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시아였다면 졸졸 쫓아다니면서 묻지도 않은 것들을 얘기해주며 방해인지 도움인지 모를 역할이 되었겠지만. 레레시아는 그러지 않고 잠자코 근처에 있을 뿐이었다. 그냥 있진 않고 진열장을 지나가며 하나 하나 눈으로 훑고 있었다. 그러다 한 곳에 멈춰서 무언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 때 쥬데카의 질문이 들렸다. 그녀 역시 힐끔 눈길만 한 번 주고 대답했다.
"전제 조건을 확실히 하고 물어줄래? 대뜸 그렇게 물으면 대답 이전에 생각 자체를 못 한다고."
그 전제 조건이라 함은 누가,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왜, 에 대한 것이다. 뭐. 말하지 않아도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고 있긴 한데.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건 일종의 심술이었다.
"대충 예상을 해보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정말로 어디서 대충 주운 물건을 갖다주는게 아닌 이상, 어떤 물건이든 그것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마음이 들어간 거니까. 그걸 못 알아보는 상대가 나쁜 거지."
정말로 지뢰가 될 만한 물건이라면 고른 사람도 조금은 미안해 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적당한 듯 성실하게 대답을 해준 그녀는 점원에게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을 포장해 달라 손짓했다. 그리고 값을 치르며 말을 덧붙였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잘 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어때. 저번에 보니까 가끔 꿈자리가 사나운 모양이더라. 숙면에 도움이 되는 향이나 베개나 큰 인형 같은 거, 그런 건 어떨까 싶은데."
오르골이나 수면등도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며 점원으로부터 작은 종이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쥬데카를 돌아보며 어쩔거냐는 시선을 보내었다.
전제조건이라... 그러고보면 확실히 이야기한건 아니었으므로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목적 등을 이야기하려다가 성의껏 대답해주는 목소리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 성의껏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너도 열심히 고르지 않으면 안 되겠지. 선물에 담긴 마음을 알아보지 못한 쪽이 오히려 나쁜 거라는 말에는 그럴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확실히 그런 것도 괜찮겠군요."
악세서리는 좀 더 알아간 다음에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치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선물로 말미암아서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레레시아의 말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도 있었다. 확실히 물어보길 잘 했어. 마지막으로 한 번 정도 악세사리들을 둘러본 너는 결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오늘 말고 다음번에 다시 오는 걸로 하겠습니다."
역시 이런 부분은 함께 와서 함께 고르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주문과 포장을 마친 레레시아를 쳐다보았다. 어쩔거냐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는 충분했겠지. 베개든, 인형이든, 향이든간에. 아마 먼저 가게를 나설 레레시아의 뒤를 따라 나서며 점원에게 살짝 미소지어 인사를 건네려고 했겠지.
그대로 아픔이 완전히 가실 때까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사 바람대로 되는 일 없다고, 치명적인 엉덩방아를 찧어 버린 선우의 뒤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을 꼽자면 상대는 선우가 이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전부를 지켜보지는 못했다는 사실 정도? 츠쿠시가 막 훈련장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과정은 끝나고 결과만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광경을 다 보았더라도 그것으로 비웃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 역시도.
바닥에 앉아 버린 선우의 뒤로 천천히 다가와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는 한 손에 커다란 칼을 들고 있었다. 등이나 허리춤에 차지 않고 들고 있다면, 아마 이쪽도 훈련장의 목적에 걸맞은 일을 보러 온 것일 테다. 첫마디 이후로는 아무런 말 않고 그대로 묵묵히 던지는 시선만 몇 초간 꾸준했다. 할 말을 찾는 것인지 속 모를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한 박자 늦게서야 몸을 조금 낮추고 붙잡으라는 듯 제 손을 내밀어 온다. 선우가 맞잡는다면 그대로 일어나기를 도울 테고 잡지 않더라도 무안한 기색 없이 손을 거두었으리라. 이윽고 과언한 입 열려 당연한 말을 어줍게도 한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가끔 좋지 못 한 꿈을 꾼다는 건 그다지 알려주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알게 될 테니 지금 숨긴들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모르쇠하다가 이상한 걸 선물하게 하는 꼴은 더 보기 싫으니 던져준 정보였다. 다행이라면 다행히 쥬데카는 그걸 납득한 듯 했고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가."
기왕이면 둘이 같이 오던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그녀도 점원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악세사리점을 나와 사람들 은근히 북적이는 골목길을 걷는다.
나올 적에 그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응시하다가 오는 걸 보곤 걷기 시작했겠지. 한쪽 손목에 작은 종이봉투가 걸려 걸을을 뗄 때마다 달랑거린다. 가는 동안 그녀가 먼저 말을 걸진 않았다. 쥬데카가 물어오면 대답은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저 터벅터벅 걸어서, 이번엔 꽤나 규모가 있는 팬시점 앞에 선다.
"뭐. 여기면 되겠지."
이번엔 바로 들어가지 않고 가게와 쥬데카를 번갈아 보고서 작게 중얼거린다. 그런 후에야 들어가자며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간다.
그 안은 그녀가 예시로 들었던 것들이 곳곳에 있고 좀 더 잡다한- 소품이라던가, 그런 것들도 있는 곳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어디부터 봐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곳일 지도. 그녀는 라라시아와 온 적이 있었으니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다.
"인형은 저기. 향 종류는 저쪽. 다른 것도 대충 근처 가면 다 보일 테니까 둘러봐."
건성으로 가리키는 것은 분명 심술이렷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히 뭐 어려울게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파티마는 프란시스카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랐다. 세븐스보다 위험한건 비능력자라니. 공적인 자리는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도 함부로 꺼냈다간 매장 당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너무나 무시무시한 발언이었기에 파티마는 몸을 덜덜 떨며 프란시스카를 말렸다. 만약 오두막 밖에서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이 가문에서 프란시스카의 위상은 완전히 박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시스카의 얼굴과 기세는 당당했다.
"파티마, 인간이 같은 인간을 박해하는건 수많은 죄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죄야. 정말 누군가가 세븐스에게 저주를 내렸다면, 그건 신이 아닌 같은 인간인 비능력자가 내린거라고! 같은 인간이 내린 저주는 저주라고 할 수 없어! 그건 그저 악담에 불과해. 신이 내린 저주와 달리 절대적인 힘도 법칙도 없는 악담. 영원하지 않고 언젠간 잊혀질 악담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순간, 파티마의 머릿속으로 큰 벼락이 떨어진듯 강렬한 섬광이 스쳐지나갔다. 오두막에 틀어박혀있던 동안, 그녀는 스스로를 저주 받은 존재라고 여기며 세븐스는 신에게 버림받은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내려진 저주가 그저 악담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뜻일까? 파티마의 눈에 난생 처음으로 희망이 비춰졌다. 그러나 그녀는 비능력자인 프란시스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영문 모를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언니는 두렵지 않아? 내가, 아니... 세븐스들이?"
프란시스카는 픽 웃으며 파티마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파티마, 넌 누가 뭐래도 내 소중한 동생이야. 난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거든. 사람들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저 갓난아기를 보며 사람을 해칠 괴물이니 뭐니... 상식적으로 말 못하는 갓난아기보다 다 큰 어른이 더 무섭지 않니?"
"그리고 납득이 안됐을 뿐이야. 쪽수가 적으면 괴롭히고 보고, 남을 증오하지 않으면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인간들이. 그래서 난 너희가 두렵지 않아."
이 말에 프란시스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풍파가 느껴졌는지 파티마는 숙연한 얼굴을 하며 언니의 손으로 자신의 손을 겹쳐쥐었다. 프란시스카는 동생의 이마에 입을 살짝 맞췄다. 친애의 입맞춤에 파티마가 얼굴을 붉히며 언니의 입술이 닿은 이마에 손을 올리자, 프란시스카는 결연한 얼굴로 파티마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파티마, 같은 식칼이라도 요리사가 쥐면 좋은 요리를 만들게 되지만, 살인마가 쥐면 생명을 해치게 돼.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너에게 달려있어. 너는 사람들을 해치고 싶지 않지?" "...응." "내가 아까 네 세븐스를 축복이라고 한거, 기억하지? 그리고 또 뭐라고 했었는지도 기억 나?" "세상을 이롭게 할 힘이라고 했어." "네가 생각하는 이로운 세상이 뭐니?" "싸움이 없고, 모두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세상..." "넌 어떻게 하고 싶어?"
파티마는 울먹거리며 어느새 눈에 맺힌 눈물들을 소매로 닦아내었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파티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프란시스카에게 말했다.
"언니, 난... 모두가 싸우지 않고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프란시스카는 동생을 품에 안았다.
"그렇다면 움직여야 해. 너희가 태어나자마자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찍고, 평범한 일상생활을 이어나갈 기본적인 권리조차 빼앗고, 나아가 같은 세븐스들을 이용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자들, 그들을 물리치고 세상에 사랑을 가져올 수 있는건 비능력자들이 아닌 너희 세븐스라는걸 기억해. 기회와 희망은 행동하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이니까."
역시 직접 보고 고르는 것보다 좋은 건 없겠지. 레레시아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너는 그녀를 따라 걸으며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봤다. 누군가에게 줄 선물인가? 아니면 본인이 쓸 물건? 잠시 생각해보지만 정확한 답은 내릴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했던 걸 생각해 보면 선물일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도. 얼마나 걸었을까, 아까보다 큰 규모의 가게 앞에 멈춰선 너는 가게의 바깥을 한번 살폈다. 음, 전혀 모르겠다. 일단 여기면 되겠지라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녀를 따라 가게로 들어서니 아까보다 확실히 더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잔뜩이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뭐부터 봐야할지 모를 정도.
"감사합니다. 그럼..."
그런 걸 아는지 대강이라도 물건의 위치를 알려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손에 집은 건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듯한 향초, 향초를 이리저리 보던 너는 이번엔 시선을 인형 쪽으로 돌렸다. 이런저런 인형이 많았지만 역시 시선이 가는 건 귀엽게 만들어진 동물 인형들. 인형들을 살짝씩 만져보며 촉감을 살피던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정한 듯 몸을 돌렸다.
"여기, 이 향초랑, 이 토끼 인형으로 하겠습니다."
꽤 커다란 토끼 인형, 보통의 토끼와는 다르게 검은 눈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굉장히 부드러운 섬유로 만들어진 인형을 건네받고 나서 값을 치룬 너는 레레시아를 돌아보았다.
이곳에서도 그녀는 대강의 위치를 알려준 것 외에는 고르는 것에 어떤 첨언도 해주지 않았다. 근처의 잡화들을 이것저것 건드려보다가, 고르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근처에 시선을 주며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가만 보자. 전에 라라가 뭐 필요하다 했던 거 같은데. 재봉에 쓰이는 리본과 레이스가 걸린 곳 앞에 있던 그녀는 다 고른 듯한 쥬데카의 목소리에 리본 몇 줄을 쥐고 돌아보았다.
"어. 벌써 골랐어? 뭐 마음에 드는게 있었나 봐?"
아까 거긴 한참 고민하더니.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고른 물건을 계산하고 담은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런 다음 쥬데카가 고른 인형과 향초를 보았다. 향이야 개인 취향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토끼 인형이라. 토끼인가...
"센스가 참 독특하구만 그래."
인형과 쥬데카를 번갈아 보고 짧게 내뱉은 말은 그랬다. 별 의미는 없었을까. 잠깐 기다리라며 그녀는 방금 받은 봉투에서 리본을 꺼냈다. 짙은 녹색과 살짝 반짝이는 밝은 녹색의 폭 넓은 리본 두 줄이었다. 알맞은 길이로 잘려있는 리본을 들고서 그가 고른 인형에 묶어줘도 될지 묻는다. 허락한다면 두 줄의 리본을 겹쳐, 인형의 목을 감싸듯이 둘러 예쁜 리본을 메어주고. 거절하면 그럼 네가 묶으라며 리본을 건네주던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가자며 휙 돌아섰겠지.
"그래서, 아직도 내가 말한 이유는 생각나는게 없고?"
팬시점 밖으로 나와 헤어지기 전,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듯 물었다. 딱히 기대는 없지만 대답 여하에 따라 이번엔 뭔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슬그머니 들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선물을 해주고 싶다. 라는 감각으로 나온 거라서 악세사리점에서는 조금 고민을 했었다. 막상 치장품을 사주려니 좀 더 도움이 되는 선물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 주의를 기울여서 이야기해준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선물을 받는 사람이 어떤 점에서 조금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는지 들을 수 있었던 건 큰 수확이었다. 그렇게 목표가 뚜렷해지니 고르는 것도 빨라질 수밖에, 그래도 대충 고른 것이 아니라 나름 숙고해서 골랐다. 향이 너무 강하면 잠을 잘 때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고, 안고 자기에 너무 크거나 자그마하면 안 되니까 적당한 크기를 골랐고, 촉감을 많이 고려했다. 부드러운 걸 만지작거리면 기분이 좋아질거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까? 독특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토끼 인형 많이 사가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드러운 인형을 한 번,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리본을 인형에 묶어줘도 괜찮냐고 묻는 레레시아를 한 번 번갈아 본다. 당연히 괜찮다고 대답하곤 리본이 묶인 토끼 인형을 빤히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나가는 레레시아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지난번에 이스마엘...씨가 했던 말이랑 관련된 겁니까?"
지난번이라 함은 레인을 마주친 임무에 나서면서 이스마엘이 푸념하듯 레레시아에게 이야기했던 때였다. 일단은 곰곰히 생각해봤을 때. 이번에는 그녀 앞에서 자주 웃지도 않았고, 뭔가 말에 반발한다거나 한 것 같지도 않았고, 이것저것 캐묻는다거나...그런 것도 없었고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어째 좀 까탈스러웠으니 오늘 일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거슬러 올라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