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온 탄야를 카리나는 주변에 맴도는 회색빛 연기를 휙휙 저어 날려보내며 반겼다. 조금 늦는 것 정도는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는 모양새였다. 그 시간에 담배 몇개피 더 피는 것 뿐이니 아무래도 좋은 것이 크겠지만, 어느정도는 카리나가 탄야와 만나는 것을 즐기고 있단 증거라고 할 수 있을터였다.
" 어 ! 나 이거 뭔지 알아! "
카리나는 탄야가 무언가를 건내주는 것을 받아들곤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그림이 표지에 그려진 동화책을 보곤 발랄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쳐든다. 반짝이는 눈, 카리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천진한 눈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 그! 그러니까! 동화라는거지? 이거? 히야~ 글을 배우긴 하는 모양이야. 어렸을 때 이게 되게 궁금했었는데~ "
아주아주 이따금, 조금의 여유가 생긴 뒷골목의 아이들의 부모가 사주는 것을 보며 궁금해하고 부러워 했던 어린 시절의 카리나였다. 그래서인지 더 들뜬 걸지도 몰랐다.
그는 새삼 생각했다. 형제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어째서 당신을 만나러 다니는지에 대해서. 언제부터인지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자신이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찾기까지 오래걸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당신의 반응이 그의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고 당신의 표정과 시선을 가만히 마주보고 있던 탄야는 은청의 시선을 가늘게 바꾸었을 것이다.
" 어릴 때 읽었던 것들은 거의 다 버렸는지 그것만 남아있더라. 어려운 단어나 문장은 거의 없는 걸로 기억해.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
무덤하게 중얼거리는 탄야의 가느다란 손끝이 당신이 들고 있는 그림책 표지를 잠깐 매만지듯 쓸어냈다. 어릴 때, 라는 단어를 말할 때의 그의 표정은 애매했는데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테지만서도. 잠시 그렇게 오래된 그림책 표지를 짚어보던 탄야는 그대로 손을 떼어내고 담배를 꺼낸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린시절에 대한 건 그다지 좋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나쁘다면 나쁠지도 모르지. 불이 붙은 담배가 타들어가는 끄트머리를 응시하다가 그가 걸음을 옮겨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 ...일단 알파벳부터 해볼까. "
뒷골목 벽은 전날에 봤던 낙서 위에 새로운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잠시 보다가 탄야가 담배를 문 채로 당신에게 노트와 펜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어보였다.
탄야가 동화책의 표지를 쓸어내리며 하는 말에, 입술을 살짝 벌리곤 '헤에' 하는 소리를 내던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지금은 잘 상상이 되진 않았지만 분명 눈 앞의 설표도 어렸을 적이 있었을테니까. 그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좀 더 환하게 웃어보이곤 했을까? 카리나는 잠시 동화책과 탄야를 번갈아보며 상상을 하다가 살짝 고개를 젓고 먼저 앞장 서서 골목으로 향하는 널 뒤따라 걸어간다.
" 알파벳, 좋지좋지. 금방 배워줄게. "
탄야를 뒤따라 걸어와서 그림이 더해진 벽을 살피던 카리나는 손을 내미는 탄야를 보며 기세 좋게 말한다. 그리곤 의외로 찰떡같이 탄야에게 노트와 펜을 쥐어주곤 카리나 치곤 얌전한 자세 - 두손을 뒷짐을 지고서 - 로 흘깃흘깃 탄야가 무얼 할지 살펴보기 시작한다.
" 아니, 근데 답답하다고 가버리면 안된다? "
데려다주는 건 할테니까. 카리나는 괜스레 자신의 머리에 믿음이 없어지는 듯 슬그머니 탄야의 얼굴을 살피며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답답하다며 가버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지만.
" 자, 탄야 선생님. 알파벳부터 잘 알려주세요. "
분위기도 풀겸 식당에서 했던 것처럼 두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감싸쥐어 양갈래 머리를 만들어 보이며 활짝 웃어보인다.
태어나기를 무뚝뚝하고 차분한 성품이었지만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받으니 이렇게 되어버렸던거지. 귀염성에 대해 답한 것은 그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림책 표지를 쓸어내다가 손끝으로 툭 두드리며 뱉어낸 그의 숨에 달달한 바닐라향이 지독하게 섞여있다. 자신이 글을 배웠을 때를 떠올려본다. 알파벳이 하나씩 적혀있던 카드. 어린 손으로 그림책을 잡아들고 조르면 읽어주던 목소리. 어린 짐승에게 사냥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여물지 못한 어린 손으로 덥석덥석 집어대던 물건들의 명칭을 일러주던 목소리까지. 결코 다정하지 않던 그 목소리는 엄하다면 엄하고 어린 짐승이 견뎌내기 힘든 위압을 담고 있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다정하지도 상냥하지도 않던 그들이었다.
" 글은 반복하는 게 당연하니까. 네 눈에는 내가 그 정도의 답답함을 견뎌내지 못할 걸로 보였다면 유감이야. 이래뵈도 인내심이나 참을성은 형제들 사이는 물론 같은 동종 수인들 사이에서도 내가 으뜸일걸. "
당신에게서 받아든 노트를 펼치면서 탄야는 펜을 쥐었고 곧 펜을 움직여서 노트에 알파벳을 적어내려갔을 것이다. 일정하고 규칙적인 움직임과 종이 위를 스치는 펜촉의 소음이 뒷골목에 울린다. 흩어질 때쯤 다시 뒷골목을 메우는 지독하게 달달한 바닐라향까지. 뒷골목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는 펜을 움직이다가 시선을 들었을 것이다.
" 나는 네가 그대로인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해. "
탄야가 다시 내미는 노트와 펜을 받아보면 부드럽고 깔끔한 글씨체로 알파벳이 처음과 끝까지 써있었고 간단한 단어 몇가지와 함께 읽는 방식이 함께 쓰여져 있었는데 그 모든 내용의 끝에는 「탄야 하멜」이라는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을 것이다.
" 아니, 뭐.. 네가 인내가 적다기 보단 내가 엄청 답답하게 할지도 모르니까. 딱히 나 똑똑하지 않아서. "
탄야의 말에 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 어...? 어어... 그래ㅡ. "
그대로인 편이 좋다는 탄야의 말에 장난스럽게 양갈래를 해보이던 카리나는 멍하니 멈춰선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탄야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신기한 기분인 듯 했다. 그건 아마도 좋은 쪽으로.
" ... 좋아, 이정도야...! "
카리나는 탄야의 제안에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기세 좋게 검정색 가죽재킷의 소매를 끌어올린 카리나는 펜을 잡고는 집중하듯 눈을 부릅 뜬다. 천천히 종이로 다가가는 펜은 얼마나 집중을 하는지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결과는 삐뚤빼뚤 엉망인 글씨체였다. 하지만 알파벳을 적기 시작한 카리나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 봐, 봤어? 내가 글 썼어! 크흐~ "
어린 아이처럼 삐뚤한 글씨를 써내려간 카리나는 종이를 들어 탄야에게 보여주며 씨익 새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어보인다.
한숨보다는 음오아예... 시니컬하게 이 설표의 표현을 빌어보면 어여쁘기만한 인형?🤔 머리길면 머리채 잡히기 좋아서 숏컷이었다는게 지나치게 리얼하다. 맞는 말인데.. 그건 안정하고 있던 동부지역이나...소규모 조직 중에 카리나 친부가 있다는 떡밥을 남겨도 좋다는 뜻이렸다?
그는 그 순하게 생겨먹은 눈매를 가늘게 뜨는 것으로 당신의 말과 행동에 반응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이 배웠던 흐름과 똑같이 알려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조금 덜 엄하고 조금 더 무심한 태도기는 했지만. 글씨를 써서 되돌려준 노트에 글씨를 따라 적어내려가는 당신을 바라보며 탄야는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려 끄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값이 꽤 나가보이는 라이터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있다.
" 세살짜리가 쓴 글씨같네. "
당신이 보여주는, 자신의 글씨 아래에 적힌 삐뚤한 당신의 글씨체를 보자마자 탄야는 거의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보였다. 이걸 펜 잡는 법부터 알려줘야하나, 뭐 거기서부터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담배 끝에 불을 붙히고 그는 바닐라향이 감도는 연기를 들숨과 함께 들이마신다.
" 글씨를 예쁘게 쓸 필요는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좋아, 잘했네. 따라쓰면서 읽는 법도 따라해보자. "
망설이지 않고 튀어나오는 탄야의 대답에 멈칫한 카리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고심 끝에 양심상 내린 결론이 두살 정도 끌어올리는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카리나의 양심이 탄야 앞에선 아직 잘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소심한 대꾸를 한 카리나는 슬그머니 탄야의 눈치를 살피며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 프으~ 역시 나라니까. 식은 죽 먹기지. "
그래봐야 탄야가 쓴 것을 그림을 그리듯 따라서 쓴 것일뿐, 외우지도 못 했지만 일단 잘했다는 탄야의 칭찬에 입꼬리를 한껏 들어올려 새하얀 이를 드러낸다. 지나가던 7살 짜리 아이도 비웃으며 지나갈 것 같은 상황이었지민, 그래도 당당하기 그지 없는 카리나였다. 일단 한발자국 나아간 것이 큰 거라고 여기기로 합리화를 한 듯 했다.
" 좋아! 어디 그것도 금방... "
카리나는 그 기세를 몰아서 단어 읽는 것을 시작하자는 탄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삼십분 가량이 흐르고 난 후의 카리나는 퀭한 눈을 한 체, 평소에는.피지도 않았을 탄야의 담배를 빌려물곤 탄야의 옆에 쪼그려 앉아, 탄야의 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세살이나, 다섯살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당신의 대답을 듣자마자 탄야가 떠올려낸 생각이었다. 평소 모든 것에 무관심한 탓에 흥미없어보이는 낯을 해보이는 주제에 당신에게 향하는 것들은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관심이 생긴다는 것이 이런걸까.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에 흥미가 가지 않아서 정적인 것들에게 관심을 가졌을텐데. " 세살이든 다섯살이든 내 눈에는 거기서 거기처럼 보여. "하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탄야가 중얼거렸다.
30분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뒷골목 벽에 그려져있는 조잡한 낙서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몇개의 담배를 태워냈다. 벽을 응시하고 있는 그 은청의 시선은 당신을 곧장 응시하며 대답하며 살피던 빛이 사라져서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이 무미건조해져 있었을 것이다. 맞물리지 않는 성격이나 분위기만큼이나 다르던 담배 연기는 이번만큼은 똑같이 달달한 바닐라향을 머금고 있었고 그는 제 다리에 기대서 바닥에 앉아 있는 카리나를 향해 무미건조하던 은청의 시선을 떨어트린다.
" 언어라는 건 주변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거니까. 글을 읽고 쓰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한거지. 원래라면 유년기에 익혀야하는 걸 너는 지금 익히는 거야. "
그럴싸한 위로의 말은 아니었다. 다정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그저 현실을 들이대는 문장의 나열들을 입 밖으로 내던 탄야가 여전히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당신의 체온이 닿아오자, 손끝을 살짝 움직여서 당신의 머리카락을 넘겨냈다.
그는 당신의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내렸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어지는 말에 대해서는 생각이라도 하는 양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다. " 그게 보통이었나. " 하고 담담한 어조로 그가 중얼거렸다. 보통 다섯살이 되어야 얼추 글을 읽는다는 게 평범한 거면, 하멜의 기준이 되는 수준이 꽤 높았다는 뜻이 되는데 말이지. 제 형제들이 글을 읽고 쓰는 걸 익혔던 게 몇살 때였나一 아니 자신이 글을 익혔던 때가 언제였지? 탄야는 눈을 가늘게 접어뜨며 떠올려보려 했다.
" 중앙과 동부는 서로 사정이 다르잖아? 옷 속에 나이프나 권총을 지니고 다니는 게 당연시되어 있는 주제에 제 자식들에게 글을 일러주는 중앙의 분위기가 이상한거지. "
무정부 시대로 접어든 이상 글이라는 건 의미가 없어졌는데 그네들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양, 혼돈과 혼란이 잦아들자마자 자식들에게 글을 익히게 했고 어느순간부터 그것이 너무 당연시 되어있었다. 덕분에 지역과 지역의 분위기와 격차가 커졌다는 게 그로서는 썩 반갑지 않았다. 먼 곳을 보며 당신의 머리를 넘겨주던 그의 가느다란 손끝이 잠시 멈춘다. 급작스레 닿아오는 분명한 타인의 체온에 물러나듯 손끝을 떼어내고 그는 당신을 바라보다가 기대있는 당신의 턱 밑에 자신의 손을 대고 끌어올렸을 것이다.
" 반복하다보면 익힐 수 있어. 이제 시작해놓고 벌써부터 그러면 안되지. 무리라고 생각하면 그만둬. 강요는 안할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