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이 컸다는 점에서는 불행이지만, 사상자가 없고 연쇄폭발로 한번에 시체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일까. 어쨌든 적의 병력은 일거에 줄어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라고 해야 하나. 부스터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보고 너는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잠깐만... 다행스럽게도 카시노프의 통신으로부터 들려온 이름은 네가 우려하던 이름과는 달랐다. 애초에 생김새부터 다르긴 했지만. 너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고갤 끄덕이며 총구를 겨누는 그의 모습에 잠시 드러났던 얼굴은 바로 바이저 마스크로 덮였다. 검은 광택을 내는 바이저 너머로 비추는 라이너스의 총구를 노려보며 너는 땅을 박찬다.
"개체명은 라이너스, 카시노프가 뒤에 있는 걸로 보입니다. 배제를 목표로 교전하겠습니다."
소매를 따라 흘러내린 체인은 지난번과 다르게 검은 광택으로 번들거렸다. 땅에 끌리며 기이한 금속성의 파열음을 내며 불똥을 튀기는가 싶더니, 불꽃이 점차 피어올랐다. 그 끝부터 불길을 업은 체인은 네 손이 움직이는 대로 궤적을 그리며 라이너스의 다리를 휘감으려고 했다.
통증이 있나, 당신도 아픔을 느낍니까? 같은 인간이면서도 이렇게 우리는 사상이 다른가봅니다. 이스마엘은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 밀려나든 말든 상관 없다. 다음에도 얼굴이고, 그 다음에도 얼굴이다. 길거리 싸움질에서 필요한 건 체면이 아니다. 네가 그렇게 얻어 터졌음을 거울을 보든 썩은 물을 보든 알아채 두고두고 곱씹고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다. 물론 부상이 덤이 되면 좋다.
비슷한 형태. 이스마엘은 물살을 헤쳤다. 휩쓸렸으나 금세 빠져나오려 시도했다. 레이버의 스페셜 스킬을 따라했으니 그 상황에도 있었던 것인가? 대체 얼마나 따라다닌 거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버스트도? 이스마엘은 침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심호흡.
"내가 이 악물랬지."
염력을 통해 다시 거리를 좁혔다. "아는 걸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된다고 해야 알아듣나?" 멱살을 부여잡으려 했다. 그리고 또 얼굴을 후려치려 들었다. 집요하게, 또 집요하게. 나이프는 찔렀던 곳을 다시금 찾아내 찌르려 시도하며.
지금의 레인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 들어 그녀는 이 이상 말하기를 관두기로 하였다. 귀를 닫은 이에게는 어떤 말도 닿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할까. 그녀는 입을 다물고 검을 들었다. 버스트로 레인의 무장을 일시적이나마 다운시켰으니 얼마간은 상대할 만 할 것이다.
레인은 보검의 형태를 바꾸더니 레이버가 썼던 기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눈에 보일 만큼 열화된 모양새였기에 저 정도는 몸으로 돌파 가능하리라. 단지 저 물살에 휩쓸리지만 않으면 되겠지. 그녀는 검을 일시적으로 늘어뜨려 채찍으로 변모시켰다. 무기를 정면에 휘둘러 소용돌이를 그대로 돌파하면서 레인에게 달려들었다. (잔여체력 2500)
비명은 없다. 분명 전신이 고통에 휩싸였으나. 그것은 너무나 멀고도 아득한 감각이었다.
레레시아의 맑은 금빛 눈동자가 레인을 똑바로 향하였다. 그 시선 뒤로 독액을 끈적하게 두른 채찍이 휘둘러지며 레인의 목을 휘감고 부식시키려들었다.
세븐스와 비능력자는 결국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어 있다. 서로 이해할 수 없어 파멸을 향해 달려갈 거라고…….
아, 통렬한 진실이다. 그는 상황도 잊고 순간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길을 잃은 것처럼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모르게 된다. 돌고 도는 의미 없는 분란과 증오의 굴레로부터 과연 무언갈 찾아낼 수나 있을지, 처음부터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지긋한 후회가 들어 온다. 하지만 그렇기에 걷게 되는 길이 있는 법이다.
"반복되어 온 파멸과 증오라 할지라도, 지금껏 걸어온 길에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입 근처에서 속삭이며 맴돌았다. 정신을 집중하여 레인에게 근접해 손목 장치를 노리고 검을 찌르려 했다. 찌르는 데 성공한다면 검날을 통해 예기를 흘려 마구 헤집으려 했을 테고. 자신의 능력이 빼앗기게 된다면 곤란한 상황이 되겠다는 감상이 들었지만 강행할 수밖에 없다. 카피에 성공하게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지금은 전투에 임하는 데만 집중하고자 한다.
<레인 조> 이스마엘은 물론이고 레레시아 역시 타이달 웨이브에 흽쓸렸으나 다행히 물에 잠기진 않고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뒤이어 이스마엘은 레인의 멱살을 잡았고 얼굴을 후려쳤다. 이내 얼굴이 싸대기를 맞은 것처럼 옆으로 돌아갔으나 레인은 이를 꽉 악물고 자신에게 찌르는 나이프의 감각을 느끼면서 그녀를 강하게 뿌리쳤다. 허나 이어 레레시아의 채찍이 레인의 목에 감겼고 독 기운이 레인을 습격했다. 목 부분을 감싸고 있는 무장이 부식되었고 그 때문에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편 그녀의 어깨의 부스터의 불이 다시 돌아왔다. 일단 목의 장갑이 부식되어 부서지면서 채찍이 느슨해졌고 그 틈을 이용해 레인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편 츠쿠시가 레인의 손목 장치를 노리고 검을 찌르긴 했으나 손목 장치는 아주 가볍게 츠쿠시의 공격을 튕겨냈다. 이어 씨익 웃으면서 레인은 그 상태로 츠쿠시의 몸을 잡고 손목 장치를 그녀의 몸에 겨냥했다.
"의미 따위 없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그것을 뿌리뽑기 위해서 어느 한 쪽은 멸해야만 해. 알겠어?"
이내 손목장치의 빛이 츠쿠시의 몸을 비추고 스캔을 시도했다. 이대로 가면 아마 스캔이 100% 일어나지 않을까?
*카운터 판정. 스캔 시작. 다이스를 1~3으로 2번 돌려서 한 번이라도 3이 나오면 뿌리치기 가능. 허나 뿌리치지 못할 시 레인의 페턴에 만상일도 추가. 뿌리치기 성공시 반격 가능. *다른 이들은 별개로 공격 가능. 단 공격을 포기하고 마찬가지로 다이스를 1~3으로 1번 돌려서 3이 나오게 될 시 츠쿠시를 구출 가능.
<마을 조> 레이먼드가 열심히 교란하는 듯 했으나 안타깝게도 라이너스는 눈길을 주지 않고 그 총알을 몸으로 맞았다. 조금이라도 아파할법도 하지만 아파하지 않는 것이 그가 평범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내 선우의 소총이 라이너스를 노렸지만 라이너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뒤이어 쥬데카가 불길은 업은 체인을 이용해 라이너스의 다리를 노렸다. 다른 것에는 그 어떤 것도 꿈쩍 않던 라이너스였으나 '불꽃'을 보더니 순간 몸을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내 다리가 휘감겼고 잠시 고통스러운지 다리를 꿈틀거리면서 겨우 빠져나온 라이너스는 쥬데카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어 라이너스는 쥬데카를 잠시 바라보는 듯 하다 다리춤에 차고 있는 '섬광탄'을 하나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그것은 땅에 철퍼덕 떨어졌고 이내 강한 섬광을 내면서 주변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
허나 라이너스에게는 그 섬광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섬광탄 공격 - 회피 실패시 50%의 확률로 (다이스 1~2로 굴려서 1이 뜨면 무사하나 2가 뜨면 상태이상) 시력 저하 상태 발동. 이 상태이상에 걸리게 될 시 2턴간 명중률이 1/3로 떨어지게 된다. (명중 다이스 1~3을 굴려서 1이 뜨면 명중하나 2와 3이 뜨면 빗나감 처리)
그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투에 집중했다. 이 지점에서야 드디어 레인과 자신의 차이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츠쿠시는 이미 자신만의 대척점을 멸해 버린 자였다. 머물렀던 곳 모두가 쇠하고 망쳐져 돌아갈 자리 없기에, 그에 눈물지을 여력조차 없어 쉬지 않고 또다른 종착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순례가 될 테고, 조금이라도 흐려진다면 방황하게 될 먼 길을.
손목의 장치는 검을 튕겨내었다. 능력을 쓴 공격을 튕겨냈으니 내구성이 예상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중요한 장치라는 뜻이리라. 과연 예상은 빗나가지 않고 현실로 닥쳐오려 한다. 츠쿠시는 자신에게 장치의 빛이 비춰지자 곧바로 레인에게 달려들어 자신을 겨눈 손을 쳐내 방향을 돌리려 한 후 그대로 손날을 세워 목을 찌르고자 했다. 덮쳐드는 손길에 날카로움이 서려 칼날처럼 벼린 채다.
목의 무장을 일부 부식시키는 것은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생긴 틈으로 레인은 빠져나갔다. 아쉽긴 하지만 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 당장의 수확이었다. 그리고 다운되었던 부스터에 다시 불이 들어온 것도 확인했다. 일희일비인가.
레인이 츠쿠시에게 근접한 것을 보고 이대로 버스트를 다시 쓸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후에 써야 할 순간이 생긴다면? 스페셜 스킬은 가급적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열화판이라고는 하나 그녀의 것을 카피해간다면. 그걸로 오늘 같은 일을 또 일으킨다면.
그래. 그러기 전에 오늘 이 자리에서 없애도록 하자.
아마 불가능할 다짐을 하면서 발치에 독액을 그야말로 둑 터진 것처럼 쏟아낸다. 일정한 형태 없이 출렁이는 독액에 검을 던져넣고 손짓하자 십수개의 사슬들이 독액을 두르고 레일에게 뻗친다. 사슬의 용도는 레인의 몸을 구속시키기 위한 용도. 가급적 레인의 손목 장치에 닿지 않도록 사슬로 감싸 구속하고서 사슬 위를 달려 그녀가 직접 레인에게 뛰어든다.
이스마엘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손이 드러난 레인의 목으로 향한다. 그러나 주먹이 아닌, 뾰족하게 날세운 손의 장갑에 스치기만 해도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만큼 강한 독성을 가진 독을 바른 공격이었다.
이스마엘의 주먹은 제법 강한 편이다. 본인의 기초적인 체력이 뒷받침되는 점도 있으나 헬무트와 슬럼의 지분도 없잖아 있다. 헬무트는 이스마엘에게 기초적인 호신술을 알려주었고, 슬럼에서는 길거리 싸움을 위주로 배웠기 때문인지 유달리 어딜 맞아야 어디가 기분이 나쁘고 아픈지를 잘 알고 있다. 옆으로 돌아간 얼굴도 그렇다. 내일이면 붓겠지. 뿌리칠 적 안와골절이 아닌 것에 감사히 여기라는 듯 이스마엘이 노이즈 너머로 눈을 흘겼으나 레인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순간이다. 목이 드러났음을 이스마엘은 확실하게 보았고, 이어지는 공격이 목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 보고 막겠지. 그렇다면 단 하나다. 이스마엘은 다시금 염력으로 거리를 좁히며 땅을 거세게 굴렀다. 그리고 흙이 솟구쳤다. 흩뿌려진 흙은 눈을 노렸고, 이스마엘은 동시에 남은 돌덩이로 손목의 장치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