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뼈의 통증이 허리를 타고 전신 곳곳으로 퍼진다. 눈 앞이 하얘지며 일어서기 힘들다. 무엇보다 더 힘든 건 이런 자신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츠쿠시였다. 물론 자신이 아는 그녀는 이런걸 비웃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아는 건 그녀가 전투할 때의 모습 뿐 실제 그녀의 성격은 모른다.
선우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을 보아 심성은 고운 친구라 생각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부스터를 한순간 켜서 반동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검을 보니 아무래도 훈련을 위해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훈련하려고 오셨나요?"
아직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 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동료에게 이런 모습 보이는 것은 굉장히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나 아프다. 아공간에서 진통제를 하나 꺼내 먹었다.
이명은 전쟁광. 아마데우스가 처음 입단한 레지스탕스의 간부. 행동대장으로, 주된 임무는 반세븐스 단체를 향한 테러 활동이었다. 사실 그녀가 속한 레지스탕스는 그리 극단주의적인 성향은 아니었지만 에스메랄다가 강력히 주장해 학대당하는 세븐스 구출과 비능력자에 대한 테러를 병행했다. 아마데우스에게 무술과 무기 다루는 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성격이 난폭해 조금만 거슬렸다하면 손찌검부터 했다. 세븐스 우월주의자로, 비능력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강해 이 세상엔 세븐스만이 존재해야한다는 극단적인 사상을 가졌다.
세븐스는 에메랄드빛 액체를 생성해 그것을 굳히거나 조종하는 능력. 이름은 'Danse mon Esmeralda'(춤을 춰요, 에스메랄다). 액체를 생성해 송곳처럼 날카로운 모양으로 굳혀 벌집으로 만들거나, 사람의 내부로 액체를 집어넣어 터뜨리는 식으로 지극히 공격적인 방향으로 세븐스를 썼다.
말해준게 도움이 됐다는 쥬데카의 말에 잠잠하던 그녀의 얼굴이 순간 미간이 꾸깃 했다. 그리고 톡 쏘아붙이는 말 한 마디.
"너 좋으라고 도와준 거 아니야."
애초부터 그 아이를 위한 선물이 아니었으면 부탁 자체를 거절했을 테니까. 그래도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으쓱이고 허락 받은 리본을 예쁘게 달아줄 뿐이었다.
"아. 그걸 이제 깨달았네. 그래. 그거야."
밖으로 나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물으니, 이제야 들어줄 만한 대답이 나왔다. 그 때까지 뚱하던 얼굴에 씨익 웃음이 번진다. 상쾌한 웃음이라기보단 등골이 오싹한 웃음 아니었을까. 그녀는 성큼 걸어 쥬데카의 앞에 다가섰다.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려 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너와 그 아이가 무슨 사이든 뭘 하든 신경 안 쓸 건데. 그 아이에게서 네가 괴롭혔다던가 힘들게 한다던가- 그런 소리가 한 번만 더 나와 내게 들린다면. 넌 내가 주는 술잔을 마실지, 죽겠다는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맞을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거야. 기억해두라고. 쥬데카 뷔시카리오."
말이 끝나면 손을 떼고 그를 지나쳐 갈 듯이 옆을 지나가다가 돌연 등짝을 후려쳤을 것이다. 운이 좋아 피했다면 맞지 않았겠지만. 맞았다면 꽤나 얼얼한 감각이 등 한복판에 남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돌아보면 자켓 주머니에 손을 꽂고 비딱하게 선 그녀가 뻔뻔한 얼굴로 그러고 있었겠지.
"뭐. 할 말 있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냉큼 들어가서 그 선물이나 갖다 줘."
그녀는 바로 들어가지 않을 듯, 골목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향에 서서 쥬데카를 보고 있었다. 그가 가면 비로소 움직일 듯이.
모든 일의 발단은 스치던 대화 때문이었다. 안드로이드 정비공에게 의뢰를 맡기고 돌아가던 중 지나가던 마을 주민이 11일이 다가온다며 이번엔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내기를 하자니, 너는 그래놓고 작년에 하나도 못 받았지 않았느냐와 같은 처음 듣는 이야기꽃을 떠들썩하게 피우며 지나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개인적인 기념일인가 보다 싶어 무시하듯 지나갔으나 가판대에 프로모션으로 놓인 막대 과자나, 쿠킹 클래스가 즐비하니 서구권 문화는 고사하고 폐허 속에 홀로 갇혀살던 이스마엘의 입장에선 대체 무슨 날인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개인실로 돌아가 11일에 대해 검색해 보니 알지 못하는 기념일을 페이시의 음성 출력 시스템이 줄줄 읊는다. 동양권의 기념일이라. 그렇다면 제는 뭔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단순히 막대 과자만이 아닌 무언가 더 준비할 것이 있나 싶은 고민은 고사하고 주변에 아는 동양권 문화를 가진 사람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이스마엘은 제의 개인실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 찾아왔다고?" "응."
이스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제는 한숨을 쉬며 모로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생각 없는 건 누굴 닮은 건지.. 그래, 그렇지만 달리 부정할 수는 없겠어. 여 또한 작년까지 제법 많은 걸 받았으니." 이스마엘은 제의 말을 아예 무시하기로 했다. 몇 개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무얼 더 받았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뭘 받았는데?"
제가 기억을 더듬더니 손가락을 퉁겼다.
"쇠꼬챙이에 꽂힌 세븐스 사형수." "……." "아, 죽은 건 아니고.. 아직 살아있었지. 의미 있는 선물이었어. 그날은 쓸데없이 힘을 안 빼도 됐거든." "됐다. 내가 너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지."
이스마엘은 질색하며 자리를 뜨려 했다. 아, 윤리관 뒤틀린 사형 집행인에게 물어본 내가 멍청하지. 페이시로 더 검색하는 게 훨씬 낫겠다 싶어 몸을 돌리려던 찰나 날카로운 손톱이 이스마엘의 어깨 위에 올라가더니, 제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마저 들어보는 건 어떤가? 지금까진 사담이었고, 본론으로 넘어가야지, 응." "얘기해 봐." "막대 과자 말입세, 포키 말이야. 연인끼리나 친한 사람끼리 서로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이지. 직접 만든 막대 과자가 유달리 의미가 있긴 하고 말입세. 정성이 들어갔지 않은가."
제는 주변을 슬슬 살피더니, 비밀 얘기를 하듯 이스마엘의 귀에 손을 가까이하며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 직접 겪은 것인데……." 이어지는 얘기에 이스마엘은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을 보냈으나 제는 아랑곳 않고 눈을 휘더니 자신의 한쪽 공막이 물든 눈가를 툭툭 건드렸다.
"거짓 하나 보태지 않았다 자부할 수 있네." "네 연애사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여도 사람 대신 기계와 연애할 것 같던 자네의 연애사가 단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네만 이리 도와주잖나. 그래서, 만들 겐가 말 겐가? 내 특별히 도와주도록 하지." "……만들고 싶긴 한데, 정말 그래야만 하겠어?" "잘 들어."
제가 양쪽 어깨를 틀어쥐었다.
"어떻게 보면 순익을 위한 상술 같지만 인간의 욕망이 반응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기념일입세. 다른 말로 말해서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날인데, 그걸 날릴 텐가? 고작 부끄러움 하나 때문에? 저질러보고 나중의 내가 수습하며 과거의 나를 *나게 욕하는 것이 인생이지. 야, 20살. 청춘 날릴 거야? 불쌍하네. 내가 가디언즈였으면 불쌍해서라도 너 체포 안하고 도와줬겠다."
이스마엘은 악마의 꼬임에 넘어갔노라 생각했다. 그냥 직접 만든 막대 과자를 주면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니냐 혹자는 지적하나 막상 그 일을 시행하는 것엔 대단한 용기와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그래, 시행착오. 이스마엘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수난을 떠올렸다. 본디 제과라는 것은 상냥함과 달콤함으로 포장되어 지극히 사랑스러운 취미로 각광받는 듯싶었으나 현실은 지옥의 불길로 반죽을 태워버리는 오븐과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반죽, 중탕 온도 하나 잘못 맞췄다고 맛이 바뀌는 초콜릿, 고작 몇 번 더 쳤다고 사람이 먹을 것이 되지 못할 경도를 보여주는 머랭의 연속이었다.
오죽했으면 이른 아침에 시작했던 제과가 초저녁까지 이어졌고, 제는 이스마엘을 보며 너는 이 세상에 밀키트가 있음과 연애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은 지금 스스로의 역량을 배우게 된 것에 대해 무한히 감사하라 했을까.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 만들어낸 과하게 달지 않은 막대 과자와 펄 슈거가 박힌 머랭 스틱은 제의 까다로운 입맛을 통과했지만, 당분간 과자류는 쳐다도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시간이었다. 시간은 절대 이스마엘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포장을 마쳤을 땐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고, 차마 밀가루요 초콜릿이 범벅인 거지꼴로 갈 수 없어 준비를 마치고 나온 개인실에서 목탄을 마주쳐 다짐을 했을 때는 9시, 마침내 손가락 반 마디만 한 목탄이 사라졌을 땐 이미 12시가 넘어버린 지 오래였다.
멍청이. 그냥 막대 과자만 주면 될 걸 가지고. 스스로가 제법 뻔뻔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도저히 문을 두드릴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래도 되나? 정말? 늦어버렸다고 실망하면?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사실 밀가루에 알레르기가 있다면? 이런 걸 못 먹는다면? 아, 맙소사. 내가 차라리 안드로이드였다면! 그래서 감정 회로를 조정하거나 칩셋을 초기화할 수만 있다면! 과거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수줍음과 조급함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문 앞에 두고 도망칠까? 그랬다가 다른 누가 채가면? 불현듯 제가 귀에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저질러보고 나중의 내가 수습하며 과거의 나를 *나게 욕하는 것이 인생이지. 이스마엘은 손에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려다 보다 뒤로 숨기며 심호흡을 했다. 한 손을 뻗어 노크흘 때는 분명 조심스러웠는데,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는 철을 두드리듯 요란한 것 같았다.
"……아, 리오 씨. 그러니까, 그게.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속에서는 차라리 노크만 하고 도망치지 그랬냐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새하얘지는 머릿속을 뒤로 시선을 살금살금 피했다.
"그러니까……."
고이 들었던 상자와 그 위에 얹힌, 좋은 재질의 엽서로 감싸고 종이 끈으로 묶어낸 손바닥 만 한 캔버스를 쥔 팔을 조심스럽게 등 뒤에서 뻗어 내밀어 안겨줄 적, 이스마엘은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싶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제, 주고 싶었는데……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던 나머지.. 미안합니다. 너무 늦었지요……."
연두색 눈만 보면 금방이라도 울 듯이 일렁였지만 막상 얼굴 전체를 보면 수줍음 탓이었다. 그러니까─ 더듬거리던 말을 뒤로 입술을 앙다문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는 알지만 잠깐 용기가 필요했던 듯싶다.
"그, 그러니까……."
자그맣게 앓는 소리를 뒤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덮어 가렸다. 당신과 달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과 직접 만든 과자가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하며.
"당신이 좋으니까, 소중한 만큼챙겨주고, 싶어,서……."
쥐죽은 듯 작아지는 목소리. 수줍음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담는 새벽이었다.
>>184 내가 이 설정을 정말 많이.. 풀기 그랬는데 응.. 타고나기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자기 자신은 성별이 없는 무언가로 생각하고 있고 찐으로.. 성별이 없어.. 왜냐면 영원한 10대의 모습과 목소리를 가지기 위해서.. 여러 개조를 거친 결과 음오아예 세븐스 인권 없는 만큼 제 인권도 없게 되었다.. 우리가 고전애니에서 보는 안드로이드나 개조인간의 몸과 같이 매끈하다고 보면 될듯
다른 이들이 우정 삼아, 애정 삼아 기다란 초콜릿 발린 과자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홀로 은빛 달 아래에 앉아 기다란 육포를 안주삼아 고독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모두 옛날 일이기에 잊으려 했지만, 원래 인간의 기억은 장난이 심해서 잊으려 하면 더 강해지는 게 너무나 얄궂었다.
"연인이라..."
그는 평소에 즐기지도 않는 독하기만 한 싸구려 술을 들이켰다. 뜨겁게 타는듯한 느낌이 식도를 자극하지만, 곧 다른 감각들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신경 끝자락이 곱아드는 것 같이 무감한 느낌 속에, 괜한 추억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솔직히, 그런 녀석은 사흘도 못 지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울고불고 할 것 같았다.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던 그녀는 목덜미에 7자가 없었으나, 그게 있는 이들 만큼이나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해바라기처럼 웃는 모습은, 오히려 그녀를 더더욱 받아들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거절도 했었다. 설득도 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다고, 꼭 해낼거라고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이야기하는 그 목소리도, 미소도, 너무나 거북했다.
그 시선 밖에서 비웃기도 했다. 제까짓 게 하루이틀이지. 일주일이지. 그런 말을 하며 동료들 앞에서 그 훈련병을 무시했다.
허나 결국 두 달이 넘는 시간동안 행해진 지옥같은 훈련을 마친 그녀는, 조금 초췌해지고 먼지가 묻었을 뿐 여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보급 간식 잘 받아간다." "제기랄."
젠장. 내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여러 의미에서 우리를 놀라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신체적 여건이 좀 딸리더라도 끈기있게 도전하는 모습에 감동하는 다른 교관들도 있었다. 난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난 두려웠던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게 되는 날이 오는걸, 나도 모르게 두려워했었다.
한 명의 대원으로써 조금씩 작전과 훈련에 익숙해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천천히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어느덧 한 명의 병사. 혹은 그 이상의 역량을 갖춘 그녀가 내게 개인적으로 대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왜 나였을까. 아직도 그건 모르겠다.
하사님, 하사님 하며 마치 나이차 나는 여동생마냥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게 귀찮아서 골탕을 먹이려고도 들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드는 죄책감은 내 손을 막아섰고, 결국 어느 순간쯤 가자 내 의도와는 달리 점점 더 그녀에게 관대해져만 가는 것을, 내 동료는 물론 나 자신까지 지각하게 되었다.
동료 한 명을 적의 탄환에 잃었다. 조금만 비껴갔으면 방탄복에 맞았을텐데. 그럼 살았을텐데. 세상은 너무 지독했다.
동료의 죽음에 내가 두려워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일 때, 마치 자신은 두렵지 않다는 듯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이성에게 포옹을 받았다. 난 그저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이 한심해졌었다.
어느샌가, 우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요즈음엔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아주 개인실까지 멋대로 들여와서는 하루종일 달라붙어 있곤 했다. 이상했다. 왜 귀찮거나 걸리적댄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까. 익숙해졌나? 그런 것 치곤 좀...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왜 그게 그렇게 들뜨는 거였을까.
그 들뜸을 해소하고 싶어 본인에게 그 심정을 토로했다. 아무 말 없이 다시 한번 품에 안기고선, 그 다음은...
허무한건지 만족한건지 모를 기분을 온 몸에 감아두고, 내 팔을 베개삼아 누운 그녀의 살짝 볕에 그을린 피부가 밤공기에 닿지 않도록 모포를 끌어올리다, 문득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살아남는게 고작인데, 끝난 이후를 묻는다니. 목숨이 먼저 끝날 판에.
그녀는 화가가 꿈이라고 했다. 이전에도 몇 번, 그녀가 무언가를 열심히 그려대는 걸 스쳐지나가며 본 적은 있었다. 모든 게 끝나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풍경과 사람들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내가 그녀와 항상 함께하며 지켜달라고 말했다.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받아들였었다.
당시 내 개인실에 두었던 랜턴은 낡아빠져서 종종 지멋대로 불빛이 깜빡이곤 했다.
지금은 그 랜턴 불빛에 의존해, 메모장에 그려진 내 초상화에 대고 나홀로 달을 술친구 삼아 건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