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락하던 장소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립고 행복하던 추억은 황량하게 남아버렸다. 기대하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허망히 끊겨버렸다. 시체가 있어야 할 곳은 피가 말라붙은 자국도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 팔아치웠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여우의 구역이 된 이상 이곳에 발 들인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 이전에 발을 들였을 가능성도 없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감각이 여실히 느껴진다. 흘러넘친 감정을 받아내지 못해 몸의 회로가 고장 나버린 것 같다. 이스마엘의 감정 회로는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켰다. 프로그래밍 에러를 고쳐야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스마엘은 웃었고, 동시에 울었다.
참담했다. 생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어두운 방 안에 홀로 틀어박혀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던 과거보다 더욱 끔찍했다. 몸이 떨려왔다. 현실을 받아들이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는 법이 없다. 받아들일 수 있노라, 견딜 수 있노라 생각했던 것이 막상 발을 디뎌보니 지지대조차 없는 얇은 유리 바닥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고 만다. 그 바닥에 발을 디뎠으나 세븐스로 버틸 수도 없다. 아버지는 죽고 나서도 위대한 과학의 발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앞으로도 마주할 것이다.
"……."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이스마엘은 입술을 꾹 다문다. 대답하고 싶은데 목이 턱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도 힘겹게 입을 떼는 것이 느껴져 배로 괴롭다. 당신에게 이런 감정을 전가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가오는 듯 유리를 밟는 소리가, 후드가 바스락대는 소리가 난다.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돌린 그 모습 그대로 겨우내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스마엘은 당신이 뱉은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치 소금으로 된 기둥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가늘게 떨리던 몸은 이제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잔인한 사람. 당신은 잔인한 사람이다. 훌쩍이지 않기 위해 잔뜩 깨문 입술에서 까득 소리가 나더니 피가 맺혔다. 이스마엘은 휘청였다. 유리 파편이 이리저리 흩어진 곳에 주저앉듯 했다.
"어떤 시선 말입니까?"
목이 콱 메였다. 감정이 흔들리는 소리가 목소리에 가득 담겨있다. 눈물이 멎지 않았다. 쏟아지는 눈물을 그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고장이 난 것 같다. 회의감이 치밀었다. 차라리 이스마엘도 안드로이드처럼 칩셋 초기화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에러가 생긴 부분을 찾아 정해진 틀에 맞춰 고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현실도, 당신도 어떻게 보겠습니까..?"
더듬더듬, 입가를 가리던 손이 얼굴을 덮는다.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한가득 고이는 듯싶다가 후드득 쏟아진다. 휘몰아치는 감정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목소리가 점차 격양됐다.
"가족이 죽어서도 누군가의 손에 움직이는 모습이 현실이라고, 끝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손에 두 번 삶을 마감할 시체를 다시 안아보라고, 누군가는 죄를 지어놓고 레지스탕스였단 이유로, 살아있단 이유로, 가족이 기다린단 이유로 다시금 갱생되어 품에서 사는 꼴을... 저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끝내 상처받은 짐승의 포효처럼 갈라지듯 외치더니 그대로 몸을 떨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허탈했다.
그러니까 도발하면 할수록 더 무섭다는 이야기로군요! (아님) 그리고 히어로 or 빌런에서 당당하게 빌런이라고 한다니! (흐릿) 그 와중에 쓰레기통을 뒤진다라. 그렇군요.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다시 되찾는게 맞지요! 그 와중에..ㅋㅋㅋㅋㅋㅋㅋㅋ 꿈팔기..세상에. 장사꾼이야! 저기에 장사꾼이 있어!!
>>922 마음을 닫는 레레시아는 상당히 무섭던데.. 하지만 확실히 비밀이 갑자기 들통이 난다면 어쩔 수 없긴 하겠네요! 그런고로 고백이 실패하고 망쳐진다면의 반응도 궁금해지는 것은 덤이에요. (나쁨) 201번은 현 상황도 언젠간 좋아질거라고 믿고 싶어하는 레레시아의 마음 같은 것일까요? 그 와중에...ㅋㅋㅋㅋㅋㅋ 악역...ㅋㅋㅋㅋ 가디언즈에게 품는 가치관과 마음이 어느 정도 보이고 있네요. 그리고 민트초코파..레레시아 나나리..(메모메모)
사실 제가 물은 것은 아스텔에게 고백을 하려고 할 때 다른 누군가가 의도치 않은 사태 등으로 끼어들여서 뭔가 되게 이상해져버렸고 아스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응? 어. 음. ...그래서 무슨 말 하려고 한 거야?" 라는 식의 상황이었지만... 저건 저거대로 맛있으니까 오케이에요!
시선을 돌리지 마라. 당연히 어떤 배려도 없는 그 말에 당신은 주저앉았다. 너는 혹여 다리에 날카로은 유리 파편이 박힐까 염려해 손을 들었으나 들려온 말에 멈칫한다. 펑펑 울면서, 눈물을 부정하듯 꾹 누른 음성이 귓가에 닿는다. 어떤 시선 말이냐, 현실, 당신 앞에 선 너를 대체 어떻게 봐야만 하느냐는 말. 그리고 입가뿐만 아니라 이젠 얼굴 전체를 가리는 손이 덜덜 떨린다. 그런 손이 무색하게 눈물은 그 손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물, 점차 격양되는 목소리에 너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소중한 존재가, 지금까지 지탱해왔던 끈이 전혀 잘못된 장소에 놓여 있었고, 강하게 붙잡았던 동앗줄이 썩어버렸다는 걸 알고도 대체 누가 태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평생을 보이지 않는 체, 아무것도 못 본 체 살아갈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당신이 현실을 보기 위해서 이 곳까지 온 거라면 이제 와서 시선을 돌리는 건 너무나 늦지 않았을까. 너는 해답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될 수 있어도 구원자가 될 수는 없는 인간.
"이스마엘 씨."
비명 너머 이어진 잠시의 침묵을 깬 건 이번에도 네 목소리였다. 또 한 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내며 너는 또 한 걸음 다가선다. 버적거리는 유리조각 소리가 방 안에 퍼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새삼 너는 참 냉랭한 인간이구나 싶었다. 위로할 말 같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위로를 한다는 걸까 싶은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역겹기는. 덩그러니 서서 울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릴까? 그걸로도 충분할까? 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순응하시겠습니까?"
들었던 손은 당신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일그러진 세상에서, 일그러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게 가능할까? 만약 불가능하다면 일그러지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사람은 의미 있는 삶을 꿈꾼다. 그것은 곧 의미 있는 죽음이기도 하지. 너는 언젠가 네가 맞을 끝이 어떤 의미를 가졌으면 좋을까 생각했다. 힘겹게 닿은 현실을 부정하고 다시 꿈으로 돌아가겠느냐. 그런 의미를 담은 말을 건네면서 너는 살짝 쓰다듬던 손을 내려 당신의 어깨를 토닥였다. 두어 번 토닥인 뒤에는 다시 버적거리는 유리조각의 길을 밟아 당신의 곁을 지나 걷는다. 달빛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듯 쏟아지는 발코니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층인 만큼 불어오는 바람은 싸늘하다. 발코니 바깥으로 보이는 까마득한 땅과 짓다 만 건물들, 뒤에는 망가져 버린 삶의 터전. 너는 폐허 속에 끼인 힘 없는 생명이 되어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아무도 못 듣는 곳,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격양된 목소리로 토해낸 외침에 담긴 것은 진심, 넌 그 말에 공감해줄 수가 없었다. 너는 그런 시간을 보내오지 못했으니까.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그래서 위로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당신은 모든 걸 토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구든 목을 가져가면 아마 잘 대해줄 겁니다. 혹시 모르지요. 그 새 뭔가 더 했을지도, 아마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당신을 맞이해줄지도 모릅니다."
대체 무슨 말을. 너는 지금 정리되지 않은 말을 기계처럼 내뱉고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육체가 전부인 존재였습니까?"
떨어지는 찰나의 시간은 실제의 배 이상이라던데, 너는 네 발길에 휩쓸린 유리조각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공중으로 뿌려진다. 바람에 방 쪽으로 휘달리는 머리카락을 따라 그림자 역시 일렁인다. 너덜거리는 난간을 붙잡으니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너는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