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맞는 말이다. 폭발적인 인기와 수요는 또다른 공급을 만들고, 공급은 공급 그 자체로 또다른 공급을 만들기도 한다. 특히 예술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예술은 그렇기도 했다. 누군가 이미 닦아놓은 길을 간다면, 그 길 위에서 정말로 큰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을 드러내기 어렵다. 그 길을 만들기 위해 구워지고 짜여져서 딱 맞은 벽돌들처럼, 그 길에 쌓인 수많은 무언가일 뿐, 특별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도 맞는 말이죠. 우리가 잘 포장된 벽돌길을 본다면 길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할 뿐, 그 길을 구성하는 벽돌 하나하나를 일일이 세보고 탐구하지는 않으니까요. 그 벽돌이, 좋게 말하면 검증된 주제, 나쁘게 말하면 진부한 주제를 선택한 이들의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억 인간들에게 수십억 관점이 있듯이 그들이 그들의 관점을 이야기한다면..."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고, 도록을 본다. 한번 '보통 해석'이라는 걸 해볼까 하면서, 검은 공간 위에 배치된 '오브젝트'를 본다. 빈센트는 여러가지 생각을 펼친다.
"이 작가분이 그림의 구도를 짜는 방법은 신몬드리안주의의 기하학적 추상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군요. 비록 직선과 직선의 조합은 없지만, 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의 원칙을 지키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저 사물은 어둠 속에서 수직으로 떠오르는군요. 그리고 오브젝트를 묘사하는 방식은... 즈지스와프 벡신스키의 환시미술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비록 벡신스키의 작품이 공포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당사자는 자신의 작품을 유쾌하게 묘사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 사람 역시도 태어나서 죽는 삶의 순환을 긍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둠이 부정적인 의미라는 것도, 어쩌면 수천년간 쌓아올려진 합의일 뿐이고, 이 작품은 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일 수도..."
라고 쏟아내던 빈센트는, 잠깐 턱을 쓰다듬는다.
"...그래도, '보통 해석'이란건 없을지도요. 모두의 '해석'은 그저 해석일 뿐이죠. 어쨌든, 이 사람 그림 마음에 드는군요. 나중에 미리내고 졸업하면 액자 하나 집에 가져가서 걸어두고 싶은데 말이죠." //6
“ ‘ 추천사 ’를 쓴 분은 이 작품을 ‘ 자살자의 임종 ’이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 있도록... 하지만 오브젝트를 ‘ 재조립 ’해보자면 교묘하게... ” 등등 열심히 중얼거리던 오토나시는 빈센트가 ‘ 보통 해석 ’을 하기 위해 도록을 집어들어 같은 페이지를 펼치자 은근슬쩍 인벤토리에서 볼펜을 꺼내 그 내용물을 도록 위에 열심히 받아적기 시작합니다.
“ ‘ 거장의 작풍 ’을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묘사해 ‘ 거장의 삶 ’처럼 생각해보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미술과 미술사에 ‘ 관심이 없는 ’ 사람이라면 떠올릴 수 없는 이야기네. ”
오토나시의 이 말은 어쩐지... 빈센트에 대한 감탄에 가까워 보이네요! 아무튼 빈센트가 오토나시를 보지 않는 틈을 타 인벤토리에 펜을 다시 슬쩍 집어놓은 오토나시는 언제 필기를 했냐는 듯 태연한 어조로 대답합니다.
“ 응. 그렇네. 그리고 ‘ 예술가 ’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이니 ‘ 각자의 해석 ’을 마다하지도 않을거고. ”
묘하게 핀트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시원찮은 대답입니다. 그러고보니 오토나시와 빈센트의 대화는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식이었던것 같기도 하고요.
“ 그거라면 딱히 어렵진 않을지도. 응. ‘ 연락처 ’야 얼마든지 받아 올 수 있으니까. ”
“ 그리고 ‘ 도록 ’도 하나쯤은 가져가도 괜찮아. ”라고 답하며 오토나시는 페이지를 넘깁니다.
조금은 핀트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지만 뭐 어떤가. 빈센트 앞에서 윤리 이야기로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보다야, 차라리 집단적 독백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게 낫기도 한 게, '고도를 기다리며'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출연자가 된 듯한 느낌이라서 재밌기로 했다. 오토나시 토리와 빈센트 반 윌러의 이야기를 조합한다면... 아마 작가들이 제발 돈을 줄 테니 녹취해서 작품으로 쓰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을까? 빈센트는 그런 농담을 속으로 삼키면서, 도록을 챙긴다.
"연락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시, 어떠한 형태로건, 사람에게는 '공동체'라는 게 있어야 하는군요."
빈센트는 두꺼운 도록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의념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들끼리의 싸움이면, 정수리를 내리치면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수준으로 두꺼웠다. 파손을 대비해서 두껍고 단단한데다가, 의념 각성자의 시야로 분석해보면 굳이 이렇게 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색깔을 세세히 분류해놨다. 불확실성 관측 안경으로 보면, 모든 작품들의 검은색이 조금씩 명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고, 점점이 박혀있는 흰색조차 보였다. 몇 개는 실수가 아니라 의도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것이라면 비용도 한두푼이 아닐진대...
"여우노래 교단의 교리를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이것도 교단 교리와 연관된 작품인가요? 아니면 교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