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이렇게 격정적인 것은 처음 본다. 언젠가 듣고 싶었던 그녀의 깊숙한 본심은, 이런 느낌이었나. 어두운 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낡은 벤치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무드' 를 중요하다고 여기며 서로 각을 재온 본심이란, 어떨 땐 이렇게도 풀어헤쳐지는 법이로구나.
어린 소년과 소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때론 그다지 소중하지 않기도 하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때로 매우 간단하게 무산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종족의 아이가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다니, 요즘 세상은 참 좋아졌다' 라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긴 시간 어울려 모든 것을 들은 지금, 그것은 우습지도 않은 코미디다. 더욱 열받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표면만 보는 많은 인물들은 그리 여길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캔을 잘근잘근 발로 구길 때,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갑을 꺼내 만지작 거렸다. 입에도 한번 깨물어본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싶은 욕구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진하게 당겨온다. 이럴 때 오염물질을 폐에 깊숙하게 밀어넣으면, 잠깐이나마 머리는 명쾌해지고. 옛날의 나는 분명 그걸 좋아했다.
....
나는 결국 불을 붙이지 않곤 입에서 담배 개비를 뺐다. 그리곤 손으로 가볍게 으스러 뜨리고, 주변 쓰레기통을 향해 튕겨 날렸다.
"나는 말이다."
"과거 누군가의 기억을 떠올려낸, 15세 꼬마란다. 미성숙한 정신은 수 많은 기억과 악몽속에 잠겼고.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칭하고 다니는 이상한 꼬맹이가 되어버렸어. 덕분에 멀쩡히 잘 살아계시는 부모님을 더 이상 진짜 부모님으로 몰입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철저하게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내가 이성적인 어른이 아니라면. 통찰력있는 저격수가 아니라면. 한 때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명예로운 사상을 가진 군인이 아니라면. 그들에게.....변명할 거리 조차 없으니까."
쓴 웃음을 지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사실은 어린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가끔씩 감정적이 되는 것. 기술과 실력이 제대로 받쳐주지 않는 것. 친구가 없는 것. 심지어는 실수하는 것 마저도. 나는 '어린 나, 윤시윤' 에게 죄를 밀어넣었다. 그 과정에서 내 행동과 감정의 모든 것이 거짓이고 연기라고는 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나도....너처럼 선택도 포기도 하지 못했던거야. 과거의 삶과, 지금의 삶에서, 나는 무엇하나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지."
목소리는 떨렸다. 그렇지만, 아주 불안정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활짝 웃는 것은 아니었지만, 씁쓸한 웃음도 아니었으리라.
"그러다가 만난게 너다. 처음에는 '어른스럽게' 대하려던 너를, 한번 헤어질 때 아픈 가슴으로 다르단걸 깨달았고. 여러 우습지만 웃지 못할 일들을 겪으면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때론 즐겁고, 때론 슬프고, 때론 서운하고, 때론 다투고, 때론 좋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는 네가 좋다는걸 확신했다. 연인으로서 같이 서고 싶다고. 지켜주고 싶다고. 함께하고 싶다고. 그게 내 솔직한 감상이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어쩐지. 자연스러워지더라. 널 구하러 가겠다고 생각하는 것. 위험속에서 지킬 수 있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강해지고자 마음 먹는 것 까지.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어른인지, 아이인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 나는.......나다. 한 소녀를 좋아하는 나야."
요 근래의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아저씨' 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내가 '아저씨' 일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을 떠올리곤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피식 웃어버린다. 그러나 나와버린 웃음을 되돌릴 기색 없이,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뭘, 어떻게 했어야 할까는 대답하지 않을거야. 무엇을 말해도 납득하지 못할거고. 애초에, 내가 말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렇게 말을 흐리다가, 다만. 하고 강하고 단호하게 끊는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에 대해서는 말해도 괜찮은 관계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네 고통을 아프지 마, 라고는 얘기하지 않아. 그러나 같이 나누는 관계가 될 수는 없을까. 네가 받아온 고통. 가족에게 받은 위협.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나의 불분명한 전생. 찾아오는 악몽. 혼란스러운 인격......그 모든것을 '우리'로 합쳐. 자신을 위해, 상대를 위해, 우리를 위해. 순수하고 자연스레 강해져, 노력할 수 있게는.......안되는거냐?"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하늘을 올려본다. 나란놈은 이럴 때에도 멋있게 말하지 못하는거냐. 그런건 너무 한심하니까. 여기서는 이 긴 얘기를, 짧게 요약해서 정리해보도록 하자.
내가 차분한척 계속 고민해봤는데 말이야, 결국 저 트라우마가 아무리 커도 당장에 해결책이 없다.... 그게 문제라면. 결국엔 그 트라우마를 딛고 안정적이 될, 다른 삶의 무언가가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그 고통의 깊이가 크니까, 어지간한걸론 당연히 안될테고....반대로 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대충 회피하는 것도 윤시윤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