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의 아침은 소란스럽고 복잡하다, 뉘엇거리며 떠오르는 해와는 반대로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형적인 조화야 말로 가이아에서 느낄수있는 특유의 정취였다. 루키우스는 언제나 밤의 사람들을 보며 살아왔기에 아침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것을 감상하는것은 가이아 토박이인 그에게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침일찍 일어난 보답으로 에리에게 얻은 차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던 루키우스는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으나, 가이아의 정취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듯, 얼마 가지않아 소란이 벌어졌다. 값이 제법 나가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소리치고, 손에 드레스와 어울리는 색의 가방을 쥔 사내가 인파를 뚫고 달리기 시작한것이었다.
소금기 머금은 벨페이아의 바닷바람을 못 맡은 지 오래되었다. 처음 뛰쳐 나왔을 때만 해도 지독하고 지겹던 그 바람이 가끔 생각나게 될 줄은 몰랐다. 제국의 수도와 벨페이아는 참 멀었다. 무작정 수도를 목표로 삼았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다. 꽤 길게, 내륙을 가로지르다 보니 심심치 않게 그 곳에 살던 무렵이 떠올랐다. 아침을 깨우는 짠 바람. 우렁찬 뱃사람들의 목소리와 드워프들의 망치질 소리. 솔직히 별로.. 그립진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나는 향수병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곳도 다를 게 없었다. 세상 어딜가나 밑바닥 인생들이 터를 잡은 뒷골목은 다른 게 없는 걸까? 감히 내 주머니를 털려던 소매치기 꼬맹이에게 돌멩이를 대신 쥐어주고 혀를 삐쭉 내밀었다. 머지 않아 이게 뭐냐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텁텁한 공기, 호구를 노리는 은근한 눈초리.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고된 곳인 만큼 생각보다 정보가 잘 모여서 뭐든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와봤더니, 아름다운 기억 하나 없는 고향이 떠올랐다.
"이야, 저런 것도 비슷하네."
뭔가 값비싸게 보이는 가방을 쥔, 딱 봐도 도둑놈이 왠 금발에게 쫓기는 게 보였다. 스을쩍 벽에 몸을 붙이고 녀석들이 스쳐가길 기다렸다. 딱 봐도 저 금발, 평범한 녀석은 아닌 것 같으니 금방 잡히겠지 싶었는데 왠걸, 도둑이 단검을 꺼내들었다. 자세가 영 어설픈데? 내가 더 잘하겠네. 가만히 두고볼까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도 못 깨달은 것 같아서 휘적휘적 다리를 휘둘렀다.
"저기- 바쁜 건 알겠는데"
나는 오른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뭐가?
"이거 주인 누구야?"
가방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쫓는 시급한 상황에서 외부의 제3자가 이러는 건 사실 눈치 채기 힘들다. 뭣보다 내 손놀림은, 자랑하고 싶은 건 죽어도 아니지만 이런 '슬쩍'하는 데에는 특출났다. 일부러 비죽비죽 비웃는 웃음을 내건 채로 그들을 향해 가방을 흔들었다.
골목길의 치열한 추격전 끝에 꺼내어진 단검, 제국의 법률로 따지면 이미 소매치기부터 손목을 자르냐 손가락을 자르냐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는 것을, 사내는 단검까지 꺼내 강도혐의 까지 스스로 추가하였다. 이제부턴 귀찮은 일이 될것임을 직감한 루키우스 역시 허리에 찬 단검을 향해 슬금슬금 손을 뻗으며 거리를 가늠하였으나 그런 대치는 전부 바보짓이라는듯, 경쾌해보이는 소년이 오른손을 높게 들어올리며 가방을 보여주었다.
사내는 자신의 품을 더듬다가 소년이 들고있는것이 자신의것, 정확하게는 훔친 장물이라고 눈치챘고 루키우스는 자세를 풀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상황이 종료되었으며, 소매치기 당한 소매치기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눈에서 이성이 사라지는 그 순간, 소년에게 단검을 내지르기 위해 달려든 소매치기였으나 첫발을 내딛는 순간 발목에 절묘하게 걸린 루키우스의 다리에 턱 하고 균형을 잃으며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탱그랑 하는 맑은 철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단검은 덤이었다.
금발은 말투가 꽤 고상? 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는 지는 모르겠다. 배운 게 있어야지. 다만 묘하게 귀족적이라는 느낌은 있었다. 그렇기에 으- 하면서 살짝 눈썹을 모았다가, 풀었다. 소매치기를 발견했다고 직접 발로 뛰는 사람한테 나쁜 말을 할 만치 성격이 더럽지는 않았다. 딱 봐도 여성용 가방인게 금발의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이구?"
지가 뭘 잘했다고 얼굴 시뻘겋게 붉히면서 달려드나.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모가지에 칼 꽂으면 정당방위 되나를 고민하면서 단검을 쥐었던 손은, 금발의 길쭉한 다리로 인한 상황 종료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솔직히 조금 안심했다. 사람 피 보는 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땅바닥에 나뒹굴게 된 단검을 주워들자 금발이 말을 걸었다. 주어는 없었지만 아마 나를 향한게 아닐까. 눈 앞의 소매치기는 모험가도 아닌 뒷골목 진창의 주민으로 보였고. 쭈그려 앉았던 몸을 쭉 펴고 금발에게 눈을 맞췄다. 남자치고 긴 머리에 푸른 눈. 묘하게 고상한..?것 같은 말투와,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제대로 보니까 귀족이라기 보다는 동종업계의 느낌이 강했다. 손에 작은 칼 들고 설치는 도적 말이다.
쯧쯧. 뒷골목의 쿰쿰한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소매치기를 보며 혀를 찼다. 제국의 수도의 소매치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치 하수였다. 자고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위해 남의 주머니를 터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했다. 건들여서 문제가 덜 생길만한 어중간한 상대를 골라서 티가 나지 않게, 적어도 자신이 들키지 않게 선을 잘 타야하는데. 이래서 내가 한탕주의 녀석들을 싫어했던 것이다. 절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려니 옆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깐깐하네. 어디 사는 누구는 첫날부터 자기 모험가요 하면서 꺼드럭대던데."
예전에 본 사람을 떠올렸다. 오래 살 낯으로 보이진 않더라니 어느 날부터 만날 수 없었다. 지나가던 소문으로는 비명횡사 했다던데, 그런 걸 생각하면 금발과 같은 사고방식이 더 낫긴 했다.
"출신이 천박하다기엔 꽤 잘 배운 거 같은데.."
혹시 입양 잘된 케이스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입맛이 나빴다. 남의 사정도 모른 채 입을 털거나 무작정 적대하는 건 성미에 맞진 않아도 좀, 기분이 이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모험가 동기인 금발을 향해 가방을 던졌다.
알렌이라고 자길 소개한 앳되어보이는 청년이 던진 가방을 받은 루키우스는 그를 향해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띄워보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다가다 한번씩 만날사이, 어쩌면 그것보다도 자주 만날사이 그러기에 차분하게 호감을 사두는것은 계산적으로 또한 그가 바라는 낭만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출신이 시궁쥐면 뭐 어떠랴, 그 출신이 도움이 되는 날의 해는 떠오를것이고, 결코 쓸모가 없다고 장담하는 날의 밤에도 해는 떠오를테니까 그러니 좋은 인상을 주고받는것이야 말로 정답일지어다
"선생님을 잘 만나서. ."
꺼드럭대지 말거라 생각보다 좋은 가르침이다, 남보다 앞서간다고 으스대지말고 남보다 뒤처진다고 응석부리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있는 루키우스기에 잘 배운 거 같다 라고 말하는 알렌의 말에 적당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눈매가 사나운 것에 비해 꽤 유들유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나보다 한참은 더 큰 녀석이고 분명 나보다 나이도 많을 건데, 개냥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아까 달리는 것을 봤을 때 했던 '되게 사납네'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제 모습을 숨겼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태생일 금발은 그의 말대로 선생을 잘 만났는지 퍽 여유있어 보였다. 그게 거스러미처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삐뚫어진 것이라는 건 알지만, 좀 억울하긴 했다.
"배운 거 없는 새X의 남 주머니 털어먹는 기술인데 뭐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말투가 좀 뾰족하게 나간 건. 말을 뱉고나니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어이고, 성격 좀 죽이자. 쟤가 나쁜 짓 한게 뭐 있냐.. 어렸을 적,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던 시절에, 길거리를 걷는 화기애애한 가정을 보며 받았던 애매한 감정이 떠올랐다. 와, 씨, 나 아직도 애인가 싶었다.
"..아- 미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늘따라 이렇게 거슬리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별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거든. 그래서 기분이 좀 안 좋아. 아무래도 모험가니 뭐니 시작하고 나니까, 좀, 감상적이 되가는 것 같네. 기분 상했다면 다시 사과할게."
"아니, 아니야. 뭐랄까, 좀, 애매하거든. 내 배 채워준 기술이기도 하고, 부끄럽지만 애정이 없다면 거짓말인데 솔직히 자랑하면 안 될 거기도 하잖아."
정말로 이게 싫었다면 소매치기로써 하수니 뭐니 떠들지도 않았을 거다. 녀석 잡는 데에 슬쩍하는 게 아니라 다리를 휘두르든 몸을 쳐박든 했을 것이다. 이게 참 애매했다. 익숙한 기술이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적당히 써먹을 수 있을 때에는 거리낌 없이 쓰는데 막상 이걸로 내 실력을 자랑하자니 묘하게 부끄러워 지는 것이다. 거기다 고향 생각에 다소 부정적인 감상까지 들고 있었으니. 타이밍이 나빴다.
무엇보다 나는 과거보다 건실한 삶을 살려고 왔다. 새롭게 시작하려는데 과거가 잡는 기분이 드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아 다섯살 애가 된 것만 같았다.
"아직 정리가 안 된 기분이야."
앞으로도 종종 신세질 기술이고,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만.. 아직 어린 게 맞긴 하니까 어쩔 수 없을까. 제대로 어른이 된다는 감각을 아직도 모르겠다.
"아-.. 도둑 잡는 거 도와준 보답이라면 받겠는데, 사과로 주는 거라면 됐어. 사과는 내 쪽에서 해야지."