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는 이곳이었는데. 아무래도 저번처럼 호락호락하게 숨겨놓은 건 아닌가 보다. 이번엔 또 어디냐. 어디 주차된 차 밑이라도 싹 다 뒤지고 다녀야 하나. 그녀는 계속 수색 중만 뜨는 장치를 보다가 누군가 부르자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해체 장치를 넣었다. 장치만, 손은 빼놓은 채로 부르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요?"
왜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뚱뚱한 체형의 가디언즈 남성을 응시한다. 이름이라. 순간 그냥 튈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순순히 구는게 상황상 좋을 것 같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했다.
"셀레나 칼렌인데요."
아마도 데이터베이스에 없을 이름이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가명을 대고 잠자코 반응을 기다려본다.
이번에도 동일한 임무, 그러나 동일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지난번에 저지당했음에도 똑같이 일을 벌이려고 하는 이들이라면 그에 대한 준비 정도는 해놓지 않았을까? 그래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준비된 차량을 타고 이동했다. 여기 또 올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굳이 이 장소를 집요하게 노리는 이유가 대체 뭐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량에서 내렸다. 또 지난번과 같은 장소에 있으려나. 그래도 폭탄을 찾아낼 장치도 있고, 중간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는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는 안경을 걸친 채, 변장을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꽤 섬세하게 땋아준 머리카락을 등 뒤로 늘어뜨렸다. 이제 슬슬 폭탄을 찾아 볼까.
히카루와 교전했던 바로 그 장소에 찾아온 쥬데카는 이전과 똑같은 느낌의 증오와 불신을 느낄 수 있었을이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그 증오와 불신은 도시 이곳저곳에 뿌리 깊게 내려져있었다. 부자연스럽다 싶을 정도의 증오심이었으나 도시 곳곳에 파괴된 흔적들이 이를 납득하게 해주었다.
만약 그가 주의깊게 모든 감정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면 이중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곧이어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어와 제대로 집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봐요, 당신, 거기서 뭐하는 거죠? 이리로 오세요."
안경을 쓴 단발의 여성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전 가디언즈 소속, 슈에라라고 합니다. 처음보는 얼굴 같은 데, 신분증 보여주시죠."
만약 주지 않는다면 시간이 오래 끌릴 것이다. 준다면 -애초에 신분증이 있냐는 둘째치고- 자신이 쥬데카임을 광고하는 셈일 것이다.
지난번보다 더 강해진 건 아니었지만, 좀 더 늘었다. 당장 자신 곁에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혹은 이 도시를 파괴하기 위해서 숨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짙은 불신. 너는 그 중에서 좀 더 익숙한 감정을 느꼈으나 그걸 찾아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좋은 예감은 아닌데. 도망칠까? 사람들 사이에 숨어든다면 어떨까 싶지만 사람들이 도망치는 걸 그대로 내버려둘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소란을 피운다면... 넌 하는 수 없이 부름에 응해 걸어갔고. 안경을 쓴 표독스러운 인상의 여성이 스스로 가디언즈라고 하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죄송합니다만, 가디언즈 사칭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어설프긴 하겠지만요."
먼저 증명부터 하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안 될 텐데. 상대가 가디언즈라고 말은 하지만 진짜 가디언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만약 그녀가 가디언즈 제복을 입고 있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랬어도 똑같을 터다. 만약 그랬다면 좀 속을 긁는 게 됐으려나.
슈에라는 그녀가 가디언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고 묻는 쥬데카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과 말장난할 시간 없습니다. 신분증 주십시오. 아니면 연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쥬데카의 말을 들을채도 하지 않으며 그를 위협했다. 일반적인 세븐스라면 가디언즈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녀는 이렇게 당당하게 쥬데카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무조건 연행할 생각이었다.
"헛소리 적당히 하십시오. 폭탄이 터진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신분증 주십시오."
슈에라의 목소리가 더욱 딱딱해졌고 짜증이 섞여있었다. 아무래도 생뚱맞게 폭탄이 터져 이곳에서 나가려고 한다는 말은 그녀에게 그저 장난식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슈에라는 삼단봉을 꺼내어 길게 늘렸다. 만약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슈에라는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칭범이면 어떡합니까? 이 일로 가디언즈에게 추궁을 당하면 어떻게 할 거냐며 되묻는다. 노골적인 표정이군. 넌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길 마친 뒤에 네 이야기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을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살짝 고갤 기울였다.
"그럼 대체 여기서 뭐 하십니까? 갈수록 태산이군... 가디언즈라는 사람이 이런 것도 모르고."
너는 그렇게 말을 하다 꺼내진 삼단봉을 보곤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이내 살짝, 조금 겁먹은 듯 연기하며 한숨을 내쉰다. 주섬주섬 옷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니 빳빳한 명함 하나가 만져진다. 얼마 전에 마주쳤던 잡상인이 줬던 명함인데. 코팅까지 해서 빳빳한 게 공들였구나 싶어 버리지 않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천천히 명함을 꺼내 내민다. 당연하지만 신분증이 아니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으니. 너는 그녀가 명함을 받아들 때를 노려 그녀의 턱을 올려붙이려고 했다. 정확히는 그런 시늉만 했을 뿐, 직접 노린 것은 그녀의 정강이였으니 있는 힘껏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한 너는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의 모자를 잡아채 눌러쓰고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그녀는 예의따윈 배운 적 없는 것처럼 이스마엘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이미 페이스 재머 때문에 단단히 의심을 산 모양이었다.
"아니, 아직. 기다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얼굴을 가렸지? 무슨 짓을 하려고 한거야?"
따지고 보면 겨우 복면하나 쓴 셈인데 불심검문을 그렇다쳐도 이렇게까지 쏘아붇히는 게 말이나 되는 건지 의문이 드는 상황이었다. 가디언즈의 몸 주위로 찌릿찌릿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스마엘의 얼굴에 보기 흉한 흉터라도 있었다면 그녀의 의심이 조금은 사라졌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그녀의 얼굴은 보니 얼굴을 가렸어야만 하는 이유가 더욱 궁금해졌다.
"이름이 뭐지? 어디서 왔어?"
그녀는 전자기기를 꺼내 이스마엘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해 신원을 확인을 할 생각이었다.
힘겹게 쫓아오는 가디언즈 남자를 힐끔만 봐도 웃겼다. 저런 꼴로 가디언즈라니. 질적으로 너무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웃겨서 다리가 느려질 뻔 했지만 어찌어찌 달려서 골목으로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좁은 만큼 인적도 없는 골목을 어느 정도 들어가다가 휙 돌아서 손을 들었다. 장갑을 벗어 하얗게 드러난 손이 골목 벽을 짚었다.
"누구 마음대로 끝이래."
그녀는 손으로부터 대량의 독액을 생성해냈다. 금속을 부식시키는데 특효인 독액을 생성해 벽과 벽 사이에 독액의 그물을 쳤다. 높이, 가능한 높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지만 닿으면 꽤나 아플 것이다. 그렇게 빤히 보이는 함정을 깔고 다시 뛰었다. 지면에 독의 웅덩이를 깔면서.
쥬데카의 왜 줘야하느냐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슈에라의 삼단봉이 쥬데카를 금방이라도 내려칠듯 올라가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타인에게서 받은 명함을 건네자 치켜올린 삼단봉을 내리고는 그의 명함을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명함에 있는 얼굴과 눈 앞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시 삼단봉에 손을 대었을 때, 정강이에 큰 통증이 몰려오더니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너 이자식!!"
이내 그녀의 전신이 불꽃으로 휩싸이더니 하늘로 떠올랐다. 전신이 불꽃으로 둘러싼 터라 슈에라가 서 있던 곳은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녀는 로켓처럼 발에서 화염을 발사하여 쥬데카가 달아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거리를 걷고 있는 시민들이 화상을 입지 않고 거리를 한 번에 볼 수 있게끔 제법 높은 위치에서 지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쥬데카가 주번 사람의 모자를 훔쳐 깊게 눌러쓴 것 때문에 찾기 어려웠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아간다. 바로 불에 휩싸인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까지는 눈에 담았지만, 적어도 저 슈에라라는 사람은 시민들을 건드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좀 극단적일 경우 시민이더라도 방해가 되면 치워버리고 은폐하려고 할 텐데. 꽤 모범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은 키를 이용해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일단 계속 걸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숨을 만한 장소는 없나? 그보다 폭탄의 위치는?
"후... 쉬운 일이 없군."
일단 폭탄을 탐지하기 위해 기계를 두어 번 들여다보다가도. 슈에라가 네가 쓴 모자를 보았을지도 몰랐기에, 또 능숙하게 주변에 있는 사람과 모자를 바꿔쓴 채 처음 마주쳤던 장소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도중에 폭탄이 감지된다면 그 쪽으로 가겠지만.
남자는 연신 땀과 침을 흘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고작 그거 달렸다고 저런꼴이라니 적이지만 눈쌀이 찌푸려졌다. 나나리는 골목 벽을 짚어 벽과 벽사이에 독액의 그물을 쳤다. 바닥에는 독액 웅덩이를 파며 그렇게 빤히 보이는 함정을 깔고 다시 뛰었다.
거기 서라!! 이 쥐방울 같은 놈!!
레레시아는 계속해서 주변 신호를 탐지해보지만 이상하게도 해체장치는 묵묵부답이었다. 분명 수십개는 설치하여야 정상인 폭탄들이 이상하게도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폭탄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끄아악!!
도망치는 레레시아의 뒤로 마치 계집아이와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골목길에 들어서 계속 뛰어가다보면 매캐한 초연냄새와 마치 대포알이 날아간듯 한 여러 크기의 크레이터들, 총탄과 폭탄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커다란 가디언즈 동상이 있었던 자리를 보면 부숴진 가디언즈 동상 위로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체스를 두고 있는 피투성이의 두 남자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달리는 뒤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니, 함정을 깔아놨는데 거기로 달려들었단 말인가? 어쩜 저렇게 무능하고 멍청할 수가 있나. 힐끔 돌아보고 계속 달렸다. 골목을 벗어날 쯤 속도를 늦춰 걸으며 장치를 주시했으나...
"...그렇게 많다면서, 왜 반응이 하나도 없어?"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없는 장치를 보며 슬슬 의구심이 든다. 설마, 폭탄 따위는 없다던가.
다른 대원들에게도 연락을 돌리기 위해 이어잭을 누르려던 찰나, 저 멀리 격렬한 전투의 현장을 발견한다. 그 현장 가운데에서 유유자적 차를 마시며 체스를 두는 남자 둘도 말이다. 그녀는 피투성이의 그들을 보고 짜증이 팍 솟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짧게 중얼거린 후 독액으로 거대한 손을 뽑아낸다. 원래 이렇게 쓰진 않지만 이번은 써야겠다. 그 손은 근처의 잔해 중 거대한 조각을 집어들더니 두 남자를 향해 던졌다. 거대한 돌덩이는 정확히 체스판을 중심으로 떨어지려 했다. 그녀는 멀찍이 그 자리에 서서 불쾌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눈 앞에서 거수자를 놓쳐버린 슈에라는 괴성을 지르며 허공에서 커다란 화염구를 소환했다. 수틀리면 지상으로 던져버릴 태세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총성소리가 들리더니 슈에라가 소환한 불꽃은 흩어져버리고 그녀는 힘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콰직-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지자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달려갔다. 이 혼란이야말로 그가 도망치기 절호의 기회였다.
도망치면서 틈틈히 기계를 둘러보았지만 마치 애초에 폭탄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이 아무것도 탐지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인 거리가 결코 짧지 않음에도 아무것도 탐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히 이상했다.
그러던 중 발길이 향하는 대로 길 이곳저곳을 걷는다면 그는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매캐한 초연냄새와 비릿한 피냄새가 그의 코를 찔러왔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가 프리덤 대원이나 가디언즈와 교전을 한 흔적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분노나 긴장같은 느낌 따윈 없었다. 그저 친한 친구들이 만난 것과 같은 평화로운 감정 뿐이었다. 육감이 발달한 쥬데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야할 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또 다른 동료들이 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커다란 가디언즈 동상이 있었던 자리를 보면 부숴진 가디언즈 동상 위로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체스를 두고 있는 피투성이의 두 남자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듣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스마엘은 얼굴을 왜 가렸냐는 질문에 심히 불쾌한 듯싶었다. "무슨 짓이냐고?" 되묻는 어조가 날카롭다.
"어이. 죄송하지만, 아니, 미안하지도 않네. 국가에 소속된 사람이 세븐스와 비능력자를 구분짓는 것을 제쳐두고 지금 차별 발언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나?"
이스마엘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안그래도 흉흉한 눈매 커피에 집중할 때보다 더 노기서린다. 왜 가렸느냐, 라. 신원 문제도 있지만 재머 칩은..
"지금 내가 뭐.. 트랜스휴먼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이스마엘이 사회에 나서 세븐스라는 이유로 받을 시선을 고려해 남긴 유품이었기 때문에.. 빡치고 만 것이다..
"나는 트랜스휴머니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트랜스휴먼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고.. 이미 나 같은 사람이 점차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인데. 그런데- 나같은 사람에게 재머를 끄라는 것 자체부터가 대단한 무례를 저지르는 행동임에도, 나는 국가 기관 소속의 요구이기 때문에 들어줬지요. 그렇죠?"
눈 홉뜬 모습 제법 흉흉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냐고요? 나는 급한 약속이 있어서 가던 길이었는데,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트랜스휴먼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듯한 심히 불쾌하고 차별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이 사안이 굉장히, 불쾌하고, 내게 있어 모독적인 말이었기에 민원을 넣고자 하니 선생님의 성함은 역으로 여쭙고자 한다는 뜻이에요."
재깍재깍 답하던 이스마엘이 질문을 묵살할 정도면 개빡친 게 맞는 듯싶다. 한 걸음 위압적으로 걸어오는 것도 그렇고.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어디서 왔냐 했지요. 안식에서 왔습니다. 이쯤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줄 알 텐데요."
적잖은 분노가 느껴지는 괴성을 뒤로 하고 나아가려 했으나, 총성과 함께 땅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말았으니 돌아볼 수밖에. 그러나 오래 바라볼 수는 없어서. 너는 모자를 눌러쓴 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지. 이 장소는 누구에게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자신을 오래 노출했다는 건, 죽여달라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작게 한숨을 흘리며 움직였지만 폭탄 같은 건 감지되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할 즈음 너는 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함과 피냄새. 주변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
네가 고갤 들었을 때 볼 수 있었던 건 피투성이가 된 채 앉아 체스를 두는 두 사람이었다. 익숙한 얼굴 하나, 낯선 얼굴 하나에 너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애쓰는 것처럼 눈썹을 찡그렸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말을 걸어볼까 생각하던 차에 돌덩이가 던져지는 걸 보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금방 날아가 뭐든 박살내려는 듯했던 잔해는 아공간에 먹혀 사라졌는데...
"끝난다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이만 물러나겠다, 그런 얘기입니까?"
아니라면 기다릴 가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너와 같은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움직였던 레레시아를 살짝 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선우에게 향한 너는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 손에 쥐었다. 저 남자는 누구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는지 설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