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고 싶게?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얌전히 기다렸다. 아스텔이 무심해보여도 그녀를 세심하게 지켜본다는 걸 알고, 이 정도 신호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어둠이라곤 일말의 가닥도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금안이 아스텔을 오롯이 바라보다가 그가 고개를 숙이자 살풋 눈커풀을 내린다. 그리고 가벼이 겹쳐지는 입술. 젠틀한 입맞춤 만으로도 그녀에게 만족스러웠지만. 그 이상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지.
"귀엽긴. 응. 부디 원하는 만큼."
조심스러운 그의 말에 염려할 필요 없다는 듯 속삭이고 다시 눈을 감는다. 등을 폭 감싸안는 팔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방금보다 진하게 이어진 입맞춤은 어느 선율보다 감미롭다. 입술이 떨어지고 고개를 무르는 그에게 발꿈치를 들어 짧게 쪽! 남기는 걸로 여운 아닌 여운을 마무리 짓는다.
짧은 한때가 지나고 그녀 역시 식사를 위한 테이블에 다가갔다. 마주보고 앉을 필요는 없지 않냐며 옆에 앉자길래 그럼 더 가깝게 자기 무릎에 앉을까? 라고 농담을 하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정말 무릎 앉기를 해도 상관없지만 그건 식사 이외에 하는게 더 즐거울 테니 아껴두고. 앉아서도 옆에 기대 같이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어지간한 건 가족하고 자주 먹으니 새로울 건 없지만. 그래도 레스토랑이니 시그니처 메뉴를 즐기는게 좋겠지.
"음. 난 이 스테이크를 미디움으로 할래. 와인은 자기랑 같은 걸로. 스프랑 샐러드는 셰프 추천으로 하자."
풀코스를 즐기는게 아니어도 전체요리 정도는 있어야지. 그렇게 메뉴를 정하고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부른다. 이번엔 알아서 눈을 내리깐 종업원에게 주문을 하자 뭐 형식적인 설명을 하는데 그런 건 됐고. 종업원이 공손히 나간 후 그녀는 아스텔의 어깨에 기대 손을 만지작거리며 종알댔다.
"고작 가디언즈라서 보다, 우리가 세븐스면서 그만큼 세상에 가치 있는 존재니까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봐. 자기는 그 힘든 시련을 극복한 걸로 가치를 증명했고.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긴 하지만 나름 말단부터 시작해 실력으로 증명했지. 그런 우리니까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고 있는 것 뿐인 거야."
비능력자를 보호한다면서 거기에 세븐스를 기용한다는 것부터가 세븐스의 가치를 인정한 것 아니냐는, 다소 가디언즈의 사상과는 동떨어진 의견이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녀는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실력과 결과를 우선하는 가디언즈에서 그보다 확실한 증명이 또 어디 있을까.
"뭐. 나도 로로랑 가족이랑 에델바이스 말곤 관심 없긴 하지만."
작게 웃으면서 그의 말에 동감을 표하고 그의 손바닥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 간지럽히는 장난을 친다. 그리고 또 웃고. 그러는 사이 문이 똑똑 울린다. 트레이와 밀며 들어 온 종업원이 에피타이저인 크림스프와 약간의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올리고 나간다. 뭉근한 스프의 향과 싱싱한 샐러드가 입맛을 돋군다. 그녀는 음식이 나오고도 잠깐은 더 장난을 쳤겠지만. 곧 스푼을 들며 식사를 시작했겠지.
딱히 자신의 무릎에 앉혀도 상관은 없었으나 그러면 아무래도 구도상 밥을 먹기는 조금 힘들었다. 물론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각자의 자리에 앉는 것보다는 훨씬 불편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자신의 무릎은 다른 때에 그녀에게 내주기로 하면서 그녀가 먹고자 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스텔은 확실히 자신과는 다르게 뭔가 이것저것 많이 안다는 것을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열등감을 느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출신으로만 따져보면 같은 라인은 아니긴 하나 지금은 같은 선이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면서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마친 뒤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그녀의 행동에 맞춰 아스텔은 살며시 자세를 조정해서 그녀가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했다. 이어 들려오는 그 말에 아스텔은 아주 작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맞는 말이야. 물론 어떻게 보자면 가디언즈의 사상과는 조금 엇나간 것도 있지만... 가디언즈의 사상을 지키고자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가디언즈의 사상을 지키고자 가디언즈에 있는 이들도 있을테고 아스텔은 딱히 그런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그렇다는 것이었을 뿐. 그리고 그녀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스텔은 그녀의 손장난을 받아주다 살며시 깍지를 끼면서 꼬옥 잡았다. 그러다 손을 풀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살며시 더 다가간 후에 그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솔직히 말해서 가디언즈에 들어온 것이 마냥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이를 죽여야만 했으니까. 아무튼 그 결과 여기로 들어온 것이 마냥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널 만난 것만으로도 여기에 들어온 보람은 있어. 조금만 더 기다려줘. ...확실하게 진급을 하게 되면, 그땐 널 데리러 갈 거니까."
그 기한이 그렇게 길진 않을터였다. 물론 당장 내일모래 일은 아니었으나 마냥 기약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조금 더 노력하고 실적을 보이고 실력을 보이면 반드시 오를 수 있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은 성공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아무튼 크림스프와 샐러드가 올려지자 아스텔은 그녀를 살며시 놓아주며 식사를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맛. 그리고 신선한 맛이 일품이라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자신이 배운 테이블 매너를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식사르 조용히 즐겼다. 그 모습이 어설픔이나 서투름은 보이지 않은 고고함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샐러드를 포크로 집어서 그녀의 입가로 가져가서 먹여주기도 하면서 아스텔은 입을 열었다.
"...차후에 같이 살고 싶은 곳 있어? 뭐, 당장은 아니지만 일단 시간이 나면 알아볼까 싶어서."
그녀가 어깨에 기댈 적,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그가 자세를 고쳐주었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만큼 더 편안히, 꼭 붙어서 서로에게만 들리도록 대화할 수 있었으니 좋았지. 그에게 기대어 그녀들이 가치를 증명했기에 지금을 누릴 수 있는 거라 말하니 작은 웃음소리 들려온다. 이내 그녀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는 말도 들려오자 예쁜 웃음이 조용히 피어났다.
"역시 자기야. 난 자기랑 얘기할 때가, 으응?"
깍지 낀 손을 조물거리며 생각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그와 대화할 때가 제일 좋다고 말하려는데. 그녀의 어깨에 손이 닿으며 아스텔과 거리가 더 좁혀진다. 이번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깜빡깜빡한다. 그런 중인 레레시아의 귓가로 들려오는 다정하면서도 소유욕이 확실히 엿보이는 말에 심장의 뻐근함과 등허리 오싹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자기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이미 말 했는 걸?"
그러니까 얼른 데려가 줘. 그가 놓아주기 전 그녀도 작게 속삭였다. 얼마든 기다릴 수 있지만 그래도 빠를 수록 좋은 법이다. 그리고 여기가 레스토랑 아닌 그녀의 혹은 그의 방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쉬움의 입맛을 한 번 다시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의 테이블 매너도 일품이었지만 아스텔 역시 그녀 못지 않았다. 서로 색체는 달라도 행동거지는 잘 어울렸다. 그가 샐러드를 내밀어주자 그녀가 얌전히 받아먹으며 눈웃음을 짓는다. 상큼한 드레싱일텐데 누가 꿀이라도 부은 것처럼 혀끝이 달달하다. 그만큼 간질거리기도 하고.
"음- 야경이 보일 만큼 높은 층이거나. 조용히 있을 수 있는 도시 바깥의 어딘가라거나?"
나중에 같이 살 집에 대해 묻길래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녀도 그녀 나름 바쁜 몸이었으니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얼른 머리를 굴려서 대강 대답을 하고 빈 접시에 스푼을 내려놓는다. 냅킨으로 가볍게 입술을 정돈하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나도 시끄러운 건 싫으니까. 소음이 적은 구역이라면 좋을까나. 뭐, 세상 어딜 가도 라라가 간섭하지 않을 곳은 없을 테니. 둘이 있을 땐 조용하고 차분히 있을 수 있는 곳이면 좋아."
소음은 일을 하며 가끔은 고막이 터질 만큼 듣고 있으니 말이다. 라라의 질투 섞인 투덜거림 역시. 그러니 둘만 있을 곳 만큼은 조용한 곳이 좋다고 대답을 확실히 한다. 나중에 도시 바깥에 작은 별장도 있으면 좋겠다던가. 하는 얘기도 하고. 그렇게 에피타이저를 마무리할 쯤 그녀가 그런 말을 꺼냈다.
"좀 전에 로로가 그랬잖아. 가디언즈에 들어온게 기분 좋지는 않지만 나를 만난 것만으로도 들어온 보람이 있다고. 그거 나도 그렇다? 나는 나면서부터 가디언즈에 속해 있었지만. 어머니가 이미 가디언즈였으니까 거기 딸린 부속품에 불과했단 말야. 나름 쓸모 있는 세븐스를 가졌으니까 그렇게 키워졌고 내가 가진 세븐스로 실적을 쌓는 것 말곤 관심이 없었어. 그러다 에델바이스에 배치되고, 로로를 만나면서부터 겨우 제대로 살고 있구나 싶어졌어. 로로가 내 옆에 있어서 비로소 내가 나로서 여기 있을 수 있다고 느껴. 동료이자 연인이자 여자로서 말야."
차분히 얘기를 하고 생긋 웃는다. 이럴 땐 장난도 안 치고 얌전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일부러일까. 그러다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듯 하자 뭐 그냥 그렇다는 거야- 라며 별거 아닌 듯이 구는 것도.
작게 속삭이는 얼른 데려가달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괜히 침을 꿀꺽 삼키면서 얼굴을 살짝 붉혔다. 간부 클래스로 진급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실적과 실력, 그리고 다른 기타 요소들도 많이 필요했다. 당분간은 임무에 조금 더 집중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아스텔은 그 정도로 대답을 마치면서 말을 마무리지었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임무에 충실해야 할 동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샐러드를 먹는 것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소리없는 미소를 짓던 와중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자 아스텔은 이내 냅킨으로 자신의 입술을 정리했다.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 소음이 적은 구역. 적어도 도시 내에서는 조금 힘든 편이었다. 일단 나중에 천천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비번이 언제였는지를 아스텔은 생각했다. 그 날은 시간을 내서 부동산에 가서 미리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어떤 위치에 뭐가 있는지를 파악하리라. 머릿속 계획을 마치면서 아스텔은 이내 마저 스프를 천천히 먹으면서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적어도 내 존재가 내 생각보다 너에겐 큰 것 같으니 말이야. ...물론 점점 더 키울 생각이지만."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고, 자신은 제 연인에게 집착을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인간관계가 있고 살아가는 삶이 있었으니까. 허나 그 와중에 제일 크게 남겨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은가. 그렇게 말을 남기는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렸고 또 다시 종업원이 들어왔다. 스테이크와 와인이 자리에 하나씩 놓여졌고 종업원은 즐거운 식사 시간 되라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얼핏 봐도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참으로 맛있을 것 같아 아스텔은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허나 그 전에 와인부터 하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천천히 자신의 잔과 그녀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붉은 포도빛 와인이 잔 안에서 출렁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스텔은 잔을 들어올렸다.
"...건배 하자. 우리. 건배하고 스테이크 좀 먹다가 춤이라도 한 번 추자. ...이젠 나도 널 완벽하게 리드할 수 있으니 말이야. 나름대로 너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도 노력중이거든. ...뭐, 아직은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래도 천천히 천천히 실력을 키워보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자신의 잔을 그녀 쪽으로 살며시 향했다.
헤베 엥엘의 삶은 풍족했지만, 그녀의 가치는 고작 2달러 75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어린 헤베가 셈해본 결과,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Rich's의 초콜릿 퍼지 하나를 사고 25센트가 남는 가격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비싼 값이었더라면 납득하고 가족에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을 텐데! 헤베의 가치가 정립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머니, 수잔나 엥엘이 테러리스트의 저격으로 생방송 도중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다. 수잔나의 남편이자 헤베의 아버지인 에르베르토 엥엘은 일찍이 헤베가 세븐스라는 이유로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아내의 죽음을 기회로 삼았다. 아내가 죽은 첫날에는 처음으로 그녀를 품어줄 듯 굴더니, 점차 헤베가 아내를 죽인 테러리스트와 같은 세븐스이고,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끊임없이 설명했다. 현 사회의 시점에서 옳은 답을 정해놓고, 스스로 인정하며 굴복할 때까지 계속해서 되묻는 나날이 지나 끝내 오늘, 그런 괴물인 헤베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그가 몸담던 세븐스 투기 도박 및 생체실험 연구소, 안식에 헤베를 팔아넘긴 것이다.
"사랑하는 헤베, 너를 사랑하고 싶지만 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지 않니. 더는 네게 사랑을 줄 여유가 없어지는구나. 너는 위험한 세븐스니까. 우월한 유전자 사이의 실패작인 네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너무 두려워 말거라."
어린 헤베는 천대받는 가축을 밀듯 거친 아버지의 손길에 강제로 떠밀리더니 처음 보는 사람 앞에 섰다. 뒤를 돌아 아버지를 쳐다봤으나 싸늘한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모두 세븐스인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해도, 모멸찬 시선은 견디기 어려웠다. 눈이 마주쳤을 적 에르베르토는 형용하기 어려운 역겨움을 느꼈는지 단박에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세븐스의 값 치고는 비싸 기분이 나쁘다며 2달러 75센트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밖으로 나서버렸다. 헤베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허름한 옷자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고, 헤베는 아버지가 어떤 곳에서 일했는지 곰곰이 되짚었다. 사형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들었다. 자신은 세븐스니, 아마 여기서 죽지 않을까? 죽음의 공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헤베가 눈을 내리깔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네 아버지란 사람 밑에서 오래도 견뎠구나." "……." "아가, 고개 들지 않겠니?" "아빠가.. 세븐스는 비능력자 앞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된댔어요." "저런, 네 아빠가 국가의 사상을 빨아대는 소리로 음험한 영상을 찍을 사람인 건 익히 알았지만 자기 유전자가 섞인 존재에게도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헤베는 강도 높은 욕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이 다가오자 다시금 질끈 감았지만 뺨 위에 손을 보드랍게 얹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남성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기르기 시작한 은발의 머리 한 뼘을 끈으로 묶고, 자수정색 눈을 가진 남성은 아버지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아버지가 네게 뭐라 말하더니." "……." "괜찮아, 말해도 돼. 여긴 아무도 없잖니. 너는 말해도 되는 존재란다.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도 되는 존재기도 하지." "……저는 엄마를 죽인 사람이랑 똑같대요." "저런. 괜찮다면 자세히 얘기해 주겠니? 힘들다면 얘기하지 않아도 좋단다." "저는.. 쓸모없고, 위험하고, 사람들은 다 저를 싫어하는데 여기는 좋아해 줄 거니 다행으로 생각하라 하셨어요." "오.. 네가 들을 말이 아닌데도. 많이 힘들었겠구나."
남성이 헤베를 끌어안고 토닥였으나 헤베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대신 쥐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세븐스인걸요." "그게 뭐가 어때서 그러니? 쓸모없고, 위험하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건.. 아주 멍청한 짓이지. 아가, 알고 있니? 맹수는 보는 것 외엔 쓸모가 없어. 그렇지만 보는 것 하나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는단다. 그럼에도 늘.. 원하는 사람이 있지. 그 매력에 홀려보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내가 보기에 너는 그런 아이로구나." "제가요?" "물론이지. 너는 누군가에게 선망받을 자격이 있단다. 그 역겨운 것이 가치를 몰라볼 뿐이야.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는데도 공포에 젖어 짖어대는 꼴이란……. 너는 많은 사람의 환호와 찬사, 사랑 속에서 살 수 있을 거란다."
처음 듣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랑 속에서 살 수 있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세븐스와 환호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은 확고했다.
"그러니, 이름이 뭐니? 알려주지 않으련?" "……헤베 엥엘이요." "헤베.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헤베, 안식의 주인인 가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네 청춘은 시들지 않을 것이고, 네 인생은 지금부터 가장 위에서 내려다보게 될 것이며, 사람들은 네게 무한한 환호와 사랑, 찬사를 보낼 것이야. 내가 너를, 세상이 너를 귀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지. 대신."
가란은 눈을 정확하게 마주했다. 아무도 자신의 눈을 마주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껏 배운 모든 것은 쓸모가 없을 거란다. 너도 잘 알고 있잖니? 네가 배운 것은 오로지 억압받고 눈치 보는 하찮은 삶이라는 것을. 나는 안단다. 너무나도 잘 알아. 네가 지금 벗어던져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벗어던져야 하는 것이요..?" "그래. 겉껍질. 너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마음껏 표출하고, 휘두르며, 손에 쥐어야 할 것이야. 누군가 욕을 한다면 참지 말고, 손가락질을 하면 하고픈 대로 하렴.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를 걷어차도 사랑을 받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라는 뜻이란다." "……지금부터요?" "그래. 바라는 것이 있니?"
헤베는 우물쭈물 대다 천천히 입술을 오므렸다.
"이름을 바꾸고 싶어요." "이름을?" "제가 사랑받는 거 맞죠..?" "물론이지." "헤베 엥엘로 불리면, 엥엘이니까 사랑받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오, 아가. 물론이지. 물론이야. 그 이유라면 백 번은 더 바꿔줄 수 있단다." "그렇지만 미들네임은 헤베로 둘래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내가 사랑받는 걸 보면서 후회할지도 모르잖아요." "사랑받는 법을 잘 아는구나. 좋은 이름을 추려줄 테니 네가 정하려무나. 자, 이제 이런 더러운 지폐가 떨어진 곳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가자꾸나. 너를 위해 방을 준비했단다. 그 역겨운 천 쪼가리도 어서 바꿔 입어야겠어. 네 살에 닿을 것은 모조리 귀한 것이어야 할 테니."
가란은 헤베를 안아올리며 문밖으로 나섰다. 문을 나서자 허리를 깍듯하게 숙이는 정장 입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복도를 걸으며 거울 너머에서 헤베가 에르베르토를 쳐다보던 시선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이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포식자의 것임이 자명하던 그 시선을. 이스마엘은 복도를 지나치다 에르베르토를 마주했다. 에르베르토는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무진 애쓰다, 이스마엘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이를 악물었다.
"한 대 치겠어요, 엥엘 씨." "무슨 소리. 지나가던 길이잖소." "어디 가시나요? 아하. 말하지 말아 봐요.. 알겠다. 아내분 묘지 가는구나. 그렇죠? 그래서, 아내분은요? 남편이 그렇게 지극정성인데.. 회임하셨대요? 그 정도면 회임하고도 남아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헤베!!!"
이스마엘이 에르베르토를 무시하고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며 스쳐 지나갈 적, 에르베르토는 손바닥을 확인하고 끔찍한 혐오를 섞은 비명을 내질렀다.
견제와 타격을 겸용한 공격들이 쇄도한다. 방비 없이 휘말린다면 상당한 충격을 입을 테지만 무리 없이 피할 수 있을, 견제에 더욱 중점을 둔 공격이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나 정면으로 돌파해 올 줄은 몰랐는데. 훈련 상황임을 감안해도 상당히 과감하며 과격한 수다. 몸이 찢어지고 꿰뚫리면서도 날아드는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더욱 가라앉는다. 효율적인 싸움을 위한 훈련이었으니, 저것 역시도 속결을 낼 수만 있다면 효율이겠지.
부스터의 속력은 사람의 움직임보다 빠르고, 더군다나 급속히 날아드는 추진력에 반응하기엔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었다. 칼을 세우기에도 늦었다. 충돌을 앞둔 짧은 순간, 회피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그는 그 대신으로 달려드는 선우의 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피해를 허용한다면 상대에게도 최선의 손해를. 능력을 덧씌워 전방을 향해 단단하게 뻗어진 반격의 기세가 적을 꿰뚫고자 하는 둔중한 기병창과 같다. 다만 달려오는 형세와 그 이후의 여파는 오롯이 상대에게 달려 있다. 이윽고 그는 묵직한 충격에 실려 나가떨어지고, 튕겨나가 몇 차례를 구른 모습이 이제야 피투성이다. 선우에게 당해 구멍 난 상처는 마찬가지로 얼마 가지 않아 수복되었다. 신음 정도는 낼 법도 한데, 그 잠시의 틈 동안 몸을 추스리고 다시금 자세를 잡는 모습은 지긋할 정도로 평상시와 같다. 츠쿠시는 조용한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상처가 낫는다 해도 고통이 중첩되면 결국 몸이 둔해지기 마련입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방법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