 어느새 푹신한 무언가로 바뀌어 가기 시작한다. 천천히, 천천히,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 도착하면.

"짠, 어서 와."

아무도 없었던 작은 들판,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은은한 꽃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내 비밀 장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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