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이 지난번 수준이라면. 글쎄. 사실 지난만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전원이 살아남은 것인지 의문이다. 혹시 그때 그 인원 중에 뭔가 특별한 녀석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지난번엔 정말 위험한 순간이 많았었지! 솔직히 운도 좀 좋았다고 생각하네. 이번에는..조사라고는 하지만. 역시 그 길드 마스터가 직접 의뢰를 한 것이니..그냥 단순한 조사는 아닐 거 같구먼. 이번에도 뭔가 심상찮은 어려움이 있을 거 같네." 자신의 그런 불안을 굳이 숨길 것은 없기에 같은 처지라 할 수 있는 옆자리 창잡이에게 털어놓았다.
"사실 나는 섬에 가본 적이 없다네. 바다도 친숙하지 못하지. 그래서 괜히 더 불안한 감도 있는 것 같네만. 자네는 별로 긴장한 기색이 아니군. 허허 대단한 친구일세. 혹시 근거가 있는 여유인가? 사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이 의뢰가 오래 걸리는 종류라는 것이다. 자신은 면도를 해야 한다. 근데 일주일 씩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우리 이전에 먼저 투입된 인력들이 지금 일주일 째 귀환도 못하고 소식도 없대요. 그럼 말 다 한 거죠. 아마 우리도 잘못하면 고립되어서 못 나가거나 죽을 수도 있어요. 사실 살아서 나갈 확률도 안 높고요. 우리 나가면 가이아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마수들과 싸울 수도 있고요. 처음 발견된 섬인데 마수들 역시 처음 보는 녀석들이 있겠죠."
레온은 위스키를 마시며 이러한 위험요소들을 무덤덤하게 말했다.
"......."
섬에 가본 적이 없다는 드워프의 말에 레온은 다시 위스키를 들이켰다.
"저도 가본 적 없어요~ 음..근거 있는 여유요? 저는 개인적으로 더 긴장하고 불안하면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해서 별로 긴장을 안 해요. 불안해지면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전투에서 죽자고 싸우질 못하거든요. 죽자고 싸워야 한놈이라도 죽이는 거니깐요."
귀찮아서 남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면 돌아오는 호칭은 어김없이 검둥이였다. 조금 바꿔서 깜둥이, 깐족거리는 인간들은 까망이... 이런 ㅆ...
"거기서 만난 거 맞아. 우리 존경하는 길드장께서 그 인원들을 그대로 소집하셨지. 원래 이런 건 더 높은 모험가가 가야 하는데.."
"싹퉁바가지 없는 어린 놈의 자식 같으니. 적어도 동이나 은 정도는 대동해서 보내야 하는 게 아냐? 이건 고기방패보다 못한 취급이잖아."
취기도 올랐겠다 나는 길드장의 뒷담화를 시원하게 깠다. 나는 이 원정 덕분에 밤의 숙녀 교단의 중요한 행사인 '무도회'를 놓치고 말았다.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는 것이다. 빈 술병을 바다에 콱 던져버리려고 하다가... 한 끗발 차이로 평정을 되찾고 난간 위에 올려두었다. 새 술병의 코르크를 열었다.
이리나는 반말을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접어둔다. 상대는 엘프였고, 엘프가 저 정도로 성숙한 외형이면 억지를 부려도 180살은 넘었을 테니 말이다. 저 뾰족한 귀를 보면, 저 사람은 이리나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막 세상 빛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이 세상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살아갔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시작되는 뒷담화를 들으면서, 이리나는 조용히 술 한 잔을 더 마신다.
"...그래도, 어떻게든 잡았으니까 아주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은, 동급 모험가가 들어왔다면 그만큼 우리한테 돌아갈 몫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고요."
술을 또 마신 이리나는, 사냥꾼 시절에 배운 금언을 이야기한다.
"사냥꾼이 많으면 곰을 잡고도 굶는다. 일을 할 때 너무 어렵다고 많은 사람을 불렀다가는, 그만큼 돌아가는 몫도 적다는 속담이 있어요. 그리고... 아무도 안... 죽긴 했으니까요? 진짜 죽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위스키는 공기에 노출을 시켜서 오크향을 좀 없애고 마셔야 맛있다. 물론 위스키의 종류마다 다르기는 한데..
"음..수행한 의뢰들이라.. 별 거 없는데..첫 번째는 슬라임 토벌. 그냥 시키는대로 슬라임만 잡으면 됩니다. 괜히 저처럼 뻘짓하다가 킬러비나 킹슬라임이랑 싸우지 말고요.. 킬러비는 슬라임들을 도발한다고 나무를 발로 차다가 사람보다 큰벌이 열받은 채로 나무에서 나와서 싸우다가 죽였고.. 킹슬라임은 슬라임을 슬라임에게 던지면 어떨까 싶어서 궁금해서 던져봤는데, 한 4마리? 쯤이 뭉쳐서 킹슬라임 열화버전이 됐어요."
"그거 잡느라 죽을 뻔했구요..어쨋든 저처럼 괜한 호기심으로 뻘짓만 하지 마십쇼."
"그 다음은 고블린 토벌. 아는 엘프와 20마리른 잡아오는 의뢰였죠. 직접 고블린 소굴까지 들어가서 홉고블린하고 샤먼까지 합해서 12마리는 넘게 죽인 것 같아요. 나머지는 굴 밖에서 죽이고. 이때는 녀석들이 조직력이 있어서 공격을 많이 당했어요. 그래서 죽을 뻔했구요."
이리나는 상대의 불평을 묵묵히 들으며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쓴 혀, 뜨거워지는 식도, 불타는 속, 그리고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기쁨의 불꽃. 그 모든 것이 한번에 모인 '음주', 그것도 술꾼들의 천국이라는 '공짜 음주'를 만끽하기도 바빴으니, 연거푸 술을 들이킨 이리나는 짤막한 대답만 하고 다시 술잔을 바삐 놀린다.
"...그렇군요."
그 말과 함께 기울어지던 술잔은 베아의 다음 한 마디에 멈춘다. 다른 거야 개인의 불평이고 개인의 문제라 쳐도, 적어도 그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무려 드래곤을 죽였는데 고작 인당 300골드라. 300골드면 여관방은 6일로 일주일도 못 묵고, 포션을 사도 30개면 끝이라.
된통 깨졌다, 그 말에 이리나는 한숨을 쉬고 뱃머리가 향하는 수평선 쪽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단순히 수십단계의 '유통단계'가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경우면 차라리 간단하고 이해하기도 편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닭장을 가진 사람은 영주에게 매주 계란 열 개를 바쳐야 하지만, 중간에서 그것을 걷는 역할을 하는 영주의 세리들을 위해 계란 두 개씩을 더 부담하는 것처럼, 중간에서 떼고 떼다보면 약한 사람들은 받아야 할 것은 덜 받고, 줘야 할 것은 훨씬 더 줬으니까. 하지만...
'알아야 할 것, 알아도 되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이리나는 영주가 사냥을 위해 쓰는 숲이 어딘지 물어보려고 갔다가, 감옥에 갇힐 뻔했다. 다행히도 서약을 해야 했지만, 그 서약 이후로 이리나는 뭔가 '알면 안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이리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침묵하며 술을 마셨다.
"알아도 되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이리나는 그런 말을 나직이 속삭인다. 그리고는 술을 털어 마시고 베아트리시에게 말한다.
"아무래도, 기밀이네, 비밀이네, 그런 거랑은 안 좋은 기억밖에 없어서요. 이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고 싶네요."
"그래서 루키우스한테 내가 똑같이 말했다. 계속 그러면 길드 밖의 권력자들에게 살해당한다고."
"상식적으로 황실이나 귀족들이 드래곤에 이렇게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고. 포상하고 치하하지 못할망정 이딴 푸대접을 하는 건.. 그냥 묻어버리고 싶다는 의미야."
잠깐 말을 끊었다. 나는 입 속으로 웅얼거리다가 결국 빈 술병을 냅다 던져버렸다. 이미 내 몸 안이 술통이 된 지 오래다.
"이거 또 열불이 올라오네. 이거 가서 죽으라고 길드에서 유배보내는 거지? 이야, 완벽하네! 원정지가 또 하필 섬이야. 우리 돌아오는 배편이 있긴 한 거냐?"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고 바꿀 수 없는 것. 그래도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성인처럼 모든 것을 웃어넘기는 짓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세상의 섭리를 비틀어버리는 것은 하늘 위의 신도 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혼자 화를 쏟아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원치 않게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 신세, 그렇게라도 해야 버틸 수 있다.
"제---기랄! 섬에 내리기만 해 봐라. 조사는 내 알 바 아니고 나무 해서 집이나 지어야겠다. 높으신 분들은 눈 감고 귀 막을테니 거기서라도 천년만년 살아야지."
이리나는 나무해서 집이나 지을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술을 마저 마시고 선실로 내려가려 한다. 선실에는 술이 더 많다고 했으니, 거기서 더 마시고 곯아떨어질 생각이었다. 집을 짓는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직이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