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 달리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껏 당신이 보여준 모습을 객기와 증오심 하나로 깎아내릴 마음은 없었거니와, 아버지의 상태를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다시금 음료 한 모금을 목뒤로 넘겼다. 지옥, 지옥이라…….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내가 어쩔 수 없었노라 두둔할 생각은 없어. 아무리 레지스탕스를 뒤에서 돕다 들켜 처형됐다고 한들 그 당시의 일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망할 자식들 덕분에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됐는데 누가 안 꼽겠어. 아, 너무 불경했나."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렸다. 불현듯 제가 자신에게 틈이 날 때마다 속삭이던 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만한 것이라 한들 살려두어야 한다. 그들이 죽는 것은 너무 가벼운 처사가 아니더냐. 단숨에 죽이는 건 본디 아랫것이나 하는 일이다. 이스마엘 또한 동의하는 이야기였으나 속내는 제법 달랐다.
"그래도 죽일 생각은 없어."
아무렴 죽어버리면 세상이 바뀌는 걸 눈에 담고 스스로 무너지지 못할 테니 아까웁지 않은가. 죽는다 한들 처절하게 눈에 담고 끝까지 과거의 영광을 담다 무너져내려라. 끝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걷어찰 영광을. 그게 이스마엘이 생각하는 그나마 괜찮은 처사의 복수였다. 캔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으나, 구겨질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죽일 생각은 없어."
아무렴 죽어버리면 세상이 바뀌는 걸 눈에 담고 스스로 무너지지 못할 테니 아까웁지 않은가. 죽는다 한들 처절하게 눈에 담고 끝까지 과거의 영광을 담다 무너져내려라. 끝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걷어찰 영광을. 그게 이스마엘이 생각하는 그나마 괜찮은 처사의 복수였다. 캔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으나, 구겨질 정도는 아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 좀 봐. 당신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캔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니. 이런 모순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날카로운 눈매도 유순해진다. 적어도 이곳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곳이며, 위협 없는 곳이니 앞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소곤소곤 비밀을 얘기하거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소리를 크게 내어 웃기도 하고,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근처에서 나는 좋은 냄새가 있다면 그곳에 이끌려 짧은 간식 시간을 가져보기도 하고, 우정 팔찌를 맞추기도 하며, 습격 걱정은 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누워 별을 보는 일 말이다. 슬럼의 사람들이 내심 꿈꾸던 자그마한 일상처럼.
다시금 등을 쓸듯 토닥여준다. 아이처럼 미소 지은 모습에 입꼬리가 조금 길게 호선을 유지했다. 눈치 살피고 배시시 웃는 것도 그렇고, 이어지는 얘기도 그렇고. 미소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 그런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했던 웃음과는 달리 말갛게 웃어버린다. "아, 세상에.. 도너티." 이곳에서 너와의 만남이 도넛으로 시작했고, 과거의 끝은 도넛이 됐다. 마치 링처럼 시작과 끝이 모여버렸지 않은가. 참으로 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잘 됐네. 나도 네가 만든 도넛이 먹어보고 싶었거든."
너는 도넛 그 자체니까.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좋아하는 것이니까, 분명 더 깊게 파고들고 심혈을 기울였겠지. 장난스러운 덧붙임과 달리 기대는 빈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인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야. 딸조차도 무마하려 들지 못하는 인물이라... 참 헬무트도 시대를 잘못 타고나긴 했구만. 우리 모두가 그렇겠지만. 모두에게 잔인한 시대다.
"워, 기어이 살려서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거나 뭐 그럴 생각이신가? 생각보다 엄청 손속이 심하구만! 그 노이즈 뒷편에는 이런 괴물이 있었다니."
외견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저 예쁘장한 얼굴의 뒷면에 있는 복수심과 증오는 지옥에서 막 기어올라왔다고 해도 믿겠어. 참 재미있는 녀석이다. 그래. 그렇지 않았으면 이런 데서 활약도 못 하고 있었겠지. 다만 그 괴물이 결국 이스마엘 케르스트너라는 하나의 '인물'을 잡아먹어버린다면... 누가 되었든 막아서야 할 지 모른다. 부디 그럴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만.
"니 마음에 드는 사람들 이 근방엔 쌔고 쌨잖아? 마음에 안 드는 놈이 하나정돈 있어 줘야지. 아, 괜찮아. 나 맘에 든다는 사람도 없으니까."
한마디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병주고 약주고 깐족대고 할거라는 뜻이다. 그러게 사람을 잘 보고 대했어야지. 부친에 대한 일종의 작별을 맞이하는 옆모습을 잠깐 보다, 캔에 든 음료를 쭉 들이킨다. 달착지근하다. 지금의 상황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달콤한 음료다. 뭐 상황이 쓰디쓴데, 음료라도 달아야지.
"슬슬 가봐야겠다.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줘야지. 연초 너무 많이 피우지 말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권총을 다시 가져가진 않았다. 잠시 동안만, 그의 묘비로 쓰였으면 했다.
>>674 확실히 기념일 선물은 경우에 따라 선호여부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름답고 실용적인 것으로 갑시다! 그러면 문제 해결이에요! 아무튼 레레시아는 뭔가 기분이 나빠질 것 같으면 자신이 먼저 자리를 비키는 성향이 확실히 강하다고 느껴요. 정말로. ㅋㅋㅋㅋㅋ 둥근 주머니. 끌어안고 자는 잠버릇이 있다고 했었지요. 아마! 아무튼 겨울적인 부분도 확실히 있다는거군요. 그래도 일단 제 생각에는 겨울이나 그런 쪽보다는 가을이 좀 더 어울리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문을 열긴 했지만 마중을 나가진 않았다. 평소 같으면 환히 웃기도 하고, 스스로가 웃음을 지었단 사실을 깨달아 수줍어져선 시선을 피하듯 환대해 줄 것이 자명함에도, 지금은 그런 기색 없이 손에 쥔 은색의 납작한 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쟁반이 탁자 위에 올라와 달그락대는 소리를 내고 쿠키를 보여줄 때 시선이 잠깐 흐르는 것 같았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식사라, 그때 이후로 뭔가 먹긴 했나? 글쎄, 부엌은 지나치게 깨끗하고, 쓰레기통 안은 에너지바 두어 봉지밖에 없다.
"그랬지요."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 다시금 입을 꾹 다문다. 대화를 청했던 건 자신이었고, 당신은 어차피 자신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문을 열고자 했을 것이다. 회피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저번처럼 무너질까 싶은 두려움 하나, 스스로에 대한 불신 하나, 지금 당장의……. 안 그럴 것 같더니만 F로 시작하는 단어를 홀로 씹어뱉는 소리가 선명하다.
"─."
이스마엘은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듯싶더니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손에서 굴리던 납작한 군번줄의 줄이 손가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절그럭대는 소리가 났다. 이내 고개를 돌려 당신을 마주한다. 제대로 잠들지 못함 역력함 피력하듯 눈 밑에 진 그늘도 그렇고, 평소의 야살스러운 듯 호쾌한 미소와 달리 차분한 표정도 그렇고. 평소와 달리 음울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저번처럼 손목을 괴롭히진 않은 것 같다.
"미안합니다. 거리를 좀 두고…… 대화하면 좋을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해버려서, 그게.. 그래서.. 사람을 앞에 두고도 신경을 못 썼군요."
아직 일어나진 못했다. 선뜻 다가가지 못함에 가까웠으며, 애써 미소 짓듯이 입술 꾹 다물다 입술 끝 말아올린다. 아, 그냥 없는 척 할걸.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마주하니 괜히 눈시울이 시큰하기 때문이다.
>>680 뀨... 커요미 레시와 일상을 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쓰다듬으로 만족해드리겠어요. >>681 크읏...! 정 구해지지 않는다면 내일 다시 깃발을 세울게요. 캡틴께서 잡아주신다면 기쁠겁니다앙...🥲 >>683 앗 (화가 풀린 뮬와와) 츄라면... 용서입니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 에델바이스에 속해 전쟁을 치르고, 프리덤의 멤버인 엘레인을 죽여버린 본인도 마찬가지 아니느냐며 어쩔 수가 없노라 비호할 수 있겠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존재했다. 이스마엘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느릿하게 감는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가? 지금부터 너희의 충성심을 보겠다. 단, 참여하지 않는다 해도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 너희는 저들과 달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나서라. 세븐스를 옹호하던 마을에서 주동자를 연행하던 날, 남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벌어진 학살. 이스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맘대로 생각해, 내가 누구 딸인데. 혹시 모르지? 사랑을 담아서 자유롭게 살라고 할지. 왜, 그런 말 있잖아. 원수를 사랑하라."
으, 하는 듯한 눈길이더니만 아예 고개를 하늘로 올려 시선을 피해버리기로 했다. 진짜 짜증 나는 사람이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속이 남아나질 않겠다. 그렇다고 해서 적으로 두겠노라 선언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똑같이 해버리면 되니까. 방금 생각한 것이 제법 그 나이 아이다움을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이 가겠노라 얘기할 적, 이스마엘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했다. 갈 거면 빨리 가라는 뜻이었겠지. 그렇게 한참을 허공만 쳐다보다, 시선을 내려 총신에 새겨진 흔적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갈 길 잃은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렀다.
사격술만 훈련해서는 실전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증명해낼 수 없다. 인류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는 스태미너. 그렇기에 전투를 가능한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둬야 하는 법. 특히나 내 경우에는 제대로 단련해두지 않으면 심폐기능이 진짜 끝장이 날 수 있기에, 단련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일단 산책이라도 하듯 가볍게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는데... 뭔가 눈치가 심상치 않다.
"...뭘 하는거지...?"
이후에 이어지는 폭발적인 발언들에 휘청, 하고 트레드밀에서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와중 겨우 중심을 잡았다. 어디...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줘야 하는걸까. 내게는 저걸 어떻게 다 교정할 수 있는 그런 능력도 자신도 없었다. 그저 실의에 빠짐을 표하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덮을 뿐.
"그... 무슨 훈련을 하려고 그러고 있었던건지 물어봐도 될까...?"
하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나는 이 당나귀 같은 소녀, 아니 소녀는 아닌가. 어찌되었든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언제나 말해도 모자라지 않은 말. 뮬은 바보. 바보는 뮬. 뮬은 답을 알고 있다. 레이먼드는 실의에 빠진 채 뮬에게 답을 구했고, 뮬은 답을 알고 있는 이상 답해줄 수 밖에 없다. 답을 안 하면 저 땀에 젖은 큰 어르신께서 노하실 것 같았으니까. 어른에게는 대답을 해줘야 예의에 맞다면서.
뮬은 만 20세다운 괘씸한 생각을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이거 말이지예~ 구르기 훈련입니더. 어디서 들었는데, 구르기 이게 참 사기기술이라카지 않겠습미꺼. 용암 위에 있어도 구르기만 야물딱지게 하면 절!대로 타죽지 않는다 했어예. 그래서 구르고 있으예."
뮬의 안경은 멍청해보이는 얼굴을 커버하는 중요한 소품인데, 그 안경은 구르기 중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저 매트 옆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얼굴이 얼마나 멍청해보였을지는 간단히 요약하겠다.
수도 없이 많은 위기의 상황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 위로 총탄이 날아들고, 땅에는 불이 붙고, 포탄이 터지며 세상을 뒤흔드는 전장. 그리고 그 중에서 홀로, 유유하게 굴러서 총알을 피하고 폭탄을 피하는 그런... 그런 말도 안되는... 화학탄이 터지고 총칼이 날아오더라도! 구르기만 하면! 구르기만 하면 피할 수가 있다고!
"그럴... 리가.. 없...ㅈ..."
아, 요즘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옛날의 나 자신을 이제 완전히 잊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그렇지가 않다. 굴러? 구른다고? 아주 그냥 빡세게 굴러버려야 이 총체적 난ㄱ... 아니야. 아니다. 참아, 내 안의 유격조교. 터져나올 것 같은 스팀을 꾹꾹 누르며 겨우겨우 괴롭게 웃음을 흉내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